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9화. 진혈단 (6)
운남성은 중원과 새외의 산물이 교환되는 창구였다.
차마고도(茶焉古道) 혹은 현철길 이라 불리는 이 교역로는, 서쪽의 비단길과 북쪽의 한철길과 더불어 삼대 교역로라 불리는 곳이 었고.
그처럼 막대한 이문이 발생하는 곳인 만큼.
새외의 패자(霸者)인 남만야수궁과 운남 백도무림의 터줏대감인 점 창파 사이에는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점창은 동도회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허허. 그리해 주시겠는가?”
언용운의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점창산으로 향했던 동도회주 제
갈척은, 마침내 점창 장문인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예. 마인들이 벼려온 비수가 그렇게나 날카롭다면, 야수궁과 아웅 다웅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게 될 행동이고, 제자들 보기에도 부끄러우니 말입니다.”
“잘 생각하셨네. 잘 생각하셨어.”
“그런데, 선배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제 결정과 야수궁의 궁주 가 어찌 나을지는 별개입니다.”
“허허허. 그건 내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일 테지.”
“예. 제가 서간을 하나 써드리겠습니다. 진악이를 데려가시지요.”
그렇게, 운남으로 향하는 행렬엔 향란관의 자치회장직에서 벗어나, 점창파의 관일검으로 복귀한 매진악과 다른 제자들이 더해졌는데.
이들의 행렬이 본격적으로 차마고도에 오르는 때.
제갈척이 허연 수염을 쓸며 매진악을 추켜세웠다.
“허허허. 관일검이 점창의 어른들을 미리 설득해놓은 덕분에 일이 잘 풀린 듯하네. 참으로 대견한 일을 했어.”
“과찬이십니다.”
그 말에 매진악이 공손히 겸양하자, 제갈설지가 고개를 가로저었 다.
“과찬이 아니에요 선배님. 이 중요한 시기에 며칠을 벌었어요. 결 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공이죠.”
제갈척은 그런 손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작은 공이 아니라는 말은 맞으나, 며칠을 벌었다는 말을 틀렸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잘못 굳어버리면 수백 년이 가도 해소되지 않는 법이야. 마인들과 우리만 봐도 백 년 된 원수지 않느냐?”
그리고 다시금 매진악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무튼 큰 보탬이 되었네. 이거 은퇴를 번복한 보람이 있구먼. 괴 룡도 그렇고, 관일검도 그렇고. 될성부른 떡잎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 해. 든든하기 그지없구먼.”
매진악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포권을 취했는데.
“…언 회장과 함께 말씀하시면 제가 많이 부끄럽습니다. 회주님.”
그 모습을 보던 제갈설지가 픽 하고 웃었다.
“흐흠?”
“…제갈 후배? 그 웃음은 뭔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듯한데…"
“그냥. 학관에 계실 적엔 청죽관의 행사에 사사건건 딴죽을 거시던 분이. 용운 님을 위해 행동하시는 모습을 보니… 참 선배님도 많이 변하셨다 싶어서요?”
“…그건! 아니, 그러는 제갈 후배도 그 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텐데? 언 후배를 거머리처럼 쫓아다녔지 아마?”
"거머… 저는 결이 좀 다르죠!”
후미를 지키고 있던 남궁윤이, 이들이 탄 마차를 향해 달려온 건 이 때였다.
“대군사님의 급서입니다.”
서간을 받아든 제갈척은 곧바로 암어를 해석한 뒤.
적힌 내용을 간추려 말했다.
“천마신교의 움직임이 있다는구나? 맹주와 혜아가 공격을 당했는 데, 두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다른 이를 찾는 듯 보였다는구먼.”
그 말에, 남궁윤은 미간을 좁혔고.
“…그 말씀은?”
“종남에서 곤륜으로 향하는 행렬은 허패고, 괴룡이 있는 쪽이 우리 의 복심임을 꿰뚫은 모양이야.”
“하면 큰일이 아닙니까?”
“하나,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할 것이다. 괴룡이 어디 있는지를 알 아내려는 목적 그리고 남녘에서 벌어지는 일에 젓가락을 올리려는 수작일 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제갈설지가 입을 연 건 이때였는데.
“예. 모르니까 본인의 속셈이 노출되는 것을 무릅쓰고 그런 수를 뒀겠죠. 문제는 지금이면 용운 님의 계획도 슬슬 시작되었을 때라는
건데….”
제갈척은 남녘을 응시하며 형형한 눈동자를 빛냈다.
“그럴 테지. 하니, 야수궁이 중요하다. 그들이 우리 편에 서기로 하 면 자연히 혈교의 퇴로가 막힘과 동시에, 천마신교의 진출로가 막히 게 된다. 서두르자꾸나.”
* * *
회합에 참여했던 주교들이 털어놓은 정보와 그들이 시료를 받는 과 정에서 밝힌 이름과 별호.
그걸 바탕으로 나는 사겸과 손청정을 제외한 다른 주교들을 세 개 의 집단으로 나눴다.
‘양호‘ ‘보통’ ‘경계‘.
세 집단에 각기 다른 집결지를 알려주고 주교회의를 해산한 나는, 독고세가의 후발대들에 게 옹녕으로 오라는 전언을 남겼다.
그리고 노삼과 도중광을 만나기로 한 숭좌채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지부들을 경유하도록 새롭게 경로를 짠 뒤.
“마산(马山), 상림 (上林), 빈양 (宾阳), 옹녕 (邕宁) 지부를 순서대로 방문해 흡수한 뒤에 숭좌로 넘어갈 것이다.”
두 명의 혈교인이 추가된 인원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여기 있는 금석 주교에게 대강의 사정은 들었을 것이다. 노부가 너희들의 광증을 고쳐주려 하니… 한 사람씩 안으로 들도록 하라.”
당도한 지부들에선 주교회의에서 행했던 시료를 똑같이 베풀었다.
그렇게 혈교의 지부들을 한나하나 진혈단의 세력에 포함시켜 나갔 다.
“단주님. 철입니다.”
“무슨 일이냐.”
“지부의 모든 교인에 대한 시료가 끝났습니다.”
“하면, 모두 막사에서 오십 보씩 걸음을 물리라 전하고. 남해 대주 교는 외각을 경계하라 전해. 철이 너는 막사의 바로 앞을 지키고.”
“예.”
물론, 그저 혈교의 지부를 장악하는 일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었다.
'혈마. 진괴량.'
강적이 기다리고 있는 만큼 연공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다만, 귀면옹의 신선과 같은 분위기를 유지해야 했기에.
명상과 운기조식으로 연공을 대신해야 했는데.
- 오늘도 명상을 하려 하느냐?
'예. 직접 움직일 때랑은 차이가좀 있긴 하지만, 이거라도 해야죠.'
- 때로는 명상을 통해 심상 속의 상대와 합을 겨루는 것이 실제로 검을 움직이는 것보다 나을 때도 있느니라. 뭐, 겨뤄본 이로 상대의 수준이 국한되긴 하지만.
'음. 한데, 오늘은 조금 다른 걸 해보려 합니다.'
- 다른거?
'예. 혈교인들의 광증을 잡아주기 위해 저들의 혈맥을 잠그는 일을 행하다 보니, 저들의 대법이 시전자에게 어떻게 힘을 주는지를 명확 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제 쪽이 순정이고 저쪽은 가짜라는 생각만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배워봄 직한부분도 있더라고요.'
- 본디 배움이란 것이 그러하다. 길을 떠을려보면 쉽지. 작정하고 뚫어낸 관도 같은 것도 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숟한 사람들이 걸음 하여 길이 되는 것도 있지. 그중 후자가 마인들의 무공과 같으니, 가 짜라고 무턱대고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
'예. 하여, 문득 생각난 것인데. 파천신공 덕분에 세맥까지 튼튼한 저라면, 저들의 방식을 응용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 터무니없는 가정은 아니로구나.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는 전제 가 필요하겠지만.
'…왜 과욕이라는 말을 힘주어 말씀하시죠?,
- 몰라서 묻느냐? 내가 네 녀석이 시퍼렇게 부푼 것을 본 것만. 하 나, 둘, 셋….
'에이. 마공을 두고 그런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사부님의 견해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기에.
나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대주천을 시작했다.
처음은 본디 달려내던 경로대로.
사하악-
그렇게 혈맥 곳곳에 익숙한 파천의 기운을 지나게 한 뒤엔, 몇몇 사 혈을 거치는 방식으로.
사하아악-
그렇게 기운을 돌려내니.
일순 단전 속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 맥동하는 혈맥을 진정시키기 위해 계속해 대주천을 실시해 속 을고르고 나니.
'단전에 고여있던 내력의 지름이 늘었다.'
내력 자체가 늘어났다는 사실과 함께.
전신이 땀으로 젖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나를 향해 남궁영이 수건을 내밀어 왔다.
“선배.”
“고맙다.”
그 수건으로 비 오듯 흐른 땀을 닦아내고 있으니.
따로 심부름을 맡겼던 우소릉이 돌아와 입을 열었다.
“언 형.”
“그래. 뭐들어온소식이 있든?”
“독고세가가 광서에 진입했다고 해요.”
“…우리는 빙 둘러 갈 텐데, 녀석들은 바로 올 테니. 옹녕에서 딱 만 나겠군. 합류해서 숭좌로 향하면 되겠다. 그래서, 소식은 그게 끝이냐?”
“한가지 더 있어요. 대군사님께서 각지의 개방조직과 무림맹의 출 장소에 천마신교가 움직이는 것 같으니 경계하라는 말씀을 전하셨대요.”
“움직이는 게 정상이지. 혈교는 창시선언을 한다고 하고, 녹림도 이상한 것 같고. 백도무림은 동도회니 뭐니 안 하던 짓을 하고, 나는 안 보이는 상황일 테니까?”
이야기를 듣던 은하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응시했다.
“…쓰홉, 형님 계획대로 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말입니다.”
“근데?”
“혈마 쪽만 해도 녹록지 않을 것 같은데, 천마신교까지 움직인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좀 벌렁벌렁하네요. 이거 지금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뭡니까?”
그런 은하성의 말에.
당옥기가 살벌한 눈초리를 쏘아내며 입을 열었는데.
“캭. 뭔 그런 말을 해. 말이 씨가 된다 너?”
은하연이 드물게 은하성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런 말이 있지. 하지만. 상계에선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움직 이라는 말도 있어.”
“…하연이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아니, 옥기 누님. 똑같은 말인데 왜 저한테는 도끼눈을 뜨고 누님 말은 맞다고 하십니까?”
“네 말은 뭔가 다 틀리게 들려.”
"……."
그렇게 몇 마디가 오가는 때.
은하연은 나를 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언 공자 혼자만 알고 계시는 것보다. 저희 정도는 정확하게 알고 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소릉이가 돌아오면 이야기해주려고 했었소. 진혈단의 전력이 계획대로 구성이 된다면 혈교와의 싸움 자체는 밀리진 않을 거요.”
운을 뗀 나는 원작의 지식과 모여든 정보를 바탕으로 다가올 혈마 와의 싸움을 짚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혈마 본인이 천마신교의 호법왕 중 하나였던 만큼. 혈교 내에서 호법왕들을 자처하고 있는 이들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순 없을테고. 우 리 쪽엔 교수님도 있고, 도중광 선배도 있으니까. 중요한 건 남만 쪽 으로 간궁윤이랑 제갈 소저인데….”
“야수궁이 나서주면 자연히 천마신교 쪽은 만겹산에 접근하기가 힘들어질 테니까요?”
“그렇지. 한데, 그건 우리가 걱정해봐야 할 일이 아니니. 알아서 잘 해내리라 믿어야지.”
이때 턱을 매만지고 있던 정현이 질문을 해왔다.
“그보다 혈천수라궁 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지 않겠습니까? 돌려보 낸 주교들이 진심으로 진혈단에 따를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 듯합니 다.”
“그래. 그게 제일 중요하다. 돌려보낸 자들 중에 분명 혈천수라궁 에 이런저런 말을 고해바친 자들이 있겠지. 그러라고 돌려보낸 거기 도 하고.”
그 말에 답한 나는 혈교의 전력들을 상기하며 입맛을 다셨다.
“우리의 정체가 짐작이 안 될 테니, 혈마본인이나 호교법왕급이 나 오진 않을 테고….”
그렇다고 허접한 자를 보낼 수도 없을 터.
“…혈풍대의 주 전력이 찾아올 거다. 이번에 진혈단에 들어오게 된 교인들을 판가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겠지만. 그놈들을 없애야 혈 천수라궁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될 거야.”
언용운은 광서 일대의 혈교 지부들을 들르며 교인들의 광증을 고쳐 주었는데.
그 걸음이 옹녕 지부에 이르렀을 때.
독고세가의 후발대가 합류하게 되었다.
“남해대주교를 뵙습니다.”
“그래. 일전에 은하군도에서 본 적이 있지 참? 이름 송 뭐시기였는데.”
“…송호겸입니다.”
“그래. 송호겸. 이쪽은 적수학사.”
“손청정이라 하오. 송 종관이라 부르면 되겠소?”
“예. 처음 뵙겠습니다.”
“우리 중 송 종관이 제일 먼저 진혈단에 들었다던데?”
“혈선녀 분들과 다른 가면인들을 제외하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 지요.”
그에, 언용운을 수행하는 혈교인들 중 독고세가의 종관을 맡고 있 는 송호겸이 합류하게 되었는데.
“광증을 억제하는 법을 정말로 먼저 베푼 것으로 모자라 다른 주교 들을 정말로 돌려보내시다니… 기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뭐라 하는 꼴이나. 마냥 믿어도 될 자들이 아닌데.”
그들 중 가장 먼저 귀면옹을 알게 된 이가 송호겸이었기에, 손청정 의 질문이 그에게 향했다.
“…필경 정보가 샐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혹시, 송 종관은 귀 면옹의 가면 뒤를 본 적이 있소?”
“없습니다.”
“대주교는 남해에서 옹의 진면목을 보았다던데. 하면 송 종관은 무 엇을 보고 저분을 따르는 것이오?”
“글쎄… 뭐랄까. 귀면옹은 버렸다고 생각한 인간성을 떠올리게 만 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가면 뒤가 꼭 중요합니까? 손 학사님은 교주님이 직접 권유하시어 본교에 드셨는지요?”
“…그건 아니긴 하지.”
“저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주교 이상 가는 인물을 만난 적도 없고. 그저 저분이라면, 말씀하시는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을 배신하지는 않겠구나. 그리 생각하고 따를 뿐입니다.”
그런 송호겸의 말에.
“…진혈단이라.”
손천정이 진혈단의 이름을 계속해 읊조리 길 잠시.
사겸이 멀찍이 팔락이는 잎사귀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혈풍대! 혈풍대가 도착했다! 송 종관은 귀면옹께 이 사실을 아뢰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