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55화 (355/444)

제355화. 수학여행 (1)

구파일방의 한 축인 해남파의 위명 덕분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해남도.

이 섬은 중원 사람들이 최남단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떠올리곤 하는 곳이었는데.

그 해남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한참을 나가면.

대여섯 개의 성(省)을 꾸겨 넣어도 남을 만한 너비의 해역에, 밤하늘의 별처럼 섬들이 뿌려져 있는 구역이 있었다.

이름하여 은하군도(銀河群島).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이 해역의 실상은 말 그대로 무법지대였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은하군도는 중원과 남해적룡궁 사이의 암묵적인 국경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관군, 해남파, 남해적룡궁.

세 곳 모두 실력행사를 자제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하여, 숱한 섬들이 해적의 소굴로 이용되고 있었고.

어떤 섬들에는 암시장인 흑시(黑市)가 들어서 있었는데.

그중 동시라 부르는 곳에선, 독특한 옷차림의 사내가 애꾸눈을 한 해적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물건은?”

얼굴에는 입매가 드러나는 하얀 가면을 쓰고, 목 아래로는 새하얀 장포를 갖춰 입은.

흑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질적인 차림의 사내.

사내의 이름은 채규.

마뇌의 두 번째 제자로, 천마신교 내에서 백상마군(白常魔君)이라 불리는 존재였는데.

그런 채규와 거래를 하는 것이 처음이 아닌 듯, 애꾸는 자연스레 앞서 걸었다.

“이쪽으로.”

그렇게 채규를 선착장에 숱하게 대어져 있는 배 중 한 곳으로 안내한 애꾸는, 정박해 있던 배의 선창(船倉)을 슬쩍 열었다.

달칵-

열린 선창의 틈으론, 희미한 아편 냄새와 함께 무기력한 모습으로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이 보였다.

그걸 확인한 채규는 선창의 문을 자신의 손으로 닫아걸었다.

탁-

그리고 해적을 향해 금자가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달그락거리는 누런 덩어리를 확인하고 기분이 좋아진 애꾸는 괜히 몇 마디를 덧붙였는데.

“아니 근데, 무슨 노예가 이렇게 많이 필요 합… 제가 알 바는 아니지요?”

“남은 눈도 멀고 싶지 않다면.”

“죄송합니다. 저번처럼 통째로 가져가셨다가. 보름 내로 배만 돌려주시면 됩니다. 사실 안 주셔도 되는데, 그럼 보증금은 저희가 먹습니다?”

말을 하는 도중에 아차 하며 자세를 바로 한 애꾸는 금세 줄행랑을 치듯 내뺐다.

그렇게 애꾸가 사라지자.

퍼져있던 채규의 수하들이 속속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는데.

그중 수하가 아닌 한 사람.

채규와는 반대로 새카만 궁장에 검은 가면을 쓰고 있는 여인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저거 죽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입이 가벼워도 너무 가벼워 보이는데?”

입을 연 여인의 이름은 채향.

채규의 쌍둥이 동생으로, 그녀 역시 흑무군주(黑无郡主)라는 군호를 받은 마두였으나.

천마신교 내에서 지금까지 두 사람의 취급은 좋지 않았다.

“…스승님께서는 혈마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하셨지만, 저런 놈이 떠들고 다니면 되레 산통이 깨질 것 같은데요? 제 생각엔 죽이는 게 맞아요.”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없는 채향과, 성정이 다급하고 참을성이 없는 채규.

그 때문에 늙은 사부의 수발이나 들고 있었으니, 입지가 좋을 수 없는 것이다.

“나도 사실은 죽이고 싶다. 저런 하찮은 놈의 목소리가 지나간 귓구멍을 도려내고 싶은 참이니까.”

하나, 송길준이 몰락하며 두 사람에게 기회가 오게 되었다.

채규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이 달라졌음을 보이고 마뇌의 후계자로 올라설 생각이었다.

“내 마음속에 살심이 이는 것과는 별개로, 저런 하찮은 자가 떠들고 다니니까 되레 궁금해질 거야. 왜 죽여 입막음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백도무림의 놈들에게도 소식이 들어갈 텐데요? 이번에 적룡궁의 소궁주가 정무학관에 갔다던데. 괴룡이라는 녀석이 분명히 냄새를 맡지 않을까요?”

“향아. 너는 사부님을 모신 지가 얼만데 아직도 나무만 보느냐. 그거야말로 사부님께서 바라시는 바일 거다. 백도 놈들이 꼬이기 시작하면, 혈마 쪽에서 어떤 움직임이든 있을 테니까.”

“흐음.”

“여차하면 만인혈에 관한 모든 것을 혈교 쪽에 뒤집어씌워서 백도 무림과 싸움을 붙여 어부지리를 노릴 수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도….”

“왜 말을 하다 마세요?”

“정말로 언용운 그 녀석이 걸려든다면, 어쩌면 우리로서는 큰 공을 세울 기회가 되겠지.”

채규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에, 수하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은하군도에 위치한 외딴 섬을 향해 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제갈 소저.”

“예. 용운 님.”

“운영위원회의 허락도 떨어졌고, 인원도 확정됐으니. 이번 수학여행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세부사항을 논의하기 위한 총학생회의를 주재해야겠소.”

“음? 적룡궁과 원철 스님을 제외한 다른 교류생들은 어떻게 하실지 결정을 하셨나요?”

“남만야수궁 쪽에선, 유람 다닐 생각이 없다며 불참하겠다는 의사를 진즉에 밝혀왔고. 각궁보랑 북해빙궁은 조금 전에 야율전이랑 담정우가 다녀갔소. 참가하겠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그럼 총학생회의를 열어야 하겠네요. 전교생이 움직이는 만큼 편제를 생각해봐야 하는데, 소속 생도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치회장님들의 의견이 필요할 테니까요.”

“우리 쪽이 가지고 있는 마교에 관해 주지시켜야 할 내용도 전파해야 하고.”

“참석자는 자치회 간부들에, 일정에 참가하기로 한 교류생들의 대표면 되겠죠?”

“학칙은 나보다 훨씬 빠삭한 사람이 뭘 묻고 그러시오.”

“그래도 최종 확인받아야죠.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교류생들의 참가 여부가 확인된 직후.

“총학생회장 언용운입니다. 이번 수학여행은 아시다시피 마교를 방벌하기 위한 여정입니다. 한치의 방심도 용납할 수 없기에, 논의하고 전파할 사항들이 있어 이렇게들 모셨습니다.”

나는 총학생회의를 주재했다.

“그럼 첫 번째 안건인 생도들의 편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공보국장님?”

“예해수입니다. 지금 나눠드리는 서류는 총학생회에서 간부들이 머리를 맞대 만든 편제의 골자입니다.”

사대기숙사의 생도들을 조 단위로 쪼개어 한 개의 제대를 만들자는 제안에.

향란관의 자치회장 소선창이 질문을 해왔다.

“이게 기숙사별로 단을 꾸렸던 본래의 제도보다 나은 이유가 뭔가?”

그에, 예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학관이 낭중마군에게 습격을 당했던 당시엔 시간이 촉박하였고, 사대기숙사들의 독립성이 강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기숙사별로 편제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리했지만, 적은 막았지.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 제도라고 생각하네만? 손발도 더 잘 맞을 것이고.”

“총학생회장님이 취임하신 이래 정무학관의 생도들은 함께 합을 맞추는 수련을 해왔습니다. 손발이 맞지 않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흠.”

예해수의 말에도 좁힌 미간을 펴지 않는 소선창.

내가 입을 연 건 이때였다.

“감당해야 할 지역이 상당히 넓은 만큼. 사대기숙사의 기치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제대(梯隊)를 만들 순 없습니다. 예 선배가 말한 지난 싸움에서 향란관이 고립됐던 때를 상상해보십시오.”

“…큼.”

“단순히 향란관을 질타하는 건 아닙니다. 누구라도 그리 될 수가 있습니다. 운매관의 용기가 만용이 될 수도 있고, 윤국관은 스스로의 꾀에 넘어가는 일이 생길수도 있겠죠. 청죽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냉철하지 못한 헌신은 처참한 사상자로 돌아올 테니까요.”

“…….”

“…….”

“…….”

그런 내 말에, 네 명의 자치회장들이 저마다 침음을 삼키는 때.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운매관의 용기가 필요한 때도 있을 거고, 윤국관의 지혜가 필요할 때도 있을 겁니다. 어떤 일엔 향란관 생도들의 자긍심이, 청죽관 생도들의 헌신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겁니다. 각 제대가 자체적으로 작은 정무학관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말이 끝나자, 소선창이 다시금 질문을 해왔다.

“…무슨 말인지 알긴 하겠는데. 그럼 새로운 지휘체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걸 이제 회장님들께서 도와주셔야죠. 생도들의 교우관계와 출신 지역, 문파 그리고 작전 지역을 고려하여 제대를 편성하고 파견할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회의는 여러 가지 논의를 거쳤는데.

당초 안건으로 생각해둔 사안들에 관한 이야기가 다 끝이 났을 때.

“편제는 완료됐고. 전교생을 움직이는 데 들어가는 재물들에 관한 계산도 얼추 끝이 났네요.”

은하연이 아미를 좁히며 입을 열었다.

“생도들을 이끌고 출정하는 일 자체는 그야말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는데, 문제는 어디로 가느냐… 이런 건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한데, 천마신교 놈들이 만인혈을 이 시점에 만들려는 이유가 뭘까요?”

은하연의 말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은하성이었는데.

“여기저기서 대판 깨지고 나니까, 마인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려고 연단술 쪽으로 눈을 돌린 것 아닐까요?”

“그렇다기엔 만인혈의 제조법은 너무 극단적이야. 아무리 천마신교 놈들이 막 나간다지만, 생각이 있으면 이렇게까지 공분을 쌓고 싶지는 않을 텐데?”

이어진 대화에 제갈설지도 한마디를 더했다.

“하연 님 말이 맞아요. 그런 제조 법으로 만인혈이라는 환단을 몇 개나 만들 수 있겠어요? 다수의 마인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려면, 기존의 잠폭단을 개량하는 방식을 택하는 게 상식적으로 맞겠죠?”

원작의 지식도 없이 저기까지 추론을 해낸 두 사람에,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말이 맞소. 특히 여러 명이 혜택을 볼 수 없다는 그 말이 일리가 있군.”

마인들의 수준을 올릴 목적이었으면 제갈설지의 말대로 잠폭단을 개량하려 했을 것이다.

‘아니면, 마환단을 만들기 위해 사부님의 무덤을 찾으러 다니던지.’

만인혈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기실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되짚어보며, 나는 당대교주 혁련강을 떠올려 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점에 교주가 주화입마에 들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다 보니 머릿속에서 한가지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유인책인가?”

그런 내 말에, 정현이 입을 열었다.

“원시천존. 저희를 유인하기 위해 그런 끔찍한 일을 행한단 말입니까?”

사실 내 머릿속을 스친 유인대상은 우리가 아닌 혈마였으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부들의 의기를 끌어낼 수 있기도 하고… 내가 아는 마뇌라면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생각으로 일을 진행했을 테니. 영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뭐, 아무튼.

정말로 혈마를 유인하려는 거라면, 독고철 쪽으로도 뭔가 지령이 내려 올 터.

‘이 안건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다.’

마지막 안건은 지령을 보고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금일 회의는 여기서 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결정인 만큼 여러 경로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파악한 뒤에 결단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때.

나는 적룡궁의 소궁주 정원해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무슨 의미로 하시는 물음이십니까?”

“소궁주님께서 처음 제게 이 일을 털어놓으실 때. 제가 생각을 해보겠다고 답을 하니, 거절을 하는 줄 알고 실망하셨잖습니까?”

“…아. 예. 그땐 그랬었지요.”

“이제 저희의 의지와 진심이 느껴지십니까?”

“예!”

“좋습니다. 이제 저희 진심을 아셨으니까. 앞으로 진행될 수련에서, 제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망신을 주려 한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예?”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바로 수련하러 가죠. 제갈 소저와 은 소저를 비롯해 천마신교의 육지 거점을 분석하는 사람들만 남고, 나머지는 대연무장에 집합합시다.”

*    *    *

총학생회의가 있었던 날을 기점으로, 언용운은 ‘수학여행 조’라는 이름으로 재편된 생도들을 이끌고 혹독한 수련을 시작했다.

삑삐빅! 삑삐빅삐 빅!

“그 상태로 버팁니다!”

“…악!!”

“이런 훈련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앜!!!”

“절체절명의 순간, 이를 악물고 한 걸음을 나아갈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각자가 살아남아야, 어깨를 걸고 있는 전우들도 살아남습니다! 알겠습니까?!”

“악!”

“그때 여러분들에게 힘을 주는 건, 온몸 구석구석 단련해 놓은 근육과 불굴의 정신력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악!!”

정원해가 교류생으로서 정무학관에 와 처음 느꼈던 감상은, 매일 아침 겪는 수련 시간이 참으로 고되다는 것이었다.

한데 그랬던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질 만큼.

마교를 방벌할 것을 결의한 언용운의 담금질은 혹독했다.

삑삐빅! 삑삐빅삐 빅!

어디서 저런 것을 고안했나 싶은 기괴한 체조로, 정원해의 몸에 이런 근육도 있었던가 싶은 자리에 알이 배기도록 만들었고.

“오늘 준비운동은 여기까지.”

그 시간이 간신히 끝났다 싶으면.

“이제 본 수련에 들어가겠습니다. 마교를 방벌하러 가는 이상. 여러분들 중 누구라도 대마두를 마주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순간을 상정하고 여러분들을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조부터 팔조까지 앞으로.”

화경의 고수인 언용운이 진심으로 검을 내질러오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쌔애애애액!

빡! 빠악! 빠아아악!!!

그에 정원해의 몸은 걸레짝이 된 듯 너덜거려졌고, 정신도 혼몽해진다.

‘물 위를 고고히 헤엄치는 백조의 다리가 기실 바쁘게 움직인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괴룡과의 훈련은 정말….’

그야말로 영혼이 탈탈 털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정원해만이 아니었다.

언용운의 측근으로 여겨지는 언동생들 중엔 실성한 듯 웃는 사람들 까지 나왔으니까.

“크큭큭큭큭. 제가 좀 세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용운 형님이랑 수련만 하면 이 꼴이 날까요?”

“아하하하. 그거 사실 언용운 저 자식이 요괴가 둔갑한 녀석이라 그래.”

“당옥기. 은하성. 헛소리가 나오지? 여유가 있나 봐? 선아! 거기 현철 족쇄 큰 거 하나씩 더 가져와 봐!”

하나, 그들 중 누구도 그만하자는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캭!! 간다 가!!!!”

“으아아아아!!!”

그에, 정원해도 이를 악물고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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