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1화. 천외천 (2)
혈교의 대주교와 어지럽게 합을 섞고 있은 지 잠시.
놈에 대한 파악을 끝낸 내가, 파천단악의 초식을 시전해 놈을 날리고는 잠시 호흡을 고르고 있자.
카아아앙!!!
독고철이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오시면서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이 배. 비단으로 된 돛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휴어도까지 오는 중엔, 까딱 잘못하면 바다에 삼켜질 거대한 파도를 탄다고 여념이 없었고.
‘비단 돛?’
당도하고 나서는 대주교의 수준을 가늠하는 일에 집중한다고 여념이 없었는데.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부러진 돛대에 걸린 돛의 재질이 남달라 보였다.
‘금범선(錦帆船)이면….’
그것을 보고 나니.
이곳에 오기 전에 했던 추측과 맞물려 대주교가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만경혈파 사겸이구만.]
[예! 회장님의 예상이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저희 조직은 철저한 점조직이라, 윗선을 알기는 정말 힘든데 어떻게 사겸인 줄 아셨습니까?!]
내 말에 유독 놀라는 독고철의 모습에, 사부님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 예상이 맞았다고? 용운이 너도 이곳에 와서 추리에 확신을 얻은 것 아니더냐? 내 기억엔 대주교가 사겸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사부님 기억이 맞습니다.’
상대가 바다에 정통하며, 해남파나 남해적룡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움직였다는 점에서 해적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을 내린 뒤.
이 일대를 주름잡는 해적들의 현황을 파악해 두었을 뿐이었으니까.
- 한데, 고철이 녀석은 왜 저러느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기억은 곧잘 왜곡되곤 하는 법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제가 도착하기 전까지 초긴장 상태 속에 놓여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착각한 모양인데요?’
독고철이 더욱더 나를 맹신하는 계기가 될 터였으니, 나쁠 것은 없었는데.
쌔애애애액!
그렇게 사부님의 물음에 답을 드리고 있던 찰나.
붕 떠서 날아갔던 사겸이, 다시금 균형을 잡고는 거칠게 박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어 왔다.
쌔액!
쌔애애액!
나는 그런 사겸의 칼질을 요리조리 피하며 독고철에게 전음을 보냈는데.
[아무튼, 철이 너는 다른 진혈단원과 협력해서 나와 사겸의 싸움을 방해하지 못 하게 해!]
[예!]
나름대로 해적으로 잔뼈가 굵어 왔기 때문인지.
사겸은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독고철을 움직여? 혈천수라궁에서 나온 것이오?”
혈술을 사용한 것과 독고철을 움직였다는 것에서 착안한 모양이었지만, 완전한 헛다리였다.
하기야, 내가 누구인지 사겸의 입장에서는 조금의 단서도 없었을 것이다.
‘아뇨. 정무학관에서 나왔습니다, 라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
눈초리는 의심스러운 주제에 말투는 조심스러운 사겸의 모습에.
내 입가에 웃음이 번지려 했으나.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나저나 사겸이면 대해적으로 분류되는 거물.’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따로 취합한 정보를 기준으로 한 것.
원작에서는 눈앞의 사겸이 등장한 바 없었다.
‘그 말은 즉. 사겸이 숙청을 당했다는 이야기인데….’
즉, 누군가의 개입 없이 스스로 숙청당할 만한 일을 벌였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내가 떠밀어주기까지 하면?’
사겸이 진혈단으로 넘어오든, 혈교 내의 폭탄이 되든 할 터였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결론이 나자, 절로 웃음이 나오려 했는데.
이번에는 참지 않고 노인의 목소리로 웃었다.
“끌끌끌.”
그러자, 사겸이 미묘하게 존대를 해오던 모습을 내던지고 빠득 이를 갈았다.
“혈마님께서 나를 버리려는 것이냐? 아니면 교단의 늙은이들 짓인가?”
자신의 물음에 묵묵부답으로 있다가, 의뭉스럽게 웃기만 하는 내 모습에 부아가 치민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웃음을 머금으며, 그런 사겸의 속을 긁어 주었다.
“끌끌. 네놈은 노부에게 질문을 할 주제가 되지 못한다.”
반응은 바로 왔다.
사겸은 와락 미간을 구기더니, 일갈을 해왔다.
“반드시 털어놓게 될 것이다!”
* * *
나를 향해 일갈을 내지른 사겸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스흡.”
그리고 일찍이 상처를 낸 왼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사겸의 동공이 붉게 물듦과 동시에 눈두덩이 주변의 핏줄이 불거져 나왔는데.
놈의 손에서 휘둘러지는 박도가 전에 없이 빨라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쌔액! 쌔액!
쌔애애액!!
내가 이따금 사용해왔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혈조술을 시전한 모양이었다.
‘혈쾌술?’
그에, 나는 작게 감탄했다.
혈쾌술은 혈교의 마공을 익혔다고 해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비술이 아니었다.
혈조술의 기반이 되는 혈륜을 완벽히 통제한 상태에서, 파천의 내력을 온몸으로 퍼트리는 방식이었고.
그런 나조차 과하게 사용하고 나면 탈진 증상을 겪곤 하는 비술이었다.
‘뭐, 저쪽은 부작용이 심할 것 같기는 하네.’
핏줄이 불거져 나온 사겸의 얼굴을 보면, 놈의 비술이 생명력을 땔감으로 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혈천수라궁에서 보낸 처형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놈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혈조술을 사용하는 나로서는 혀를 차고 싶은 모습이었다.
“쯧쯧.”
“귀면옹! 언제까지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내 볼 것이다!”
다만, 사겸이 휘두르는 박도 자체는 무시하지 못할 위력을 내고 있었다.
사선에서 직선으로, 직선에서 다시 사선으로.
쌔애액! 쌔액!
쌔애애액!!
손에서 휘둘러지는 초식만 떼어 놓고 보면, 마구잡이로 그어내는 발악과도 같은 도초들이었으나.
사겸의 몸은 비술 덕분에 빨라져 있었고.
쌔액! 쌔액!
쐐애액!!
젖은 선상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특유의 보법은, 놈이 그어내는 투로가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린다고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카앙!!!!
하나, 나 역시 이런 환경에서 싸울 때를 생각하여 그간 훈련을 해온 터였고.
놈이 사용하고 있는 혈쾌술은 내 쪽이 더 조예가 깊었다.
사학-
나는 순식간에 파천의 내력을 실은 혈조술을 체내에서 돌리기 시작했다.
그 덕에 시간은 늘어져갔고.
쌔애애애-
사겸이 질러낸 초식들을 농락하듯 피해낼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놈을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지만, 사겸은 써먹어야 할 패.
나는 살초를 내지르는 대신 입을 열었다.
“끌끌. 사가 놈아. 그게 네놈의 전력이냐? 노부더러 언제까지 그런 태도로 있겠냐 하더니만. 명년(明年) 오늘까지는 이런 태도를 유지해도 될성싶은데?”
사겸은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갈!!!”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과격하게 박도를 그어냈다.
쌔애애애액!
같이 죽자는 식으로 펼쳐낸 놈의 도초를 쳐내기 위해, 나는 놈을 놀리는 것을 멈추고 다시 한번 파천단악의 초식을 시전했다.
카아아아앙!!!!!!!
이 순간.
사겸은 박도의 옆면으로 내 초식을 빗겨 막더니, 동시에 왼손을 휘저어 왔다.
그렇게 휘저어진 사겸의 왼손에선 핏물이 방울방울 쏘아져 나왔는데.
슉! 슉! 슉! 슉! 슉!
그 핏물들은 자그마한 구슬의 형태로 뭉쳐져 내게 탄환처럼 쇄도하기 시작했다.
‘혈환만살(血丸滿殺)?!’
그건 상대를 벌집으로 만들어 버리는 역혈수라대법의 절초였고, 거리마저 가까웠다.
만만하게 봤다간 목숨을 내놓아야 할 터였다.
하지만, 해볼 만했다.
슈욱-
나는 왼쪽 손의 상처를 통해, 핏물을 뽑아낸 뒤.
그 피를 안료 삼아 허공에 갈지자를 그렸다.
촤악! 촤아아악!
그렇게 허공을 물들인 내 피는, 역장(力場)의 기능을 하며.
사겸이 쏘아낸 혈환만살을 모조리 받아냈는데.
툭! 툭! 툭! 툭! 툭!
그렇게 사겸이 짜낸 회심의 수가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
나는 곧바로 찰나를 쪼개 역장을 이루고 있던 핏물을 사겸에게로 쏘아냈다.
슝슝슝슝슝!!!!!
원리는 별것 아니었다.
그저 빠르게 막아낸 뒤, 핏물을 쏘아낸 것이었으니까.
하나, 사겸의 눈에는 자신의 기술이 되돌아오는 것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는지.
“?!”
놈은 기겁하며 두 팔을 교차해 머리를 막았다.
아마 벌집이 되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는데.
사실 내가 쏘아낸 혈환은 강기를 실은 것이 아닌, 평범한 핏방울에 불과했다.
촥! 촥! 촥! 촥! 촥!
하여, 사겸을 향해 쇄도한 핏물들은 그저 물감처럼 놈을 피범벅으로 만들 뿐이었는데.
“…….”
그 사실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는지.
“…혈환의 성질을 바꿔?”
사겸은 멍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분명히 나를 죽일 틈이 있었는데… 왜?”
“그건 질문이냐, 아니면 죽여달라는 부탁이냐?”
“…대관절 누구십니까? 그리고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 * *
완전히 바뀐 사겸의 태도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끌끌. 그게 질문하는 자의 태도가 맞느냐?”
그러자, 사겸이 쥐고 있던 박도를 땡그렁 던졌다.
놈이 더 덤빌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나는 회한을 허리춤으로 돌려 넣은 뒤.
뒷짐을 지며 입을 열었다.
“사가야. 너는 혈천수라궁의 행사에 만족하느냐?”
“…예?”
“천마신교에서 어렵게 떨어져 나와, 만천하에 혈교가 새로 일어났음을 알려야 하는 이때. 만인혈을 탈취하는 일에 혈안이 돼 있는 작금의 혈천수라궁이 옳다고 생각하냐고.”
“…….”
내 질문에 사겸은 말을 아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혈염천하의 길을 고심하고 또 고심해도 모자랄 판국에, 본단이 한낱 환단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야.”
“…….”
“심지어 만인혈은 천마신교 놈들의 술법이 아닌가? 숱한 교인들이 강남에서 피를 흘린 끝에 독립을 천명할 기반을 만들었건만, 그건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동떨어진 짓거리지.”
그런 내 말에.
사겸은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중얼거렸는데.
“독고철이 말했던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이라는 게… 귀면옹 당신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렇다. 노부는 혈천수라궁에 늙은 궁둥이를 붙인 채, 혈마님의 눈과 귀를 어지럽게 하는 버러지들을 쓸어내고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을 열고자 하는 뜻을 품은 지 오래다.”
그러다 이어진 내 말에.
사부님이 헛웃음을 흘리시는 때.
- …뜻을 품은 지 오래는 무슨. 어찌 저리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저런 소리를 지어내는지. 가만 보면 하성이가 말한 입벌구라는 말이 딱 맞아.
사겸이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어 왔다.
“…이 시점에 제 앞에 나타나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 바다에 내려온 이유는 만인혈을 없애기 위해서다.”
만인혈의 이야기를 입에 담은 나는 혈교의 본단이 있을 서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만인혈이 혈마님께 전해진다면, 그분의 무위에는 도움이 되겠지. 하나, 혈마님을 향한 교인들의 충심은 금이 갈 것이다.”
“…….”
“한 명의 힘으로는 굳건한 백도무림의 천하를 무너뜨릴 수 없다. 십만대산의 초대 천마가 그랬고, 이대 천마도 그랬지.”
“…….”
“거기다 백도 무림의 분노는 덤일 테지. 막 태동한 본교가 백도무림의 분노를 감당하는 일은 사서 가시밭길을 걷는 일이 될 것이다. 만인혈 같은 것에 의존해서는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에 닿을 수 없어.”
그렇게 혈천수라궁이 있을 방향을 응시하며 그럴싸한 소리를 읊어낸 나는, 다시금 사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어쩔 테냐 사겸. 노부의, 진혈단의 뜻에 너도 동참하겠느냐?!”
“귀면옹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흥. 여즉 내가 혈천수라궁에서 네 놈의 충심을 시험하고자 나온 처형인인줄 아는 모양이로구나?”
“…….”
“그럼 이런 번거로운 순간 없이, 조금 전에 네놈을 죽였겠지. 그리고 먼저 불경한 말을 입에 올린 사람은 노부다.”
“…….”
“선택은 네 몫이다. 사겸. 진혈단과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혈천수라궁에 노부 같은 자가 있다는 사실을 고하는 방법도 있겠지.”
내가 그렇게 사겸을 회유하고 있는 그때.
끼걱!
끼거거걱!!
거선들이 노를 젓는 소리와 함께, 뱃머리가 파도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한 무리의 선단이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 저마다 비단 돛을 내건 것을 보니, 사겸의 수하들인 모양이로고.
‘…그런 것 같습니다.’
- 허, 저 정도 선단에 타고 있는 놈들이 모조리 덤벼들면 아무리 용운이 너라도 버겁지 않겠느냐?
그에, 사부님과 몇 마디 나누는 때.
사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수하들입니다. 대파(大波)가 일어난 걸 보고 이리로 오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뭐? 이번에는 수하들과 함께 덤벼볼 참이냐?”
“귀면옹이 천외천의 존재임을 체감했는데,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해서?”
“이 사겸도 진혈단에 들겠습니다. 제가 뭘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