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80화 (380/444)

제380화. 사해동도 (4)

“태원이가를 살펴달라던 맹주님의 부탁으로, 산서성으로 대민지원을 나가던 길에 녹림왕을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녹림왕 도중광.

내가 신입생이던 때, 그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당혹스러운 우연이었으나, 그 덕에 천마신교 녀석들이 녹림도를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걸 토대로 제 외가인 태원이가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당시 그 일을 해결해 달라던 도중광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결과적으로 녹림왕을 도와준 일이 된 것인데. 당시에 그는 다른 목적이 있어 노삼 교수님께 접근했던 것 같았습니다. 노삼 교수님. 아닙니까?”

“…도중광. 그 산적 두목 놈.”

그런 내 질문에, 노삼이 머리를 긁적이는 때.

제갈척은 수염을 쓸며 웃음을 지었다.

“백도의 기린아가 녹림을 그늘막으로 사용한다? 허허. 그야말로 말랑말랑한 발상이긴 하구만?! 그래서, 광풍투개. 저 이야기가 다 무엇인가? 나로서는 금시초문이구만?”

그 말에 답한 건 공손무결이었다.

“밖으로 돌릴 이야기는 아닌지라… 내막까지 다 아는 사람은 천하에서도 손에 꼽을 겁니다. 더욱이 선배님께서는 은퇴 중이지 않으셨습니까?”

“하여, 무슨 이야긴데?”

“용운이가 조금 말을 하긴 했는데, 천마신교 놈들이 사특한 연단술로 빚은 환단을 미끼로 녹림도 같은 하류무인들을 꾀어내고 있었습니다.”

“흐음. 그랬던 것을, 괴룡이 천마신교의 세력을 축출하면서 구해준 꼴이 되었다?”

“정확하십니다. 선배님.”

듣고 있던 경혜 사태가 입을 연 건 이때였다.

“그 외에 다른 이야기가 더 있는 거 같은데요? 녹림왕이 노 교수님께 따로 목적이 있었다는 부분 말입니다.”

이어진 질문에, 노삼이 직접 답했다.

“크흠. 제가 학관에 들어와 교수 소리를 듣기 전에, 도중광 그 산적 놈이랑 강호에서 이래저래 부딪힌 바가 많지 않았습니까?”

“해서요?”

“애들 데리고 산서에 가던 길에, 악연도 연이라고 그 산적 놈이 제게 금분세수(金盆洗手)를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야기가 이어지는 중, 사부님께서는 질문을 해오셨다.

- 금분세수면… 흑도가 손을 씻는 일 아니냐?

‘맞습니다.’

- 날만 잡으면 되는 것을 노삼에게 왜 부탁을 했을꼬? 거지를 통해 알리려고?

다만 사부님의 말처럼 간단한 건 아니었다.

‘사부님께서는 세상 무서운 게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검을 휘두르셨으니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금분세수를 통한 악업을 청산하는 일.

이를 위해서는 공개적으로 때와 장소를 공언한 뒤, 날이 새도록 자신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의 도전을 받아내야 했다.

그렇게 원수들의 도전을 받아내는 데 성공해내면, 악업이 청산되었음을 인정한다.

‘녹림왕쯤 되면 해묵은 원한이 어마어마하겠죠. 단순히 개방을 통해 알리려는 생각보단… 노삼 교수님을 보증인으로 세워서 원수의 숫자도 줄이고 이후의 삶도 보장받고 싶었나 봅니다.’

사부님과 몇 마디를 나누고 있기를 잠시.

팽재혁이 턱을 만지며 좌중을 향해 물었다.

“음? 그런데 도중광이 금분세수를 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본 것 같은데요?”

그 물음에 답한 건 공손무결 이었다.

“노삼 선배가 그 이야기를 전해주시긴 했는데, 내가 뭉갰다네.”

“아?”

“도중광 정도면 그래도 말이 통하는 흑도인 아닌가? 안 그래도 어지러운 강호. 왕이 사라져 개판이 된 녹림까지 추가할 이유는 없지.”

공손무결의 말이 끝났을 때.

제갈척이 각탁을 두드려 주위를 모았다.

“그러니까. 녹림왕이 우리에게 확실히 원하는 것이 있고. 거기에 더해 약간의 빚도 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구먼?”

그렇게 논제는 정리가 되었고.

“빈니는 걱정이 되는군요. 아무리 도중광이 녹림왕이라 불린다지만, 녹림이라는 집단 자체가 그리 끈기가 있는 집단이 아닐 텐데요?”

“빈도의 생각도 같습니다. 그를 설득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산적들의 입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맹주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두 분의 우려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만. 되레 그렇기에, 도중광의 협조만 구해내면 귀면옹의 행보가 안전해질 성싶습니다. 녹림이 끈끈하진 못하나, 그렇다고 녹림왕의 입김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은 아닙니다.”

이후로 열띤 갑론을박이 있기를 한참.

회주인 제갈척이 녹림왕의 도움을 받자는 내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론을 냈는데.

“그럼 괴룡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이어서 내게 질문을 해왔다.

“남은 것은 인선이구만. 괴룡. 녹림을 통해 혈교의 중추로 향할 조는 어찌 구성할 생각인가?”

“음. 우선 녹림왕과 이야기를 트려면 노삼 교수님께서 동행해 주셨으면 싶습니다.”

“그야 그리해야지. 나머지는?”

“적당한 때에, 독고철에게 우리의 상황을 정무학관의 친우들에게 터놓자는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다.”

“호오? 그걸 받아들이겠나?”

“받아들이게 만들어야죠. 다만, 쉽게 받아들이게 하려면 아무래도 함께 부대껴온 청죽관 생도들을 중심으로 꾸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귀면옹 조의 인선은 내 뜻을 존중한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던 모양인지, 반대는 없었다.

어른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다면. 이 늙은이와 함께 갈 생도로는 남궁윤 생도가 좋겠네. 대외적으로는 괴룡이 하북의 본가로 향한다고 알려질 터.”

제갈척은 본인이 이끌 남만조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학관 석차 이, 삼 등을 다투는 검황의 손자와 내 손녀를 데려가면, 당신들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야수궁에도 전해질 테지.”

그리고 아버지를 응시했다.

“열거한 생도 중에, 언 간사가 데려가려고 염두에 둔 생도가 있는가?”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진주언가의 아들내미와 젊은 영웅들이 저희 가문을 방문한다는 소문을 낼 것이니… 용명이는 데려가야 하고 절친하게 지내는 팽가의 두 쌍둥이와 천장호 소협. 그렇게 구성하면 될 듯합니다.”

*    *    *

회의 중 굵직한 사안이 일단락되자.

언용운은 깍듯이 예를 올리곤 회장을 나갔다.

“저는 그럼 결정된 사안을 다른 생도들에게 전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언용운이 나간 이후론, 유사시에 그가 이끌 귀면옹 조와 유기적으로 연계할 방안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모든 논의가 끝마쳤을 때.

언정웅은 자기도 모르게 총학생회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 언정웅을 발견한 건, 마침 총학생회실에서 나오던 우소릉이었다.

“어?”

그제야, 언정웅은 자기도 모르게 이쪽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음?”

언용운이 다른 생도들과 나누고 있는 이야기를 방해할까 싶어, 알은체하려는 것을 만류하는 때.

“그, 우 소협….”

우소릉의 입이 먼저 열렸다.

“언 형! 작은 언 형! 아버님! 가주님이 오셨어요!”

그 말에, 총학생회실에 생도들이 우르르 나와 인사를 했고.

언정웅은 난처한 기색으로 그 인사를 받았다.

“이거 참. 중요한 이야기 중인데 내가 방해한 건 아닌가?”

그 말에 답한 건 언용운이었다.

“아뇨. 인선에 관한 이야기는 다 끝난 참이었습니다.”

방해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언정웅은 넌지시 속마음을 말해보았다.

“그럼 안 바쁜 것이냐?”

“저는 항상 바쁘긴 하죠.”

“그래 그렇지 참. 그럼 나는 이만….”

“아, 가시려고요?”

“회의가 길지 않았느냐. 머리 좀 식힐 겸 경내를 전반적으로 산책하던 길이었다. 그냥 지나가려 했는데 우 소협이 기별을 넣는 바람에 번거롭게 했구나 일 보거라.”

“예.”

돌아온 언용운의 답에 언정웅이 몸을 돌리려는 때.

“캭! 언용운 너는 평소에는 귀신 같은 게, 꼭 이럴 때 눈치가 없더라?!”

당옥기가 불쑥 다가와 언정웅의 소매를 붙들었다.

“용운이랑 용명이 하고 나눌 이야기가 있으셔서 온 거 아니세요?”

“딱히, 바쁜 녀석들을 붙들고 나눌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닐세.”

“쟤, 오늘 별로 안 바쁜 편에 속해요. 과제도 혼자 마무리했거든요. 그치 하연아?”

“예. 어차피 적룡궁의 소궁주님이랑은 이야기도 나누셨잖아요? 아버님이랑 저녁이라도 나누고 오세요.”

그렇게 떠밀리듯 학관을 나온 삼부자는 이래저래 연이 깊은 단강제일객잔으로 향했는데.

옮긴 자리에선 긴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

“…….”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두 아들은 아비가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하니 말을 아꼈고.

“…….”

언정웅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길을 앞둔 언용운을 향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으니까.

‘마음 같아선 보내고 싶지 않다.’

그게 아비 된 자로서의 솔직한 심정이었으나.

언정웅은 평생을 사사로운 정보다 의로움을 좇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용운이 더 이상 자신만의 아들이 아님을 알았다.

‘숱한 백성들의 은공일 것이고, 맹주님께는 뒤를 맡기고 싶은 후학, 생도들에게는 자신을 이끌어줄 선배.’

언정웅은 자신의 아들이 이미 품을 벗어났음을 알았다.

하여, 속내를 감출 말을 찾은 지 한참.

전할 말을 떠올린 언정웅이 입을 열었다.

“어렵고도 먼 길이 되겠구나.”

언정웅으로서는 어렵게 꺼낸 이야기였으나,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더 멀리 있는 북해빙궁도 다녀왔는걸요.”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는 언용운에게 언정웅은 무사히 돌아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문을 이어내기 위해 부자간의 연을 끊어내기도 했던 자신이, 감히 그런 말을 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하여, 말문이 막혔는데.

그런 언정웅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언용운이 입을 열었다.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큼.”

“…크흠.”

그 바람에 멋쩍은 침묵이 흐르길 잠시.

언용명이 그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하북의 방비도 중요하겠지요. 형님이 오신다고 소문을 낼 것이라고 하니… 당연히 마인들이 관심을 가질 테고, 준동을 해올 수도 있겠지요. 저희에게 감정이 좋을 리 없는 연왕부의 세력이 지척이기도 하고요.”

언용운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 마인들도 그렇고, 황명으로 봉금 중인 연왕부도 감시를 게을리해선 안 되지. 너희 역할도 중요하다.”

“예.”

“아버지랑 백숙부님들께 조언과 도움받아가면서, 소진 누님 중심으로. 개방도 천장호 통해서 끌어들이면 더 좋고.”

어느새 천하를 진동시키는 무인이 된 언용운.

‘형의 모습에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을 느낄 만도 하건만….’

그 뒤를 우직하게 쫓고자 하는 언용명.

“…….”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두 자식의 모습에.

언정웅은 괜히 멋쩍어 부인의 이름을 빌려 입을 열었는데.

“그나저나 천기묘산 어르신의 뜻대로 네가 가는 것처럼 이야기를 퍼트렸다가, 실상을 알게 되면 진주에 계시는 부인의 상심이 클 텐데. 내게 큰 숙제를 주셨구나. 이 일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말을 꺼내고 보니 진심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    *

동도회에 안건이 통과된 뒤로.

후속 조치들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공손무결은 은밀히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사용해 녹림왕의 위치를 파악하였고.

“위치를 알아냈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더구나.”

“어디에 있답니까?”

“중경부의 옥화산.”

“무당산 자락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닿는 곳이긴 하네요.”

“그래. 밀직원장이 직접 가서 중간지점에서 은밀히 만나자는 의견까지 교환 됐다.”

그 길로 노삼과 나 그리고 공손무결은 은밀히 녹림왕 도중광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약속 장소는 옥화산과 단강구의 가운데 있는 흥산현 부근의 외딴 산장이었는데.

화경의 경지에 이른 세 고수가 날 듯이 달리니, 도착은 금방이었다.

- 저기 보이는 산장이 약속 장소인가 보구나? 그 산적 놈이 먼저 도착했는지, 불이 켜져 있는데?

‘그런 것 같습니다.’

산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부님의 예상대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도중광이 그 자세 그대로 우리를 맞았다.

“구패검. 오랜만이요.”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 선배.”

그에, 공손무결이 나름대로 예를 갖추는 때.

노삼이 입을 열었다.

“산적 두목 도중광이.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집어치우고. 네가 우리를 좀 도와야겠다.”

“광풍투개. 낮술을 드셨소? 내가 당신 밑의 거지새낀 줄 아시나?”

“거, 일전에 네놈이 녹림도도 백성이다 어쩐다 읍소를 해서 우리가 나선 일이 있잖아! 그거 지금 갚아!”

“거절하겠소.”

“뭣이? 이 자식이 누가 시커먼 산적 놈 아니랄까 봐 해우소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마음이 다르네?”

“그렇지. 그게 바로 흑도요. 약속 다 지키고 살 거면 내가 정파를 하지 산적질을 했을까.”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하는 도중광이었지만.

나는 그의 태도에서 되레 해볼 만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거짓말.”

정말로 아쉬운 게 없다면.

이런 자리에 응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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