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5화. 진혈단 (2)
남녕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인 가운데 중심을 가로지르는 강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다.
남녕의 복판을 가로지르는 강을 두고 세인들은 옹강(邕江)이라 불렀는데.
이 옹강으로 통하는 지류 중 하나에, 남쪽에서부터 물길을 거슬러 올라온 작은 나룻배 한 척이 몸을 올렸다.
촤아아-
나룻배엔 죽립을 눌러쓴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남녕. 남쪽의 안녕을 바라는 도시, 라.”
그중 뱃머리에 서서 멀찍이 보이는 남녕의 성채를 응시하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은하군도를 주름잡는 해적단 금범단의 단주 만경혈파 사겸이었고.
끼긱-
노잡이를 자처하고 있는 죽립인은 그런 사겸의 오른팔이자 부단주인 허욱이었는데.
끼기긱-
허욱이 잘 젓던 노를 거꾸로 저어, 나룻배가 제자리에서 맴돌기 시작하자.
남녕 땅을 바라보던 사겸의 시선이 허욱에게로 옮겨왔다.
“뭐하는 짓이냐 허욱.”
그 말에, 허욱은 짓씹고 있던 입술을 뗐다.
“단주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을?”
“전부 다 말입니다. 흠주(欽州)에서 확인한 정보들이 모두 꺼림칙합니다. 녹림왕이 피습당해 생사불명이라는 것도 그렇고… 특히나 독고세가의 움직임이 너무 굼뜹니다.”
주교회의가 소집된다는 전언을 듣고, 사겸이 행한 조치는 독고세가를 통해 귀면옹에게 상황을 알린 것뿐이었다.
한데, 독고세가의 움직임이 급박한 상황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주교회의가 코앞인데, 이제 겨우 무창에 이르렀다고 하지 않습니까? 혹시, 적룡궁을 통했던 전서가 전달되지 않은 것일까요?”
허욱의 물음에, 사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소궁주에게 향하는 서신을 전하지 않았거나 먼저 까발릴 정도로 기강이 해이했다면… 대해에 가득한 해적들과 소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적룡궁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야.”
“하면 서신은 전달이 됐다는 건데… 그럼 귀면옹이 저희를 버린 것일까요?”
“글쎄다. 서신은 분명히 독고세가에 전해졌을 테고, 독고철 그 녀석의 태도를 떠올려보면 귀면옹께 전달됐을 테지만… 그분의 심중은 알 길이 없지.”
그렇게 물음에 답하길 잠시.
사겸은 허욱에게 되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귀면옹을 썩 탐탁지 않아 했던 녀석이, 지금은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랬었습니다만. 단주님께서 그분을 구원자처럼 믿고 계시는 것 같아서, 저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것입니다.”
“내가?”
“귀면옹에게 전서를 보낸 것 외에는 아무 조치도 안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과는 별개다. 딱히 귀면옹을 구원자라 여긴 적은 없다. 그저, 진혈단의 기치가 마음에 들었을 뿐이야. 따지고 보면, 그저 배 한 척 빌려드렸을 뿐인 사이 아니냐?”
“그럼 왜 아무 조치도 안 하신 겁니까? 그 가면 쓴 늙은이가 동아줄이 될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내빼시죠?”
허욱의 말에, 사겸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로 말이냐?”
“어디든지요.”
“허욱. 우리는 해적으로 이름이 났다. 투서 한 장이면 천하에 수배서가 나붙을 것이야.”
“바다가 있지 않습니까? 교단이고 관군이고 별수 없을 텐데요?”
“창시선언이 이루어지고 나면 교단은 바다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어.”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혈교의 비급으로 교인들을 모으는 것까지는 가능해도, 그걸 조직으로 만들고 운영해 나가려면 결국 금력이 필요했다.
“이제 막 창시선언을 하려는 본교로서는, 남만 야수궁과 정면승부를 하는 것보다는 바다나 녹림 쪽으로 눈을 돌릴 테니까.”
“바다라고 안전하지는 않다는 말씀이신 듯합니다만, 그렇다고 딱 봐도 호랑이 아가리처럼 느껴지는 남녕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나 혼자 홀연히 망망대해로 나가버리면 본단도 어쩌지 못할 것이야. 하나 그러고 나면 우리 식구들은 어찌하느냐?”
“…….”
“내가 순순히 주교회의에 응하면, 다른 식구들은 살 가능성이 있다. 앞서 말했듯 교단은 바다로 나올 수단이 필요할 터, 금범단이라는 조직은 필요로 할 테니까.”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으시는군요.”
“나야 이꼴저꼴 다 겪어온 몸. 딱히 목숨에 미련은 없다. 허욱 너는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말한 단원 중엔 너도 포함이야.”
그런 사겸의 말에, 허욱은 미간을 좁히며 발끈했는데.
“제가 목숨이 아까워 이런 말씀을 드리는 줄 아십니까?”
“알겠으니까 다시 노나 저어. 이건 명령이다.”
사겸은 한마디로 상황을 일축하고는 다시금 남녕을 응시했다.
‘…귀면옹만 믿고 있다, 라.’
허욱에게는 아니라고 하였으나, 가만히 되새겨보니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귀면옹의 모습에서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을 보았다.’
말단으로 보이는 수하에게도 역천수라대법의 부작용을 풀어주었던 그 모습.
그리고 그저 배 한 척 빌려준 게 전부였던 인연을 구하기 위해, 백도의 선단이 가득한 삭월도 앞바다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던 그 모습.
‘…그 길을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라고 전언을 보낸 것이니. 어찌 보면 믿고 있다 할 수 있겠지.’
마교에 귀의하는 순간에도 가져본 적 없었던 믿음이 어느새 가슴 한편에 자리 잡혀있음을 깨달은 사겸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 * *
남녕에 숨어들어 시내를 수색하고 다닌 지, 어언 열흘.
우소릉이 무언가를 찾아와 내게 보였다.
“언 형. 저 뭔가 찾은 것 같아요.”
“어디서?”
“포목점 뒷골목에서 발견했는데, 알려주신 혈교의 암어와 비슷한 표식이 있길래 제가 베껴왔어요.”
나는 곧바로 독고철에게 턱짓했고.
쪽지를 받아든 독고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암어용 글자가 맞기는 합니다. 한데 이게 점 하나만 덜 찍혀도 뜻이 달라집니다. 정확한 게 맞습니까?”
“응. 내, 내가 선배치고 좀 허술해 보여도 이런 눈은 정확해.”
“…허술하다 생각지 않습니다. 정확을 기해야겠기에 여쭌 겁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는 때.
은하성이 입술을 삐쭉이며 한마디를 했다.
“소릉이 저건 나한테는 기어오르면서 후배들한테는 쩔쩔매.”
나는 그런 녀석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는데.
“악!”
“지금 그거 신경 쓸 때냐?”
그 사이, 독고철은 지도를 가져다 놓고 암어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소릉 선배님. 그러면 여기 점이 세 개 찍힌 방면이 북쪽을 보고 있던 게 맞습니까?”
“응. 포목점의 입구가 남쪽이니까… 북쪽을 보고 있던 게 맞아.”
“그럼 북문으로 천 보를 가서 서편으로 오백 보를 가라는 뜻이 되는데… 그럼 이곳을 가리키게 됩니다.”
그렇게, 독고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확인한 은하연은 종이 한 장을 펼치며 입을 열더니.
“여기는 무룡곡이군요.”
그 위에 회(回)자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복판의 땅은 살짝 돋아 있고 주변은 움푹 꺼져있는 지형이에요. 주변의 야산들도 묫자리로 쓰는 곳이라 사람들이 잘 접근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네요.”
“그렇소?”
“예. 매입하려고 마음 먹었던 적이 있던 곳이라 잘 알아요. 은밀한 회합을 하기에 적절해 보이는데요?”
“그렇군. 돋은 땅이 자연스럽게 단상 역할을 하겠어. 이곳을 병풍처럼 둘러싼 이 산들의 형태는 어떻소?”
“칼로 자른 듯한 절벽들이에요. 높이는 열 장 정도?”
“그렇다면 이중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때를 봐서 난입하면 되겠는데?”
또박또박 답을 하던 은하연이 아미를 좁힌 건 이때였는데.
“…근데 괜찮을까요?”
“무저갱에서 얻은 영단으로 몸보신들을 한 뒤로, 이 정도 높이는 감당할 경공들이 되지 않나?”
내가 되묻자.
은하연과 사부님이 각각 한마디를 해왔다.
“제가 걱정하는 건, 난입하는 방법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다른 혈교인들을 끌어들이는 일이에요. 언 공자는 숨구멍을 터주면 두려움이 분노로 바뀔 것이라고 하셨지만… 도망이란 선택지도 있잖아요?”
- 나도 하연이와 비슷한 생각이다.
두 사람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으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힘드오. 혈교의 교인들은 산적이 아니야. 역혈수라대법 특유의 광증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해약이 필요한 이들이 대다수일 거고. 당장에 내뺄 순 있어도, 영원히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체득했을 것이오.”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은 계속해 말을 이었는데.
“아무튼 진혈단에 붙을 만하겠다는 강렬한 인상을 줘야 할 텐데, 저쪽은 못 해도 수백은 모일 거고, 저희 인원은 이게 다라 이미 수적으로 밀리고….”
“그건 아까 소저가 한 말 중에 답이 있지 않나?”
“제가 한 말 중에요?”
눈을 키우는 은하연.
나는 되물음을 던졌다.
“그 근방이 묫자리라면서?”
“아?”
“병풍처럼 둘린 계곡 위쪽에 시체 병단을 일으켜두면, 진혈단의 인원이 엄청나다고 느껴지겠지. 그게 시체 병단임을 모르게 할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겠지만.”
그리고 당옥기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녀석의 입에서 적절한 대책이 흘러나왔는데.
“백면과 흠순초만 있으면 바닥에 깔리는 연기를 만들 수 있어.”
“옹강 때문에 이 주변엔 원래 안개가 많이 끼는데, 거기에 그 연막이 더해지면… 시체군단의 몰골은 숨겨지고, 몽환적인 분위기만 남겠지.”
이때, 혹이 난 머리를 비비고 있던 은하성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거 말고 정현 도장이나 어찌하십시오.”
“…원시천존. 갑자기 빈도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것입니까?”
“왜라뇨. 저번에 그 청수산의 산적 놈들 사이에서도 옷만 산적 옷을 입었지, 뻣뻣해서 진짜 들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은하성의 말에 언동생들이 저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때.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우르르 무언가를 해서는 방금 말한 압도와는 거리가 멀어. 너희들은 가면 쓰고 무게만 잡고 있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한다.”
* * *
남녕의 북서쪽에 위치한 무룡곡.
시커먼 어둠과 음산한 안개만이 가득한 이곳에.
화륵-
횃불을 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여든 이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어떤 이는 영락없는 유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흑도 바닥에서 평생을 구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강남 일대에 점조직으로 흩어져 활동하던 혈교의 주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지 한참.
“!”
붉은 피풍의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혀, 혈풍대.”
피처럼 붉은 피풍의를 걸쳤다 하여, 혈풍대라는 별칭이 붙은 그들은 혈마 진괴량을 호위하는 친위 주교들이었는데.
그들의 등장에 자리한 모두가 숨을 죽이는 때.
등장한 이들 중 가장 앞 열에 서 있던 노병오가 들고 있던 두루마리 하나를 촤륵- 펼치며 입을 열었다.
“본인은 혈마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종 노병오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혈마님께서 내게 내리신 힘이다. 여기 모인 자들을 모조리 죽여도 좋다는 명이지.”
그렇게 한순간에 좌중을 휘어잡은 노병오.
“본교가 천마의 후예를 참칭하는 자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로 우뚝 서려 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쥐새끼 같은 짓을 하는 불신자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시야에 들어오는 면면을 훑으며 혀를 차더니.
“쯧쯧쯧. 버러지 같은 삶에 혈마님께서 손을 내밀어 주셨거늘. 천한 습속을 버리지 못하고….”
이죽거리며 계속해 말을 이었는데.
“하여, 혈마님께서 그를 바로 잡으라는 명을 내리신바. 더러운 불신자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한 줌 핏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말이 끝났을 때.
노병오의 수하들이 근골이 끊겨 폐인이 된 것으로 보이는 혈교인 하나를 질질 끌고 나왔다.
노병오는 그렇게 끌려 나온 혈교인을 보며 말했다.
“이 자의 이름은 종찬. 음적(淫賊)의 낙인이 찍혀 사지가 찢겨나갈 놈에게 본교가 신공을 베푸는 아량을 보여주었지. 하나, 이자는 이번 소집령을 받고 동령으로 내빼려 했다.”
그렇게 잠시 죄목을 읊은 노병오는 곧바로 양손에 핏빛 아지랑이를 감았다.
“불신자들의 말로란 이런 것이다.”
퍼엉!!!
그리고 첫 번째 불신자의 머리를 짜부라뜨린 뒤.
피범벅이 된 손으로 사겸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버러지 중에서 가장 커다란 버러지가 이 자리에 있다. 남해 대주교 사겸.”
그러자, 혈풍대의 인원들이 즉시 사겸을 둘러쌌는데.
사겸은 손바닥을 내보여 혈풍대의 손길을 거부하더니, 순순히 노병오가 서 있는 단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곧 죽을 놈이 무게를 잡는 것인가?’
그 모습에, 노병오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는데.
‘하기야, 천한 잡뼈 놈이 드물게도 대주교 자리에 올랐으면. 제 놈이 죽어야 수하들이 산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야지.’
그가 사겸을 제거하기 위한 구실을 입에 올리려는 때.
“혈염천하의 시기가 코앞까지 도래하였는데, 사겸은 남해 대주교라는 요직에 있으면서도….”
꽈르르릉!!!
시커먼 밤하늘에서부터 내려친 벼락이 무룡곡을 둘러싼 암벽들 위로 떨어진다 싶더니.
뭉실거리는 연기와 함께, 웬 노인의 사자후가 쩌렁하게 울렸다.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에서 아득히 벗어난 놈이 감히 그 말을 입에 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