제343화. 지금부터 반격이니까 (6)
초왕 전하의 치하(致賀), 그리고 머리를 숙여오는 백관들.
언동생들은 황급히 소매를 붙여 들었고, 나는 입을 열었다.
“받잡기 민망한 말씀입니다. 이번 흉사를 막아 낼 수 있었던 까닭은 첫째로 전하와 왕비마마께서 대범하고 의연히 행동해주신 덕분입니다. 그 덕에 군심과 민심이 동요하지 않았고 소생들도 마음을 굳건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나는 왕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고.
“둘째로는 왕자마마의 기지가 있었습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적은 따돌리고 아군은 불러들일 수 있는 암어를 남겨주셨으니까요.”
마지막으론 먼저 고개를 숙여온 백관들을 향해 붙여 든 소매를 내보이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목숨을 던져 초왕부를 지켜낸 충신들이 계십니다. 소생들은 그저 보여주신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 일천한 재주를 보탰을 뿐. 논공을 위해 줄을 세운다면 한참 뒤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왕자가 빽! 하고 입을 연 것은 이때였다.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니 그런가 범 내관?!”
그 말에, 왕자를 호종(扈從)했던 범 내관이 입을 열었다.
“실로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계신 자리에서 아뢰옵기 참담합니다만. 사실 소신들이 미력하여 왕자마마의 목전에 흉수들의 검이 닿을 뻔했던 것을 괴룡이 몸을 던져 받아냈사옵니다.”
그러자 초왕부의 백관들 사이에선 ‘오오.’ 하는 탄성이 새어 나오는 때.
종묘에 함께 있었던 다른 장졸들이 줄줄이 입을 열었다.
“적들의 수괴 역시 괴룡이 베었고, 다른 흉수들을 몰아내는 일도 괴룡과 다른 정무학관의 생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예. 소장들이 왕성이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일을 그르칠 뻔한 것을 다잡아 준 것도 괴룡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진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초왕 전하께 꾸벅 군례를 올렸다.
“…괴룡과 정무학관의 생도들은 왕부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숨도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랬는가?”
“예. 전하. 돌이켜보니 조금만 여유를 부렸어도 때를 맞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진심이 있었기에 왕자마마를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초왕 전하께서 흐뭇하게 웃어 보이시며, 우리를 향해 말했는데.
“모두가 입을 모아 자네들의 공을 말하고 있는데, 지나치게 겸양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 괴룡과 생도들은 망극해 하지 말라.”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그 치하를 받으니.
“민망하지만, 받잡겠습니다.”
초왕 전하께서 재차 입을 여셨다.
“이 자리가 공세(攻勢) 속에 거둔 승전을 치하하는 자리였다면… 고가 위무를 하는 술도 내리고, 각자의 공에 걸맞은 상도 내렸을 것이다. 하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수성(守城)에 안도하는 자리다. 많은 충신이 쓰러졌고, 왕부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신음하며 울고 있다. 그런 장은 뒤로 미루어야겠다. 이에 괴룡을 비롯한 여러 공신의 양해를 구한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입을 모아 답하자 초왕 전하께서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그러길 잠시.
곧바로 근엄한 어투로 문무백관들을 향해 명을 내리기 시작하셨다.
“재상!”
“예. 전하.”
“그대는 왕성의 곳간과 약재창을 열어 백성들을 돌보고 위무하라.”
“말씀 받잡겠사옵니다.”
“왕성부윤. 관문들은 어쩌고 있는가?”
“예, 전하. 일차적으로 흉수들을 몰아냈고, 함부로 드나드는 이가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들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터. 이 일을 계획한 흉수와 연결된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찾아라. 무언가가 있을 것이야.”
그에, 초왕부의 문무백관들이 각기 명을 받드는 때.
나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나아가며 입을 열었다.
“전하. 흉수와 연결된 실마리를 찾는 일. 소생들이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되레 내가 부탁하고 싶은 일이다만… 무리를 하지 않았는가?”
“괜찮습니다. 임무에 지장을 줄 상태라면 말씀을 올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탁하겠다.”
* * *
초왕 전하의 허락을 받은 우리는 왕성 곳곳을 수색하기 위해 안가를 나섰다.
왕부의 문무백관들을 뒤로하고 언동생들과 나만 남게 되자, 천장호가 혀를 내둘러왔다.
“하여간에 용운 형은 술법도 일절, 무공도 일절이지만. 혀가 그중 최곤 것 같수! 군심과 민심? 일천한 재주?! 어떻게 그런 말들이 무슨 기름칠을 한 것처럼 술술 나오지? 나는 머릿속에 알면 됐수다 소리만 지나가던데?”
그런 녀석의 말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중얼거리시는 때.
- 인석의 혀가 조정에 나갔어야 할 혓바닥이기는 하지.
남궁윤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장호 네가 우리의 대표였다면 큰일이 났겠군. 저런 공치사는 넙죽 받아서는 면이 서지 않는 것이다. 과연 언용운이야. 내가 인정한 녀석다워.”
“나는 애초에 대표 같은 거 시켜줘도 안 합니다! 그리고 궁윤 형이 뭐라고 용운 형을 인정하고 자시고 합니까!? 나 참. 광서에 와 들은 소리 중에 제일 어이가 없네.”
“…….”
이어서 입을 연 건.
예해수와 은하성이었다.
“혀도 혀지만, 진짜 담이 보통이 아니세요. 초왕 전하에 고관들이 즐비한 자리에서 어떻게 절지 않고 말을 하시죠? 미리 할 말을 써놓은 줄 알았어요.”
“용운 형님의 담이 크긴 하지. 하기야 귀신한테도 뒈지기 싫으면 말 들으라고 막 협박을 하시는 분인데. 세상 무서울 게 있을 리가… 그런데 형님. 이미 뒈진 놈이 어떻게 또 뒈집니까?”
“알려줄까?”
“…닥치겠습니다.”
언동생들은 들떠있었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황족 중에서도 관민 모두에 신망이 높은 초왕 전하의 공치사, 그리고 백관들의 인사.
그건 과거시험에서 급제해 평생을 관에 몸 바쳐도 마주하기 힘든 광경이었으니까.
“전하께서 그렇게 깍듯이 예를 표하시는 모습은 나도 벅차긴 했고, 왕자마마도 무사하시니, 다들 들뜬 건 알겠어.”
하나 계속 풀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됐다.
“그런데, 긴장들 풀지 마라. 아까 못 들었냐? 근왕병이 성문부터 수복해서 단속했다잖아. 몇 놈쯤 숨어 있을지 모를 노릇이야. 내 생각엔 이번 일, 분명히 천마신교가 연관돼있다. 그것도 낭중마군 송길준 그 얍삽한 놈의 냄새가 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나와 언동생들은 왕성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왕성의 크기는 작지 않았고.
외조부가 계시는 산서에선 천마신교 놈들이 건물의 외벽에 문양을 그리는 식으로 집결지를 표시한 전적이 있었기에.
우리는 왕성의 외곽에서부터 온갖 건물의 겉과 속을 꼼꼼히 수색해 나갔고.
틈틈이 흑마법을 사용해 사혼들도 탐문했기에 시간이 좀 걸렸는데.
사흘.
나흘.
그리하여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
은하연이 빗금이 가득 그어져 있는 지도를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수색할 구역이 얼마 안 남았는데… 별다른 흔적이랄 게 없네요? 이쯤 되면 빠져나갔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제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물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남은 구역에서도 수상한 점이 없으면 그렇다고 봐도 되겠지.”
그렇게 우리의 걸음이 마지막 구역에 접어든 이때.
“음?”
내 기감에 어떤 움직임이 걸린다 싶더니.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 나갔다.
휙!!!!
“언 형!”
“나도 봤다! 한 놈이 유인하려는 것일 수도 있으니 정현과 소릉이는 여기 남고! 나머지는 좌우로!”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며 양 손가락을 휘저어 조를 나눴다.
그렇게 우리는 튀어나간 흑의인의 뒤를 쫓았는데.
“잡았….”
언동생들이 진로를 막고 내가 녀석의 덜미를 잡아채려는 때.
독을 삼킨 것인지, 흑의인이 눈을 까뒤집으며 털썩 쓰러졌다.
“부그르륽!”
“젠장.”
사로잡을 생각이었기에, 반사적으로 욕지기가 나왔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결을 할 거였다면 왜 튀어나온 것인가 싶었다.
“당옥기. 한번 살펴봐 봐.”
“알았어.”
하여, 당옥기에게 검시를 부탁하길 잠시.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 귀 뒤에 찍힌 이 불꽃 문양… 천마신교의 상징 아냐?”
그런 당옥기의 말에 함께 머리를 들이밀었던 은하연이 입을 열었다.
“흐음… 문양은 맞지만, 이건 너무 노골적이지 않아요? 낭중마군이 배후에 있다기엔….”
“너무 대놓고 나 잡아보란 식으로 튀어나와 죽긴 했지. 길준이 그 새끼든 그 밑에 놈들이든 모두 내 밥이긴 하지만… 이렇게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당옥기가 나를 향해 바쁘게 손짓을 한 것은 이때였다.
“야. 야. 여기도 봐봐. 뭐가 더 있어.”
녀석의 말에 시선을 옮겨보니.
고대의 갑골문으로 쓰인 네 글자를 뭉쳐 만든 자문이 찍혀 있었다.
“혈염경천(血染驚天)?”
이건 혈교로 독립하기 전 혈마의 궁인들이 기치로 삼던 문구였다.
그걸 확인한 순간 나는 천마신교의 생각을 단번에 깨달았다.
“…이 새끼들이 지금 우리를 칼로 삼아 혈교를 도려내려고 하네?”
* * *
광동의 성도 광주(廣州).
일년내내 꽃이 만발하는 이 땅에서도 가장 운치가 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대궐 같은 산장.
이곳엔 연왕 주흠덕이 들어앉아 포도를 따 먹고 있었는데.
그 앞에 꿇어앉아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사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송길준의 내사 하광이었다.
“…기염곡의 다음 대 곡주를 맡기로 한 자가 일이 어렵겠다는 전언을 보내왔는데. 이후로도 초왕부에서 황족이 죽거나 납치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로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런 하광의 말에, 연왕을 향해 부채질을 하고 있던 대내관이 비음 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쳐왔다.
“전하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겠지요?”
“예. 약속드린 대로 이 일은 천마신교가 책임을 질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왕성을 빠져나오기 전에, 본교의 문양을 몸에 새긴 자를 남겨두고 왔습니다. 언용운이라면 그 표식을 알아볼 것이니. 자연히 저희 소행이라고 여길 것 입니다.”
마뇌궁에서는 혈마의 세력을 내부의 적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기실 버리는 패를 내미는 것이었으나, 하광이 그런 사실을 이 자리에서 밝힐 이유는 없었다.
하광은 그저 천마신교가 눈물을 머금고 책임을 진다는 투로 일관했다.
그에 대내관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참으로 이름만 거창하지 실속 없는 자들이옵니다 전하.”
하광은 굴욕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다.
“전하께 송구한 말씀을 한마디만 더 올리겠습니다. 아무래도 거소를 옮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에, 연왕이 포도알을 떼던 것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거소는 왜?”
“이곳 광주는 초왕이 있는 광서와 너무 가깝습니다. 소인들이 마무리를 해놓고 왔긴 했으나 분노한 초왕이 전하께 해코지를 하려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만 휴양을 끝내시고 요령으로….”
대내관은 그런 하광의 말을 뚝 자르며 말했는데.
“전하께서 요령은 짜증이 나는 일투성이라 남국에 와 몸을 쉬시고 계시거늘 그 무슨 말이오! 그리고 지금 움직이면 되레 수상해 보이지 않겠소이까!?”
그쯤하여 연왕은 피식 웃으며 한마디 말을 뱉었다.
“초왕 주흠순. 그 겁쟁이는 어차피 고를 어쩌지 못한다.”
* * *
초왕부가 습격당한 일과 관련된 정보가 수북이 쌓인 가운데, 초왕부의 문무백관이 모였다.
임시직을 받아 왕성을 수색하는 일을 도왔던 나와 언동생들도 그 자리에 함께했는데.
쾅!
초왕 전하께서는 보기 드물게 노기를 내보이며 입을 여셨다.
“연왕 이 작자가 기어이 고를 분노케 하는구나!”
사실, 이번 일과 연왕부과 관련이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하나, 되레 너무도 깨끗한 그 행적이 역설적으로 연왕이 배후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전하를 숙적으로 생각하는 연왕이니까.’
본인이 시킨 것이 아닌데 이런 일이 터졌다면, 쌍수를 들고 관심을 보이거나 비꼬는 인사라도 전해야 했다.
‘정황상 이득을 볼 사람도 자금을 댈 사람도 그밖에 없기도 하고.’
온화한 성정의 초왕 전하셨지만, 인내심이 많은 것이지 강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두면 곧바로 연왕이 있는 광동으로 쳐들어갈 기세시다.’
왕성이 불타고 왕자가 죽을 뻔 했으며, 숱한 신료들과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
진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게 마구잡이로 뻗어가도록 둘 순 없었다.
나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미리 옮겨둔 천마신교의 문양과 혈마의 문장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소인이 왕성을 수색하던 중에 의문이 가는 정황을 확인한 바. 전하께 독대를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