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71화 (371/444)

제371화. 동도회 (2)

안휘성 안경 땅.

이곳엔 구성원들이 자부하고, 세인들이 부르기를 천하제일세가라 하는 남궁세가가 있었다.

그 자존심만큼이나 높은 담장과 장대한 부지를 가진 남궁세가의 장원엔, 가주가 아끼는 화초들을 보관하기 위해 기름종이를 발라 만든 온실이 있었는데.

슥- 슥-

머리와 수염은 허옇되, 눈빛만큼은 맹금류의 그것처럼 빛나는 노인이 온실에서 난의 잎을 닦고 있었다.

노인의 이름은 남궁원(南宮元).

그가 바로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공손무결 이전에 무림맹주를 역임했으며, 강호인들이 일컫기를 검황(劍皇)이라 칭하는 백도무림의 거인이었다.

“조부님. 윤입니다.”

“영이도 왔어요!”

물론, 사사롭게는 남궁윤·남궁영 남매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손주들의 기별에, 남궁원은 난의 잎을 닦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강아지랑 윤이가 왔구나.”

그런 남궁원을 향해 남궁윤은 문안 인사를 올렸고.

“예.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남궁영은 백본회에서 실각한 이후로 세가에서 자숙하고 있는 남궁욱에 관해 물었다.

“작은할아버님은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

“나야 뭐 똑같지. 욱이 그 녀석도 반성하며 지내고 있다. 한데, 학관이 한창 학기 중일 텐데… 수학여행이 끝났으면 단강구로 갈 것이지 이 늙은이는 뭐하러 보러 왔는고?”

차분하기 그지없는 남궁원의 음성이었지만.

남궁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은퇴를 번복해달라는 요청을 드려야 하는데….’

남궁세가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엄히 훈육을 받아온 남궁윤이었다.

그러한 훈육을 담당했던 할아버지께 다시 강호로 나와달라는 부탁을 하려니, 절로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내 속을 다 꿰뚫어 보시는 듯하다.’

하나, 동도회는 천하에 꼭 필요한 일이었다.

남궁윤은 우선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소손이 조부님께 어려운 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무창에서 제갈혜로부터 전해 들은 정무학관 동도회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하여, 정무학관의 동도회라는 조직을 발족할 것이라 합니다.”

남궁윤의 말에, 남궁원은 우선 미간을 좁혔는데.

“맹주의 해남행에 하북삼협의 두 사람이 동행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구먼….”

그러다 말고 남궁윤에게 질문을 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 할애비더러 동도회의 회주 자리에 나서 달라는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느냐?”

“예. 소손은 할아버님께서 회주를 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허허. 윤아, 인석아. 이 할애비가 가주직도 실권은 네 아비에게 다 넘겨주고 이름만 유지하고 있거늘… 내가 천하에 은퇴를 천명했음을 잊었느냐? 장부일언 중천금이다 인석아.”

헛웃음을 지으며 거절해오는 남궁원.

하나, 남궁윤은 굴하지 않고 재차 입을 열었다.

“장부일언 중천금. 맞는 말씀이십니다. 한데, 소손과 영이에게 해주시던 말씀은요?”

“…….”

“남궁가의 자손이라면 항상 천하를 가슴에 품고 근심해야 한다. 그것이 사족(士族)된 자의 의무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럼 얼마입니까?”

“…뭐라?”

“외람됩니다만, 소손은 지금도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천하에 난세가 도래했습니다! 조부님께서 나서주셨다면, 흘린 피들이 줄었을 겁니다! 소손에게 늘 심계천하를 가슴에 품으라 하셨으면서, 어찌 검황께서 세가에서 소일만 하고 계신 것입니까?!”

남궁윤의 말에, 남궁원은 띄고 있던 미소를 완전히 거두고 입을 열었다.

“쯧쯧. 윤이 네가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이 할애비가 나섰다면 그로 인한 반동이 분명히 따랐을 것이다. 공손 맹주가 우스워지고, 네 아비도 우스워진다. 그리하여 야기되는 혼란은 왜 생각지 않느냐?”

한번 입을 연 남궁원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냈다.

“그리고 담금질 없이 검이 벼려지는 줄 아느냐? 나 같은 늙은이들이 물러날 때를 모르고 설치면, 당장에 눈에 보이는 평화야 오겠지. 하나, 내가 천년만년 산다더냐? 나는 이미 죽을 날이 가까워져 오는 몸이다.”

“…….”

“그렇게 설치던 늙은이들이 죽고 나면? 경험이나 고난을 겪지 못한. 이 온실 속에 그득한 화초 같은 이들만 남는다. 그렇게 되면 난세가 아니라 지옥도가 펼쳐지겠지.”

“…….”

“꼭 윤이 네가 아니더라도 나를 야속해 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검황이란 늙은이가 세상일엔 귀를 닫고 호의호식하며 지낸다고 하겠지. 하나, 젊은이들의 앞날은 스스로 결정하고 쟁취해야 하는 것이야.”

“…….”

“슬퍼하고, 번민하고, 고뇌하고. 그렇게 나아가며 강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무정하디 무정한 강호의 생리야.”

남궁원의 한마디 한마디가 무겁게 울렸다.

하지만 남궁윤으로서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맹주님을. 언용운을 돕고 싶다.’

동도회가 제대로 발족하려면 대들보 역할을 해줄 어른이 꼭 필요했으니까.

“하오나….”

“아직 이 할애비 말 안 끝났다. 자고로 군자는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들어오며 영이가 언급한 너희들 작은 할아버지. 욱이 그 녀석이 백본회 부회주를 지내며 벌인 짓들이 여즉 회자되고 있거늘 어찌 외부활동을 한다는 말이냐?!”

하나, 그러다 나온 작은할아버지의 이야기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는데.

“…….”

“그저 남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조용히 검을 닦다가. 천하가 정말로 이 늙은 몸의 검이 필요하다면 그때나 나설까….”

얌전히 듣고 있던 남궁영이 입을 삐죽거리며 한마디를 한 건 이때였다.

“할아버지가 안 나서면. 그 자리 아마 제갈가의 태가주님께 돌아갈 거에요.”

“…제갈척 그 영감탱이가, 은퇴를 번복한다고 하더냐?”

“설지 선배가 직접 갔으니까. 그렇게 되겠죠.”

“아니 그래도 나랑 나눴던 약속이 있는데….”

“어릴 때 절맥을 앓아서, 그댁 사람들 설지 선배 아끼기로 유명하잖아요. 천기묘산 어르신도 손녀 이뻐하기로 유명하시고요.”

“…어째 나는 너를 안 이뻐한다는 투로 들리는구나?”

“만날 오라버니한테만 쓴소리하시고. 이쁜 놈 매 한 대 더치고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거잖아요.”

“…인석이 나를 나쁜 할아버지로 모는구나. 어디서 이런 고약한 어법을 배웠는고.”

남궁원의 물음에, 남궁윤은 남궁영의 화법이 언용운에게 옮은 듯하다고 생각했다.

“…….”

하나, 자신이 청할 때보다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그렇게, 온실 속에 정적이 흐르길 잠시.

남궁원이 수염을 쓸며 단강구가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흠. 너희가 이러는 이유가 결국 그 괴룡이라는 녀석 때문일 테지?”

“…….”

“…….”

“괴룡과 제갈척 그리고 동도회주라….”

*    *    *

안경에서 남궁가의 남매가 할아버지를 설득하고 있는 때.

호북 융중산 아래 자리한 제갈세가의 태가주전에서도 동도회 이야기를 놓고 조손간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전임 대군사 제갈척과 제갈설지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렇게 맹주님과 고모님의 말씀을 종합할 수 있겠네요. 아마, 용운 님과 다른 교수님들이 돌아와서 정무학관의 운영위원회가 소집되면 동도회의 일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겠죠.”

한데, 제갈설지의 표정은 진지했던 반면.

이 순간에도 서예를 하고 있던 제갈척의 표정은 여유만만이었다.

“동도회라… 거, 맹주와 혜아가 고민을 좀 하였구만?”

그에, 볼을 부풀린 제갈설지는 먹물을 찍으려던 제갈척의 붓을 가로채려 했다.

하나, 제갈척은 붓을 빼앗기지 않았다.

휘릭- 몸을 빼는 부드러운 움직임에 제갈설지는 목표를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붓을 못 빼앗으면 먹을 못 찍게 하면 되는 법.

제갈설지는 손으로 벼루를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남 일 말하듯이 여기실 게 아니라, 할아버님이 회주직을 맡아달라는 이야기예요.”

“허어. 그랬느냐? 나는 몰랐구나.”

“모르긴 뭘 모르세요. 학기 중인데 제가 그냥 왔을까요? 다 아시면서… 그만 놀리세요.”

“설지 너야말로 그만 좀 하거라. 늙어 죽을 때가 다돼서야 간신히 여가 생활을 하기 시작한 할애비한테, 그런 실권이라곤 하나도 없고 귀찮기만 한 직함을 맡아달라니.”

“…거, 보세요. 딱 듣고 다 아시면서.”

“알긴 뭘 알아. 예끼 인석아. 소도 그렇게 부려 먹지는 않는다.”

“천하에 은퇴를 천명하신 할아버님이 회주를 맡아주셔야, 동도회가 평범한 친목 단체라는 명분이 서요. 제발요.”

그런 제갈설지의 음성에.

그제야 붓을 놓은 제갈척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 원 참. 절맥을 앓을 적에도 할애비가 걱정할까 봐 아프단 소리 한 번 않던 녀석이, 생떼를 다 쓰는구나. 어찌 이러는지 이유나 들어보자.”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야 명분이….”

“그 이유 말고, 설지 네가 진짜로 이러는 이유.”

제갈척의 물음에, 잠시 입술을 깨물었던 제갈설지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발버둥을 치는 사람이 있어요. 처음에는 그 사람을 그저 이기고 싶었어요. 내가 왜 저런 사람한테 져야 하나. 그런 생각만 가득했죠.”

“언용운이를 말하는 것이로구나.”

“네. 그러다가 저 사람은 왜 이렇게까지 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후기지수 몇이 모여 이렇게 발버둥을 친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그런 생각이요.”

“…….”

“하지만 용운 님은 결국 천하를 움직였어요. 끝끝내 산을 옮겨낸 우공처럼요.”

“…우공이산이라.”

“부끄럽고 싶지 않아요. 제갈설지 따위가 감히 언용운을 이기려 들었다는 평이 아니라. 의지는 가상했다. 적어도 그 정도의 평은 듣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러는 거예요.”

“내 일단 그 녀석을 한번 직접 보고 싶구나.”

*    *    *

나는 수학여행단을 이끌고 정무학관에 복귀했다.

“…이상 열외자와 부상자를 제외한 인원의 보고를 마칩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여준 용기와 의기는 마인들에게는 두려움을, 민초들에게는 희망을 심어 주었을 것입니다. 빈니는 정무학관의 총장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경혜사태께서는 붉어진 눈시울로 내 보고를 받아주셨다.

“생도 하나하나 손을 잡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 같으나, 고단들 할 테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생도들은 제대를 해산하고 쉬도록 하고. 운영위원회를 소집 할 것이니, 위원들과 생도 대표들은 참석하도록 하세요.”

소집된 정무학관의 운영위원회에선, 동도회에 관한 논의가 이어졌다.

“언 회장. 정말로 고생 많았습니다.”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했을 일입니다.”

“그 당연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워졌지요. 언 회장 이하 정무학관의 생도들이 일깨운 정무의 정신이 안온함에 젖어 잠자고 있던 백도 무림이라는 거인의 심장을 깨우게 될 것입니다.”

만인혈 사태에 수학여행이라는 편법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주신 분들이, 동도회를 반대할 리는 없었다.

동도회를 승인한다는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가 되었고.

“그럼 총학생회에서는 재학생들로서 선배님들을 맞을 준비를 고민해주세요.”

“예.”

“아. 마방연은 민간에 제공할 독공대처훈련 수료과정을 준비해주시고요.”

“옙.”

나는 운영위원회에서 결정된 사안을 언동생들에게 공유했는데.

- 하연이 저건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고 뭔 저런 표정을 짓느냐?

사부님의 말마따나, 은하연의 표정이 복잡 미묘해 보여서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은 소저? 표정이 왜 그렇소?”

“동도회가 승인되다니. 좋은 일이네요… 참 잘된 일인데,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니까 마냥 웃어지지 않네요.”

그렇게 운을 뗀 은하연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해야 할 일들을 읊기 시작했다.

“그냥 생각나는 것만 해도 후배들 이름으로 서신들도 보내야 하고, 학관의 미화 작업과 기숙사별로 특산주와 답례품 준비해야 할 거고 의전용 합격진 점검이랑 선배님들 오시면 연감도 한 번씩 보실 테니까 그것도 준비해야 하고….”

나는 그런 은하연의 손가락 중 하나를 직접 접어주며 한마디를 더했다.

“마방연의 일도 있소. 민간에 공개할 독공 대비 과정도 만들어야 하오.”

그런 내 말에 당옥기는 경악했고.

“엑. 그거 진짜로 한대?!”

“어. 대상이 무림인이 아닐 수도 있는 만큼 호초탄 용량에 대한 검증이나 훈련 난이도 빡세게 조절해야 한다. 옥기 너도 빨리 연구실로 가.”

은하연은 재차 입을 열었다.

“…휴학할까.”

“오. 강의 듣는 시간까지 줄여서 최선을 다하고 싶은 거요?”

“…마귀.”

그렇게 은하연과 몇 마디를 나누는 중, 맹주님과의 연락을 위해 무창에 남겨두고 온 응용이가 돌아왔다.

호루룩!!!

녀석을 쓰다듬어준 나는 은하연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응용이 때문에 마지막 말은 제대로 못 들었소. 마 어쩌고 하던데 뭐라고 했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성이랑 우 소협은 기숙사 가서 자치회 하급간부들 좀 다 불러와. 철이랑 선이는 차 좀… 아니다 양호처에 가서 잠 안 오는 탕재 좀 받아올래?”

그렇게 총학생회실이 바빠지기 시작한 때.

나는 응용이의 다리에 매달린 전서를 확인했다.

『남궁윤, 남궁영 두 녀석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남궁가의 가주님이 동도회에 참석 의사를 밝혀 오셨다.

무창에 도착하시면 내가 모실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전서엔 엄청난 희소식이 적혀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실력자인 것처럼 묘사되면서도, 원작에선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안 했던 사람이 검황인데?’

그런 분이 동도회에 함께해 주신다면,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는 전력이 될 터였다.

하여,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찰나.

“용운 님? 모두 복귀 하셨네요?”

제갈설지의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왔는데.

“제갈 누님 오셨어요!”

“설지야 하연이 표정 좀 봐. 언용운이 또 일 벌이기 시작했어.”

모두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준 그녀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용운 님? 오는 주말에 혹시 시간이 좀 되실까요?”

“시간은 왜?”

“저희 할아버님께서 용운 님을 한번 뵙고 싶다 하셔서요.”

“천기묘산 어르신께서 말이오?”

제갈설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 역시 반가운 소식이었다.

‘일단 관심은 있으시다는 소리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없는 시간도 내야지. 뵈러 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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