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화. 지금부터 반격이니까 (7)
대내관은 내가 내민 종이들을 수렴하여 초왕 전하께 전했다.
“……!”
그걸 확인한 전하께서는 하늘을 찌르던 노기를 입안에 꾹 담아내시더니.
백관들을 향해 물러가라는 명을 내리셨다.
“조회를 파하겠다. 고가 다시 부를 때까지 모두 자신의 임무에 힘쓰고 있으라.”
그리고 나를 향해 따라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독대를 허락한다.”
전하의 걸음을 쫓아, 편전(便殿)의 내실에 이르니, 물음이 이어졌는데.
“공손 맹주가 알려준 바 있어, 천마신교의 문양은 고도 알고 있다. 그 옆의 갑골문자로 만든 문장의 정체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나는 그 물음에 무릎을 굽히며 답했다.
“송구합니다. 전하의 노기가 사해를 덮은 듯하여, 잠시 마음의 여유를 찾으시라는 뜻으로 소인이 무엄하게도 독대를 청했습니다.”
“내 괴룡의 진심을 의심치 않는다. 예의 차릴 것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탄없이 말해보라.”
“소인의 생각으론 전하께서 금방이라도 연왕부를 치자는 말씀을 하실 것처럼 보였습니다.”
“…….”
“소인도 이번 일의 배후엔 연왕부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제대로 된 증좌가 없는 지금 연왕부를 들이치게 되면 되레 초왕 전하께서 고단한 지경에 처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내 말에 초왕 전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고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곧바로 광동이 위치한 방면을 응시하며 이를 가셨다.
“연왕이 딱 그리 생각하고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이다! 고가 늘 그래왔듯 황상께서 근심하실 것을 염려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겠지! 그래도 핏줄이라고 지금껏 그자의 행동을 눈감아 왔으나. 더는 참지 못하겠다!”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소인은 오히려 좋은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좋다고?”
“방금 하신 말씀처럼 전하의 성정을 연왕은 예단하고 있을 겁니다. 일이 터진 지금이야 주위에 붙어 있는 누군가가 혹시나를 대비하겠지만, 전하께서 참겠다는 태도를 보이시면 곧 완전히 방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노리자는 거군.”
“예. 저도 그냥 넘어가자고 전하께 무엄한 말씀을 올린 게 아닙니다.”
“하나, 결국 그때가 언제냐는 건데, 왕성을 속속들이 뒤졌는데도 나타나지 않은 증좌가 갑자기 나타날 리 없지 않은가?”
“저희가 증거를 찾아오겠습니다.”
내가 증거를 찾아오겠다는 말을 하자, 전하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그럴 것 없다. 왕자를 구해준 것과 수색을 도와준 것으로 고마움은 차고 넘친다. 쉬러 오라 해놓고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한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야. 더는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구나.”
그런 초왕 전하의 말에, 나는 목덜미를 슬쩍 내려 안에 입은 해룡왕의 갑주를 보이며 답했다.
“제가 공을 세우기 전부터 전하께서는 제게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셨습니다. 한데 어찌 몸을 사리겠습니까.”
“…그건 고가 순수한 호의로 건넨 것이다.”
“압니다. 그저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건 저희 일이기도 합니다. 전하께 여유를 찾아 드리고자 없는 문양을 그려 내민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 보인 문양들은 발견한 것은 진짜입니다.”
“…일단 계속해보라.”
“수색 중에 수상한 자 하나를 발견했는데, 잠깐 사이 자결했습니다. 시신을 보존하여 안치는 해두었으나, 보고를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두 문양은 그자의 몸에 새겨져 있던 자문입니다.”
“그래. 고가 받은 장계에 이런 보고는 없었다.”
“두 문양 중 모르겠다고 하신 쪽. 혈염경천이라 쓰인 갑골문은 천마신교의 여러 계파 중 입지가 특별한 녀석들이 쓰는 문양입니다.”
그렇게 운을 뗀 나는 천마신교 내부의 혈마계와, 내가 짐작하는 낭중마군 송길준의 속내에 대해 늘어놓았는데.
“…그런 고로 혈마계는 곧 천마신교에서 독립을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계시던, 초왕 전하께선 그 이야기를 한마디로 압축하셨다.
“자네의 말을 종합하면, 천마신교의 교단 쪽 책사가, 고를 이용해 내부의 적을 도려내려 한다는 거로군?”
그리고 나를 향해 재차 질문을 해오셨다.
“한데, 이자들 역시 강호에 풍파를 일으키려 하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
“어차피 둘 다 토벌해야 할 자들 아니냐는 물음이십니까?”
“그렇다.”
그런 초왕전하의 말씀에, 사부님께서는 낮게 감탄하셨다.
- 초왕의 인물됨이 확실히 남다르긴 하구나. 시골의 유지도 누가 자신을 손아귀에 올려놓고 놀아나게 하려 든다면 날뛰는 게 정상이거늘, 귀하디귀한 지체로 차분히 강호를 생각하는 것이….
‘보기 드문 인품이시긴 하시죠. 무엇보다도 저를 마음에 들어하신 다는 게 가장 중요하고요.’
하니, 초왕부를 지켜 내야 했다.
그래야 장차 전하의 힘이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테니까.
“천마신교도 혈교도 기본적으로 혹세무민을 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은 맞습니다만. 혈교를 지금 치는 것은 전략적으로 득이 될 게 없습니다.”
“…자중지란을 유도하는 쪽이 천하의 안정에 도움이 되겠다는 말이군. 하기야, 천마신교와 혈교가 서로 싸운다면 우리로서는 어부지리가 되겠지.”
“예. 게다가 저희가 혈교의 뒤를 쫓는다면. 그 틈을 타 천마신교 놈들이 다른 허튼짓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연왕부도 그 대상이 될 수 있겠지요.”
“…연왕부에 직접 마수를 뻗칠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놈들이 북해빙궁을 삼키려 했던 일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후. 잠시 분노를 삭이라는 충언도 알겠고. 혈교를 쫓아선 안 된다는 이야기도 알겠다. 한데, 어찌 증좌를 찾아올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고가 물어도 되겠나?”
“제가 천마신교 내부사정에 대해 이렇게 해박하게 아는 것을 저쪽은 모릅니다. 그걸 이용하면 얻어 낼 수 있을 듯합니다.”
내 말에 초왕 전하는 고민이 된다는 듯 미간을 매만지셨고.
나는 쐐기를 박기 위해 한마디를 더했다.
“초왕부의 무장들은 용맹합니다. 하나 마인들이 어찌 싸우고 생각하는지는 잘 모를 겁니다. 소인이 적격입니다.”
그러자, 초왕 전하는 항복을 한다는 듯 양 손바닥을 내보이시더니.
내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갑주 안에 들어 있는 손수건을 내어주며, 고가 코가 꿰인 것 같다고 했는데, 이제 보니 한참 남는 장사를 해버렸군.”
“민망한 말씀입니다.”
“믿겠다. 그 일에 관해 일임할 테니 인력이든 재화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하라.”
* * *
나는 초왕 전하께 허락과 지원 약속을 받고 편전을 나섰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리고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하기 위해 곧바로 객관으로 돌아왔는데.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예해수 선배가 어떤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후배님. 응용이가 돌아왔어요!”
시선을 돌리니 정말로 응용이가 돌아와 있었다.
호루룩!
맹주님이 계실 안휘성을 찍고, 정무학관까지 거쳤다 돌아온 녀석을 향해 나는 따뜻한 말을 건넸는데.
“고생했다. 힘들었지?”
그런 내 말에, 응용이 녀석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호룩?
그에 응용이에게 먹이를 주는 역할을 도맡아온 우소릉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잘해주시냐는데요?”
“…참 나. 내가 언제 안 잘해준 적 있어?”
- 몰라서 묻느냐? 너는 사람이고 새고 있는 대로 부려 먹지 않느냐?
나는 사부님의 말씀과 언동생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응용이의 발에 매달린 서간들을 꺼내 살폈다.
‘별다른 내용은 없군.’
강호는 비교적 조용했고, 진혈단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확인한 서간을 삼매진화로 불사른 나는 각탁으로 나아가 빠르게 한 장의 서간을 작성했다.
『낭중마군 송길준이 본교를 치려하니 시급히 윗선에 보고하라.』
그리고 응용이의 발에 그걸 매달며 말했다.
“응용아 미안한데 고생 좀 더해야겠다. 이거 독고철에게 전해.”
그러자 응용이 녀석이 머리 위에 올라오며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호룩!
“이럴 줄 알았다는데요, 언 형?”
“얘. 밥이랑 물은 먹인 거 아냐?”
“네. 먹였어요.”
“언응용. 이거 급한 거야.”
호루욱!
“이거 확 그냥 오늘 물 끓여?”
호루룩!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다시금 창밖을 향해 날갯짓해나가는 응용이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길준이 놈은 내가 혈교의 창구 하나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겠지.’
송길준이 혈교를 쳐내려 한다는 정보를 독고철 이름으로 올리면. 자연히 천마신교 내에서 혈마계와의 자중지란이 일어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고급 정보를 올린 공으로 독고철의 지위도 크게 상승할 터.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의 상황에 픽 웃어 보인 나는 손뼉을 쳐 언동생들을 주목시켰다.
짝.
“초왕 전하께 이번 일에 연왕부가 얽혀있다는 증좌를 찾아오겠다말씀을 드리고 오는 길이다.”
그런 내 말에 남궁윤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갑자기 증좌를 어디서 찾으려는 거냐?”
“응용이 발에 달린 서간에 송길준이 혈교를 찍어 내려 한다는 내용을 적었어.”
“하면….”
“저 소식이 철이를 통해 혈마의 귀에 들어가는 대로 혈교와 마교 사이에 일이 터질 거야. 천마신교로서는 정신이 없겠지? 그 순간에 놈들의 거점을 들이치면 아마 건질 수 있을 거다.”
“그 거점이 어디 있는 줄 알고?”
“그건 지금부터 찾아야지. 길준이 놈의 성격상 여기서 아주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운을 떼며 객관에 있는 지도를 향해 다가간 나는 동그란 원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왕성이 습격당한 일을 되새겨보면 상당히 급하게 이루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연왕은 광동에 있고. 이 두 정보에 초왕부, 개방, 하오문의 정보력까지 합하여 이 잡듯이 뒤지면 분명히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야. 전하께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시기로 했으니까. 은 소저. 체계 좀 만들어봅시다.”
“알겠어요. 그럼 시간은 얼마나?”
“당연히 가능한 빨리지.”
“…후. 응용이가 단강구로 가고, 독고철이 작성한 보고서가 혈마의 손아귀로 들어가기까지 짧으면 엿새, 길면 여드레쯤 걸릴 테니. 사흘 잡아야겠네요. 하오문은 언 공자가 좀 다녀와 주시고, 개방은 천 소협이….”
“개방도 내가 다녀오겠소. 난리 통에 시간이 없었는데, 정현이랑 천장호는 묵린토룡의 내단 하나 줄 테니까 반으로 갈라서 흡수해.”
“원시천존. 그리하겠습니다.”
“크흠. 아이 그런 거 받아먹어도 되나 모르겠네. 지금도 죽을 고생을 몇 번이나 했는데 얼마나 더 부려 먹으시려고….”
“먹지 마. 먹지 말고 대충 살다가 그냥 뒈지면 되겠네.”
“아! 먹습니다! 먹어요!”
“은 소저는 좀 기다리시오. 옥기가 그러던데 묵린토룡은 사막에서 살아가는 녀석이라 화기가 많아 소저가 익힌 심결과 어울리지 않는다던데?”
“어, 맞아. 근데 같이 얻은 인면지주의 내단이 기본적으로 기운이 차긴 하더라, 이거 흡수해도 탈 안 나도록 연구 끝나면 하연이 네가 취하면 될 거야.”
그렇게 말을 하는 와중, 하성이의 모습이 살짝 눈에 밟혔다.
“…….”
소릉이에게 먹인 시점에서 녀석에게도 내단을 줘도 됐으나.
좀 잠잠하다 싶더니 근래 들어 녀석 특유의 조바심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저래서야 흡수는커녕 잘못하면 주화입마가 올 터.
“하성이 너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네 몫은 분명히 있으니까, 때가 되면 줄게.”
“…옙.”
녀석을 향해 한마디를 건낸 나는 빠르게 손뼉을 치며 모두를 독려했다.
“자자, 빨리빨리들 움직이자. 시간 없다.”
* * *
올해 들어 은하성은 심적으로 부침을 겪고 있었다.
남궁영, 장선, 독고철.
재능 있는 후배들이 두각을 보이는 터였고, 근래 들어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우소릉마저 멀찍이 나아간 느낌이 들었으니까.
‘후.’
그게 아니꼽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의 무력함에 서글플 뿐.
‘나도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
은하연에 비해 상재가 모자란단 평을 듣는 은하성이었지만, 나름대로 상계의 자식으로 자란 터.
서류를 속독하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하여, 여기저기서 들어온 정보 서류들을 훑고 또 훑고 있었는데.
그렇게 은하성이 한창 서류를 읽어내고 있는 때.
언용운과 은하연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건진 게 있소?”
“철저한 보안 속에 광서로 내려온 만큼 처음부터 저희가 어디 있다 생각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랬겠지.”
“초왕부에 들어오고 나서는 이야기가 샐 수밖에 없긴 한데. 그것과 이번 일이 일어난 일자를 고려해서 역산하면 대략 이 정도 반경에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광동 쪽에 마땅한 입지로 삼을 만한 곳을 살펴보고 있어요.”
그렇게 모두가 은하연의 제안에 따라 광동에 관심을 두고 있던 때.
은하성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들었다.
‘뭣도 모르던 시절에 형님한테 처맞아 봐서 아는데. 내가 송길준이면 용운 형님 마주치는 거 싫어서, 광서나 광동에는 안 올 거 같은데.’
송길준도 호초탄에 눈물 콧물 다 뺀 걸 시작으로 번번이 쫓겨 다녔다.
‘수하들이 용운 형님을 붙잡았다고 하면 달려오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 다른 데 있지 않을까?’
은하성은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려다 순간 멈칫했다.
‘헛소리한다고 혼나는 거 아냐?’
창창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계속해서 새는 바가지 취급을 받아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은하성은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시간이 촉박해서 그런지 몰라도 다들 너무 광동과 광서 쪽만 파고 있다.’
자신의 생각이 맞든 틀리든 한마디 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나야 뭐 항상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 처맞는 게 일이고.’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꾸중 한 번 못 들을 것도 없었다.
‘새는 바가지도 나름대로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은하성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광동성이나 광서성 말고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귀주? 여기도 조건에 부합하는 거 같은데요?”
“……?”
“……?”
그런 은하성의 말에, 장내에 정적이 흐르길 잠시.
물끄러미 지도를 응시하던 언용운이 은하성을 향해 다가와 입을 열었다.
“하성아.”
그에, 은하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는데.
“…닥칠까요?”
언용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로 칭찬이었다.
“아니, 잘했다.”
그렇게 은하성의 머리를 헝클은 언용운은 다른 언동생들을 향해 말했다.
“귀주성 쪽 자료, 내 쪽으로 가져와 봐. 은 소저. 여기 성도인 귀양(貴陽)도 역산한 거리에 들어가지 않나?”
“관도가 워낙 잘 돼 있고 물길도 있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길준이 이 새끼. 여기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