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9화. 사해동도 (3)
만겹산 깊숙한 곳에 위치한 혈교의 본단.
교인들이 혈천수라궁이라 부르는 이곳의 후원엔, 허락되지 않은 발걸음을 불허하는 비동이 있었다.
동도회 그리고 검황과 천기묘산.
강호의 명숙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백도 무림의 두 거물이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강호로 나온 일로 천하가 떠들썩할 때.
혈천수라궁의 비동은 호교법왕 서열 일위에 해당하는 자왕의 비호 속에 꾹 닫혀있었는데.
굳게 닫혀있던 그 문이 비로소 열렸다.
쿠구궁-
뭉실뭉실 새어 나오는 핏빛 안개를 헤치며, 자욱한 피비린내와 함께 등장한 혈마 진괴량.
문을 지키고 있던 자왕은 꾸벅 몸을 숙였다.
“미천한 종이 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반라(半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진괴량을 향해 겉옷을 내밀었다.
“묘왕의 대법은 효험이 있으셨습니까?”
“있더군. 만인혈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말이야.”
“송구합니다.”
“그에 더해 개인적인 성취가 있었다.”
“하면?!”
“아홉 번째 계단에 올랐어.”
“혈염천하! 실로 본교의 복이 옵니다!”
“큭큭. 그래그래. 여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이구만. 딱 기분만 놓고 보면 당장에 십만대산으로 달려가 혁련강의 멱도 틀어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지존의 걸음이시옵고. 본교의 창시선언을 앞둔 때입니다. 방금의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혁련강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는 말을 어렵게도 하는군.”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냐는 소린가?”
“!”
“농담이야 농담. 자왕의 충언을 내가 곡해할 리가 있나. 나도 알아. 혁련강을 거꾸러뜨리는 일은… 혈우신공을 완전히 대성하고 교단도 가다듬은 뒤에야 가능한 일임을.”
“그날을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해 견마지로를 다할 것입니다.”
그렇게 진괴량이 싱글벙글한 기분을 유감없이 드러내길 잠시.
그는 곧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해서, 아랫것들 정리하는 일은 어떻게 됐나? 특히 사겸 그 녀석은?”
“교주님께서 사겸에게 친위 주교 중 하나를 붙이라 하셨지요. 하여 노병오를 붙였습니다.”
“그 녀석이라면 믿을 만하지. 그래서?”
“만인혈이 사라진 일 자체에는 딱히 수상스러운 정황이 없다는 보고입니다. 정말로 흑백무상 두 쌍둥이와 만인혈이 그렇게 수장된 것이 맞는 듯합니다.”
“그래?”
“예. 하나, 이후에 사겸이 백도 놈들과 교전하지 않은 점이 수상하다고 하더군요. 전력을 온존하고자 하는 판단이라기에도 애매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흠.”
“보고로는 혼령들이 나타나는 괴현상이 벌어졌다 하는데, 본디 사겸은 해안의 백성 출신이니 그 같이 행동한 게 이해는 갑니다만….”
자왕의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진괴량의 얼굴엔 쓴웃음이 걸렸다.
“본좌의 명에 맹종하는 자세는 아니지. 백도 놈들의 선단을 밀어내면서 가라앉은 시체들을 뒤졌어야지.”
“바로 그 점입니다.”
“애초에 사겸은 내 뒤를 끝까지 따라올 성정은 아니긴 하지.”
“예. 사겸이 벌어들이는 은이 아깝긴 하나, 금범단의 조직만 잘 흡수해 낸다면 어느 정도 온존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창구도 있고요. 지금 쳐내는 게 맞는 듯합니다.”
이어진 자왕의 말.
혈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음을 던졌다.
“해서?”
“노병오에게 일러 주교회를 소집하라 일러뒀습니다. 교주님만 허락해주시면….”
“그 자리에서?”
“예. 겸사겸사 애매한 다른 자들의 반응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기야, 사정을 모르는 자들 입장에선 갑자기 대주교가 날아가는 상황일 테니… 어떤 상황에서도 본좌를 믿는 참된 신자와 불신자들이 나뉘겠군.”
“그렇습니다.”
“허락하지. 외에 다른 창시 준비는 완벽한가?”
“예. 그렇게 솎아낼 자들만 솎아내고 나면 천하에 혈교가 섰음을 알려도 될듯합니다.”
정중히 소매를 붙이며 답을 하는 자왕의 태도에.
진괴량은 씨익 웃으며 외투를 걸쳤다.
* * *
천하제일후기지수니 신진제일협이니 사람들이 추켜세우는 나라도 기말고사가 피해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여, 혈교 쪽에서 연락이 오길 기다리며 생도로서의 본분에 집중했는데.
“끝.”
마지막 과목의 기말 과제 작성을 끝내고 붓을 내려놓자.
당옥기는 깜짝 놀라며 입을 열더니.
“엑?! 중원의 왕조와 구파일방의 역사 과제를… 벌써 다했다고?”
“어.”
짜증을 내며 책상 위에 머리를 붙였다.
“부러워! 아니 창량 교수님은 왜 일학년만 과제를 면제해주신 거야?! 해주려면 다해주던가! 캬아악!”
그에, 팽소진은 피식 웃었고.
“휴학했다 복학한 걸로 유일하게 이득을 본 부분이네. 정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부신 걸까?”
은하성과 우소릉은 냉큼 내 쪽으로 다가와 과제를 살폈다.
“대충하신 거 아닙니까? 어떻게 그렇게 빨리하실 수 있죠?”
“헉. 대충한 건 아니신 거 같은데요? 제가 고서 찾아가면서 쓴 것보다 언 형이 더 잘 쓰신 것 같아요.”
은하연이 입을 연 건 이때였다.
“우 소협. 그거 빨리 언 공자한테 돌려주세요. 하성이 저거 눈알 굴리는 게, 베끼려는 눈치에요.”
그런 은하연의 말에, 나는 손에 잡히는 두루마리를 빼 들어 녀석을 후려쳤는데.
“쪼금만!”
“아!”
“잘한다 싶으면!”
“아앜!”
“꼭!!”
그런지 잠시.
은하연이 내 쪽으로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언 공자도 끝은 뭐가 끝이에요?!”
그리고 본인 머리까지 쌓인 서류 더미를 들고 와 책상 위에 올렸다.
“이건 내년도 입관시험 준비에 관한 문건이고요, 이건 계절학기 수강생 명단, 그리고 이게 방학 동안 생도들이 지원 가능한 파견처요.”
“…….”
“다 확인하시고 결재하세요. 끝나고 나면, 교류생들이랑 면담할 준비도 하시고요.”
“…알겠소.”
그에, 다시금 붓을 들고 일거리들을 쳐내길 한참.
똑똑-
누군가 총학생회실의 문을 두드리기에 입을 여니.
“문 열려있습니다.”
적룡궁의 소궁주 정원해가 굳은 표정으로 찾아와 입을 열었다.
“괴룡. 잠시 시간을 좀 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안 그래도 제가 먼저 찾아뵈려고 했었습니다. 안쪽으로 드시죠.”
표정을 보아하니,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 같았기에.
나는 정원해를 내실로 데리고 들어와 차를 내주었다.
그러자, 그가 품에서 흙덩이 같은 것을 꺼내 내게 건넸다.
그냥 보기엔 열어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진흙을 구워 넣는 방식의 서찰 같았는데.
“서간입니까?”
“살짝 옆으로 돌려보십시오.”
“독고세가? 독고세가로 향하는 서간이 왜 저에게?”
내가 되묻자, 정원해는 소매 춤에서 원통형 목함을 꺼내 보였다.
“그게 원래는 이 목함에 들어있었습니다.”
정원해가 내민 목함의 옆면엔, ‘적룡궁의 소궁주는 보시오.’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그에 사부님께서 입을 여셨다.
- 무슨 놈의 서찰을 저리도 번거롭게 보낸단 말이냐?
‘맞는 말씀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독고세가에 서신을 보낼 자라면….’
적룡궁의 손에 독고세가로 향하는 서신을 이런 방식으로 보낼 사람은 천하에 하나밖에 없었다.
“금범단주가 보낸 서간인 듯합니다?”
“역시. 바로 알아채시는군요. 여느 때처럼 해적들과 시비가 붙은 줄 알았는데, 놈들이 이 서간을 화살에 매달아 쏘았다고 합니다.”
“…흠.”
“열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수신인이 저로 돼 있어서 궁인들이 훼손치 않고 제대로 보관을 해왔고, 최종수신자가 독고세가라 돼 있어 저도 바로 괴룡에게 오는 길이니까요.”
동도회의 수뇌부에 독고철에 관해 공개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 일이 동네방네 떠벌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적당한 구실을 들어 입을 열었다.
“예. 적룡궁의 신의를 믿습니다. 아마, 남해에서 철이가 돌아다니며 천마신교가 주적임을 공지하던 모습을 금범단주가 눈여겨보았나 봅니다.”
“그런 모양입니다. 그 모습에 우리도 느끼는 것이 많았습니다.”
정원해를 이해시킨 나는 곧바로 흙으로 된 봉인을 부숴 안에든 조그마한 서찰을 꺼냈다.
『주교회의가 소집됐다. 옹을 뵙고 싶다.』
함께 내용을 확인한 사부님께서는 한마디를 하셨다.
- 해적 놈이 나름대로 머리를 썼구나.
‘흑도와 마도의 틈바구니에서 잔뼈가 굵어 온 사람이니까요.’
사부님께 답한 나는 정원해가 서간이나 독고세가에 더 관심을 두지 못하도록 예의를 차려 일축했고.
“송구하지만 내용은 맹주님께 먼저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해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리하십시오. 본궁과 관련된 사안이라면 괴룡이 어련히 알아서 이야기를 해주시겠지요.”
이어서 원래 정원해를 찾아가려던 용무를 꺼냈다.
“이건 이거고. 소궁주께서는 내년에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처음에는 그저 뭍의 사람들과 완전히 척지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저 체면만 좀 세워주고,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괴룡이 어떤 위인인가 보자 그런 마음이었지요.”
“큼.”
“한데, 정무학관에 와서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고 나니 조금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럼?”
“어머님께 느낀 바를 서간으로 전하고, 내년에도 여기서 수학을 할 참입니다. 계절학기도 신청을 했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학관의 제도를 잘 모르실 텐데, 방학 기간에 학관에 남는 생도들을 위한 여러 가지 지원책이 있습니다. 제갈 소저에게 가시죠. 자세히 안내해줄 겁니다.”
그렇게, 정원해를 제갈설지에게 맡긴 나는 본관의 한 층을 차지하게 된 동도회의 사무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겸이 적룡궁의 손을 빌려 서간을 보낼 정도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는 거다.’
* * *
내가 동도회의 문을 두드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뇌부가 소집됐다.
나는 어른들에게 서간을 내보이며 내 생각을 말했는데.
“사겸은 생존 감각이 비상한 자입니다. 그가 이런 방식으로 전언을 보냈다면, 사면초가 비슷한 상황에 놓인 게 아닐까 추측합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경혜 사태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
“창시선언을 하려는 모양이로군요. 빈니가 직접 가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마인들을 다 도륙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예?”
“언 회장은 왜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따지고 보면 빈니가 언 회장과 제갈 부회장을 대신하여 마인들의 틈에 숨어들어 간 적도 있지 않습니까? 나도 할 수있습니다.”
그에, 제갈척이 허허롭게 웃으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후배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괴룡이 벌여 놓은 일로 깜짝 놀랐던 상황에서 이런 연락까지 오니 흥분한 건 알겠는데, 서신의 내용과 괴룡의 말을 상기해보시게. 이건 창시선언을 하는 자리가 아니야. 주교회의라 하였지 않나.”
“…아.”
“이 늙은이가 보기엔. 아마, 출범 전에 누런 떡잎을 솎아내려는 작업으로 보이는구만.”
원작의 지식 없이도 흐름을 짚어내는 제갈척의 모습에, 내가 잠시 감탄하는 때.
‘과연 천기묘산이라 불릴 만하시다.’
창량이 입을 열었는데.
“제 귀엔 용운이가 가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제대로 이해한 게 맞습니까?”
“귀면옹을 찾고 있지 않나? 우리 중에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어? 당연히 용운이가 가야지.”
제갈척이 반론이 나오기도 전에 말문을 막아 버리자, 공손무결이 의견을 냈다.
“그럼 제가 함께 가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안 돼. 인선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맹주만큼은 안 되네. 자네는 종남으로 가야 해.”
“종남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리의 복심이 만겹산의 혈교인 만큼. 겉으로는 십만대산을 견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보여야 해. 일종의 허허실실이지. 그렇지 않나 괴룡?”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천마신교와 혈교 중엔 당연 천마신교 쪽의 전력이 강합니다. 맹주님이 그쪽 연락소를 신경 쓰는 모습이 자연스럽습니다.”
내가 답하자.
제갈척은 정답을 말했다는 듯 흡족하게 웃으며 아버지를 응시했다.
“같은 맥락으로 언 간사는 하북의 본가로 돌아가 줘야겠어.”
“하북으로 말씀입니까?”
“그래, 괴룡에게 쏠려있는 관심도 좀 분산시킬 필요가 있어.”
“…아. 제가 용운이와 함께 본가로 가는 것처럼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맞네. 미리 언가에 잔치 준비도 하라 이르고. 젊은 영웅들이 온다고 소문도 살짝 내고.”
“…….”
“…왜 답이 없는가? 이게 괴룡을 안전하게 하는 일인데? 차남과 친우 몇을 정말로 진주언가로 동행시키면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아. 잠시 부인 생각이 났습니다. 기대를 할 터인데… 뭐, 용운이가 안전해지고 천하가 평안해지는 일이니. 제가 감당을 해야지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한데 그럼 만겹산 쪽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 늙은이가 직접 가겠네. 번듯한 생도 몇을 데려가며, 하북 쪽과 똑같이 요란을 떨면 동도회주의 첫 행보가 무엇인지 절로 관심이 따를 것이니. 시선을 잡아끌겠지.”
“아하.”
“하나, 결국 내가 명예직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면 마음을 놓을 테고? 유사시엔 적재적소를 차단해 괴룡을 지원하도록 하지.”
제갈척의 마지막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때.
제갈민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의 말씀이 모두 좋아 보입니다만. 소자의 생각으론 괴룡의 종적을 완전히 지우기엔 만겹산까지는 너무 멀다는 생각입니다. 괴룡과 함께 움직일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가려줄 그늘이 필요할 성싶은데요?”
“사실 나도 그거 하나가 딱 고민이긴 하구만. 표국이나 상단으로 위장하는 건, 괴룡의 명성에 마인들이 찔러 볼 게 뻔하고 말이야.”
그렇게 두 사람이 미간을 좁히는 때.
나도 잠시 생각을 곱씹어 보았다.
‘사겸은 적룡궁을 이용해 뜻을 전했다.’
사해는 동도라는 이 모임의 기치에 걸맞은 행동이 머릿속에 스치자.
문득 그늘막으로 삼아도 좋을 법한 상대가 내 머릿속에 스쳤다.
“녹림왕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