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88화 (388/444)

제388화. 진혈단 (5)

혈교인들의 광증을 시료하기 위한 막사가 마련되었다.

혈교인들이 시달리는 광증을 눌러내는 일은, 내게 있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부님이 초대천마에게 알려준 몇 줄의 구결에서 출발한 천마신공.’

그 불완전한 천마신공에서 또 한 번 떨어져 나온 것이 혈교의 역혈수라대법이었다.

‘그런데 나는 제대로 된 심법의 구결을 알고 있지.’

게다가 혈조술을 어떻게 혈도에서 달리게 해야 하는지 역시 체득하고 있었고.

이미 독고세가에 적을 두고 있는 진혈단원들을 손봐준 적이 있었기에,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막사를 마련하는 일로, 준비는 끝이 났다고 봐도 무방.

나는 언동생들을 모아놓고 한가지 당부를 전했다.

“교인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너희는 초연하게 무게만 잡고 있어. 철이 네가 사겸에게도 같은 말을 전하고.”

“예.”

“그럼 나가봐.”

그렇게 행동지침을 내린 나는, 곧이어 귀면옹의 음성으로 큰 목소리를 냈다.

“한 사람씩 들여보내라!”

“예. 단주님.”

그러자 곧.

각진 인상의 사내가 막사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들어왔습니다!”

“어디의 누구냐.”

“광남부(广南府)의 석초라 합니다.”

“그래? 석초. 웃통을 까고 내 앞에 뒤돌아 앉거라.”

“뭐, 격체전공 같은 것을 해주시는 겁니까?”

격체전공이란 일신의 내력을 넘겨주는 행위.

사제지간에나 이루어지는 일을 입에 올리는 모습에.

내 입이 절로 열렸다.

“내가 네놈한테 격체전공을 왜 해줘?”

그런 내 모습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이놈아! 본 성격 나온다! 본 성격이 나와!

‘…아니,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 어쨌거나 저 녀석들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 말씀을 따라, 내가 몇 마디를 덧붙이니.

“너나 나나 오늘 처음 본 사이 아니냐? 격체전공은 무슨 격체전공.”

“크흠. 교에 몸담은 이래 점점 광증이 발작하는 일이 잦아져서 이것저것 방도를 찾아봤는데, 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걸 고쳐주신다고 하시니…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선은 잘못 열린 길목을 막아 줄 것이다.”

기운을 거꾸로 돌리는 역혈대법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한데, 순정이 아닌 심결을 주워섬겨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혈(死穴)을 자극하니.

특수한 체질을 타고난 자가 아니면 자연히 마기가 골수까지 치미는 것이었는데.

오늘은 우선 점혈을 통해 그 길목을 봉해줄 생각이었다.

“입 다물고 집중해. 내가 혈도를 잠가둘 것이나, 이 시각 이후 내력을 운용할 때는 스스로 조심해야 할 것이야.”

그렇게 석초라는 놈의 입을 다물게 만든 나는, 파천의 기운을 감은 손으로 사혈로 통하는 길목을 점혈했다.

팍! 팍!

파파팍!!!

그런 내 손길에, 석초는 신음을 흘렸으나.

조치 자체는 순식간에 끝이 났는데.

“나가봐.”

“끄, 끝난 겁니까?”

“끝났으니 나가라 했겠지. 나가봐라. 나가면서 다음 놈 들어오라고 전하고.”

멍청한 목소리를 내는 석초를 막사 밖으로 내보내고 나니.

다른 혈교인이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가운데.

“남해 대주교가 귀면옹이라 부르던데… 저도 그리 부르면 되겠습니까?”

밖에서 작은 소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우선 검지를 손으로 가져간 뒤.

“쉿.”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어떤가?”

“나도 모르겠네. 워낙 순식간에 끝나서.”

“뭘 어쨌길래?

“잘못 열린 혈도를 막아주신다면서 점혈을 해주셨는데. 몸속에서 흐르는 기의 흐름이 잠잠해진 것 같기도? …그냥 기분 탓인가?”

그렇게 다른 혈교인들이 석초에게 관심을 보인다 싶었는데.

그중 성정이 모난 자로 보이는 이가 출수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탓인지 아닌지는 잠시 어울려보면 알 수 있겠지!”

“뭣이?!”

펑! 펑!!

퍼퍼펑! 펑!!

그에, 손속이 뒤섞이는 굉음이 들려오길 잠시.

어느새 귀에 익은 석초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이 정도로 장력을 질러냈으면 슬슬 기혈이 들끓어야 하는데… 그런 조짐이 없는데?”

그걸 확인한 나는, 귀를 기울이던 것을 멈추고.

막사에 들어서 있던 교인을 향해 손짓했다.

“웃통을 까고 내 앞에 뒤돌아 앉거라. 아, 참. 네놈은 어디의 누구냐?”

그렇게, 혈교인들에게 광증을 누르는 점혈을 베푼 지 한참.

‘…시간이 제법 지난 것 같은데.’

어둠이 내리깔려 있던 밖이 밝아 오는 것이 느껴졌는데.

이때.

은하성이 막사의 천막을 들추며 입을 열었다.

“단주님. 방금 나간 사람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냐?”

그 말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니.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놈도 있지만. 그래도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군.’

의문의 눈길을 보내오던 처음과 달리.

여러 감정이 섞인 눈빛들이 내게 쏟아졌다.

“혈도를 잠근 것만으로는 미봉책이다. 운용할 수 있는 내력과 파괴력이 약해진 기분이 들 테지만, 그걸 받아들여야 광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걸 확인한 나는 뒷짐을 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미 골수에 치민 마기는 특수한 약재를 통해 뽑아내야 한다. 그건 독고세가의 일원 중 한 사람에게 맡겨 놓았으니. 그들이 당도하면 나눠줄 것이다.”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이제 노부는 할 일을 다 했다. 혈풍대의 손아귀에서 그대들을 구해주었고, 약속했던 광증을 덜어내는 일도 행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이제 그대들이 선택할 차례야. 답하라. 진혈단의 대의에 동참하겠는가?”

그런 내 말에.

사겸을 필두로 자리해 있던 모든 혈교인들이 동시에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농담 삼아 조정으로 나가거나 사람을 꾀는 게 천직이라고 했었는데… 정말로 광신자들까지 꾀어내는구나.

‘꾀어냈다고 할 정도로 신뢰를 보이는 이는 저들 중 일부에 불과하겠지만. 일단 한 걸음을 뗐습니다.’

그 말에 답한 나는.

다음 걸음을 떼기 위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진혈단에 들겠다는 의지들을 받겠다. 하나, 내가 여차하면 호교법왕들과 대적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대들이 주저하던 모습들을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진혈단의 길을 걷기로 결의한 이상. 혈사는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가지런히 모아놓은 혈풍대의 시신들을 가리키며 남은 말을 이은 뒤.

“그러려면 적을 알아야 하고. 아군을 든든히 해야 한다. 다행히 혈풍대의 일이 혈천수라궁에 전해지는 데에는 시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 진혈단의 규모가 커지면, 앞으로의 혈사를 헤쳐나가는 동력이 되겠지.”

마지막으로 은하연과 당옥기를 가리키며 말을 맺었다.

“지금부터 혈선녀들이 나눠주는 종이에 각자의 본거지와 거느리고 있는 교인들, 그리고 알고 있는 윗선들을 적어. 가까운 곳은 노부가 직접 방문하여 광증을 해소해 줄 것이고. 먼 곳은 그대들이 돌아가서 내가 일러주는 집결지로 이끌고 와.”

*    *    *

언용운이 금의환향한다는 소문.

진주는 말 그대로 도시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잔치 분위기가 됐다.

하나, 그들의 행렬이 도착하기에 앞서 전해진 언정웅의 엄명에, 그 분위기는 해소되었다.

남해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생각하면 떠들썩한 잔치를 벌일 때가 아니라는 언정웅의 전언은 그 자체로 강력한 명분이었고.

평생을 의롭게 살아온 언정웅과 그간 언용운의 행적을 생각하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보였기에.

“…천하를 뒤흔드시는 큰 공자님의 풍모를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가주님과 큰 공자님 명성에 먹칠할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냥 안 오셨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우리 일이나 하세.”

진주의 백성들은 그 말을 받들어, 조용히 생업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언용운이 하북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겨낸 하북조는 요동과 장성 너머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편.

각자의 무위를 닦으며 하루하루를 보내왔는데.

캉! 캉!

카앙! 캉!!!!

언정웅과 하북조의 언동생들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 때.

“가주님. 대군사님이 보내신 전서가 왔습니다.”

“이리 내게.”

제갈혜가 보낸 급서가 이들의 품에 날아들었다.

“아버님? 무슨 내용이 적혀있습니까?”

“…천마신교가 네 형을 찾는듯한 움직임을 보인다는구나?”

“형님은 형님이시고… 그렇다면 저희도 조심해야 할 듯합니다.”

“그래. 용명이 너는 지금 당장 안채로 가서 부인과 함께 가솔들을 불러 모아 이 이야기를 전달해라. 나는 적당한 구실을 들어 방계가문의 가주들을 불러 모으마. 아, 당가의 약방에도 연락해야겠구나.”

급서가 도착한 지, 딱 이틀이 지났을 때.

휙! 휙! 휙! 휙! 휙!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천으로 동여맨 괴한들이 정말로 진주언가의 담장을 넘었다.

“웬 놈들이냐!”

“적습! 적습입니다!”

물론,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던 만큼.

진주언가의 대응은 발 빨랐다.

“소진아! 너희가 안채를 지켜라!”

“예! 숙부님!”

숱하게 실전을 겪어온 언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안채를 지켜냈고.

“진평장주는 후문을! 진성장주는 장원 밖의 민가를 부탁합니다.”

거기에 오랜 갈등을 봉합한 덕분에 한달음에 달려온 방계가문들과, 석가장에서 약방을 관리하고 있던 독괴 당자진까지 더해지니.

“예. 가주님!”

“분부 받잡겠습니다!”

언가장은 물론이고 민가의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었는데.

“언 가주. 어떻게 대충 끝이 난 것 같은데?”

“예. 선배님. 일단 장원으로 침투한 자들은 모두 처치한 것 같습니다.”

“부상 당한 가솔들은 내가 살펴볼 테니, 자네는 그럼 부인에게 가보게. 보기로는 강단 있어 보이지만,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은 처음이시지 않는가?”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안채로 돌아온 언정웅은, 무사한 언동생들과 이화부인을 확인하고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부인을 중히 여기지 않아 아이들에게 맡긴 게 아니라….”

“상공께서 나가 싸우셔야 안전해지는 형국이었죠. 압니다.”

“그, 그렇구려. 그리고 또 뭐냐… 음. 용운이가 걱정되실 텐데, 우리가 이렇게 공격을 당한다는 것은 되레 용운이 쪽이 안전하다는 증거요. 여기 있나 싶어 공격해온 것일 테니까.”

“그것도 알아요.”

“…크흠. 생각 외로 담담하시구려.”

“상공께서 언가장에 복귀 하시자마자 하신 말씀이, 용운이는 더는 우리만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씀이셨잖아요. 마냥 걱정만 해서야 되레 앞길을 망치는 법이죠.”

“흠흠.”

“그러고 보니, 상공께서 용운이를 쫓아내겠다던 결정을 내리시던 날이 생각나네요.”

“…그 말씀은 또 왜.”

멋쩍은 표정을 짓는 언정웅의 모습에.

이화부인은 잠시 웃어 보이곤, 언용운이 있을 남녘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상공을 힐난하려는 게 아니라, 뜻을 세웠으면 믿어주는 것도 부모라는 말이에요. 그날 용운이가 저더러 진즉에 감싸는걸 그만두셨어야 했다는 말을 제게 했었거든요.”

“…고얀 놈.”

“뭐, 누구랑은 다르게, 길이 막혀있으면 돌아갈 줄을 아는 아이니. 어미 가슴에 대못을 박지는 않겠지요. 걱정은 이만하렵니다.”

“…예를 든 누구가 누구요?”

“누구겠어요. 평생 속에 있는 말을 감추고 빙빙 둘러대시는 상공이시죠.”

“큼. 내가 언제….”

“방금도 중히 여기지 않는다, 어쩐다면서 빙빙 둘러대신 분이요?”

“…걱정했소.”

“…저도요.”

*    *    *

언용운이 남녕에서 열렸던 주교회의를 훼방 놓은 지, 열흘.

혈교의 본단 혈천수라궁의 정전 역할을 하는 석조대전의 문이 부서지라 열렸다.

콰아아앙!!!!

그렇게 노기등등한 모습으로 등장한 혈마 진괴량의 모습에.

자리해 있던 네 명의 호교법왕이 일제히 이마를 바닥에 붙였는데.

진괴량은 그들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노성을 냈다.

“바닥에 이마를 붙일 시간이 있으면 상황이나 설명해! 노병오가 죽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남녕의 주교회의가 어찌 된 것이야?!”

그에, 노병오에게 혈마의 친서를 전했던 자왕이 입을 열었다.

“노병오가 이유 없이 자신을 죽이려 하기에, 부득불 죽이게 되었다고 사겸이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본래 행하려던 숙청작업이 어그러진 듯합니다.”

“내가 아는 사겸은 그런 성정이 아닌데?”

진괴량은 본능적으로 이번 일에 뭔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나,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겠어 입술을 씹는 때.

자왕이 재차 입을 열었다.

“예. 사겸은 절대 이런 일을 벌일 성정이 아니지요. 금범단의 다른 교인들을 생각해 순순히 노병오의 뜻에 따랐어야 맞습니다.”

“그래. 이 일. 뭐가 더 있다.”

“…사실 다른 보고가 있긴 했습니다. 현장에 있었다 주장하는 주교 중 하나가 귀신 가면을 쓴 노인이 주동자라는 말을 전해왔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진혈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일찍부터 교내에 만들었다 하는데… 남녕에 운집한 세력의 수가 최소 일천은 넘어 보이더라는 주장을 해왔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예. 터무니없는 주장인지라….”

“…십만대산. 마뇌 그 영감탱이의 짓거리일까?”

“…일단 파악하고 있습니다만. 노병오가 당한 것 자체가, 점조직으로 운영되던 본교의 폐단으로 생긴 듯 보여 소인이 직접 가볼까 합니다.”

그런 자왕의 말에, 진괴량은 고개를 저었다.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황에. 그대가 가는 건 아니지. 혈풍대주를 들라고 해! 내가 친히 명을 내리지. 귀면옹인가 뭔가 하는 그 늙은이를 잡아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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