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68화 (368/444)

제368화. 숨이 붙어 있는 한 (6)

사겸과 적룡궁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천마신교의 계획이 틀어졌고 만인혈은 소멸했다고 말했다.

하나, 사실 만인혈은 소멸하지 않았다.

‘사부님의 힘을 빌려 임시로 봉인을 해뒀을 뿐.’

그에 관한 이야기를 언동생들과 나누어야 했는데.

독고세가의 진혈단원들과 적룡궁의 궁인들이 함께 있었고.

나는 귀면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무리지.’

그들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 나는 적당한 구실을 입에 올렸다.

“…그대들이 찾는 젊은 무인은, 이 땅을 인세의 지옥으로 만든 마녀와 격전을 치렀소. 지금은 탈진하여 삭월군도의 외딴곳에서 속을 고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

독고철이 입을 연 건 이때였다.

“외딴곳이면, 삭월군도의 외섬들을 한번 뒤져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몸을 뺄 틈을 만들고자 한 것을 알아챈 모양인지.

녀석은 내가 던져준 구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바꿔, 정원해를 콕 집었다.

“소궁주님. 도와주시겠습니까?”

독고철에 이어, 눈치 빠른 팽소진도 한마디를 더했다.

“그게 좋겠네. 소궁주님은 외섬을 둘러봐 주시겠어요? 모산의 제자들을 남겨 놓고 오기도 했고, 본섬 쪽은 저희가 살펴볼게요.”

“알겠습니다.”

팽소진이라면 알아서 비밀선착장으로 올 터.

여기서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듯했는데.

‘해가 넘어가는군.’

마침 해가 넘어가며 어둠이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내 몸을 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암흑동화를 시전하면 되겠다.’

그러면 종적을 감출 수 있음은 물론이요, 적룡궁의 궁인들에게 수신(水神)을 만났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

샤하악-

나는 떠오른 생각을 바로 실천에 옮긴 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해역이 가득했던 원혼 중 상당수가 성불한 덕분에, 바다의 노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푸하!”

하여, 비밀선착장까지 헤엄쳐 돌아오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는데.

그렇게 돌아와 보니, 당옥기와 천장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건, 옆구리를 싸쥐고 있는 천장호였다.

“큰일 났다는 표정으로 가시던데, 무슨 일이었던 겁니까?”

“내가 진혈단을 관리하고 있다는 걸 적룡궁 사람들은 모르잖아.”

“아. 그렇죠? 따지고 보면 아군인데. 적룡궁 친구들이랑 사겸 쪽은 그걸 모르죠?”

“그래. 다 이긴 싸움에서 아군끼리 피바람이 일뻔한 걸, 어찌어찌 막았다. 그러는 너는?”

“저요?”

“옆에 터진 거 괜찮냐고.”

“터진… 무슨 사람을 만두 취급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만두도 아닌 게 옆이 왜 터져?”

“…아니. 그놈들 상당한 고수였는데, 용운 형도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걸 보니 살만한가 보네. 쥐어 터져야 정신 차리지? 이리 와.”

“히익.”

“내가 갈까?”

가만히 보고 있던 당옥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연 건 이때였다.

“잘 꿰매 놓긴 했는데, 헛짓거리는 하면 안 돼. 그래서 채향이라는 여자는 네 손으로 없앤 거야? 만인혈은 그 여자가 가지고 있었어?”

“뭐, 일단은?”

“뭐야, 그런 말이 어딨어.”

“애들 오면 한 번에 이야기해 줄게. 곧 올 거야. 그리고 나도 좀 지쳐서 운기조식 좀 해야겠어.”

“어. 아, 알았어. 진맥은 안 해봐도 돼?”

“응. 그냥 잠깐 내버려 둬.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속을 고르고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끼거걱-

선착장에 배를 붙이는 소리와 함께, 바다에 나가 있던 언동생들이 돌아왔다.

나는 그중 정현을 바라봤다.

“아까는 좀 떨어져 있기도 하고 경황도 없어서 허투루 봤는데… 이제 보니 너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정현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되레 질문을 해왔다.

“그보다 가셨던 일은 어찌 된 것입니까? 저희는 박살이 난 천마신교의 선단에 함께 계셨던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렇게 운을 뗀 나는, 선착장과 연결된 숨은 비동에서 채향과 싸웠던 일들을 쭉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

팽소천이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만인혈은 없어졌다는 이야긴가?”

“아뇨. 남아있다는 이야기죠. 이제 처치하러 가야 한다는 이야기고요.”

팽소진이 질문을 해온 건 이때였는데.

“그 처치라는 게… 그러니까 용운이 네가 흡수를 하겠다는 거지 지금?”

“예. 정확하십니다 누님.”

“그걸 흡수해도 돼? 채향이라는 여자는 완전히 괴물처럼 변해버렸다면서?”

“저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오간 이야기에, 당옥기가 목소리를 높였다.

“야! 욕심낼 게 따로 있지! 큰일 나 그런 거!”

“사욕으로 그러는 거 아니다. 사람의 원혼을 뭉쳐 만든 기연은 나도 굳이 탐나지 않아.”

“근데?”

“회한으로 임시 봉인을 해뒀는데, 그 과정에서 새어 나오는 귀기를 접해봤어. 어지간한 제령으론 성불시키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원혼들이 집약돼있더라. 그런 걸 내버려 두고 가면, 이 해역 자체가 그 음기에 잠식될 거야.”

그렇게 되면 원혼이 산 사람들을 끌어당겨 장차 해역 전체가 죽음의 바다가 될 것이다.

“그리고 흑백무상 두 쌍둥이는 죽었지만, 저걸 연구한 자료는 천마신교에 그대로 있다. 봉인해놓고 간들 놈들이 되찾아가겠지. 그래서야 우리가 한 고생은 물론이고 희생된 이들까지 수포가 되는 거 아니냐.”

그렇게 언동생들을 이해시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녀오겠다는 말을 전했는데.

“그렇게들 알고. 소진 누님이 해안가의 제대들이랑 애들 지휘해서 본섬 곳곳을 뒤져봐 주십시오. 난리 통에 미처 소각하지 못한 흔적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어.”

“예. 숨어 있는 마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 점은 조심하시고요.”

그 말을 마치니.

언용명과 정현이 연달아 입을 열었고.

“방금 형님께서 천마신교 놈들이 노릴 수 있다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비동으로 향하지 않겠습니까? 호법이 필요할 듯합니다.”

“빈도의 생각도 작은 언 소협과 같습니다.”

팽소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노린다면 다른 곳보다는 그쪽을 노리겠지. 용운아. 얘네 둘 데려가.”

*    *    *

노린다면 비동을 노려올 것이라는 언동생들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하여, 나는 언용명과 정현을 데리고 사부님을 남겨두고 온 비동으로 진입했는데.

뽀글-

물길을 지나, 야명주가 알알이 박힌 동굴을 확인한 언용명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이런 곳이 있었군요. 미끄러져 내려오자마자 바로 앞바다로 나아가서 짐작도 못 했습니다.”

“일종의 진법의 묘리인 거지. 시선이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게 돼 있다. 나도 처음엔 앞바다로 나아갔었고.”

“그러셨습니까?”

“어. 사실 완전히 놓친 건데 아까 귀천하던 영혼들… 그 녀석들이 알려주더라.”

“원시천존. 그야말로 도가 통한 것입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어느새 당도한 안쪽의 공동.

“이쪽은 없습니다.”

“이쪽도 없습니다.”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연결돼있을 만한 공간이나 숨어있는 누군가가 없는지 다시 한번 꼼꼼히 살폈다.

“그럼 시작한다.”

그리고 회한을 움켜쥐며 사부님께 인사를 건넸다.

‘제자가 보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 흥. 보고 싶긴 뭘 보고 싶어. 만날 보는 얼굴 뭐가 좋다고.

‘…허. 언동생들 사이에서 봉인해놓고 가자는 주장이 제기됐었는데, 그냥 여기다 놓고 갈 걸 그랬네요.’

- 뭣이?

‘물론, 제가 거절했습니다.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을 빼면 시체밖에 안 남는 제가 어찌 사부님을 놓고 가겠습니까?’

- …스승님. 꼭 닮은 제자를 만나보라 하셔놓고. 더한 놈을 이어주시면 어쩝니까.

‘…그런 말씀은 속으로 하셔야 하는 거 아닌지요?’

- 들으라고 하는 말인데 왜 속으로 해?!

그렇게 몇 마디 주고받기를 잠시.

사부님께서 사뭇 진지한 어투로 말씀하셨다.

- 아무튼, 만인혈의 귀기를 누르고 있었는데, 원념들의 음기가 여간 대단한 것이 아니다. 네 말마따나, 이건 평범한 영단 같은 것이 아니야.

‘예. 엄밀히 따지면 원혼들을 가둬 놓은 결계 같은 것이라고 봐야죠.’

- 그 말이 딱 맞다. 하여, 이걸 흡수할 생각이냐?

‘예.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 …용운이 네가 이걸 흡수하려면, 네 녀석의 정신을 보호하고 있는 특유의 벽을 허물어 심상 속으로 원혼들을 끌어들여 제압해야 할 것이다.

‘네, 각오는 되었습니다.’

- 너를 믿는다만… 조심하거라. 숱하게 스치는 원혼들의 사념 속에서 채향 그 마녀를 본 것 같기도 하니 말이다.

*    *    *

조언을 마친 사부님께서 만인혈의 기운을 누르고 있던 것을 멈추신 모양인지.

회한의 검신을 타고 귀기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하학-

나는 먼저 혈륜을 개방해 혈맥을 보호했다.

그리고 하단전에서 끌어 올린 파천의 내력으로 내 몸에 들러붙기 시작한 귀기들을 감싸, 혈맥에 실어 보았다.

끼에에에엑!

그러자, 끔찍한 귀곡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한음지기가 혈맥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당장은 버틸만 하지만. 오래 이러고 있으면 혈맥이 얼어 터질 것이다.’

사부님의 말마따나, 평범한 환단을 흡수하는 방식으론 몸이 버텨내질 못하는 것이다.

‘정신면역 특성을 해제해야겠다.’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정신을 집중해 심상 속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새하얀 가운데 오직 나만 독존하는 공간이었지만, 내가 정신 면역을 내려놓고자 마음을 먹자.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한 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졌는데.

달칵.

내가 그 문을 열어젖히길 잠시.

끼에엑!

끼에에에엑!!!

마귀의 형상을 한 귀곡성의 주인들이, 문을 비집고 심상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을 넘어 개떼처럼 몰려드는 마귀들의 모습에, 문득 전생이 떠올랐는데.

“어째. 옛날 생각이 나네.”

픽 웃어 보인 나는 회한을 뽑아들고 쇄도하는 마귀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촤악!

촤아아악!!!

마귀의 바다라 불러도 될 정도로 몰려드는 적의 숫자가 많았지만.

녀석들을 베어내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촤아아악!!

하나 그렇다고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잘못하면 정신이 붕괴한다.’

절명한 마귀들은 흩어져 심상 속에 흡수가 됐는데.

그럴 때마다, 끔찍한 절규와 그들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편린들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 으아아악!

개중엔 용서받기 힘든 악행을 저지른 악인도 더러 있었지만.

- 사, 살려주세요! 가족이, 가족이 있….

대다수는 평범하디 평범한 민초들이었다.

‘…….’

즉, 마귀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만인혈에 희생당한 이들의 원념이라는 결론이었다.

촤악!

촤아아악!!

나는 미친 듯이 회한을 휘두르며.

그네들의 한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내 정신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끊임없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당신들의 원한을! 희생을 잊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 숱한 인생들의 무게를 짊어지겠다 다짐하며 회한을 휘두른 지 한참.

“…끝났나?”

더는 베어낼 원념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 익숙한 형상을 하고 있는 마귀 하나가 뒤늦게 문틈으로 쏘아져 나왔다.

“시뻘건 눈. 핏대가 완연한 시퍼런 피부. 삐죽빼죽한 상어 이빨을 한 여자….”

채향.

악의로 똘똘 뭉친 채향의 원념이 나를 갈기갈기 찢어내겠다는 듯 팔을 휘저어 왔다.

쌔액! 쌔액!

쌔애애애액!!!

하나, 그녀는 이미 만인혈의 기운을 마음껏 끌어다 쓰던 때의 채향이 아니었다.

그저 나를 죽이겠다는 일념만 남은 망령이 된 녀석은.

숱한 원혼들의 절규를 견뎌낸 내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위협적으로 휘둘러지던 채향의 양팔을 베어냈다.

촥!

촤악!

그리고 원령을 사멸시키기 위해 마지막 일격을 질러내는 순간.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녀석까지 흡수하는 것은 과욕이 아닐까?’

불순한 혼이 심상에 섞여들면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었고.

희생된 이들의 한을 이어받겠다는 생각과도 맞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곱씹다 보니, 그저 강한 힘을 위해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은 능사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이 녀석을 직접 받아들이는 것은 독일 수도 있다.’

하여, 그냥 심상 밖으로 내쫓아야겠다고 생각하기를 잠시.

문득 다른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암객? 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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