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6화. 숨이 붙어 있는 한 (4)
허락을 구하듯 한마디를 중얼거린 채향의 모습에.
나는 녀석이 무엇을 하려는지 단박에 깨달았다.
‘만인혈을 삼키려고?!’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신 건 이때였다.
- …저것이 지금 용운이 너랑 싸우는 와중에 단약을 섭취하려는 것이냐?
나는 채향을 향해 바쁘게 달려 나가며 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 살초를 주고받는 중에 그런 짓을 하려 하다니? 제 손으로 주화입마를 불러들이는 멍청한 짓일 텐데?
나는 사부님의 말에 짧게 답했다.
‘마인들에게 평범한 강호인의 잣대를 대선 안 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생각으로 공세를 펼쳤다.
쌔애애애애액!!!!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겠다는 각오 속에 뻗어낸 일 검이었던 만큼.
채향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내게도 큰 타격으로 돌아올 수 있는 한 수였는데.
- 인석아! 왼편이 완전히 비지 않았느냐!
이 순간.
채향은 나를 공격한다는 선택 대신, 왼손으로 시뻘건 환약을 꺼내 제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쌔애애애액!!
하나, 살초를 실은 회한이 살벌한 직선을 그어내고 있는 와중이었다.
채향은 그 선택의 대가로 오른 손목을 내놓게 되었다.
촤아아악!!!
한줄기 핏물을 뿌리며 툭 하고 떨어져 내린 채향의 손목.
검을 쥐고 있던 손을 떨어뜨린 만큼, 내게 유리한 상황으로 보였으나.
스미는 불길함에, 나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물렸다.
파팟!
그러자, 곧바로 나른한 채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이 참 좋아 언용운. 여길 찾아낸 것도 그렇고… 방금도 딱 한 걸음만 더 들어왔으면 그 잘생긴 얼굴을 갈기갈기 찢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나를 보며 채향이 빙글거린 지 잠시.
녀석의 안광이 시뻘겋게 물든다 싶더니.
꾸륵.
잘려 나간 오른손이 있던 자리에서 시커먼 핏물이 흘러나와 날카로운 송곳의 형태를 갖췄다.
채향이 일갈을 내지른 건 이때였다.
“죽어어!!!”
끼에에엑!!
원래의 음성과는 조금 다른, 귀곡성이 겹쳐지는 목소리.
채향은 곧바로 땅을 박찼다.
팟!
잠깐 사이 채향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귀기가 묻어나는 살기는 내 전신을 따갑게 압박해왔고.
움직임 자체도 크게 달라져 있었다.
‘빨라.’
순간이동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
그 속력을 앞세워 채향은 오른손에 돋아난 피송곳을 찔러왔다.
슉! 슉! 슉! 슉! 슉!
회한을 고쳐잡은 나는, 발작하듯 걸음을 물리며 회한을 휘저었는데.
캉! 캉! 캉! 캉! 캉!
그렇게 한 합을 버텨내고 나니, 채향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 살짝이지만 저 채향이라는 마두의 실력이 너를 웃돌고 있구나.
사부님의 말씀이 맞았다.
이 순간, 채향은 화경의 경지에 이른 나를 분명히 압도하고 있었다.
‘예. 몇 계단을 단숨에 뛰어넘은 듯하네요.’
- 암객을 불러내어 합공하는 것은… 내력이 부족하겠느냐?
‘아직 여유가 있긴 합니다.’
- 하면, 그렇게 해야지!
‘암객은 상대가 방심한 순간을 노리는 것에 특화된 살수입니다. 그 이점이 없어지기도 했고… 채향의 기세를 보아하니, 지금 암객을 내어봤자 녀석의 손에 흩어질 것 같습니다. 일단 아끼는 쪽이 나을 것 같네요.’
- 흩어져? 그리되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냐?
괴왕부의 제자가 아니니, 그런 술법을 익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 채향은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었다.
원작에서도 그랬지만, 제 오라버니를 버리고 내빼며 한 행동들이나, 방금 오른손을 내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는 않은데, 이론상 강제 역소환이 이루어지면 제 쪽이 내상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오라비랑 다르게 채향 쪽은 닥친 상황에 잔머리를 잘 굴리는 편이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내가 호흡을 고르며 사부님과 몇 마디 주고받고 있는 사이.
저벅저벅.
어느새 손이 날아갔던 자리로 이동해, 다시 검을 잡은 채향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우리 오라버니 얼굴에 상처를 낼 때부터 궁금했는데, 그때 네가 불러냈던 시커먼 그림자 검수는 도대체 뭐야? 왜 지금은 안 꺼내?”
“곧 죽을 녀석이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풉. 겁먹고 걸음을 물렸으면서 허세는? 뭐,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 내력이 많이 든다거나?”
“마음대로 생각해.”
“흐음. 표정을 못 읽겠단 말이지…. 일단 몸에 구멍이 좀 나고 나면 생각이 바뀌게 될 거야. 우리 서로 알아가는 사이가 돼보자고?”
“목이 달아나면 그런 소리를 못 지껄이게 될 거야.”
채향이 양손을 휘저어 온 것은 이때였다.
쌔액! 쌔액! 쌔액! 쌔액!
채규와 함께 합을 만드는 수련을 해왔던 덕택인지, 채향은 왼손으로 검을 쓰는 것도 익숙해 보였고.
오른손에 달린 피송곳은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며 나를 노려왔다.
슉! 슉! 슉! 슉! 슉!
그것은 송곳 모양으로 속사를 하듯 찔러져 오는가 싶다가도, 낫처럼 형태가 바뀌어 그어져 내렸고.
캉! 카카캉!!
막아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삼지창처럼 가지를 뻗어 다시 한번 나를 노려왔다.
휙! 휙!!
그렇게, 쏟아지는 채향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전념하고 있던 때.
나와 함께 상대의 동태를 관찰하던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채향이요?’
- 오냐. 타고난 육체와 정신을 가진 용운이 너도 환단 하나를 제대로 흡수하려면, 호법을 세우고 대주천을 몇 번이고 해야 하지 않느냐?
‘그렇죠.’
- 한데, 아무리 만인혈을 삼켰다지만 그것만으로 저런 힘을 낼 수 있다니? 저놈들의 심법이라는 것이 결국 우리 파천신공에서 갈라져 나간 것일 텐데… 어찌 저럴 수가 있느냐?
나는 바쁘게 걸음을 물리며 답했다.
‘사부님 말씀대로 천마신교의 무공은 파천검문의 아류로 출발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난 백여 년간 꾸준히 자신들의 방식으로 발전했다는 것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 이제 와선 아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냐?
‘예. 같은 역혈대법이라도 파천의 무공은 정종 심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다고 하더라도….
‘거기다 만인혈의 특별함도 한몫하겠죠. 왜 사람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한들이 뭉치고 뭉쳐져 만들어진 환단이 바로 만인혈이었다.
‘그 원념의 집약이 만인혈입니다. 채향은 그걸 연구해온 녀석이니, 그런 원념들이 익숙하기도 할 것이고요.’
하나, 사부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었다.
나를 죽이겠다는 일념과 관계없이, 그녀에게서는 귀기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완벽히 소화를 시킨 건 아니야.’
그리고 시커먼 가면으로 얼굴의 절반이 가려져 있었음에도, 채향의 모습이 점점 괴인처럼 변해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눈은 새빨갛게, 피부는 시퍼렇게 변해가고 있다.’
이를 종합했을 때 나오는 결론은 하나.
지금의 상태를 무한히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당장 쏟아지는 이 소나기만 어떻게든 피해 내면 활로가 열린다.’
하나, 그 순간에 당도하려면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나는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을 의식 저편으로 밀어두었다.
그리고 채향의 손에서 뻗어 나오는 공격에 신경을 집중하며 회한을 휘둘러 나갔다.
* * *
한편, 두 사람이 맞붙고 있는 동굴보다 한참 위쪽에 위치한 공동.
“동생도 내다 버린 새끼가 까불어?!”
이곳에선, 천장호의 일갈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까불어.
까불어.
그에, 채규는 빠득하고 이를 갈았고.
“거지새끼가 잘도… 네놈과 언용운은 내가 반드시 혀를 도려내고 말 것이다.”
“꿈 한번 크다. 나 혼자면 모를까 용운 형을 묶은 순간 그건 개꿈이야. 멍청한 놈. 학습 능력이 그렇게 없나? 하기야 대가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니까 주둥이가 그 꼴이 났지.”
천장호를 향해 맹공을 쏟아 부었다.
챙! 채채채챙!
채애앵!!!
그렇게 두 사람이 몇 차례 합을 주고받던 중.
도와줄 틈을 보고 있던 당옥기가 흠칫 놀라 입을 열었다.
“…천장호 너?”
그녀의 목소리에 언동생들의 시선이 천장호를 스쳤는데.
그들은 그의 오른 허리에서 피가 번져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정현을 구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채작진이 해체된 때.
언용명과 팽소천의 역할을 천장호 홀로 감당하다 베인 것이었다.
“!”
천장호의 상처를 확인한 언동생 중 입을 연 건 팽소천이었다.
“천장호! 다쳤냐?!”
그런 팽소천의 음성에 팽소진이 이를 악다물었다.
“돼지. 이 멍청아. 아주 천장호부터 공격하라고 알려줘라. 우리 누님 어쩌고 하면서 나서준 건 기특한데… 진짜 생각 좀 하고 살아.”
“…아.”
팽소진의 예상대로, 정현을 상대하고 있는 놈들을 제외한 다른 마인들은 집중적으로 천장호를 노리는 움직임을 보였다.
쌔액! 쌔애액!
하나, 천장호도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드루와 이 새끼들아!”
부상을 당한 와중에도 아슬아슬하게 그런 공격들을 피했고.
꽈르릉!!
쾅!!
그중 한 놈에겐 항룡장을 제대로 먹여, 언용명과 팽소천이 채작진으로 복귀할 시간을 벌어주기까지 했다.
“맛이 어떠냐! 다치기는 개뿔? 사실 얼빠진 놈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이 천장호님의 계략이었다 이 말이야!”
그렇게 다섯 방위를 담당할 사람이 다시 모이자. 검진의 핵을 담당하던 팽소진이 당옥기와 자리를 바꿨다.
어차피 천장호가 다쳤다는 사실이 알려진 터이니, 비교적 안전한 쪽으로 천장호를 옮기려는 의도였는데.
“어디 좀 봐봐.”
당옥기가 다가와 묻자, 천장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살짝 긁혔수.”
“…살짝이 아닌데?!”
“침 바르면 나아요.”
당옥기는 그런 천장호의 옆구리에 금창약을 뿌리며 인상을 구겼다.
“정신 나간 소리 작작해. 언용운한테 옮았어?”
“용운 형 말씀이 나와서 말인데, 살짝 잘됐다 싶기도 합니다?”
“미쳤나 봐. 잘됐긴 뭐가 잘돼?”
“아니, 저 마두 놈 때려죽이고 나면 학관 돌아갈 거 아닙니까? 가면, 아프다고 하고 수련이고 뭐고 싹 열외를 해야겠수. 크헤헤.”
“여기서 학관까지 가는 동안 걔한테 시달릴 건 생각 안 하는구나? 멍청하게 다쳤다고 영혼까지 털릴걸?”
“…….”
“그리고 그 생각이 괘씸해서라도 내가 가는 길에 다 낫도록 만들어줄게.”
“…아? 그, 그러면 수지가 안 맞는데?”
그리고 그 같은 상황을 후회 속에 바라 보는 이가 있었으니.
자신의 실수 때문에 천장호가 다친 것을 본 정현이었다.
‘…천 소협의 부상은 전적으로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정현은 언용운의 몫을 해내겠다는 아집에 빠져 과욕을 부렸던 자신이 미웠다.
하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잘못된 도를 좇느라, 서 있는 자리를 망각하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
부상을 당한 천장호.
부상자가 끼어있는 채작진.
흑무군주를 쫓아 내려간 언용운.
태산 같은 걱정이 심중에 쌓여있었지만, 정현은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언 소협을. 다른 동료들을 믿겠습니다.’
언용운은 이겨낼 것이고.
천장호도 버텨낼 것이다.
그렇게 심중의 번뇌들을 하나하나 내려놓는 순간.
“…후.”
가느다란 호흡 한 줄기가, 정현의 입에서 느릿하게 터져 나왔다.
그 호흡은 물이 가득 찬 둑과도 같았던, 정현의 심상에 구멍을 냈는데.
“……!”
이 순간 정현의 세상에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고요한 세상.
억겁처럼 흐르는 찰나.
그 속에서 정현은 송문검을 꽉 움켜쥐었다.
손잡이를 움켜쥔 손에 들어간 힘은 과욕을 부렸던 조금 전과 같았으나, 그 손에서 펼쳐지는 검초는 전혀 달랐다.
쌔액! 쌔액! 쌔액! 쌔액!
쌔애액!
고요함을 되찾은 정현의 검이 그려내는 태극.
캉! 캉! 캉! 캉!
면면부절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정현의 태극은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그 물결은 마인들의 공세를 끝없이 삼켜내 무로 돌아가게 만들었는데.
카앙! 캉!!!
그가 그려낸 태극에 흐름을 빼앗긴 자들은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촤악! 촤악!
촤아악!!!
그렇게 정현이 무아지경으로 태극을 그려낸 지 한참.
촤아아악!!!
정현의 검 끝이 마침내 채규의 발악마저 삼켜내고, 그 목덜미에 붉디붉은 혈선을 그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