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0화. 동도회 (1)
백도무림의 새로운 세력 구도를 짜려는 시도는 차근차근 준비해오던 사안이었다.
- …저게 대낮에 저리 쩌렁쩌렁하게 뱉을 이야기가 맞느냐? 용운이 너를 끌어안은 것도 그렇고, 공손가 녀석이 격양된 상태인 것 같은데?
다만, 사부님의 의견엔 동감하는 바.
나는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그. 맹주님?”
“그래. 용운아.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하거라.”
“…다른 건 아니고. 그런 말씀을 이렇게 대놓고 하셔도 상관없습니까? 누가 듣겠는데요.”
“상관없다. 들으라면 들으라지.”
맹주님께서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를 취하셨다.
그에, 밀직원장 국도진이 난처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상관이 없지는 않습니다. 때가 된 것도 사실이고, 맹주님의 결심이 확고하신 것도 잘 압니다만. 삼갈수록 좋은 이야기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자리를 옮겨 말씀을 나누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밀직원장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정론.
맹주님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게 우리는 해남파의 속가문인 창해문으로 향했는데.
용사비등한 필체의 현판이 걸린 대문을 넘어섰을 때.
도열해있던 창해문의 제자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무림맹주님과 정무학관의 젊은 영웅들을 뵙습니다!”
맹주님께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해남파의 장문인인 용산해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장문인.”
“말씀하십시오.”
“여기 계신 두 분 선배와 차를 나누고 계셔 주시겠습니까? 저희끼리 나눌 이야기와 아이들에게 해줄 이야기에 구분이 있는지라, 저는 용운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지요.”
맹주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용산해는 창해문의 문주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는데.
“도제 그리고 하북권웅. 이쪽으로 가십시다. 창해문주님께 좋은 육보차(六堡茶)가 있습니다. 함께 내어달라 청합시다.”
팽무혁은 문주전의 옆에 달린 곁문을 가리키며 되물음을 던졌다.
“이쪽 말고 저쪽으로 가면 안 됩니까?”
“…예?”
굳이 정문을 놔두고 곁문으로 가겠다는 팽무혁의 말에, 용산해가 고개를 갸웃하는 때.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싱거운 농입니다. 기실 개소… 큼. 의형 딴에는 어색함을 풀어보자고 청개구리 같은 소리를 하신 것 같은데, 장문인께서는 신경 쓸 필요 없으십니다.”
“이보게 정웅. 필요가 없다니. 의형이 못났기로서니 그리 면을 깎는가?”
“…의형이 제 앞에서 면을 깎는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용운이 쫓아냈던 이야기를 꺼내신 분은 어디의 누구신데요?”
“크흠. 그건 그냥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장문인 가시지요.”
“예. 아, 예.”
* * *
어른들이 먼저 떠나갔고.
언동생을 비롯해 정무학관의 생도들도 창해문의 제자들을 따라 객관에 짐을 풀러 갔다.
그렇게 연무장에 맹주님과 나만이 남게 되었을 때.
“이번 만인혈 사태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맹주님은 멀찍이 보이는 바다를 보며 입을 여셨다.
“마인들을 방벌하기 위해 낯선 바다로 나아가겠다 마음먹은 후기지수들의 의기와 요소요소에서 빛을 발한 용운이 네 결단력에 우선 감탄했지.”
“과찬이십….”
“과찬은 무슨. 과찬이냐. 아직 본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다.”
“…일단 얌전히 경청하겠습니다.”
“특히나 내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건, 용운이 네가 일을 추진한 방식이었다.”
“대외적으론 수학여행으로 포장한 것 말씀이십니까?”
“정확히는 그 방법의 기저에 깔린 네 생각이라 해야겠지. 너희가 움직이면 어른들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그리 행한 것 아니더냐? 총학생회장이라는 자리를 마련한 것도 이런 때를 위함이었을 테고.”
맹주님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과연 온갖 이해관계가 난립하는 무림맹을 조율해온 분답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생각으로 총학생회장에 출마한 것이긴 했습니다. 사실 편법인데, 그걸 두고 맹주님께서 느낀 바가 있다 하시니 조금 멋쩍네요.”
“편법이되 편법이 아니다. 그 많은 후기지수와 학관의 교수님들. 해남파와 보타문을 비롯해 여러 방파들이 너를 돕게 만든 원동력은 결국 의기이니까.”
“…….”
“누군가는 걱정이 되어, 누군가는 부끄러워서 검을 들도록 만들었지… 하나, 용운이 너 같은 후기지수들이 난세의 최전선에 서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어진 이야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경혜 사태께서 제게 해주셨던 말씀을 맹주님께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해보거라.”
“사태께서는 걱정되는 마음과는 별개로 저희도 한 사람의 무인이라 하셨습니다. 맹주님께서도 저희를 너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당연한 이야기다. 나도 너희를 마냥 어리게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인들을 상대하는 일에 용운이 너와 마방연의 후기지수들만 한 적임은 없지.”
“…….”
“만일 이번 같은 일이 또 벌어지고, 내게 명령권이 있다면 나는 용운이 네게 선봉을 부탁할지도 모른다.”
“저희를 최전선에 세우지 않겠다는 방금의 말씀이랑 모순적으로 들리는 것 같습니다.”
“말을 잘못한 모양이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희만’ 세우지는 않겠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같이 서겠다는 말이지. 더는 정도라는 명분으로 아집의 족쇄를 채우려는 이들에게 붙들리지 않을 것이다.”
다짐하듯 한마디를 내뱉은 맹주님께서는 이윽고 구체적인 방안을 말해주셨다.
“이번에 네가 보여준 방식과 네 아버님을 중심으로 한 하북삼협의 친목 모임에서 떠올린 게 있다.”
“아버지의 친목 모임이요?”
“그래. 최근에 그 모임의 구성원이 늘어난 것을 아느냐?”
“무혁백부와 석가장주님 그리고 저희 아버지 이렇게 세 분이 정기적으로 모이신다는 것만 압니다.”
“강남상왕 은세평 대인이 틈틈이 함께해왔고, 하북의 약방을 관리하는 사천쌍괴 어르신도 함께하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하.”
“해서, 나도 떠올려 보았다. 정무학관을 중심으로 동도회(同道會)를 발족하면 어떨까 하고.”
“동도의 모임이라… 정무학관의 동문들을 중심으로 한 모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다. 대외적인 명분은 충분하지 않으냐?”
겉으로는 친목 모임을 표방하나, 실은 다가올 위난에 기민하게 대처할 조직.
정무학관의 동문회라면 그 난제의 해법이 되어줄 듯도 했다.
하나,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천하에 이름난 백도의 고수들 중 많은 이가 정무학관을 거쳤긴 했다.’
하나, 강호 전체를 기준으로 삼으면 그 수는 그야말로 극소수였다.
그렇다면 그저 정무학관의 학연으로 이루어진 일파가 되어버릴 수 있었다.
나는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입에 올렸다.
“…강호를 아우르는 조직으로 삼기엔 조금 편협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문제 될 게 없다. 동문회가 아니라 동도회라 하지 않았더냐.”
“…정무의 깃발 아래 같은 뜻을 품으면 동도라는 말씀이시군요?”
“정확하다. 예컨대, 이번에 교환학생으로 참여한 원철이나 새외의 친구들도 동도라 할 수 있겠지. 정무학관에 장학금을 댄 상인들도 그리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대군사님께서는 여기에 더해서, 민간에도 베풀 수 있는 수료 과정도 만들면 좋겠다고 하시더구나. 네가 고안한 그 화생방 훈련이란 걸 예로 드시면서 말이야.”
“…아?”
“확실히 독공 대처에 그만한 훈련 양식이 없긴 해.”
문득 화생방을 그렇게까지 퍼트려도 되는가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으나.
시대가 난세인 만큼 민초들도 배워두어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예. 꼭 강호인이 아니더라도 독공에 대처하는 법은 익혀두면 좋겠죠.”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는, 심중에 남아있던 마지막 의문을 전했다.
“한데, 진주언가에게 맡기겠다는 말씀은? 동도회의 일익을 저희 아버지께 맡기시려는 겁니까?”
“누가 뭐라 해도 당금 천하에서 가장 신뢰받는 곳이 진주언가다. 정확히는 너지만. 세인들은 너와 가문을 동일시하니까.”
“큼. 이건 정말로 과찬이시네요.”
“이것도 과찬이라 할 수는 없지. 예를 들어볼까? 팽가의 일이라면 모용가가 돌아앉겠지만, 언가의 일이라면 그들도 무거운 엉덩이를 뗄 것이다. 당가는 목숨을 걸 테고. 새외의 친구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고? 산서의 진상도 강남의 휘상도 금은을 내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테지.”
하나하나 열거하시니, 조금 멋쩍긴 했지만.
일리는 있는 말씀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하여, 내가 언 선배에게 어려운 부탁을 드렸다.”
“그러셨군요.”
맹주님께서는 내 어깨를 두드리시며 말을 맺었다.
“일단 그렇게 알고 있거라. 본격적인 이야기들은 차근차근 추진하며 나누도록 하자.”
* * *
창해문에서 하루를 쉰 우리는, 어른들과 함께 북상을 시작했다.
내로라하는 명숙들이 함께하는데, 그중 한 명이 무림맹주고 내 품엔 초왕 전하께 받은 마패가 있는 터라.
감히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는 용감함을 갖춘 이는 없었다.
그렇게 별일 없이 다다르게 된 무창의 수군진.
“노삼 교수님! 무사하셨군요?!”
“나야 목숨줄이 질기지, 용운이 너도 무탈했구… 아니 근데 장호 저 새끼는 옆구리가 터졌네?”
각자의 임무를 위해 흩어졌던 정무학관의 제대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엔 뿔뿔이 흩어졌던 언동생들도 있었다.
“제갈 소저랑 남궁가의 두 녀석은 본가에 들렀다 바로 학관으로 오겠다 전언들을 보내왔고… 그럼 다 왔네. 상점가로 가자. 황학반점 주사들의 요리솜씨가 그렇게 대단하다더라.”
녀석들에게 임무를 들려 보낼 때. 나눴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어서옵… 괴룡이 아니십니까?!”
“나를 아시오?”
“호북에서 괴룡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뭐, 그럼 주인장을 믿고 내 전낭을 맡길 테니, 이 집에서 가장 자신 있는 요리들 좀 내와주시오.”
그렇게 도착한 요리집에서 주문을 하니.
“돈은 됐습니다. 저도 동정호 근방에서 태어나 수적들한테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주인장이 전낭을 쥐고 있는 내 손을 지긋이 밀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이리 불 앞에 서는 법을 배워 주인장 소리를 듣고 있는데… 해남의 일은 참 안 됐더군요.”
“…그리 되었소.”
“아무튼, 협객들을 대접하는 영광만으로 식대는 차고 넘칩니다. 전낭은 되었으니, 이쪽으로 드십시오.”
그렇게 내 전낭을 극구 사양한 주인장은 주사들을 채근하러 떠났는데.
그런 주인장의 태도에, 전낭을 다시 소매 안으로 넣자.
은하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쓰흡.”
“뭐야 그 쓰흡은?”
“이러면 저희랑 하신 약속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다?”
“보통 다음으로 미루자는 말이 나올 텐데 거기서 글쎄다 소리가 바로 나오시네요. 역시 천하의 짠돌….”
“…내가 억지로라도 저 주인장 소매에 은자를 넣을 테니까. 있는 대로 다 시켜. 그리고 참깨 하나라도 남기면, 하성이 너는 죽을 줄 알아.”
“…….”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은하성이 흰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반가웠고.
그 너스레 덕분에, 각자 맡았던 임무로 지쳐있던 분위기도 풀렸는데.
따끈따끈한 요리가 하나둘 식탁 위에 오르는 때.
우소릉이 입을 열었다.
“근데 천 형은 어쩌다가 다치신 거예요?”
“아, 이거? 이 부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에, 천장호가 무용담을 늘어놓듯 옆구리가 터진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가지고 창자가 줄줄 새어 나오는데. 내가 딱 틀어막고. 사자후를 내 질렀지.”
“헉. 정말요?”
“고럼고럼. 그렇게 마인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든 다음에 항룡장으로 파파팍! 모두 처치했지!”
“진짜로요?”
“그렇다니까? 나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들 났다!”
그에, 당옥기가 미간을 좁히는 때.
“캭!!! 그 정도는 아니었어. 무슨 창자가 줄줄 새어 나오고 다 처치를 해! 허풍도 적당히 쳐야 넘어가 주지! 진짜 어이가 없네!”
나는 은하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은 소저.”
“예. 언 공자.”
“무창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고 했지? 하면, 제갈 소저랑 궁윤이 남매를 보지 않았나?”
“예. 봤어요.”
“걔들 본가에는 왜 간 거요? 남긴 전언에 다녀오겠다는 말만 적혀 있지, 무슨 이유로 간다는 내용은 없던데? 혹시 아시오?”
“아, 언 공자한테 본가에 가는 이유를 이야기 안 했나요?”
은하연은 되물음을 던지는가 싶더니, 이내 스스로 답을 내렸다.
“아. 언 공자한테 말하고 가긴 부끄러울 수도 있겠네요. 음. 설득이 안 될 수도 있고 하니….”
“뭔 소리요?”
“맹주님께서 추진하고 있는 동도회 있잖아요? 실권자는 언 가주님이시지만, 배분을 고려해서 직함은 간사직을 맡기로 하시고, 명예직으로 회주님을 모시기로 했잖아요?”
“그렇다고 들었소.”
“각자 할아버님들 모시러 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