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65화 (365/444)

제365화. 숨이 붙어 있는 한 (3)

수평선에 등장한 선단에,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사겸의 해적단인 것 같구나?

밤하늘의 별처럼 섬이 뿌려져 있다 하여 붙은 이름, 은하군도.

이곳은 섬이 많은 만큼 해적들도 많았다.

하나, 비단 돛을 사용하는 선단은 사겸의 해적단 딱 하나뿐이었다.

“예. 비단 돛을 내거는 행위 자체가 사겸에 대한 도전이니까요.”

그 말은 즉.

수평선에 등장한 선단이 사겸의 것이라는 뜻이었다.

“좀 늦는다 싶었는데… 아주 늦지는 않았네요.”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

사겸이 타고 있을 거함의 돛 머리 위에 녹색 깃발이 내걸렸다.

펄럭-

나부끼는 녹색 깃발에, 사겸의 선단들이 사선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사겸이 빠져나갈 길을 틀어막자, 천마신교의 배들도 움직임을 보였다.

‘나머지가 몸빵을 하는 사이, 채향을 태운 배만 탈출시키려는 건가?’

적룡궁의 포위를 따돌려낸 천마신교의 쾌선은 총 여섯 척이었다.

놈들은 그중 다섯 척을 앞으로 내세우고, 그 뒤를 한 척의 배가 따르는 합(合)자형 대형을 만들어 돌파를 시도했다.

펄럭-

사겸의 기함에 걸린 깃발이 붉은색으로 바뀐 것은 이때였다.

그렇게 깃발이 바뀌자.

사겸의 기함을 포함해 다섯 척의 배가 물살 위에서 기막히게 몸체를 틀었는데.

끼거거걱!!!

그렇게 옆면을 드러낸 배들의 옆구리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나온 건 이때였다.

펑! 펑!!

펑펑펑펑펑!!!!

그에, 수십 발의 포환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천마신교의 배에 떨어졌다.

쾅! 쾅!!

콰콰콰콰쾅!!!

포격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사겸의 선단은 확인 사살을 하겠다는 듯.

연이어 포격을 때려 부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사부님께 한마디를 전했다.

“제가 저번에 뭐라 그랬습니까? 쟤들 화포 같은 거 있을 거라고 했죠? 저렇게 마음대로 갈긴들, 관군이 잡으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거니와 천마신교 놈들이 발고도 못하죠.”

- …하여간에 철두철미한 녀석. 그래 네 똥 굵다 인석아.

사부님께서는 그런 내 말에 대꾸하시면서도, 잔해가 되어버린 천마신교의 배를 두고 입을 여셨다.

- 아무튼, 천마신교 놈들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구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해치웠다는 말은 함부로 사용하시면 안 되는데…. 그거 부활 주문입니다.”

- …부활 주문?

“그런 게 있습니다.”

- 또 저만 아는 이상한 소리로 날 놀리려 하는구나. 네 입으로 직접 이런 물살에 휘말리면 아무리 고수라도 뼈도 못 추릴 것이라 하지 않았더냐?

그 말씀이 맞았다.

안개는 걷혔어도, 여전히 삭월도의 바다는 거칠기 그지없었고.

“이 주변이나 섬 근처라 잠잠하지, 저 앞은 뼈도 못 추릴 곳이긴 하죠.”

설령 저 포격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들, 노기 등등하게 작살을 꼬나쥐고 있을 정원해와 적룡궁의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을 터.

천마신교 놈들이 이 바다를 빠져나갈 수는 없으리라.

- 결과적으로 용운이 네가 사겸을 끌어들인 일이 묘수가 되었구나.

사부님의 말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도망치는 천마신교 놈들을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혈교의 본단, 혈천수라궁이 내렸던 만인혈을 가져오라는 명에 종지부를 찍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겸은 장차 혈교를 장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패였다.

‘바다에 정통한데다, 응집력 있는 조직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가 문책을 당해 죽임을 당하면 곤란했는데.

만인혈이 천마신교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수장시켰다고 보고를 올리면 혈천수라궁에서도 사겸을 어쩌지 못할 듯했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거니와, 일의 앞뒤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니까.’

원작보다 빨리 천마신교에서 떨어져나온 혈교인 만큼.

이번 일로 쓸모가 많은 사겸을 어쩌지는 않으리라.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나는 다시금 몸을 삭월도 쪽으로 돌렸다.

“독고세가 녀석들을 적룡궁 사람들 사이에 남겨 놓고 왔으니… 사겸과 교전이 일어나진 않을 거고. 다시 애들한테 가보면 되겠군.”

그리고 물살을 가르며 헤엄을 치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렇게 손발을 휘저은 지 잠시.

“음?”

시커먼 물속에서부터, 허여멀건 무언가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샤하아아악-

처음에는 해파리나 상어 같은 바다생물인가 하였으나.

그런 것들과는 좀 달랐다.

내게 다가온 녀석은 물결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원념?”

워낙 해역에 음산한 기운이 잔뜩 깔려있어서, 무의식 중엔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인지하고 보니, 그건 원념들이 뭉쳐 영체를 이룬 것이었다.

귀신 중에서 가장 음험한 족속이라 불리는, 이른바 물귀신.

녀석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자신들과 같은 처지로 만들고자, 해저로 끌어들이는 존재들이었다.

우웅-

다가오는 것의 정체를 파악한 나는, 그들을 퇴치하기 위해 즉시 내력을 끌어올려 왼팔에 감았는데.

- …너를 어쩌려는 것이 아닌 듯한데?

‘…그러게요?’

산 사람을 끌어당기는 습속을 가진 보통의 물귀신과 달리.

녀석들은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춤을 추듯 움직였다.

나는 그 춤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따라오라고?”

*    *    *

한편, 삭월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동굴.

이곳에선 백상마군 채규의 무리와 언동생들 간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챙! 챙!!!

채채채챙!!!!

저쪽은 흑무군주 채향을 비롯해, 인원의 오 할이 빠져나간 상황이었고.

이쪽은 언용운 한 명이 빠져나간 상황이었음에도 당장의 전황은 팽팽했는데.

“다들 조바심 낼 것 없어! 버티기만 하면 돼!”

팽소진은 언동생들을 북돋고, 마인들의 조급함을 끌어내고자 계속해 전황을 상기시켰다.

“외섬들은 미리 청소했고, 해역엔 적룡궁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어. 용운이가 쫓아간 그 시커먼 여자도 독 안에 든 쥐야! 용운이가 돌아 올쯤엔 모산파 애들이 이 섬에 깔린 진식도 다 지워 놓겠지. 우린 버티기만 하면 돼!”

캉! 카아아앙!!!

하나, 그런 팽소진의 말에도 정현은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내가 조금 더 강했다면….’

이따금 혼자 일을 벌이곤 하는 언용운을 다른 언동생들이 힐난할 때.

정현 또한 같은 마음으로 언용운을 향해 서운함을 토로했었다.

하나, 그런 말을 하며 속으로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책망했다.

‘…내가 더 강했다면. 언 소협이 홀로 움직이는 순간이 줄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정현이 홀로 채규를 비롯한 마인들을 홀로 감당해 낼 수 있었다면, 누군가를 더 데려갈 수 있었을 터.

‘언 소협 혼자 채향을 쫓아갈 일은 없었을 테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정현의 머릿속엔 외섬에서 유골들을 마주했을 때, 언용운이 읊조렸던 한 마디가 스쳐 지나갔다.

‘스스로를 이기적이다라고 자조하시며, 자신의 사람들이 소중하다 하셨지.’

언용운의 어깨에 올려진 짐을 덜어주진 못할망정.

그가 맡기고 간 언동생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쌔액! 쌔액!

‘오롯이는 무리겠지만… 언 소협의 몫을 내가 해내야 한다.’

하여, 정현은 입술을 터지라 씹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쌔액! 쌔액!

쌔애액!

하나, 그런 식으로 중압감에 휩싸여 몰두하게 되면.

되레 시야가 좁아지는 법이었는데.

언용운의 심계가 워낙에 철저해서 이렇듯 궁지에 몰리게 되었지만, 채규는 바보가 아니었다.

채챙!!!!

정현의 낌새를 눈치챈 채규는, 언동생 무리 중 검을 진 쥐 얼마 되지 않은 팽소진을 노리고 들어갔다.

“가문도 내팽개친 계집이 아까부터 쫑알쫑알!”

찢어진 입으로 팽소진에게 일갈하는 채규의 모습에, 정현은 급히 무당 특유의 보법인 제운종을 시전했는데.

사실, 이 순간이 바로 채규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채규는 팽소진에게 달려들던 걸음에 급히 제동을 걸었다.

끼긱!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몸을 틀면 관절이 남아나질 않았을 터였으나.

마공을 익힌 덕에 기괴하게 몸을 꺾어 낸 채규는 정현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뻗었다.

쌔애애애애액!!

그에, 정현의 뇌리에 아차 하는 생각이 스치는 때.

펼치고 있던 채작진을 깨고 달려온 언용명과 팽소천이, 각각 정현과 채규를 향해 손바닥과 도를 내질러왔다.

팡!

부드럽게 내지른 언용명의 장력을 받아낸 정현은 좌측으로 몇 보쯤 붕 떴다가 내려앉으며 채규의 공격에서 멀어졌고.

“멍청한 마두 놈아! 우리 누님은 가문을 내팽개친 게 아니다!”

태산 같은 힘이 실린 팽소천의 일도를 받아낸 채규는 우측으로 튕겨 나갔는데.

카아아앙!!!

그렇게 한고비를 넘겨내자, 언용명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우리 형님도 형님이지만, 정현 도장도 똑같습니다. 그렇게 혼자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소진 누님이 아까부터 하신 말씀을 뭐로 들으신 겁니까?”

채규가 검을 고쳐 쥐며 코웃음을 친 건 이때였는데.

“큭큭. 짊어지긴 뭘 짊어져, 아주 꼴값들 떨고 있군.”

지지 않고 천장호가 입을 열었다.

“꼴값은 너지, 아가리에서 피가 줄줄 나서 말도 똑바로 못하는 게? 아까 그 여자가 친동생 아니냐? 이게 동생한테 버림받은 새끼가 까불어?!”

*    *    *

우웅-

물가에서 조우한 영체들은 길 안내를 해주겠다는 듯, 앞장서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으면 퇴치야 언제든 할 수 있었다.

‘물귀신은 같이 죽으려 들고, 평범한 원념은 살고 싶다는 말만 반복하는데….’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는 직감을 믿고 나는 영체들을 따라 들어갔다.

웅-

영체들은 내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마주했던 배가 숨겨져 있던 동굴로 다시 들어갔는데.

녀석들이 잠수하길래, 따라 들어가 보니.

해저에 난 동굴이 보였다.

‘…내려오자마자 출항하는 배 꽁무니를 쫓는 바람에 저걸 못 봤네.’

그 동굴을 헤엄쳐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뽀글-

나는 삭월도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비동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즈음 영체는 자신은 여기까지라는 듯 눈 녹듯 사라졌다.

‘…야명주.’

곳곳에 박혀있는 야명주는 사람의 손을 탄 것이 분명했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는 뻔했다.

‘채향.’

나는 사라진 영체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한 뒤.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는데.

‘…….’

그렇게 안으로 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침상에 누워 있는 채향을 발견했다.

기척을 죽인다고 죽였으나, 이 정도 거리까지 이르자, 채향의 기감이 나를 눈치챘다.

“오라버니! 그러니까 내가… 언용운?!”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잠잠해질 때까지 여기 숨어있을 모양이었나 보지?”

“…아하하. 걸려버렸네. 그런데 여길 어떻게 알았어?”

“적악여앙이라는 말을 아나? 악행의 대가는 원래 언제고 찾아오는 법이야.”

“으엑. 얼굴은 내 취향인데 하는 말은 완전 유생 같아.”

나는 채향의 헛소리를 무시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랑 주렁주렁 달고도 안됐잖아? 항복해라. 그럼 목숨은 살려 준다.”

내 말에, 채향은 배시시 웃으며 빙글거렸다.

“어머나. 신진제일협이 사람을 갈아 영단을 만든 마녀를 살려준다고? 혹시 내가 마음에 들었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네가 벌인 미친 짓을 만회할 정도의 천마신교 정보를 자복하면 살려주지.”

“그래도 관대하게 느껴지는걸? 마교라면 북해고 남해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천하의 언용운이?”

“세간이 나를 뭐라고 평가하든 나한테 중요한 건 앞으로 흘릴 피를 줄이는 거야.”

“…흐음. 멋있네, 언용운. 죄 많은 남자다. 연옥란이가 팔 한쪽을 날려 먹고도 빠져있더니만. 이유가 있었어.”

“만에 하나가 있으니, 권해봤는데… 말을 빙빙 돌리는 걸 보니 거절이지?”

“숙녀에게 너무 집요하게 구는 건 실례인데.”

“나도 바라던 바야.”

나는 곧바로 회한을 뽑아 들었다.

“사실은 나도 너 살려주기 싫어.”

그리고 채향을 향해 달려 나갔는데.

채향은 급히 뒤로 걸음을 박차며,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교주님. 스승님, 이 만인혈이 저놈들한테 넘어가면 어차피 말짱 꽝이잖아요? 소녀가 사용 좀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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