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0화 진혈단 (7)
“단주님! 저희가 경계를 서고 있던 곳에서부터 천 보쯤 떨어진 거 리에서, 침입자로 보이는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외곽의 경계를 맡겨두었던 송호겸이 달려와목소리를 내는 때.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귀신같은 녀석. 혈천수라궁 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 내다 보더니, 정말로 저놈들이 제 발로 찾아왔구나.
나는 그 말씀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확인된 게, 그저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는 것뿐인가? 사겸과 손 청정은?”
“대주교의 말로는, 혈풍대의 움직임으로 보인다고 하였고. 두 사람 은 침입자들의 걸음을 저지하기 위해 남았습니다.”
보고를 들은 나는 막사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독고철을 향해 말했다.
“철아.”
“예. 단주님.”
“너는 지금 즉시 이 지부의 교인들에게 혈풍대의 본대가 나타났음 을 알려라. 그리고 일러준 집결지로 이동하라는 명을 전해. 그리고 먼저 집결지로 이동해.”
“…예?”
“노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더냐?”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예. 분부대로 행하겠습니다.”
“송 총관은 철이를 돕고.”
“예!”
그렇게 독고철과 송호겸이 막사에서 멀어졌는데.
그러자마자 당옥기가 펄쩍 뛰며 입을 열었다.
“야! 교인들을 왜 다 먼저 보내?”
“교인들은 전력이 되지 못해. 너희들도 저들에게 등을 맡길 수 있 냐고 단체로 성토했잖아.”
“…우리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너는 필요하다고 그랬잖아? 함 께 싸울 것도 아닌데, 지금껏 뭐하러 시간 들이고 품 들여서 고쳐줬 어?”
“내 말은 '당장'은 전력이 아니라는 이야기야. 혈교와의 싸움은 단 순한 땅따먹기가 아냐. 교인들이 의지하는 대상을 혈천수라궁에서 진혈단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렇게 당옥기의 물음에 답하고 있으니, 정현이 고개를 끄덕여 왔다.
“원시천존. 평범한 의리 그 이상의 신뢰를 얻어내야 하겠습니다.”
나는 마주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생각들을 해봐라. 몸을 고쳐주는 일도 억지로는 하지 못했 다. 그런데 죽으라고 나서라면 과연 나서 겠냐?”
장선이 본인의 가슴을 두드리며 한마디를 해온 건 이때였는데.
“용운이 형님 말씀이라면 저는 나설 수 있는데요? 불구덩이에도 들 어갈 수 있습니다. 저는!”
동기의 돌발행동에.
남궁영이 한숨을 내쉬며 장선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선아. 지금 우리 이야기하고 계신 게 아니잖아.”
“아? 죄, 죄송합니다.”
뭐, 나쁠것은 없었다.
장선의 각오 자체는 기특했고.
그 덕에 다른 언동생들 사이에선 피식- 하고 웃음이 번지며, 침입 자 소리에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 풀렸으니까.
나는 두 사람을 향해 손사래를 친 뒤, 계속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교인들은 당장엔 전력이 되지 못하는데, 저들이 있으면 우 리도 마음 놓고 싸우지를 못해. 나나 소릉이를 제외하면 사용하는 무 공들이 모두 정종 무공이야. 언젠가 우리 정체를 밝혀야겠지만, 지금 은 때가아니다.”
그 말이 끝났을 때.
언동생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중 은하성이 질문을 해왔다.
“형님. 그러면 교인들을 비우고 여기서 혈풍대를 맞이하는 겁니 까?”
“일전에도 강조했지만 혈풍대의 본대가 왔다면 노병오 때랑은 다 를 거야. 장소도 옮기는 게 좋겠다.”
“어디로 말입니까?”
되돌아온 물음.
나는 잠시 송호겸의 보고를 상기해 보았는데.
“천 보 밖의 움직임이라 그랬으니까. 지금쯤 사겸과 혈풍대가 조우 했을텐데….”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여니.
“사겸도 살리고 혈풍대 놈들의 심중에 일말의 방심이라도 섞으려 면… 이 산장에 불을 놓는 게 좋겠군.”
은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도망치는 인상을 주시려고요?”
“정확하오.”
“좋은 생각이네요. 혈풍대 입장에선, 사겸은 어쨌거나 혈천수라궁 을 향해 주교회의의 일을 이실직고를 한 자… 그보다는 귀면옹이 목 적일 테니. 불을 놓고 도망가는 인상을 주면, 자연히 저희 쪽으로 오겠어요.”
“거기다 혼비백산 도망치는 자를 쫓다 보면 얕잡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니 그 점도 기대해볼 수 있겠지.”
은하연의 말에 답한 나는 각탁 위의 지도를 가리키며 다시 입올 열었다.
“그래서. 종착지로 어디를 삼으면 좋을지 의견 있는 사람?”
그 말에 답한 건 우소릉이었다.
“제가 언 형 심부름 다니면서 미행당하지 않으려고 구석구석 누비 고 다녔는데요. 이런 식으로 능선을 돌아 내려가다가, 이 계곡으로 들어가면 어떨까요?”
* * *
사겸이 천 보 밖의 움직임을 보고 혈풍대가 나타났다며 고함을 칠때.
성취의 부족으로 기감이 날카롭지 못했던 탓에, 손청정은 그게 혈 풍대라는 확신을 하지 못했다.
하여, 그저 침입자의 등장에 수풀이 쐐기 모양으로 베어져 나간다 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썽겅! 썽겅!
썽거겅!!!!
수풀을 가르는 쐐기가 점점 가까워져 옴에 따라, 손청정도 그들이 혈풍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독한 혈향.'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혈마의 그림자이자, 혈교 내에선 죽음의 다른 이름으로 통하는 혈풍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척. 척. 척. 척. 척.
저마다 시뻘건 피풍의를 뒤집어쓴 일군의 등장에.
손청정의 등허 리 엔 식은땀 한줄기 가 주룩 흘러 내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나타나는 건, 교단에 죄를 지은 이를 처단할 때뿐.'
손청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전력으로 달려오던 혈풍대는, 지남철을 만난 쇳조각처럼 우뚝 걸음 을 멈춰 세웠다.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제대로 멈추는 게 더 힘든 법인데….'
저 정도 속도로 걸음을 내딛다, 단숨에 멈춰 섰다는 것은 혈풍대를 구성하고 있는 대원 개개인의 내공이 상당하다는 증거였고.
'…심지어 한 치의 오와 열도 흐트러지지 않고 멈춰 섰다.'
그건, 합까지 척척 맞는다는 이야기였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동하는 움직임부터 저처럼 살벌한 이들이라면 다른 것은 말할 것 도 없을 터였다.
그에, 손청정이 남몰래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하나하나가 나보다 강한 이들이야.'
쐐기 모양으로 늘어서 있던 혈풍대가 좌우로 갈라지더니. 눈길만으로 살갗을 따끔거 리게 만드는 존재가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온 존재는 사겸과 손청정을 훑고는 입을 열었다.
“남해 대주교 사겸. 그쪽은 평주교 손청정이군? 본인은 혈풍대주 진동철이다.”
그렇게 운을 뗀 진동철은 혈천수라궁에서 받은 명을 단도직입적으 로 입에 올렸다.
“저 위에 있는 산장에 귀면옹이라는 자가 있지?”
"……."
"……."
“이 일에 관계된 모든 이를 본단으로 데려오라는 교주님의 명이시 다. 두사람은순순히 따르라.”
사겸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연건 이때였는데.
“예까지 오신 것을 보면, 노병오 조장이 벌인 짓을 들으셨을 테지? 대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함을 이해하시오.”
“정확히 무엇을 이해하라는 말인가?”
“보시다시피 두 다리가 멀쩡한지라. 혈천수라궁까지 가는 일에 혈 풍대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소. 내 발로 찾아갈 것이니, 돌아가서 그 대로 전해주시오.”
그런 사겸의 말에, 진동철은 미간을 좁혔다.
“사겸.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그러자마자, 진동철의 뒤에선 혈풍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검을 봅 아들었다.
채채채챙!!!!
“마지막 기회다. 교주님의 명에 순순히 복종하라.”
사겸은 이어진 진동철의 말에 답하는 대신, 본인의 애병인 대도를 고쳐 쥐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손청정은 급히 사겸에게 전음을 보냈다.
[대주교. 어쩌려고 그러시오? 지금 우리 둘이서 저 혈풍대를 감당 할 수 있다고 보시는 거요?]
[비켜서자는 전제하에 말을 하는군? 둘이 아니라 혼자서라도 막을 걸세.]
그런 손청정의 말에도, 사겸이 요지부동으로 있는 때.
귀면옹이 머물고 있던 산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화륵-
화르르륵-
그러자, 혈풍대의 시선이 동시에 불길이 치솟는 방향으로 옮겨갔고.
"!"
이윽고 진동철의 명이 떨어졌다.
“불을 놓고 도망가려는 수작인가? 전 대원. 저쪽으로 간다!”
그러자, 혈풍대는 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산장을 향해 튀어 나갔는데.
사겸이 뒤를 쫓겠다는 듯, 황급이 몸을 트는 때.
손청정이 그 소매춤을 붙들며 입을 열었다.
“혈풍대주의 말을 듣지 못하셨소? 이 런 상황에 불을 놓는 건, 전형 적인 줄행랑의 수요. 지부의 다른 교인들도 사분오열로 흩어지는 듯 하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귀면옹이 진정한 혈염천하를 추구하는 구도자인가 했소만, 저 불 길을 보고 나니 심중에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이런 때는 상황을 지 켜보는 게 순리 아니 겠소? 기다렸다가 귀 면옹 이 다른 복안이 있어 저리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기꾼이었던 것 인지를 봅시다. 후자라면 혈풍대의 제안에 응하는 것도 나브지 않을 거요. 주교회의의 일이 커진 덕분에 대주교를 숙청하기는 어려워진 감이 있소.”
그런 손청정의 말에, 사겸은 콧방귀를 꼈고.
“학사는… 그야말로 서생 같은 소리만 하고 있구만. 지금의 혈교엔 나나 자네 같은 사람의 자리는 없어.”
손청정은 바로 발끈했다.
“어쨌거나 면을 텄으니,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기껏 생각해서 말했 는데,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으십니다.”
“모르는 소리를 하는 건 자네야. 귀면옹은… 내 선단과 적룡궁의 선 단 사이에 끼어 곤죽이 될 것을 무릅쓰고 홀로 나타나셨던 분이다. 배 한 척을 빌려주었을 뿐인 인연을 위해서 말이야. 인연을 운운하려 면 그런 일에나 하는 걸세.”
"……."
“그분은 절대로 거둔 이를 버릴 분이 아니야. 소용돌이가 치는 그 험난한 바다, 언제 화포와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는 자리에 나타났던 분이니까. 되레 살리려고 저런 수를 썼겠지.”
“대주교와 옹의 연은 알겠는데 그것만큼은 말도 안 되는….”
“실제로 혈풍대가 지금 그쪽으로 가지 않았나? 사분오열 도망치는 교인들도 대부분 살 수 있을 테지.”
"……."
“자네는 자네 마음대로 해. 나는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귀면옹이 남녕에서 말씀하셨듯 결국 선택이야.”
말을 마친 사겸은 손청정의 손길을 털어내고 혈풍대를 뒤쫓기 시작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길 잠시.
“제기랄.”
손청정은 이내 곧 입술을 씹으며 그 뒤를 따라붙었다.
* * *
불길이 치솟는 산장을 향해 혈풍대가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때.
“진 대주! 아직 우리 사이에 이야기가 남지 않았소?!”
그런 혈풍대의 걸음을 잡아 놓겠다는 듯, 사겸이 따라 붙어왔다.
그에, 진동철의 마음속에선 사겸은 이미 귀면옹에게 넘어간 배교자 라는 확신이 섰다.
하나, 당장 그에게 전력을 쏟을 수는 없었다.
그야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혈풍대가 받은 명령 중 가장 우선순위가 높았던 것이 바로 귀면옹 을 잡는 일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귀면옹이라는 늙은이를 내 앞에 가져와!'
죽이든 살리든 상관은 없었으나, 놓치는 것 만큼은 안 됐다.
“오조장.”
“예. 대주님.”
“오조는 지금부터 대열에서 이탈해 사겸을 상대한다.”
"예"
“될 수 있으면 죽이고, 만약 손청정이나 다른 잔챙이들까지 합류해 상황이 여의치 않아진다면, 그들이 우리의 행사를 방해치 못하도록 잡아끄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존명.”
그렇게 오조를 떼어놓기를 잠시.
혈풍대의 본대는 마침내 불길의 진원지인 산장에 이르렀다.
“어디로 내뺐는지 살펴봐.”
진동철의 명에 혈풍대의 인원들이 불길 가득한 사방으로 흩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언가를 찾아내 진동철에게 보고했는데.
“이쪽에서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주교회에 참석했던 교인들 외에 수천의 단원을 휘하에 두고 있다 는 보고는 거짓인 듯합니다. 그리 많은 인원이 머물렀던 것 같지 않 습니다!”
그 보고를 함께 들은 부대주가 한마디를 해오는 때.
“이 리 내빼는 것도 그렇고. 광증을 해소하는 시료로 단원들을 혹하 게 만들었다는 것도 그렇고. 묘왕 혹은 그 휘하의 인물 아니겠습니 까? 약과 연단술에는 밝고 무위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잡아보면 알겠지.”
대원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대주님! 이쪽에 다급히 빠져나간족적이 있습니다!”
진동철은 곧바로 손바닥을 내보여 수하들의 입을 다물게 한 뒤.
족적이 나있다는 방면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다급히 수풀을 해치는 미세한 소리를 잡아내고 명을 내렸 는데.
“쫓는다.”
기감에 잡혔던 수풀 소리를 고려해, 산을 질러 내달리길 잠시.
탁! 탁! 탁! 탁! 탁!
저마다 가면을 쓴 채, 바쁘게 도망치고 있는 한 무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덜미를 잡았다는 생각에, 진동철은 입을 열었는데.
“귀면옹! 거기서라!”
그러자마자 도망치는 이들의 선두에서있던 늙은이가 빽! 하고 소리 를 질러왔다.
“어른더러 서라 마라 하는구나. 에라이. 싸가지 없는 놈아. 진가는 예법을 똥꾸멍으로 가르치느냐?”
"……."
돌아온 말에, 진동철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으나.
'…사겸과 달리 저 늙은이는 될 수 있으면 살려서 데려가는 게 좋겠 지.'
통성명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성을 아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의뭉스러운 구석이 많았기에.
진동철은 예를 갖추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르신. 교주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괜히 힘 빼지 마시고, 대 화를 좀 하시는 게 어떻겠….”
“싸가지 없다고 했다고 바로 꼬리를 마네. 에이잉. 줏대도 없는 놈. 싫다 이놈아!”
"……."
진동철의 인내심은 딱 여기까지였다.
“근맥을 끊어놔야 말이 좀 통하겠군.”
그는 까드득 이를 갈며 검을 뽑아 들었는데.
진동철의 바람이 무색하게.
귀면옹의 무리는 혈풍대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계속해 도 망쳐 나갔다.
휘 휘 휙!
[경신술이 비상한 늙은이다. 이래서는 언제 끝이 날지 알 수가 없 고. 산세를 보아하니, 저 봉우리 옆쪽에 반드시 계곡이 있을 것이다. 부대주는 우측으로 질러 내려가서 측면으로 몰아」
[존명.]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모습에.
진동철은 곧바로 일대의 지세를 이용한 작전을 실행했다.
그렇게 토끼를 몰듯, 귀면옹 일행을 몰아넣은 결과.
마침내 다다르게 된 막다른 골목.
끼긱-
내내 속을 긁어오던 귀면옹의 입이 걸음과 함께 멈추는 것을 확인 한 진동철이 한마디를 했는데.
“막다른골목이군.”
이때.
귀면옹 쪽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게? 아늑한게, 참 좋다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