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5화. 동도회 (6)
회주를 선임한 동도회는 회칙을 정하고 모임을 파했다.
하여, 발족식에 참여한 내빈들과 생도대표들이 각자의 숙소로 돌아간 때.
“빈니는 이 자리에 앉겠습니다. 천기묘산 선배님께서 상석에 앉으시지요.”
“명색이 총장실인데 그리해도 되는가?”
“이 모임은 기실 동도회의 연장인 만큼,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정무학관의 총장 경혜와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 교수들.
“하기야. 그렇긴 하지. 그럼 사양하지 않고 앉겠소.”
“하북권웅도 거기 회주님의 왼편에 앉으시면 되겠습니다.”
“사태의 배려. 감사드립니다.”
동도회의 회주 제갈척과 간사 언정웅.
그리고 무림맹주 공손무결과 전 무림맹주 남궁원.
“이 공손 모는 그럼 여기 말석에 자리하겠습니다.”
동도회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경혜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회칙이 참으로 깔끔하게 정해졌습니다.”
그녀의 말에, 운매관의 사감교수 팽재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실로 그렇습니다. 회원들은 연공 서열에 집착지 않고 상호 예의를 갖춘다. 의로운 행동은 서로 권하며, 환난이 미치면 돕는다. 간단하면서도 꼭 필요하다 싶습니다. 정웅 형님과 맹주님이 머리를 맞대 만드셨다 알고 있는데 두 분 모두 대단하십니다.”
“하하하. 맹주랍시고 번듯한 태사의에 앉아있었지만, 매번 손 놓고 있기 바빴는데. 앞으로 문제가 발생한다면 백본회의 재가와는 관계없이 동도회가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손무결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만 움직여도 자연스럽게 백도무림 전체의 일이 될 터. 무림맹이 나설 근간이 될 테지요. 규약 부분은… 사실 제가 기여한 바가 적어 말하기 부끄럽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언 선배?”
“금칠은 그쯤 하십시오. 맹주님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 공손 모는 그저 좋다는 답변을 드렸을 뿐인 것을요? 언 선배, 아니 간사님께서 마련하신 규약이지요. 용운이의 재기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크흠. 용운이는 제가 낳았지만 어디서 그런 녀석이 나왔는가 싶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흐흫흠. 큼. 크흠.”
언정웅이 겸양하듯 입을 열자, 윤국관의 사감교수 제갈민이 말했다.
“금칠이 아니라, 정말로 친목회로 출범한 모임의 취지에 딱 들어맞는데….”
그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는데.
“유사시에 회원들이 움직일 수 있는 근간이 될 수 있고. 세 가지 규약이 주자(朱子)님 말씀과도 맥이 통하니, 명분도 있지요. 하여, 누구도 반대치 못하고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 향란관의 사감교수 창량.
“천하가 어지럽고 마인들의 기세가 흉흉하여 빈도도 동의했습니다만….”
그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우려되는 점을 말했다.
“이 동도회라는 조직은 잘못하면 전가의 보도처럼 악용될 수 있습니다. 무림맹에는 그런 폭거가 일어나지 않도록 여러 가지 견제 장치가 있지만… 동도회는 그런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창량의 말에, 청죽관의 사감교수 노삼이 혀를 차며 말했다.
“또. 그놈의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만.”
“쓸데없는 걱정이라니요. 동도회는 무림맹의 상위조직처럼 변모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듣고 있던 남궁원이 입을 연 건 이때였다.
“하나, 어떠한 강제력은 없지 않나. 동도회엔 저 세 가지 규약과 회비에 관한 규칙만 있을 뿐. 기실 어떠한 강제적인 조항은 없네. 그 말은 즉, 회원 개인의 의와 협이 모여 나아가는 조직이라는 소리야.”
제갈척은 그런 남궁원의 말을 이어받아 말했다.
“그렇게 뭉쳐진 의사가 그른 길로 향한다면. 그건 백도무림 자체가 더 이상 정도를 입에 담을 수 없는 구정물이 되었다는 말일 걸세.”
“그럼. 그럼.”
“그렇게 썩어 빠졌다면야 망하는 게 맞지. 그저 혈통과 무맥을 이었다고 정도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말이 틀렸나 창량 도장?”
“…그 말씀이 맞습니다.”
“이제 막 출범한 조직이니, 세월을 겪으며 보완이 되든 썩어가든 할 테지. 당장에 중요한 것은 상대를 직시하고 무엇을 준비할지 생각하는 것일세.”
운을 뗀 제갈척은 거침없이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십만대산의 저력은 내가 대군사로 있을 때 파악한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백도무림 전력의 삼 할 정도는 됐었네. 그런 놈들이 중원으로 나오고자 하는 행동을 벌였다면 교세가 두 배는 커졌다는 계산이 성립해. 아니 그런가 공손맹주?”
“맞는 말씀이십니다. 다만 괴룡을 비롯한 여러 후기지수의 분전 덕분에 마인들의 기도(企圖)가 막혔고 저희와 새외의 관계는 돈독해졌습니다. 거기다 마교가 혈교와 갈라서기도 했으니….”
“가재는 게 편이라 했어. 물론, 갈라선 직후인 만큼 천마신교와 혈교가 편을 먹기야 힘들겠지만. 위험을 계산할 때는 합쳐야지.”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족히 사 할은 된다는 계산입니다.”
“게다가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 놈들은 교주라는 절대적인 구심이 있지만 우리는 언제고 연합체일 수밖에 없네.”
날카롭게 상황을 재단한 제갈척은 중점으로 두어야 할 사안을 꼽았다.
그리고 당면과제를 말했다.
“강호인들이 마교라는 집단을 직시토록 해야 하고, 결집을 도모해야 하는 게 일대 과제인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당장의 동도회는 오대세가가 주축인 형국일세.”
제갈척의 말은 맞았다.
회주는 제갈척.
간사는 언정웅.
이를 강력하게 지지한 세력은 하북팽가와 사천당가.
후보로 나섰던 남궁원이 사퇴를 했으니, 오대세가가 주축이라는 말은 전혀 과언이 아니었다.
그에, 자리한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때.
제갈척은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하북의 연락소는 간사인 언 후배가 맡아야겠으나, 다른 성(省)들은 구파에 맡기는 것도 방법일 성싶구먼.”
듣고 있던 남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늙은 생강이 여전히 맵기는 하구만? 거, 회주 자리를 양보한 보람이 있어.”
“언제는 그릇이 간장 종지만 해서 책상물림이나 해야 할 위인이라더니?”
“그거야 자네가 욱이 이야기를 들먹이며 긁어대니 그런 거지.”
“그리고 양보는 개뿔이. 안 될 거 같으니 물러나는 것을 두고 세간의 사람들은 쫄아서 튀었다고 말하기로 합의했네.”
“허. 내가 전력으로 했으면 몰랐어. 학관에 다니던 시절부터. 번번이 나한테 깨졌던 것 다 잊었나?”
“그 이야기는 또 왜 꺼내?!”
그렇게 티격태격하기를 잠시.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제갈척은 다시금 남궁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뭐, 백도무림의 결집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뒤를 맡길 싹들을 길러내는 일이지. 늘 그래왔지만 정무학관의 역할이 중요하오. 그래서 말인데 검황. 그 괴룡이랑은 어떻게 하기로….”
“에잇! 거 그런 식으로 먼저 말하지 말라니깐!”
* * *
동도회 발족식을 성황리에 치러낸 다음 날.
남궁윤은 내게 서신 한 장을 내밀었다.
“조부님께서 너와 은하성의 무공을 봐주시겠다며 초청장을 써주셨다.”
“음. 보민장으로 오라고 하시네, 이거 너희 방계 가문의 장원이지?”
“맞다.”
남궁윤이 내민 서신을 읽던 때.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는데.
- 이미 합의를 보았으니, 그냥 오라는 말을 하면 될 것을 저리 남궁가의 가주 인이 찍힌 서간을 보내는구나.
‘그러게요. 참. 궁윤이네 가문답습니다.’
사부님의 말에 답을 하고 있자니, 당옥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근데 남궁세가는 남한테 막 무공을 전수해주고 그래? 언용운이야 본인 무공이 있으니 심득을 일깨워 주시는 정도겠지만, 하성이한테는 상승무공을 가르쳐주기로 했다며? 우리 집은 안 그러는데.”
그런 당옥기의 말에, 천장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누님 집안이 워낙에….”
“…우리 집안이 뭐, 말 잘해라?”
하나 당옥기의 살쾡이 눈이 이어지자, 급히 말을 돌렸다.
“워낙에… 아! 복철이 이 그지 새끼는 내가 시킨 일은 제대로 하고 있나?! 십만대산 쪽 동향에 관한 자료를 살뜰히 챙겨오라고 했는데 잘하고 있나 가봐야겠네!”
“캭!!! 어디가 천장호! 대답 안 해? 우리 집안이 뭐가 어때서?!”
그에, 당옥기의 노성이 이어지는 때.
은하연이 턱을 만지며 말했다.
“사실 완전 남은 아닌데.”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사실 하성이가 남궁세가의 방계가문 규수랑 정혼 비슷한 걸 한 상태거든요.”
그 말에, 남궁가의 남매를 제외한 모든 언동생들이 저마다 놀란 눈을 하는 때.
은하연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애초에 그래서 천뢰검법을 익히고 있었던 건데? 다들 모르셨나요?”
“금시초문이오.”
나도 은하성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녀석이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말이 정혼이지, 사주단자 같은 게 오간 건 아니고 그냥 부모님 선에서 이야기만 오갔던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은휘상단이랑 남궁세가가 이래저래 부딪히는 일이 많다 보니 정략으로다가… 정작 저는 그 규수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런 녀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가 남궁가의 규수 하나를 살렸음을 알겠군. 처음 만났을 때 저거 완전 저질이었는데.”
“…아니 용운 형님. 사람 더러 저거라고 하시는 것도 모자라 저질이라뇨. 그리고 솔직히 저질까지는 아니었….”
내 말에 은하성이 항변하는 때.
은하연과 남궁윤이 동시에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고.
“그 정도였어.”
“그 정도였다.”
뒤이어 정현과 남궁영이 말했다.
“확실히 언 소협도 은 소협도 세간의 평이 좋으시지는 않았지요. 빈도는 두 분을 통해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도를 배웠었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그 댁 가주님이 본가에 와서 하소연하시기도 했었어요. 문중의 결정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무를 수 없겠냐고요.”
그에 은하성도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입을 열었는데.
“허! 차! 저도! 저 싫다는 집은….”
“너 싫다는 집은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말끝을 흐리기에 되물음을 던지니, 녀석은 빠르게 말을 바꿨다.
“마음을 바꾸시도록 열심히 해야죠! 수련하러 가시죠. 어르신 기다리시겠습니다.”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에 나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 * *
남궁원이 묵고 있는 보민장에 걸음 한 지 칠 일여.
은하성은 본격적으로 남궁세가의 상승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파치치칙!
“그저 뇌기를 휘감아 강하게 휘두르는 게 다가 아닐세. 먼저 공간을 장악하고 비로소 검에 깃든 벼락을 내리치는 것일세.”
“명심하겠습니다.”
반면에 나는 그저 찌르고 가로 긋고 세로 베는 기초적인 초식만 반복하고 있었다.
부우우우- 웅
다만, 그 과정을 엄청나게 느리게 행하고 있다는 게 다른 점이었는데.
오늘도 그렇게 검을 둔하게 휘둘러 내는 데 집중하기를 한참.
남궁원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지겹지 않은가?”
“시키신 분이 하실 말씀이십니까?”
“시킨다고 군말 없이 하는 녀석은 처음이라 말일세.”
“에이. 검황 어르신이 시키는데 투덜거린 녀석이 있으려고요?”
“입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행동에서 묻어나는 법이지. 이걸 왜 해야 하나 하는 그런 태도가 말일세. 심지어 자네는 화경에 든 고수가 아닌가? 답답할 텐데?”
“이렇게까지 둔하게 휘둘러 보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수련을 하고 있긴 했습니다. 화경의 고수라 한들 변초와 환초 같은 것을 걷어내면 결국 베고 찌르는 것이 검초 아니겠습니까?”
그런 내 답에, 남궁원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거, 참. 세워온 공들을 보면 미련한 위인은 절대로 아닌데… 그렇다면 인내력과 근성이 대단하다는 것일 터. 여러 가지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먼.”
말을 마친 남궁원은 곧바로 허리춤의 검을 뽑으며 말했다.
“지금 휘두르던 속력 그대로 들어와 보시게.”
그 말에 따라, 나는 검을 휘둘러 들어갔고.
남궁원은 그런 내 검초에 딱 맞는 속력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채앵!
그에, 한참 만에 맞물린 회한과 남궁원의 검이 쇠 긁히는 소리와 함께 교차하는 때.
끼기기기긱.
남궁원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저 무당산만 해도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일세. 하나, 처음 오를 때는 정도를 택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네.”
“근간을 든든히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맞네. 높은 경지에 이르면 발 아랫것들이 모조리 까마득해 보이지.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 한다는 말과도 맥이 통하는데, 절대고수들과의 싸움에선 편법이 어지간해선 통하지 않네. 결국 쌓아온 근간이 승패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지.”
채앵! 채애앵!
“자, 방금의 합보다 두 배의 시간을 더 써서 한 번 휘둘러보도록 하세.”
그렇게 둔하게 휘두르는 검식 속에 남궁원과의 대련이 이어졌다.
느리디느린 대련을 연속해 이어가자, 또다시 칠일 여의 시간이 훌쩍 지났고.
이후로는 다시금 원래의 속도를 되찾아가는 방식의 대련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음?’
여전히 까마득했지만.
남궁원이 딛고 있는 경지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간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