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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언가 망나니-362화 (362/444)

제362화. 천외천 (3)

사겸이 귀면옹과 만인혈이 만들어지고 있는 삭월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를 잠시.

“그럼 노부는 그리 알고 가면 되겠나?”

“…예.”

“알겠다. 한데 노부의 배가 박살이 나버려서, 배 한 척을 빌려야겠는데?”

“수하들이 당도하면 내어드리겠습니다.”

저마다 비단 돛을 내건 산하 선단이 마침내 휴어도에 당도했다.

끼거거거걱!

부서진 기함.

피를 뒤집어쓴 사겸.

그런 사겸 앞에서 어쩐지 고압적인 기세를 풍기고 있는 귀면옹.

“단주님! 괜찮으십니까?!”

해적단의 부단주 허욱은 목도한 광경에, 허리춤의 도를 뽑아 들었다.

“뭣들 하느냐! 단주님을 둘러싸고 있는 놈들과 저 가면을 포위하라!”

채채채챙!!!

부단주의 명.

사겸의 수하들은 저마다 병장기를 빼 들고 개떼처럼 배에서 뛰어 내렸다.

사겸이 그들을 향해 고함을 친 건 이때였다.

“멈춰라! 뭐 하는 짓이냐 허욱?!”

“예? 저는 단주님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호들갑 떨 것 없다. 배는 조금 전의 파도에 휩쓸려서 이리된 것이야.”

“…그 피는 그럼?”

“참. 내가 피를 뒤집어쓴 꼴을 하고 있었군. 이것도 별것 아니다. 상처를 입어 이렇게 된 게 아니야.”

“…그,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뽑아 든 날붙이들 다 내려놓고, 저기 계신 귀면옹께 적당한 배나 한 척 내어드려라. 길도 트고.”

“…예.”

“아, 그리고 허욱.”

“예.”

“너는 내가 저번에 맡겼던 인명부를 귀면옹께 내드리도록.”

“…알겠습니다.”

그런 사겸의 명을, 허욱과 단원은 충실히 따랐다.

그에, 귀면옹과 독고철 그리고 열 명의 수하들이 유유히 휴어도를 떠나가는 때.

허욱이 사겸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단주님. 일단 시키시기에 명대로 하였는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사겸의 해적단에 속해있는 모든 단원이 혈교에 귀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함에 타고 있는 자들과 산하 선단의 선장들은 혈교를 받아들인 이들이었다.

그중 기함에 타고 있던 이들은 귀면옹의 진면목을 겪었다.

하나, 허욱을 비롯해 뒤늦게 도착한 산하의 선장들은 그 경험을 하지 못했다.

“저자들을 저리 보내도 되는 것입니까?”

그들은 사겸이 귀면옹을 깍듯이 대하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을 대표해 허욱이 입을 열자.

귀면옹을 태운 배를 응시하고 있던 사겸이 말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단주님께서 그토록 고전하실 정도면, 필경 혈천수라궁에서 보낸 자 같은데….”

“근데?”

오랜 시간 점조직으로 교세를 확장해온 혈교였기에.

파벌마다 그 형태가 조금씩 달랐지만.

매일 같이 바다라는 대자연과 싸우며 온갖 적들을 마주하는 사겸의 조직은 그중에서도 독특했다.

“지금이라도 말씀만 하시면 날려버리겠습니다.”

그저 역혈수라대법의 강함을 받아들였을 뿐.

이제 막 혈천수라궁이라 불리기 시작한 교단보다는 사겸 개인을 향한 충성심이 강했던 것이다.

“하하. 날려버리겠다고? 허욱 네가 말이냐?”

“포도아(葡萄牙)의 색목인들에게서 노획한 화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필요 없다. 애초에 전제 자체가 틀렸어. 귀면옹은 혈천수라궁에서 보낸 자가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하면,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허욱의 물음에.

사겸은 헛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내가 오늘 하늘 위의 하늘을 보았다.”

“…귀면옹이 혈마님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니다. 나는 혈마님을 직접 뵌 적이 있다. 저런 분위기가 아니었어.”

잠시 혈마를 떠올려본 사겸은, 다시금 귀면옹이 탄 배가 멀어지는 광경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혈마님은 아니야… 다만, 호교법왕들의 행사에 불만이 있어 보였다.”

“그 점은 저희와 같군요.”

“특히나 이번 만인혈에 관한 생각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화근덩어리라고 없애야 한다더군.”

“…단주님과 제가 나눴던 이야기군요. 그래서 누구인 겁니까, 귀면옹은?”

“모른다. 진혈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밖에는.”

“…한데, 한배를 타시기로 하신 겁니까? 천마신교 쪽 정보도 내주시고요?”

“혈조술의 격이 달랐다. 내가 시전한 혈환만살의 성질을 일순간에 바꿔버렸고, 혈쾌술을 사용한 반동도 없어 보였어. 단순히 귀면옹만 그런 게 아니라 독고철을 비롯해 휘하에 두고 있는 놈들도 얼굴에 핏대가 서거나 하는 모습이 없었다.”

그런 사겸의 말에, 허욱은 그게 말이 되냐는 듯 눈을 키우며 되물었다.

“저희가 익힌 신공은 혈도를 거꾸로 돌리는 대법인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 물음에, 사겸은 다시금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귀면옹이 말끝마다 언급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았다.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이라.’

정작 그 길이 무엇인지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귀면옹의 태도에서 그 진의를 알 것도 같았다.

‘저 정도 혈술과 무위를 지닌 사람이라면….’

독고철은 그렇다 쳐도 그 아래 수하들은 하찮게 느껴질 것이다.

한데, 귀면옹은 그런 녀석들의 부작용까지 없애준 듯했다.

‘호교법왕들이 좌지우지하는 작은 왕국이 아니라, 교인들의 염원을 이룩하고자 하는 교단을 만들고자 하시는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사겸은 가만히 자신이 왜 혈교에 귀의를 했는지를 떠올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해적들의 씨를 말리겠다고 혈교에 귀의를 했었지. 그때는 혈왕부라고 불렸지만.’

그랬던 사겸은 이제 남해안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해적이 되어있었다.

‘장부 나이가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면 하늘의 명을 깨닫게 된다더니. 내가 오늘 진정한 하늘을 보았다.’

*    *    *

사겸이 내어준 배를 타고 휴어도의 해역을 벗어나는 동안 나는 선미에 서 있었다.

그런 나를 향해 사부님께서 질문을 해오셨다.

- 멋진 척을 하려면 선수(船首)가 더 좋지 않으냐? 왜 꼬랑지에서 그러고 있느냐.

‘제가 멋을 부리자고 이러고 있는 줄 아십니까?’

- 아니더냐?

‘혹여라도 사겸이 공격해올 수도 있으니 이러고 있는 겁니다. 뭐, 겸사겸사 사겸에게 귀면옹의 인상을 남겨놓으려는 생각도 있긴 하지만요.’

-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공격은 무슨 공격?

‘화포가 있지 않습니까?’

- 화포? 그런 것에 손을 댔다간 관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사부님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중원에서 개인이 화약을 함부로 다룬다는 건 삼족이 멸할 수 있는 중죄였다.

하나, 이곳은 중원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는 무법의 바다니까요.’

하여, 저쪽에서 화포를 쏠 수도 있다 상정하고 긴장 상태를 유지한 지 한참.

마침내 화포의 사정거리마저 벗어나게 되었을 때.

나는 배에 퍼져 있던 진혈단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남해 대주교는 우리 진혈단과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봐도 좋겠구나.”

그에, 송호겸을 필두로 단원들이 군례를 표해왔다.

“진정한 혈염천하의 뜻에 사겸도 감복한 것일 겁니다.”

“특히나 형제들이 피를 흘려 마련한 독립의 때에, 만인혈 같은 것에 의존해선 안 된다는 말씀은 속하들의 가슴속에도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런 단원들의 태도를 보니.

만인혈을 없애겠다는 대의를 이미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다.

녀석들의 각오도 확인했으니.

슬슬 언용운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도 될 듯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녀석들과 따로 움직일 명분을 만들기 위해, 독고철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백도무림 녀석들의 향후 계획은 어찌 되는고?”

“…각자 맡은 지점을 정찰한 뒤, 은하군도의 흑시 중 하나인 동시에서 집합하기로 했습니다. 저희는 이곳 휴어도 해역 외에 장사도까지 훑기로 하였고요.”

“하면 장사도 해역의 초입에서 헤어지자. 노부는 달리 들를 곳이 있다.”

“예.”

그에, 독고철은 절도있게 답을 해왔는데.

그러면서 따로 전음을 보내왔다.

[회장님. 한데, 사겸이 정말로 저희 진혈단에 귀의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아니라면 공격을 했겠지. 내가 계속 선미에 있었던 이유도 그걸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아. 그러셨군요.]

[적어도 이번만큼은 협조하겠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고 나면 결국 진혈단에 발을 담그게 되는 거고.]

[그도 그렇습니다. 계획대로 만인혈을 없애고 나면, 그 자체로 한배를 타는 꼴이 될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러길 잠시, 독고철이 뜬금없는 질문을 해왔다.

[한데, 어떻게 괴팍한 노인 흉내를 그렇게 잘 내십니까? 저는 회장님의 정체를 아는 데도, 귀면옹이 실은 회장님이라는 사실을 깜빡깜빡 잊을 정도였습니다.]

[괴팍하기 그지없는 노인 한 분을 내가 잘 알거든. 그분을 많이 참고했지.]

[아하. 사천쌍괴 어르신들 말씀입니까?]

[아니, 그 양반들은 상대도 안 되는 분이 있어.]

[…아? 그러고 보니 한 분이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그래. 틈만 보이면 사람을 보고 인성이 나쁘다느니, 멋을 부린다느니 힐난하고.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런 분이 있다.]

[?]

그런 내 말에, 독고철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그 괴팍한 노인이라는 게 혹시 나를 말하는 것이냐?

‘글쎄요? 혹시 찔리십니까?’

- 찔리기는 뭘 찔려! 애초에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구만!!

*    *    *

우리를 태운 배가 물살을 갈라나가길 한참.

“독고철의 지휘에 따라 부여받은 임무에 매진하고 있으라. 그러면 다시금 노부를 마주할 때가 올 것이다.”

“예!”

어느덧 다다른 장사도 부근.

나는 배 안에 실려 있던 쪽배로 갈아탄 뒤.

귀면옹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홀로 동시를 향해 나아갔는데.

그렇게 당도한 집결지엔, 커다란 덩치를 살려 해적으로 분한 소천이 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예. 다들 모였습니까?”

“…으음.”

“?”

“다는 아닌 듯하다.”

“그게 그렇게나 생각하고 답을 하실 일입니까?”

“혹시라도 틀리면 안 되니깐.”

“아니, 다 안 온 건… 그냥 한 명만 안 와도 안 온 건데요?”

“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독고철과 적룡궁의 소궁주 정원해를 제외한 언동생들이 모두 당도해 있었는데.

그중 당옥기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용운 너는 왜 혼자와? 갈 때 정원해랑 같이 가지 않았어?”

“나는 따로 볼일이 있어서, 중간에 갈라졌다.”

“무슨 볼일?”

“무슨 볼일이냐면….”

그렇게 운을 뗀 나는, 휴어도에서 사겸과 있었던 일을 쭉 말했다.

“…그러고 오는 일이다.”

그런 내 말에.

당옥기는 눈을 키우며 입을 열었는데.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다시피.”

잠시 맥을 짚어 내가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혀를 찼다.

“에라이 언용운아. 무창에서 미안하다고 한지 얼마나 됐다고 또또 이러니? 도대체 언제 사람 될래?!”

그런 당옥기에 이어 언용명도 한숨을 쉬며 말했는데.

“사실, 저희 중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적룡궁 사람들과 움직인다고 하실 때. 뭔가 이상하긴 했는데… 또 그리 위험한 곳에 홀로 가셨군요.”

“이보게 용명이. 형님이 완전히 혼자 간 건 아니지. 따지고 보면 독고철을 대동하고 간 거니까.”

천장호의 소신 발언이 오랜만에 내게 유리한 말을 해오는 때.

“그리고 혈교의 소굴에 우리를 어떻게 데려가겠나? 자칫 잘못하면 들통이 날 텐데. 그나저나 용운 형은 난 놈은 난 놈이유. 대주교면 상당한 끗발인데 그걸 코를 꿰서 오셨네.”

팽소진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사겸은 어느 정도까지 뜻대로 움직이는 거야?”

“혈교 쪽의 목표가 만인혈을 획득하는 것에서 없애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잠재적인 우군으로 여겨도 된다는 건가? 음. 그것만으로도 크긴 하다. 보기엔 삼파전 같이 보여도 기실 천마신교 놈들만 공격하면 된다는 이야기니까?”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길 잠시.

우리의 말을 듣고 있던 정현이 고개를 끄덕여 왔는데.

“원시천존. 이것 참. 묘한 형태의 오월동주인 듯합니다.”

나는 마주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겸에게 받아온 문서를 내보였다.

“그리고 이거. 이 서류는 은하군도 인근에서 활동하는 흑도 중에 천마신교 쪽에 만인혈의 연구재료를 공급했던 자들의 신상이라더라. 대조를 좀 해봐야겠는데, 우리 쪽은 정보 수집이 얼마나 됐어?”

내가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찰을 마친 생도들과 적룡궁의 사람들이 하나둘 복귀하기 시작했다.

사겸이 내어준 정보에, 우리 쪽 정보, 거기에 적룡궁의 정보가 합쳐지니.

그야말로 물 샐 틈 없는 그물망이 만들어졌다.

“여기 그려져 있는 견가라는 애꾸를 잡는다. 파악된 사실에 따르면 이놈이 가장 많이 물자를 댔어. 그중엔 사람도 포함돼 있고.”

“예!”

추포 작전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형님. 견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배가 입항합니다. 지금 들이칠까요?]

[수속은 밟게 둬야지. 요란하게 처리해선 흑시를 관리하는 자들과 마찰이 일 수 있다. 최우선 목표는 만인혈을 없애는 거야.]

[예.]

[용명이 너는 당옥기랑 같이 그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가 틈을 봐서 배에 잔류하는 놈들을 조용히 재워. 나는 소진 누님이랑 놈이 노름을 한다는 곳 근처에 있다가 잡아 올 테니까.]

[예.]

나와 언동생들은 기만하게 움직여, 겸가의 해적단을 무력화시켰고.

“뭐, 뭐얗… 켁!”

견가 본인도 단숨에 사로잡았는데.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답한다. 한마디라도 거짓이 섞이면 그땐….”

“으아악! 저, 저는 그냥 심부름꾼 입니다! 물어만 주시면 뭐든지 말하겠습니다!”

애초에 이 견가라는 자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정보를 흘리기 위한 안배였던 모양인지.

심지가 형편 없었다.

그 덕에 나와 언동생들은 물자와 연구재료들이 어떻게 삭월도로 드나드는지를 알게 되었다.

“배를 통째로 넘겨주는 식으로 넘겼고. 물자들을 받아온 곳은 청풍상회, 창동표국, 남해욱가… 천장호.”

“예.”

“이거, 은 소저랑 다른 애들 있는 육지로 전해.”

“예!”

“우리는 삭월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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