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8화. 사해동도 (2)
“다들 표정들이 왜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닌가?”
한바탕 호탕하게 웃은 제갈척은,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심지어 아주 예쁘게 엎질러진 성싶은데? 혈교의 기둥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정보를 뽑아내고 있는 형국이니 말이야.”
그 말에, 창량 교수와 아버지가 연이어 입을 열었는데.
“그렇게 웃고 넘어가실 일이 아닙니다. 선배님!”
“…저도 창량 도장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칭찬하실 일이 아닌듯합니다. 용운이 너는 어쩌자고 그리 큰일을 혼자 벌였느냐?”
그런데도 제갈척은 나를 두둔했다.
“어쩌자고 벌이긴, 마인들을 거꾸러뜨리고자 한 일이구만. 본디 어지러운 시국엔 비상한 방법이 필요한 법일세. 그리고 홀로 벌인 일은 아니라지 않나? 혜아와 상의를 했다면 최소한의 절차는 지킨 것 아니야?”
듣고 있던 공손무결이 입을 연 건 이때였다.
“덕분에 양발이 믿는 도끼에 찍힌 기분입니다. 용운이 녀석도 녀석이지만 대군사님께서는 어찌 이런 일을 제게 귀띔도 해주시지 않을 수 있는지….”
“내 여식이라 두둔하는 게 아니라. 책사가 큰 그림을 그리다 보면 때로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도 있는 법이라네.”
“검황 선배와 선배님의 사이가 무림맹에 들어가시고 나서 더욱 앙숙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그런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음성에, 사부님께서도 한마디를 하셨다.
- 먼저 일을 저지르는 그 습성. 내 언젠가 한 번은 혼구녕이 날 줄 알았느니라.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렇게 한 거죠.’
이만한 일을 몰래 진행해왔다는 사실에 섭섭했을 것이고.
독고철이 혈교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 놀랐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기에, 어떤 말씀을 하시든 달게 받겠다고 생각하던 때.
제갈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어떤 마음인지 나도 알고 있네. 괴룡 본인은 물론 학관 사람들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일이고, 특히나 향란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이지. 선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
“맹주의 심정도 나는 이해해. 혜아와 괴룡. 두 사람 모두에게 공적 사적 양면으로 섭섭하겠지.”
“…….”
“하나 솔직히 말해보세. 이 일을 털어놓았다면 정말로 허락했겠나?”
“…….”
“나도 그렇고 자네들도 그렇고, 머리와 마음이 굳은 사람들이네. 우리의 머릿속에는 절대로 안 되는 영역이 있어. 언 간사도 괴룡을 쫓아냈을 때를 돌이켜보게.”
“…….”
“괴룡은 본인의 억울함을 소명키보다는 가문을 박차고 나온 위인 아닌가? 저 아이가 이 일을 몰래 진행한 데에는 기실 어른들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수가 없어.”
제갈척의 물음에, 자리해있던 학관의 운영위원들 중 대부분이 묵묵부답했다.
하나, 경혜 사태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하오나. 꾸중을 듣기는 해야 하는 일입니다. 빈니 역시 언 회장을 누구보다 많이 아낍니다. 오죽하면 아미에서 성토해올 정도로요. 하나, 이번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걸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감도 오지 않습니다.”
“물론 혼이 날 것은 나야겠지. 하나, 다른 자리에서 총장으로 아버지로 교수로서 혼을 내시게. 오늘 이 자리는 동도회의 수뇌로서 적을 직시하는 자리가 아닌가?”
“…….”
“일단 괴룡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세.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차근차근 바로잡으면 될 일이야.”
* * *
회장을 차분하게 만든 제갈척은 내게 질문했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지금부터는 숨김없이 답을 하게.”
“하문하십시오.”
“휘하에 넣었다는 혈교인들은 어떻게 통솔하고 있는가?”
“어떻게 휘어잡았는지는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고… 독고세가의 경우는 교내에선 남궁영과 장선이 거의 함께 다닙니다. 아니면 저랑 있거나요.”
“교외에선?”
“독고철과 송호겸의 보고를 교차검증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뿐이라면 느슨한 것 아닌가?”
“옥죄지 않는 방식으로 고삐를 거는 방식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송길준을 잡을 때 혈교를 움직였던 일을 떠올려보시면, 완전히 제 통제하에 있다는 증좌가 될 것입니다.”
“그렇구만. 대주교 쪽은?”
“남해 대주교의 경우 기본적으로 해적이기 때문에 통솔이라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산하에 두었다 정도로 해야 할 듯합니다.”
팽재혁이 팔짱을 끼며 입을 연 건 이때였는데.
“해서, 그 계획의 다음 단계가 뭐냐?”
“조만간 혈교에서 어떤 형태로든 창시를 위한 움직임이 있을 겁니다. 그때 혈마에게 다가갈 기회가 생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갈척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자체로 혈마를 제거할 기회라 이거구만?”
“예.”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겠네. 자네에게 천마신교와 혈교, 독고철은 무엇인가?”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교라 하면 천 리를 마다치 않고 뛰어다니는 모습에. 외숙부가 소천한 일로 그저 마인이라고 하면 이를 가는 줄만 알았는데… 오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마냥 없애야 할 마귀라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그렇게 이어진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마인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우리 파천검문이 나온다.’
태사부님과 사부님의 인생에 과연 마(魔)라는 글자를 붙여도 되는 걸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답할 말이 금세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이라 생각합니다.”
“길?”
“동도회의 발족식에서 어르신께서는 구정물이 되면 더 이상 백도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지.”
“그와도 맥이 통합니다. 백도무림에 속해있으면서 속이 시커먼 위인이 있을 수 있듯. 마교에 귀의한 이들 중에도… 검이 필요해 손을 뻗었을 때. 잡힌 게 마공 밖에는 없었을 이들도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공 자체에는 죄가 없다는 말이로구먼?”
“담백하게 생각하면, 그저 스스로를 상하게 할 뿐 아니겠습니까? 물론 쉽게 강해질 수 있는 마공이 퍼지면 사도에 혹하는 이들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건 선도가 필요한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
“물론 십만대산의 경우 증오가 대물림되어 불구대천의 지경에 이르렀고. 벼려진 그들의 무위는 만민을 신음하게 함과 동시에 저희를 노려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뜻대로 죽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만히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
“다만, 몰리고 몰려 마도에 들어선 자라면. 그리고 그 마음속에 스스로가 검을 쥔 이유가, 사람됨이 아직 남아있다면… 한번은 기회를 줘도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 내 말에, 제갈척은 수염을 만지며 물었다.
“독고철과 대주교는 그 범주에 들어간다는 겐가?”
“외람됩니다만, 독고세가의 경우는 명백한 선대 백도무림인들의 과오입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혈교 쪽이 신흥이라 교세를 무리하게 확장하다 보니 말씀 드린 예외에 속하는 이들이 좀 많습니다.”
“…….”
“남해 대주교도 악명을 쌓았지만, 그 시작은 해안가의 백성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물론 그게 면죄부는 될 수 없겠지요. 혈마를 제거하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각자 합당한 죗값들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철이나 독고세가의 경우는 학관에 잠입시키려 공을 들였던 터라 손에 묻은 피가 없다시피 하긴 하지만요.”
그렇게 내가 할 이야기를 모두 마쳤을 때.
좌중엔 무거운 정적이 내리깔렸는데.
그렇게 고요가 이어지길 한참.
제갈척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다 듣고 나니. 나는 괴룡이 깔아놓은 판을 바탕으로 남은 회의를 계속해도 될성싶은데? 자네들은 어떤가?”
공손무결은 여전히 섭섭한 눈치였지만,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안건에 대한 의견을 냈다.
“첩보에 의하면 천마신교 쪽은 소교주 선발에 들어간 듯합니다. 혈교 쪽은 용운이가 말한 대로 창시선언을 준비 중일 것입니다.”
이어서 경혜사태도 맹주님과 비슷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혈교가 머리가 떨어질 조직이 될 것임을 상정하면, 천마신교 쪽에 집중하면 되는 걸까요?”
그건, 이번 일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들이었는데.
‘휴.’
내가 속으로 한숨을 돌리는 때.
경혜 사태가 한 말의 내용을 두고, 제갈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경우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리려 하면 안 돼. 확실히 잡을 수 있는 녀석부터 잡아야지. 창시선언이든 남해대주교든 언질이 독고세가에는 필히 오겠지?”
“예.”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만겹산에 집중을 하세. 제대로 된 연락소를 마련하려면 점창파 그리고 남만야수궁이랑도 이야기를 해봐야겠구만.”
* * *
동도회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벌인 회의가 끝났을 때.
경혜사태는 언용운과 함께 본관의 후원으로 향하며 설교에 들어갔다.
“…의도가 좋았다 하여 모든 게 용인되지는 않습니다.”
“…옙.”
“제가 언제 언 회장한테 싫은 소리를….”
창량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노삼이 불쑥 다가와 그런 창량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잔소리하고 싶어도 오늘은 그냥 빠져. 총장님이 하고 계시잖나.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너무 많이 들으면 귀에 딱지가 앉으면서 한 귀로 흘리게 되는 법이야.”
“그냥 봤습니다. 그냥.”
그렇게 창량이 본인의 연구실 쪽으로 걸음을 떼려는 때.
독고철, 남궁영, 장선.
입학한 이래 줄곧 붙어 다닌 청죽관의 신입생 삼인방이 멀찍이 눈에 들어왔다.
‘…….’
기수마다 있는 절친한 녀석들로 생각해 왔으나, 언용운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세 사람의 모습 역시 달라 보였다.
‘…독고철에겐 정말로 친우라 부를 수 있는 이가 있는가?’
얼마 안 되는 평생을 고달프게 보내왔을 독고철을 생각하니, 창량의 표정이 조금 복잡해졌는데.
노삼이 마른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용운이 그 녀석은 참 사람을 뜨끔하게 하는 구석이 있어. 손을 뻗었을 때 닿는 것이 마공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는 그 말이 틀린 게 아니야.”
“…….”
“나도 멀쩡한 왕초를 만나 거둬진 덕에 여기까지 왔지. 조금만 엇갈렸어도 인생이 어찌 될지 모른다 싶구만….”
“…….”
“…가만. 내가 왜 자네를 붙들고 이딴 이야기를 하고 있지?”
노삼이 하던 말을 삼키는 때.
창량은 신입생 삼인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창량을 향해 노삼의 다급한 전음이 이어졌으나.
[왜 그래? 뭐 하려고?! 아무 짓도 하지 마! 아니, 이 말코가 갑자기 왜 이래?!]
이미 창량의 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세 사람 앞에 이른 뒤였다.
한데, 막상 당도하고 보니.
무슨 말을 건네도 이상할 것 같다는 생각이 창량의 머릿속에 스쳤다.
“큼.”
하여, 괜히 뒷짐을 지니.
신입생 셋이 동시에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입을 모았는데.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본관에 가는 길이냐?”
창량이 묻자, 마침 독고철이 답을 해왔다.
“예. 교무처에 볼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고생이 많다.”
“예?”
“언 회장 밑에서.”
“아. 예.”
“원체 보통내기가 아니라 애로사항들이 많지? 나라도 부담을 조금 줄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과목의 기말 과제는 없던 것으로 해주마.”
그런 창량의 말에, 신입생 삼인방이 동시에 멍한 표정을 짓기를 잠시.
“???”
남궁영이 입을 열었다.
“어? 저희만은 아니죠? 다른 생도들에게도 전달하면 되나요?”
“그렇게… 하거라. 신입생들 모두 고생했다고 전하고 시험 잘 치라고 전해주고.”
이날 정무학관의 신입생들은 최초로 창량 교수에게 과제 면제를 받았다.
* * *
한편, 은하군도에 위치한 흑시.
이곳에 사겸의 금범선단이 정박하고 있는 때.
한 장의 서간이 도착했다.
사겸이 확인한 서간을 불사르자, 곁에 있던 부단주 허욱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까?”
“다가오는 달의 말일. 주교회의를 열 것이니 소집에 응하라는군… 이거 좀 이상한데?”
“…소집령은 처음이긴 하군요. 하나, 혈천수라궁에서 창시선언을 서두르는 만큼. 점조직을 혁파할 때가 되긴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만?”
허욱의 말에, 사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만인혈이 소멸됐다는 보고 이후로 알겠다는 답 외에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너무 조용히 넘어갔다고 생각지 않나? 귀면옹을 만난 일을 제외하면 사실 그대로긴 했지만, 교단 측에선 응당 문책이 있었어야 했다. 한데 그런 것도 없이 주교회의라….”
“…단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뭔가 싸하긴 한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를 지켜보는 눈을 붙여 두었을 텐데… 이거, 귀면옹께 연락을 취해야 하는가?”
“단주님의 말씀대로 저희를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연락을 취하는 게 가능할런지요?”
“일단 바다 위에 오르면 눈은 떨어질 수밖에 없지.”
“하나 독고세가로 보내려면 결국 뭍으로 사람을 보내야 하지 않습니까?”
“적룡궁을 이용하면 어떨까?”
“적룡궁을 말씀입니까?”
“씹어먹어도 시원찮은 놈들이지만, 그놈들은 백도와 연이 깊다. 백도의 일파로 자리 잡은 독고세가로 향하는 서신을 무시하진 않겠지. 지금 그 녀석들 배가 어린도에 있지?”
“예.”
“준비해라. 놈들의 배가 출항할 때 쾌선을 붙여서 화살을 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