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87화 (387/444)

제387화. 진혈단 (4)

이제는 선택해야 한다는 내 말에, 무룡곡에 정적이 내려앉기를 잠시.

혈교인 하나가 정적을 깨며 질문해왔다.

“…무슨 선택을 말하는 겁니까?”

“지금부터 하는 모든 행동이 그대들의 인생을 틀어놓을 선택이 되겠지. 질문자는 우선 답을 들을 각오가 돼 있는지부터 선택하라. 노부의 답을 듣고 싶다면 어디의 누군지부터 말해.”

질문자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곧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천주부(泉州府)의 손천정. 강호에선 적수학사(赤手學士)라 불리고 있습니다.”

적수학사.

매일매일 숱하게 들어오던 강호의 정보들 속에서 스치듯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별호였다.

‘별호도 별호지만….’

각자 뜻이 다른 교인 수백 명이 모인 상황에서, 정체를 밝히는 용기만큼은 칭찬할만했다.

나는 손천정 이름 석 자를 머릿속에 새기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학사라 불리는 것을 보면 소싯적엔 붓을 놀린 모양인데?”

“과거시험을 붙들고 있던 시절이 있긴 했습니다.”

“한데, 이처럼 간단한 이치가 이해가 안 되는가? 노부는 혈풍대의 행사를 저지했고, 그대들은 그걸 지켜만 보았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이 무엇이겠나?”

나는 혈교의 사람이 아니다.

하여, 택할 수 있는 길이 여럿 존재했다.

하나, 이 자리에 모인 혈교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교단과 정면으로 맞서느냐 아니면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느냐 두 가지뿐이었다.

내가 그 점을 상기시키자, 손청정은 다시금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소생이 여쭌 것은 나무가 아니라 숲입니다. 어르신이 그리고 계시는 정확한 그림을 묻는 것입니다.”

나는 손천정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렇다면, 되레 대가… 머리가 돌아가는 질문이었구먼.”

그리하여 다시금 좌중에 정적이 내려앉았을 때.

“노부가 이끄는 비밀결사의 이름은 진혈단. 그 이름에서 이미 감이 올 텐데… 앞서 혈풍대와 싸우며 언급했던 진정한 혈염천하를 추구하는 조직이다.”

뒤편에 시립하고 있는 언동생들과 계곡 위의 병력을 향해 소매를 펼치며 입을 열었다.

“하나, 오늘로써 진혈단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손천정. 비밀결사가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무엇이겠나?”

“…글쎄요. 비밀결사를 포기할 만큼 저희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 기실 초면인 형국인지라 확신은 할 수 없고. 다른 뜻이 있다면… 때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을 내리신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맞다. 때가 무르익었기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고, 드러낸 이상 단원들의 의지와 염원이 관철되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 본단으로 갈 것이야.”

“…막아서는 이들이 있을 텐데요?”

“노병오와 수하들이 이미 그런 자들 아니었는가? 그 길을 막는 이들을 배제하고서라도 걸음 할 것이니, 너희가 필요하다는 그 말도 맞다 볼 수 있겠지.”

대화가 여기까지 이어지자.

자리해 있던 교인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러니까 교단과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이야기 같은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계곡 위에 있는 이들에다, 남해대주교의 전력까지 더해지고 우리의 수하들까지 더해지면 유례없는 규모가 될 거 같기는 한데… 호교법왕들과 혈풍대의 본대를 상대하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군.”

“가능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본단의 숙청대상자에 오른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맞서 싸우는 거 아니면 죽는 것뿐 아닌가?”

“싸우는 것도 사지로 향하는 길이야! 혈공의 부작용은 어쩐단 말인가?”

줄곧 지켜보고 있던 사겸이 입을 열었다.

“조용!”

그러면서 진각을 밟아 회장에 다시금 정적을 불러왔는데.

쿵!!

손청정이 다시금 입을 연 건 이때였다.

“그 길의 끝에는 호교법왕들이 있을 텐데요? 그들이 어르신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치워야지. 그 늙은이들을 치우고 교주님을 알현할 것이다. 애초에 그러기 위한 걸음이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손천정의 물음은 단순한 물음이라기보단, 그만한 전력이나 복안을 갖추고 있느냐는 뜻으로 들렸다.

하나 지금 단계에서 그를 비롯한 혈교인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복안을 알려줄 이유는 없었다.

“고작 이름과 별호를 밝혔을 뿐인 자네에게. 모든 그림을 보여줄 이유는 없을 성싶은데? 진혈단의 뜻에 따르기로 결의한다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야.”

“…….”

“다만, 한가지 약속할 수 있는 건, 역혈수라대법의 광증만큼은 노부가 고쳐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내 말에.

회합장엔 다시 한번 어수선한 분위기가 들어찼다.

“…광증을 고칠 수 있다고?”

“해약을 본인도 만들 수 있다는 뜻인가?”

“어투를 보면 완전히 고칠 수 있다는 이야기 같지 않나?”

그에 사겸이 재차 진각을 밟았다.

쿵!!!

“조용하라! 그리고 방금의 말씀만큼은 내가 보증한다. 귀면옹 휘하의 교인들은 말단까지도 신공의 부작용이나 후유증을 겪지 않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적시에 나서준 사겸의 모습에, 나는 가면 뒤에서 씩 웃음을 지은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역시 선택이지. 궁금한 이나 절박한 자는 속는 셈 치고 나서보거라. 미심쩍은 자는 거부해도 좋아.”

*    *    *

언용운이 혈교의 조직을 꿀꺽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때.

무림맹주 공손무결과 대군사 제갈혜 그리고 향란관의 사감 창량.

이렇게 세 사람을 태운 마차가 포함된 행렬이 중원의 서단(西端)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행렬은 동도회의 연락소를 설치하기 위해 섬서성을 방문했던 일을 매듭짓고, 곤륜을 향해 가는 중이었는데.

제갈혜가 지난(至難)했던 협상 과정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치자.

“종남은 참 뭐든지 순순히 응하는 법이 없네요.”

창량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교가 고개를 쳐들면 가장 먼저 피를 보는 곳이 곤륜이고 그다음이 종남입니다. 지난 정마대전에서도 현판을 지켜내긴 했지만, 큰 피해를 입었던 곳 아닙니까?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종남의 제자들은 교수님을 상당히 고까워하던데, 교수님께서는 되레 감싸주시는군요?”

“감싸주는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이니까요. 섬서에서 부대끼다 보니 우리 화산과 종남의 관계가 개와 원숭이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요.”

“그 공사 구분이 안 되니까 제가 이러는 거죠.”

공손무결이 입을 연 건 이때였는데.

“그래도 이번 일은 결국 허락하기는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만 해도 저는 크나큰 발전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슬슬 혈교와 접촉하러 간 용운이 녀석의 계획이 시작될 때가 된듯한데. 녀석. 무탈한지 모르겠….”

말을 하는 중에,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 공손무결이 제갈혜를 향해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대군사님.”

“예?”

“종남과의 일이 급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미뤄뒀다가 잠시 잊었는데… 적당히 큰일을 숨겨야지, 어떻게 용운이가 혈교를 먹겠다는 계획을 저한테 숨기실 수가 있습니까?”

“…아하하.”

“용운이 녀석이야 원체 피가 끓는 녀석이니 알겠다 하고 말았지만. 대군사님이 그걸 숨기실 줄이야.”

“…하신 말씀을 조금 빌리자면, 용운이가 그래도 저한테는 털어놨다는 게, 장족의 발전 아닐까요?”

그에, 제갈혜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나름의 변명을 말하는 때.

창량이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는 맹주님이야말로. 용운이 녀석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천하를 헤집고 다니게 만든 장본인 아니십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맹주님이 녀석을 대놓고 이뻐하신 뒤로 완전히 고삐가 풀렸습니다.”

“크흠. 그야. 녀석이 원체 대견한 생각을 하고 또 잘 해내니까. 세인들이 괜히 녀석더러 신진제일협이라고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재목일수록 아껴야지요. 향후 백도 무림을 떠받칠 재목이 저러다 꺾이면 어쩌시려고요.”

“크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창량의 쓴소리로 끝을 맺은 때.

우지직! 쿵!!

히히히힝!!!

세 사람을 실은 마차보다 앞서 있던 마차에서 굉음이 들린다 싶더니.

“쳐라!!!”

토굴에서 솟구쳐 나온 한 무리의 괴한이 공손무결의 행렬을 향해 공격을 해왔다.

“적습입니다!”

그에, 세 사람은 각자의 역할을 맡아 마차를 나섰다.

“저는 좌측을 맡겠습니다.”

“빈도는 우측을 맡지요.”

“저는 중앙의 전력을 지휘할게요.”

구패검과 화산백미 그리고 좌견천리.

강호를 진동시키는 두 검수와 대군사의 지휘가 곁들여지니.

촤악!

촤아악!!!!

기습의 이점이 무색하게 습격이 무마되었는데.

정작 이 상황을 가볍게 무마한 세 사람은 저마다 미간을 좁혔다.

그중 가장 먼저 공손무결이 입을 열었는데.

“…대군사님. 일군이 저희 쪽을 습격하는 동안 언덕 너머로 사라지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보셨습니까?”

“예. 이거 전형적인 찔러보기네요. 맹주님이 목표였다면 사라졌던 자들이 가세했어야 맞는데. 미련 없이 철수한 것을 보면 다른 노림수가 있다는 건데….”

이때 창량이 한마디를 했다.

“지금 시점에서, 맹주님을 노리는 게 아니라면… 용운이와 아이들 쪽 아니겠습니까?”

“이 공손모가 명색이 백도무림의 수장인데… 용운이 쪽을 더 위협적으로 느끼다니. 이것 참. 분발해야겠구만.”

그에, 공손무결이 헛웃음을 짓는 때.

“그러셔야겠네요.”

픽 웃어 보인 제갈혜가 전서응을 관리하는 수하들에게 손짓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건 그거고. 동도회와 개방을 통해 천마신교가 움직이는 것 같으니 주의하라는 연락을 취해야겠네요.”

*    *    *

광증을 해소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온 교인들에게 시료를 하려면 적당한 공간이 필요했다.

하여, 사겸에게 교인들의 통제를 맡겨두고.

나는 언동생들이 세운 막사 안에 들어와 앉았는데.

퍽. 퍽.

침상으로 쓸 공간을 마련하고 있던 남궁영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독고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그에, 독고철이 고개를 갸웃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정작 남궁영은 독고철이 아닌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철이는 믿어요. 그런데… 밖에 있는 다른 교인들과는 함께 일을 도모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남궁영이 이야기의 물꼬를 트자.

정현과 사부님도 연달아 입을 열었고.

“언 소협의 말씀대로 시류에 밀려 혈교에 귀의를 한 것으로 보이는 분들도 분명 있는 듯 보였지만… 영락없는 흉적이나 귀기가 묻어나는 마인들도 보였습니다. 후자에 해당하는 자들이 정말로 힘이 되겠습니까?”

- 그래. 영혼에 말라붙은 피냄새가 지독한 자들이 더러 있더구나.

우소릉과 은하성도 한마디씩을 더해왔다.

“맞아요. 안 그래도 뱀 같은 관상으로 눈알을 막 이리저리 굴리는 분들도 많았어요.”

“형님. 굳이 저 사람들을 다 휘하에 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독고세가 사람들이랑 노삼 교수님 쪽을 기다렸다가, 저희끼리 쓱싹 하시죠? 보니까 혈풍대 놈들도 별 볼 일 없던데요?”

나는 우선 은하성을 향해 엄한 목소리를 냈다.

“은하성.”

“…그냥 쥐어박으시지. 그렇게 목소리 내리까실 때가 제일 무서운데.”

“노병오가 이끌던 혈풍대를 놈들의 본 실력이라고 봐선 안 돼. 만에 하나라도 그런 생각이 머리에 남아있었다간 다른 놈들을 만났을 때 너는 죽게 된다.”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왔다.

“그래 큰일 날 소리야. 이번엔 언 공자가 놈들이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포석을 깔아뒀기에 얻을 수 있던 낙승이었어. 나는 태연한 척하면서도, 뒤로는 진땀을 빼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니?”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죠.”

은하성의 태도를 보니, 정말로 그런 생각을 했다기보단 우리끼리 해보자는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이 나온 모양이었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들을 하는지는 알겠다. 그리고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해. 저들 중에 대의명분으로 움직이는 자들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른 언동생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새였기에.

나는 은하성에게 보내던 눈초리를 거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혈교 내의 서열이 재편될 수도 있어 보이니, 야욕이 치밀어 이 급류에 몸을 싣고자 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 혈공의 부작용만 해소되면 도망을 치려는 자도 있을 것이며,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진혈단의 뜻에 함께한다는 자세를 취할 이들도 있을 거야.”

그런 내 말을 숨죽여 경청하는 언동생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훑으며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지금은 단순하게 생각하자. 어차피 저들도 우리를 믿지 않아. 이용한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러니 우리도 신뢰가 확보될 때까지는 저들을 의심하고 이용한다.”

그러자 언동생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중 당옥기가 질문을 해왔다.

“그래서. 이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 산적왕 아저씨랑 노삼교수님이 있는 숭좌채로 가는 건 알겠어. 그다음은? 혈천수라궁까지 어떻게 갈 건데?”

“사겸의 이름으로 그쪽에 이실직고할 거야.”

“이실직고?”

“어. 혈풍대가 누명을 씌우려 하기에, 부득불 혈사를 벌였으니. 죄를 청한다고 할 거야.”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이 짝하고 손뼉을 치는 때.

“아. 그럼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있겠군요?”

“거기에 더해 그 정보를 밖에 있는 이들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뿌려두면. 저들 중 어디를 믿으면 되는지도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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