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0화. 천외천 (1)
적룡궁의 배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노를 저은 지 한참.
멀찍이 쌍둥이처럼 대칭을 이루고 있는 두 개의 바위섬이 보였다.
“저기가 휴어도(休漁島)로군.”
눈에 들어오는 휴어도의 전경은, 적룡궁의 소궁주 정원해에게 전해 들은 그대로였다.
“딱 저 모습만 보면 정말 그림 같네.”
하나, 이 주변의 해역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철썩!
처얼썩!!!
시커먼 파도가, 내가 탄 쪽배를 삼키려 끊임없이 날름거렸고.
곳곳에 자리한 소용돌이들이 시커먼 바다 위에 새하얀 죽음의 덫을 수놓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런 소용돌이에 대처하기 위해, 정원해가 수련 중에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파도는 너무 거스르려 해도 안 되고, 마냥 순응해도 안 된다.”
그리고 쪽배의 바닥에 달린 발걸이에 다리를 끼워 넣은 뒤.
쏴아아아-
배가 큼직한 소용돌이의 경계에 진입하며 속도가 더해졌을 때.
내력을 휘감은 노로 바다를 바쁘게 찍어내기 시작했다.
팍! 팍! 팍! 팍! 팍!
덕분에 탄력을 받은 쪽배는 어느 순간 수면 위를 살짝 날았다가.
촤악!!
물살을 가르며 내려앉았다.
그렇게 소용돌이 하나를 넘어냈지만, 아직 넘어야 할 파도와 소용돌이가 무수히 남아있었다.
철썩!
처얼썩!!
해역을 돌파하는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에 바쁘게 노를 휘젓는 와중,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새어 나왔는데.
“물고기도 쉬어간다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네.”
새삼 거친 바다를 체감하고 나니.
앞서 이 해역으로 들여보낸 독고철과 진혈단원들이 떠올랐다.
“후. 철이네는 잘 도착했으려나?”
그런 내 말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잘 도착하지 않았겠느냐? 그 녀석들은 네가 탄 쪽배보다 큰 배를 탔으니… 설령 박살이 났다 하더라도 잔해 정도는 남았어야지?
“이런 소용돌이에 제대로 휘말리면!”
촤아아악!!!
“뼈도 못 추릴 것 같아서요!”
- 하나, 네 녀석이 그렇게 되도록 놀려두지를 않았지. 훈련을 좀 시켰느냐? 어련히 잘 넘어갔을 것이다.
사부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다른 물음을 던져 오셨다.
- 한데, 용운아.
“예?”
- 대주교라는 자에게 너희가 삭월도를 안다는 정보는 왜 준 것이냐?
“저희가 삭월도의 존재를 안다는 것은, 사실 천마신교 쪽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됩니다.”
- 혈교 놈들은 애초에 삭월도의 존재를 알긴 하니까?
“예. 그런데, 혈교와 천마신교가 손을 잡는 일은 이 시점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혈교는 독립을 하겠다고 나온 것이고.
천마신교 입장에서는 혈마의 무리는 단박에 쓸어내고 싶은 대상이다.
“초록은 동색이니 가재는 게 편이니 하는 말들이 있지만… 지금 단계에선 제가 흘린 정보가 천마신교 쪽으로 들어갈 일은 없습니다. 대신 혈교의 대주교 쪽이 다급해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모든 전략의 기본은 상대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부터다.
“저희가 천마신교의 다른 거점을 공격하는 동안 삭월도를 치려던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실제로 그렇게 됐지 않습니까? 그리고….”
- 그리고? 왜 말을 하다 마느냐?
“대주교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만인혈이 만들어지고 있는 장소를 백도무림이 알고 있다.
“대주교가 만인혈을 착복할 욕심이 있거나 공을 탐하는 자였다면, 정보를 들었을 때. 선수를 치기 위해 홀로 움직였을 겁니다.”
그렇게 운을 뗀 나는, 휴어도가 있는 방면을 향해 계속해 노를 찍으며 말을 이었다.
“혈교의 교단을 맹종하는 자라면, 독고철을 건너뛰고 자기보다 윗선인 호교법왕 쪽과 상의를 했을 것이고요.”
- …하나, 대주교라는 녀석은 고철이 녀석을 불러들였다. 그럼 둘 다 아니지 않느냐?
“예. 놈은 세 번째 유형입니다.”
혈교에 충성은 하되, 무작정 본단의 말에 따르지는 않는다.
“그건 순수하게 혈교의 기치(旗幟)와 역혈수라대법의 강함을 추종하는 자라는 뜻이죠.”
그런 자라면, 만인혈에 혈안이 된 혈천수라궁의 모습이 탐탁지만은 않을 터.
“그 말은 즉. 대주교라는 자를 제대로 꺾을 수만 있으면… 놈이 우리 진혈단의 뜻을 받들 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그놈의 진혈단의 뜻은… 그거 그냥 송호겸 그 녀석이 중얼거린 이야기를 듣고 급조한 거 아니었더냐?
“아무튼요!”
* * *
출발 시점을 일부러 늦춘 언용운이 열심히 노를 젓고 있던 때.
각각 동도와 서도라 부르는 휴어도의 쌍둥이 섬 사이에 놓인 틈바구니에선.
비단으로 된 돛을 사용하는 거함 한 척과 중형 선박 한 척이 배를 붙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이제 닻을 내리시오! 뭣들 하느냐?! 줄사다리를 내려라!”
그 광경을 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중년인이 있었으니.
은하군도 일대를 주름잡는 대해적 만경혈파(萬頃血波) 사겸이었다.
세간에는 은하군도의 숱한 해적중 하나로 알려진 사겸이었으나, 사실 그는 다름 아닌 혈교의 남해 대주교였는데.
독고철이 배에 오르기를 기다리며, 사겸은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독고철.’
독고철과 접촉한 뒤에, 만인혈 탈취 계획에 착수하라는 혈천수라궁의 엄명이 있긴 했다.
하나, 그런 명을 떠나서 사겸은 개인적인 궁금증이 들었다.
‘감히 내 전언을 되돌려보냈단 말이지?’
고작 각주 직을 받았을 뿐인 녀석이, 어찌 그렇게 방자하게 굴 수 있는지가.
‘백도무림의 중심에 안착하여 세가를 다시 세우기까지 이르렀으니, 타성에 젖어 혈염천하의 대의를 잊을 만도 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피는 못 속인다고 하였다.
멸문했던 명가의 후예라는 배경을 지닌 독고철이, 정파 놈들과 어울리다 헛물을 켜게 되어 변심했다는 가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 마냥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독고철은 혈교에 분명히 충성하고 있었다.
‘강남에서 벌어진 천마신교와의 싸움.’
십만대산 쪽에서 미지근하게 나온 덕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 싸움이 혈교의 승리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건.
발각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무학관으로 향한 정보를 빼돌린 독고철의 공이었으니까.
‘뭐, 애초에 성정이 오만한 놈일 수도 있겠군.’
그렇게 사겸의 머릿속에 여러 의문이 떠다닌 지 잠시.
그런 의문을 떠올리게 만든 장본인인 독고철이 사겸의 배 위에 올라섰다.
척.
사겸의 배에 오른 독고철과 그 수하들은 사겸을 향해 깍듯이 읍을 해왔다.
“백영각주 독고철이 대주교님을 뵙습니다.”
한데, 예를 차려오는 독고철의 그 모습이, 되레 사겸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성정이 오만하지도 않군.”
이 순간, 사겸에게 독고철은 이해할 수 없는 인종이 되어버렸다.
미간을 한껏 좁힌 사겸은 좌우의 수하들을 향해 턱짓했다.
채채채채챙!!!!
그에, 사겸의 수하들이 줄줄이 병장기를 뽑아 들었고.
사겸 본인도 박도를 뽑아 들고 입을 열었다.
“독고철. 너는 뭐지? 어떤 이유로 교에 충성하는 것이냐?”
그에, 독고철의 수하들도 저마다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는데.
채채채챙!!
독고철은 그런 수하들에게 검을 내리라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진정한 혈염천하의 때가 도래할 것임을 믿기에, 교에 충성합니다.”
“…뻔한 말이로군. 그 말을 나더러 곧이곧대로 믿으라는 거냐?”
“대주교님께는 뻔한 말처럼 들리는 모양이지만, 그게 진심이고 전부입니다.”
말을 하는 독고철도, 그 말에 검을 내리는 녀석의 수하들도.
사겸을 앞에 두고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 나를 가르치려 드는가?”
그 모습은 사겸의 내심에 여전한 의문을 남김과 동시에, 자존심을 긁었다.
“애송이가 겁도 없구나. 혈천수라궁 입장에서는 백도무림의 심부에 잠입해있는 너희가 귀하게 느껴지겠지만. 이곳은 내 영역이야.”
“…….”
“바다는 많은 것을 삼켜버린다. 너희들이 모두 죽어 나간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곳이 이곳이다.”
“…….”
“그리고. 나는 그런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지. 내가 혈천수라궁의 눈치를 보느라, 너희를 수장시키는 일을 겁낼 것 같으냐?”
“…충분히 실행에 옮기실 수 있으신 분으로 보입니다.”
“한데, 너희들은 어떻게 흔들림 없는 눈빛을 내 앞에서 보일 수가 있지?”
이어진 사겸의 물음에.
독고철은 당장에 처한 상황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본교의 남해 대주교가 만경혈파였다.’
비단 돛이 걸린 사겸의 배를 목격하면, 드넓은 바다가 피로 물든다는 그 별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고.
대주교쯤 되면 절대고수 반열에 든 대마두였다.
‘눈앞의 사겸은 우리를 모두 수장시키겠다는 방금의 엄포를 정말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독고철은 그런 사겸의 영역에 완전히 들어와 있는 상황.
사겸이 뱉은 말을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기기로 마음을 먹으면, 독고철과 수하들은 삽시간에 물고기밥이 되리라.
‘그런데 두렵지가 않다.’
대답 여하에 따라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건만, 독고철은 이상하리만큼 사겸이 겁나지 않았다.
독고철은 그 이유를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언용운 회장님이 계시니까.’
언용운이 대주교를 만나기로 했으면,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듯 언용운을 생각하니, 얼마 전 뇌주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고.
‘…우리는 진혈단의 뜻을 품고 있지 않느냐고 하셨지.’
자연스럽게 독고철의 머릿속에선 여러 가지 생각들이 척척 짜 맞춰졌는데.
‘왜 대주교씩이나 되는 인물이 내가 혈교에 충성하는 이유를 궁금해하고, 회장님께서는 대주교를 만나겠다 결정하셨는지… 알 것 같다.’
그렇게 머릿속이 명료해지자, 자연스레 독고철의 입이 열렸다.
“저희는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을 보고 있습니다. 갈피를 잃을 이유가 없지요.”
“…뭐라?”
그런 독고철의 말은, 사겸에겐 ‘당신은 갈피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라는 뜻으로 들렸는데.
그에, 사겸의 미간이 다시 한번 와락 구겨지는 때.
“네놈이 보았다는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이 대관절 무엇이길….”
사겸의 수하 중, 돛대 위에 올라 망을 보던 척후병 하나가 뿔나팔을 불며 입을 열었다.
뿌우우우우-
“파도! 파도가 몰려옵니다! 대파(大波)입니다!”
사겸은 즉시 수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멀찍이 거대한 파도가 몸을 일으킨 것이 보였다.
“!”
바다의 파도는 당장엔 멀어 보여도 순식간에 밀어닥쳐 모든 것을 삼킨다.
사겸은 독고철을 겨누고 있던 박도를 거두고 급히 선수를 향해 달렸다.
썽겅! 썽겅!! 썽겅!!!
그리고 내리고 있던 닻과, 독고철이 타고온 배와 연결돼 있던 갈고리 줄을 모조리 끊어버린 뒤.
주변을 향해 명을 내렸는데.
“배를 움직여라! 서도를 방파제로 삼아야 한다!! 독고철! 네놈들은 밧줄이든 뭐든 몸을 배에 고정시킬 것을 찾아서 붙들어!”
그에, 사겸의 선상이 분주해지는 때.
대파를 알려온 척후병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파, 파도에 누가 있습니다!”
그에, 사겸의 시선이 다시 한번 거대한 파도가 일어난 방향으로 돌아갔는데.
어지간한 성벽 높이의 파도가 시시각각 시커먼 그림자를 드려오는 와중.
나무판자라 불러도 될 법한 쪽배에 의지한 채, 포말로 된 하얀 선을 그으며 파도를 타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 * *
나를 순식간에 휴어도까지 데려다준 파도는, 섬을 때려 부수듯 덮쳤는데.
촤아아악!!!!!!
이 순간.
나는 수상비의 묘리를 응용해 비영파천보를 시전했다.
팟!
그렇게 내가 의지하던 쪽배를 박차고 공중으로 도약한 때.
사겸의 배는 기민하게 쌍둥이섬의 사잇길로 움직여 서쪽 섬을 방파제로 삼았다.
촤아아아-
대응 자체는 빠르고 정확했지만, 파도 자체가 워낙에 무식한 크기였다.
콰아아아아앙!!!!!
사겸의 배는 부서져 내린 물살로 이루어진 여파를 뒤집어쓴 채.
속절없이 밀려 내려가 동쪽 섬의 바위틈에 처박히게 되었는데.
그 바람에, 배 위에 타고 있던 사람 중 일부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고.
나머지는 균형이든 정신이든 둘 중 하나를 잃어버려 선상에 널브러지게 된 때.
착!
나는 사겸의 배 위에 안전하게 내려앉은 뒤.
왼손에 상처를 내 뽑아낸 혈조술의 기운을 회한에 휘감았다.
- 기도도 그렇고, 영혼에 말라붙은 피 냄새도 상당한 것이… 저 박도를 선상에 꽂아 넣어 버텨낸 놈이 혈교의 대주교인 모양이로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주교로 보이는 자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 나갔다.
쌔애애애애액!
검붉은 기운이 이글거리는 내 검에, 대주교는 놀란 눈을 했다.
“!”
하나, 멍하게 있진 않았다.
놈은 빠르게 선상에 박아 넣어 버팀목으로 사용한 박도를 뽑아내더니.
박도에 혈조술의 기운을 감으며 마주 달려왔다.
쌔애애액!
나와 대주교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리니,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내 회한과 놈의 박도가 어지러이 섞이기 시작했다.
캉! 카카카캉!
혈조술이 휘감긴 대주교의 박도는 평범한 도객의 도법과는 전혀 달랐다.
쌔애애애액!
캉!!
엉긴 피의 도움을 받아, 거검으로 변모해 찔러져 들어오기도 했고.
픽! 픽! 픽! 픽! 픽!
동시에 방울방울 날아드는 핏물은 그 자체로 암기의 역할을 해왔다.
‘싸우는 방식을 알긴 아는구만?’
혈술을 기반으로 한 마공을 제대로 익힌 티가 났고.
해적 생활을 하며 수없이 실전을 겪어본 티도 났다.
‘하기야 아무리 혈교가 막 태동하는 시기라 하더라도, 대주교 자리를 아무렇게나 뿌렸을 리는 없지.’
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내 눈엔 대주교가 사용하고 있는 마공의 한계가 명확히 보였다.
‘내가 오늘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려드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