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84화 (384/444)

제384화. 진혈단 (1)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달라는 말로, 우리와 함께하겠다는 뜻을 전해온 도중광.

‘세세한 이야기를 모두 말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혈교를 궁지로 모는 일의 일익을 맡기려면, 큰 그림을 알려주긴 해야 했다.

“그럼 전체적인 그림을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때, 도중광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내 말을 막았다.

“잠깐.”

그리고는 본인의 두 호위, 쌍도귀와 편목금강에게 명했다.

“너희 둘은 나가 있어.”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듣는 귀를 단속하는 모습이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 질문을 던지니.

“두 분은 선배님의 손발처럼 움직이시는 분들 아닙니까? 굳이 안 내보내셔도 될듯합니다만?”

“그래도 적게 듣는 게 좋지. 어차피 나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할 것 아니냐?”

도중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 녀석의 계획이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만, 세상만사 뜻대로만 되진 않는 법. 일이 뒤틀렸을 때, 괜히 의심할 요소는 없도록 하는 게 좋아.”

그런 도중광의 태도에, 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는데.

“의심암귀(疑心暗鬼)를 배제한다… 그렇지요. 사실 한 핏줄끼리도 다툼과 의심이 있을 수 있는 법. 사해동도라는 뜻 아래 힘을 모은 상황이지만, 그런 요소는 줄이는 게 좋을 것입니다. 과연 녹림의 진정한 주인이라 불리는 분의 혜안이십니다.”

정작 도중광은 정현이 사용한 문자를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귀(暗鬼)? 몰래 숨은 귀신이면… 간자를 말하는 거냐? 저놈들이 단순무식해서 그렇지 그런 놈들은 아니야. 그냥 내 경험상 귀찮은 일이 생겼기에 내보낸 거다.”

우소릉이 엷은 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연 건 이때였는데.

“흐흐흠. 정현 도장께서 하신 의심암귀라는 말은, 괜한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에요. 방금 선배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죠.”

“이 쥐방울만 한 녀석이? 은가의 아들놈에게 까분다 싶더니 나한테까지 실실거리네? 야 이놈아. 내가 네 친구냐?”

도중광이 와락 미간을 좁히자, 우소릉은 숨을 삼키며 내 뒤로 숨었고.

“힉. 죄, 죄송해요.”

은하성은 그런 우소릉을 향해 삿대질하며 킬킬거렸다.

“크하하. 내가 언젠간 경을 칠 줄 알았지.”

“너도 닥쳐 이놈아!”

“…….”

그에, 도중광의 불호령이 떨어진 때.

노삼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멍청한 놈아. 쪽팔린다고 엄한 내 새끼들 잡지 마라.”

“멍청한 놈이라는 말은 안 맞지! 어?! 그렇게 문자로 줄이고 그러는 건, 못 배워서 모를 뿐이요! 뜻은 맞았다지 않소!”

“그럼 무식한 놈이 되는구먼.”

그렇게 노삼과 도중광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나는 잠시 독고철을 바라봤다.

혈교의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신호를 전한 것이었는데.

“…….”

“…….”

녀석은 나를 믿는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짝.

나는 손뼉을 쳐 주위를 환기한 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세한 이야기나 전후 사정이 궁금하지는 않으실 테고… 핵심만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혈교의 세력 중 일부를 휘하에 넣어 본단을 칠 생각입니다.”

그렇게 운을 떼자, 도중광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미친놈들을 휘하에 넣겠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 아니 애초에 너희는 물이고 그놈들은 기름 아닌가?”

그런 도중광의 말에 답한 건 은하성이었다.

“용운 형님이랑 처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뭐 그런 생각이 드실 법도 합니다만… 따지고 보면 선배님과 저희도 물과 기름 아닙니까? 흑도의 녹림왕과 백도의 후기지수.”

“…아니 그야 그렇긴 한데.”

은하성의 말에 도중광의 말문이 막힌 때.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이곳의 채주 두흥. 놈이 한 말이 모두 틀린 건 아닙니다. 혈교가 신흥세력이라는 그 말만큼은 맞습니다.”

“…일단 계속해봐라.”

“저마다 발을 담근 정도가 다르고, 담그게 된 이유가 다르죠. 일전에 선배님께서 세파에 밀려 녹림도가 된 이가 있다고 하셨죠. 비슷한 처지가 되어 마공에 손을 뻗은 이도 있을 겁니다.”

“…….”

“그 말은 즉. 개심의 여지가 있는 자도 개중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짧든 길든 같은 길을 함께할 자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거, 참. 여러모로 신기한 녀석일세.”

그런 내 말에.

도중광은 별종을 다 본다는 표정을 지었고.

사부님께서는 혀를 내둘러오셨는데.

- 도가 놈의 표정을 보니, 끝났구먼 끝났어. 참으로 요사스러운 혓바닥이야.

곧바로 도중광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해서?”

“끌어들일 수 있는 자들을 끌어들이는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그럼 나는 뭘 하면 되느냐?”

“선배님이 해주실 일은 저 지도에 나와 있는 두 개의 붉은 네모 중, 숭좌에 있는 산채를 적절한 시기에 장악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내가 맡아야 할 일을 명확하게 짚자.

“말하는 투를 보면… 그 적절한 시기라는 게 임박한 것 같은데. 나는 너희를 남녕까지 데려달라는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주전력을 녹림산장에 다 두고 왔다.”

도중광은 난색을 표했는데.

“방금 나간 두 모질이와 나. 이렇게 셋이서 숭좌채를 장악하는 일은 어려울 성싶은데?”

“졸개들이야 인근의 산채들에서 동원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왕 소리를 듣고 있지만 마음대로 아랫놈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그건 녹림왕이 습격을 당해 죽었다는 정보를 흘리면 됩니다.”

“……? 그게 무슨 소리냐. 안 죽은 걸로 하기로 한 것 아니냐?”

도중광이 고개를 갸웃하자, 은하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 공자의 말은 가짜 정보를 흘린다는 이야기예요. 그러한 정보가 흘러나가면, 녹림도 중에 준동하는 이들이 있을 테고. 선배님께서는 산채를 휘어잡을 수 있게 되시겠죠.”

그에, 노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도중광이 너는 멍청한 게 맞아.”

“…….”

나를 향해 물었다.

“하면 내가 할 일은 우선 그 정보를 티 안 나게 흘리는 것이겠구나? 어차피 이곳에서 도망친 녀석들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흘릴 수 있겠구만.”

“예. 그 과정에서 저희나 교수님이 드러나지 않는 것만 신경 써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도 선배랑 같이 숭좌 쪽을 장악하는 일을 진행해 주시면. 주교 회의의 결과가 어찌 흘러가든 퇴로와 진입로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알겠다.”

“예. 그러면 여기서부턴 두 분과 저희는 따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    *

호북성 단강구에서 출발한 제갈척의 사절단.

남궁윤과 제갈설지가 포함된 이 사절단은 장강을 거슬러 사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금 남으로 길을 잡아 운남 땅에 들어섰다.

그렇게 첫 번째 목적지인 점창산이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는 때.

후루루룩-

멀찍이서 날아온 응용이가 제갈척과 제갈설지가 타고 있는 마차에 내려앉아 차창을 두드렸다.

툭툭.

그에, 제갈설지가 응용이의 발에 묶인 전서를 확인하는 때.

후미를 담당하고 있던 남궁윤이 마차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응용이가 날아오던데?”

“예. 용운 님이 섬서나 저희 쪽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기로 했잖아요?”

“그야 알지. 난 전언의 내용을 묻고 있는 거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해서.”

제갈설지는 부탁대로 응용이가 가져온 전언에 적힌 내용을 간략히 전했다.

“음. 녹림왕이 피습을 당했다는 전언이네요.”

언용운의 조는 녹림왕과 함께하고 있었다.

들려온 소식에, 남궁윤은 미간을 있는 대로 좁혔다.

그리고 더 안쪽의 제갈척과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회주님. 행로를 틀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행여라도 말이 새어 나갈까 작게 내는 목소리.

그 목소리 속에 실려있는 걱정.

제갈척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크허허. 이 녀석 이거 제 할아비와는 다르게 귀여운 구석이 있구만?”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나온다 이놈아. 설지 네가 알아듣게 설명해주거라.”

“흠흠. 용운 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이런 방식이 아니라, 이중삼중으로 암어가 더해진 형태로 소식이 전해졌을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퍼지고 있다는 건, 되레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증거죠.”

“…그, 그런가?”

“그렇다니까요.”

그에 귀를 벌겋게 물들인 남궁윤은 제갈척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괜한 이야기로 회주님의 정신을 흐리게 한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 마음만큼은 맞아.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야. 필요하다면 행로를 유연하게 잡아야겠지. 하나, 우선 야수궁. 굳건히 중립을 지키고 있는 그치들을 끌어들여야 해.”

그렇게 운을 뗀 제갈척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을 이었다.

“본디 중도라는 게 가장 어렵듯, 세력이 중립을 지키는 일도 어렵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힘이 있어야 가능하지. 야수궁의 전력과 무위가 우림에서만 빛을 발한다고 하지만, 반대로 그들의 땅에서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중원의 왕조들이 애를 먹다 포기한 이들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아마 혈교의 본단이 어디에 있는지도 이미 꿰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다 떠나서, 지리적으로도 십만대산의 마인들이 혈교와 연계하는 것을 막으려면 반드시 확보해야 하고.”

그 말이 끝났을 때.

제갈설지는 엷은 숨과 함께 한마디를 했는데.

“용운 님의 계획이 착착 진행돼서, 만겹산을 친다는 결론이 났을 때 빛을 발할 포석이긴 하지만요.”

제갈척은 피식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며, 내 눈에 든 녀석이나, 검황 그 친구의 눈에 든 녀석은 숱하게 있었다. 하나, 우리 두 사람 모두의 눈에 들었던 위인은 천하에 딱 두 사람뿐이야.”

“맹주님과 용운 님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한데, 괴룡에게는 맹주에게 없는 과감성과 유연함이 있다. 녀석은 반드시 뜻한 바를 이뤄낼 것이야. 하니 우리도 제대로 이 일을 해내야 한다.”

잠자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궁윤이 앞쪽을 가리킨 건 이때였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 매진악 선배와 점창의 제자들이 나와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려면 점창의 역할도 중요하지. 가보자꾸나.”

*    *    *

노삼과 도중광.

두 사람과 헤어진 우리는 평범한 백성의 모습으로 변복한 뒤.

목적지인 남녕 땅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독고철이 알려준, 집합을 알리는 혈교의 표식이 어딘가에 새겨지길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오늘도 표식은 없었나?”

“제 쪽은 없었어요, 언 공자.”

“저희도 없었습니다.”

“저도 못 봤어요.”

갑작스러운 습격을 겪었지만, 녹림왕 도중광을 이번 일에 깊숙이 개입시켰다.

결과적으론 전화위복이라 부를 법한 최고의 상황이 됐지만.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주교회의.

그 회의가 열릴 때와 장소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때.

당옥기가 나를 빤히 지켜본다 싶더니.

“뭘 그렇게 봐?”

질문을 해왔다.

“근데 언용운. 그 주교회의가 열리는 장소를 알아냈다 쳐.”

“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알아낸다. 사면초가에 처한 사겸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회의는 남녕 어딘가에서 소집된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거기서 다른 혈교인들을 네 휘하에 끌어들이는 일이 자신 있냐고. 철이나 사겸이랑 접촉할 때랑은 사정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세상 모든 사람. 심지어 본인 오라버니한테도 날을 세우던 너한테도 천독단을 받아냈던 나다.”

“캭!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그리고 너 그때 역시 그거 노리고 그런 거지!”

질문한 건 당옥기였지만, 다른 녀석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던 모양.

나는 당옥기를 놀리던 것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말했다.

“철이는 초대받지 못하고, 사겸은 초대받은 주교회의. 여러 정보를 취합한 현 상황에 비춰보면… 이 모임은 숙청의 장이 될 거다.”

그런 내 말에, 남궁영과 장선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창시에 앞서 교인들의 기강을 잡기 위한 자리인 만큼. 잔혹한 본보기 자리가 되겠죠? 그를 통해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할 테니까요?”

“헉. 그럼 더 힘든 것 아닌가요?”

하나, 나는 귀면옹의 복장이 든 상자를 응시하며 씩 웃었다.

“하지만 적절한 숨구멍이 생긴다면… 두려움은 분노로 바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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