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2화. 사해동도 (6)
야음을 틈타 학관을 빠져나온 우리는 무당 산맥의 자락을 따라 은밀히 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호북의 남단을 향해 남하 하기를 한참.
반짝이는 장강의 물줄기가 멀찍이 보이자, 노삼이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북극성이 저기 있고 장강이 보이니까… 거의 접선지에 이른 것 같은데? 용운아. 그 지도를 한번 살펴보거라.”
“안 그래도 조금 전에 살펴봤습니다. 저기 보이는 봉우리만 넘으면 도 선배와 만나기로 약속한 곳입니다.”
“그래? 그럼 소릉이 네가 한 번 가서 슬쩍 보고 와봐. 도중광이 그 산적 두목 놈이 흑도 치고는 신의가 있는 놈이긴 하지만….”
“마냥 믿을 수는 없죠. 소릉이라면 산서에 갈 때 녹림왕을 본 적도 있고 적절하겠네요. 다녀와라 소릉아.”
“예. 언 형.”
그렇게 우소릉을 보내고 잠시 숨을 돌리는 때.
독고철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그 짧은 시간에 녹림왕의 그늘을 빌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내시다니… 정말 회장님의 수완은 대단하십니다.”
그런 녀석의 말에, 남궁영과 장선이 연달아 입을 열었는데.
“맞아. 선배들이 입버릇처럼 사람 아니라고 하는데, 진짜 용운 선배는 좋은 의미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그치그치. 용운 형님이시니까 생각만 해도 막막한 일들을 해내시는 거지.”
그렇게 병아리 삼인방이 속닥이고 있던지 얼마나 되었을까?
우소릉이 돌아와 입을 열었다.
“먼저 도착해 계세요. 본인 외에 두 사람이 있던데요. 한쪽은 민머리고 한쪽은 애꾸눈.”
“쌍도귀와 편목금강. 두 사람은 도 선배의 호위다. 이상한 낌새는 없든?”
“예. 함정 같아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렇답니다.”
“오냐. 그럼. 이동하자.”
봉우리를 넘어 도중광을 마주하게 된 나는, 꾸벅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다른 언동생들을 소개하려 했다.
“선배님. 이쪽은….”
하나, 도중광 쪽에서 손을 내저어왔다.
“됐다. 나더러 선배라고 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는다만, 피차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 않느냐.”
“앗. 그렇게 선을 그으신다고요?”
“오늘은 한배를 탄다만 내일이면 서로를 향해 날붙이를 들이밀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사이다. 딱 이 정도 거리가 좋아.”
그 말에, 노삼 교수님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암암. 산적 두목 놈과 친해져 봐야 얻을 거라곤 하나도 없다.”
“흥. 나는 딱 행로를 봐주는 역할만 할거요. 그리고 이번에는 약속 지키시오?”
이후로 우리는 역용과 변복을 했다.
은하연과 당옥기는 각각 도중광의 애첩과 시비로.
나를 비롯해 다른 녀석들은 도중광의 수하 역할을 하기 위해 산적 차림으로.
그렇게 변복을 마친 우리는 도중광과 함께 남하를 시작했다.
* * *
도중광이 우리의 남행을 도와주는 데 사용한 명목은 휘하의 녹림채들을 순시한다는 것이었다.
하여, 한참 이동하다가 잠은 녹림채에서 자는 여정이 계속되었다.
영락없이 남의 소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형국이었기에, 처음에는 초긴장 상태로 밤을 보냈다.
하나, 호북에서 호남과 귀주를 거쳐 광서의 서편에 이르는 먼 거리를 내려오는 동안.
도중광은 행로를 봐주겠다는 약속을 굳게 지켰다.
- 흑도 치고는 신의가 있다는 늙은 거지의 말이 맞기는 하구나.
‘예.’
덕분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여정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여느 날과 같이 목적지인 남녕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때.
내적 친밀도가 올라갔던 모양인지, 은하성이 도중광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크흠. 말로만 듣던 녹림왕. 과연 어떤 분일까 싶었는데… 지금껏 뵈어온 다른 명숙들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으실 듯하네.”
“그러신가요?”
우소릉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연 건 이때였는데.
“하기야. 은 형은 뵙는 게 처음이시군요? 저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요.”
“그렇지, 나는 처음 산서로 갈 때 못 따라갔으니까… 가 아니고. 가만, 소릉이 너 지금 잘난 척한 거냐?”
“후훗.”
“아니, 얘가 자꾸만 저를 잡아먹으려고 드는데요. 이거 참아야 합니까?”
이어지는 대화에 듣고 있던 정현은 물음을 던졌다.
“안 참으면 무엇을 하시려고요?”
“…쓰흡. 그건 고민을 좀 해봐야겠는데?”
그에, 은하성이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자.
우리 사이에서 웃음이 퍼져나갔다.
그렇게 퍼진 웃음기는 도중광의 입에까지 걸렸다.
“큼.”
하나, 그는 곧 정색을 하고 말했다.
“백도의 도련님들이 하라는 공부와 수련이나 할 것이지, 왜 나한테 관심을 두나.”
은하성은 그 말이 자신에게 향한다 여긴 것인지, 다시 한번 머리를 긁었다.
“송구합니다. 저희 가업이 녹림도 분들과 자주 얽히다 보니….”
“뭐 하는 집안이길래 우리랑 얽혀?”
“강남에서 돈을 좀 만집니다.”
그렇게 이어진 말에.
도중광의 왼편을 지키고 있던 애꾸, 편목금강이 입을 열었다.
“흥. 잘 보이는 게 좋을 것이다. 상계 출신이라면 천하 일흔둘 녹림채의 주인 되는 분의 위엄을 알 테지?”
도중광은 곧바로 편목금강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놈아. 좀 생각하고 말해라. 괴룡과 붙어 다니는 상계의 자제라면 강남상왕의 아들이란 소리 아니냐.”
“…….”
“이런 놈들을 남겨두고 금분세수를 하려니, 깝깝하다 깝깝해.”
그렇게 수하의 입을 막은 도중광은 다시 한번 은하성을 훑으며 말했다.
“아무튼. 그러니까 자네가 그 누나를 재끼려고 우리 녹림에까지 손을 벌렸던, 은가의 개차반이라는 것이로구만?”
그에, 은하성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때.
“…….”
도중광은 일행의 가운데에 놓인 마차를 향해 눈길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마차의 여생도에게 누님이라고 하던데, 그럼 저쪽이 천금매소 인가 보군. 아버님은 잘 계시는가?”
그에, 은하연의 낭랑한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흘러나왔는데.
“잘 계시긴 한데. 녹림왕께서 통행세를 좀 낮춰주시면 더욱더 잘 계실 듯합니다.”
“거, 천하의 주인이 바뀌어도 휘상은 남는다는 말의 장본인들이면서 뭘 또 깎아 달래? 그리고 자잘한 통행세까지 관여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야. 소관이 아닐세.”
듣고 있던 노삼 교수님이 혀를 찬 건 이때였다.
“에이잉 쓸모없는 산적 놈 같으니. 말마다 다 안돼. 뭐 되는 게 없어. 뭐가 일흔둘 녹림채의 진정한 주인이냐? 녹림왕은 무슨. 그냥 허수아비 산적 두목으로 별호 바꿔라.”
“늙은 거지는. 입을 조심하시오.”
“조심하긴 뭘 조심해. 내 말이 틀려?”
“틀리고 자시고,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차림이 산적 놈이요. 당장에 기감을 세우고 있긴 하나. 그렇게 나불대다 말이 입에 붙으면, 묵기로 한 산채에서 들통이 나는 수가 있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를 더했다.
“…이건 도 선배님 말씀이 맞는듯하네요.”
“허…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노삼 교수님은 한 마디를 툴툴거리더니, 도중광을 향해 과장되게 굽실거리며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이번엔 어디서 묵습니까, 녹림왕 어르신?”
“청수산(青秀山)의 산채로 갈 것이오.”
“또 개짓거리 하는 놈이 있지는 않겠지?”
비교적 순탄하게 남쪽으로 향하는 여정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하로 위장하고 있는 우리나 애첩으로 분한 은하연에게는 깍듯했으나.
시비로 분한 당옥기에게는 음충맞은 추파를 던지는 놈이 있던 것이다.
“끙. 그건 내가 하나하나 챙길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까? 뭐, 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당신들이 단죄하는 것을 용인토록 하겠소.”
“이 새끼야. 네가 용인하는 게 아니라 옥기 쟤가 참는 거야. 쟤 아버지가 파서독제야.”
그러다 이어진 말에, 세 녹림도가 동시에 움찔하는 때.
당옥기의 말이 이어졌다.
“기억은 할 거예요.”
“…….”
“…….”
“…….”
그에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도중광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청수산의 산채는 괜찮을 거요. 그곳 채주가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놈이오. 들어봤을 텐데? 거령도라는 별호를 못 들어 봤소?”
“거령도 두흥. 그 이름은 들어보기야 했는데… 그보다도 네놈의 평가가 후한 느낌이구나?”
“수완이 있는 녀석이오. 내가 물러날 때, 모질이들을 맡길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녀석 중 하나라고나 할까?”
* * *
언용운 일행의 걸음이 남으로 향하고 있는 때.
북으로 향하고 있는 일행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언정웅이 이끄는 하북조였다.
황하를 넘어 목적지인 진주를 향해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동안, 이렇다 할 사고 없이 여정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언정웅은 되레 그 점이 걱정이었는데.
“우리 쪽이 너무 조용하구만. 용운이가 우리 틈에 없다는 이야기가 샌 것은 아닐지….”
그 말에, 팽소진이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희가 행로를 잘 택한 덕 같기도 한데… 아무튼, 그건 저희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을까요?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해야죠.”
그 말에, 언용명과 팽소천이 연이어 입을 열었고.
“형님이라면 무엇을 마주하든 슬기롭게 헤쳐나가실 분입니다. 누님 말씀대로 저희는 저희 몫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용명이 말이 맞습니다! 숙부님!”
천장호는 너스레를 떨었다.
“암요. 용운 형 걱정? 그런 건 하는 게 아닙니다!”
그에 언정웅은 마른 웃음을 지었고.
“너희가 나보다 낫구나. 그래. 괜한 걱정보단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팽소진은 재차 입을 열었다.
“용운이가 진주로 가는 듯한 분위기를 잘 만들어 왔지만, 실제로 방문하는 것은 아니니까 언젠가는 들통이 날 거란 말이죠? 우선 최대한 그 시기를 늦추는 게 저희의 일이에요.”
“그렇겠지.”
“그러려면 숙부가 숙모부터 빨리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셔야 해요. 버선발로 튀어나와서 용운이 찾으면… 그냥 산통이 다 깨지는 거예요.”
“…알겠다.”
* * *
도중광이 호언장담한 청수산의 산채.
- 도가 놈이 청수산의 산채는 다를 것이라 하더니만, 확실히 이곳은 살림살이가 제법 괜찮아 보이는구나?
이 산채는 그간 거쳐온 다른 녹림채에 비해 여러모로 윤택해 보였다.
목책이면 목책, 산적들이 차고 다니는 무기면 무기.
가히 녹림의 정예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고.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졸개들의 태도도 다른 산채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렇다 보니 대접도 상당히 융숭했는데.
“지금이야 거령도 소리를 듣고 있긴 하지만, 녹림왕께서 한창 강호를 호령하실 적에 이 두흥은 까마득한 졸개 놈이었습니다.”
“거,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나.”
“허허허. 그만큼 까마득했던 제가 이렇게 선배님께 대접을 올리고 있으니 감회가 남달라서 그렇지요. 하여, 순시를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제가 어렵게 명주를 구해왔습니다.”
사부님께서 군침을 흘리시는 때.
- …명주?
술잔을 뒤적거리던 당옥기가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뭐 탄 거 같은데?”
영락없는 시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당옥기가 입을 열자.
이쪽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두흥은 곧바로 노호성을 질러왔다.
“어디 종년이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입을 여느냐!?”
하나, 우리는 동시에 병장기를 뽑았고.
채채채채챙!!
도중광의 두 호위도 본인들의 병장기를 뽑음과 동시에.
도중광을 향해 언월도를 던졌다.
도중광은 그 애병을 손에 쥐자마자 잔칫상을 두 동강 내며 두흥의 무리와 거리를 벌렸다.
쾅!!!
“두흥! 뭐 하는 수작질이냐?!”
“선배님. 종년이 생각 없이 주절거린 소리를 듣고 저를 의심하십니까?”
“하면, 네놈이 먼저 마셔 봐라.”
시치미를 떼던 두흥이 본색을 드러낸 건 이때였다.
“…선배님은 너무 늙으셨습니다. 백도무림이 마교에 정신이 팔린 이런 시국인 만큼. 우리의 힘과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
“상방의 노랭이와 찍소리도 못할 백성들까지 쥐어짤 놈들이 산더미같이 널려 있는데. 녹림왕이라 불리시는 분이 가만히 죽치고만 계시니 제가 부아가 치밀지 않고 버팁니까?”
“허허. 내 나잇살을 먹었지만 네놈 정도는 우습다.”
“그러실 테지요. 해서 저도 준비를 좀 열심히 했습니다.”
말을 마친 두흥은 손뼉을 부딪쳤는데.
짝.
그 박수에 따라 모습을 드러낸 그의 수하들의 눈동자에서 붉은 기운이 감돈다 싶더니.
날카로운 살기가 이쪽을 향해 뻗어왔다.
그에 독고철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저놈들에게서 역혈수라대법을 익힌 자들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저희의 접근이 교단에 들통이 난 걸까요?]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그럼 우리 쪽을 노려야 하는데, 지금 보면 철저하게 도중광 선배님을 노리는 모양새 아니냐?]
[…그럼?]
[본교의 일파 중 하나가 이 근방의 녹림에 손을 뻗쳤다고 보는 게 맞겠지.]
내가 그렇게 독고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두흥과 도중광의 대화는 계속해 이어졌다.
“마냥 방관하듯 가만히 계시는 선배님의 작태에 염증을 느끼는 녹림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마인이랑 손을 잡는 것이냐?”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천마신교는 저희가 감당하기에 너무 커다랗지만 혈교는 신흥세력. 충분히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천하의 모질이 같은 새끼.”
“그런 모자란 놈을 믿고 애첩까지 끼고 청수산에 찾아온 선배님은 그럼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이어진 대화 끝에, 도중광이 빠득 이를 가는 때.
“내가 이래서 이 바닥이 싫어. 싹수가 보인다 싶던 새끼를 키워주면 꼭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든다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느냐? 저런 놈은 쓸어버려야지]
[아뇨. 선배님께서 원래 딱 행로만 도와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저희도 딱 행로만 써야 하거든요. 여기서부터는 추가 요금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너는 진짜. 백도 무림 녀석이 맞느냐?]
[저는 그냥 접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턴 빚을 지게 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