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2. 진혈단 ⑼
죽고 나면 부하로 부려주겠다는 내 말에.
진동철은 까득 이를 갈았다.
“…놈.”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희롱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안 하는 걸 보니,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아들었나?”
진동철은 대답 대신 검을 슬쩍 틀며 회한을 밀어냈다.
나도 곧바로 대응했기에.
카앙!!!
나와 진동철은 서로에게 전해진 힘을 흘려내기 위해, 각기 다른 방 향으로 휘리릭 몸을 돌려야 했는데.
균형을 잡고 다시금 회한을 들어 올리니, 진동철의 눈자위 주변에 울룩불룩한 핏대가 선 모습이 보였다.
'…혈교의 마인들이 혈맥 안에서 혈조술을 달리게 할 때 나타나는 특징.'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검을 세운 진동철이 벼락같이 땅을 박차왔다.
쌔애애애애액!
물론, 우직하게 검만 뻗은 것은 아니었다.
진동철의 오른손에 들린 검이 진한 혈향을 흩뿌리며 휘둘러 지는 동 안, 놈의 왼손에선 핏방울이 방울방울 쏘아져 나와 나를 벌집으로 만 들고자 쇄도했다.
슉! 슉! 슉! 슉! 슉!
어지간한 무림인이 이 자리에 대신 서 있었다면, 십중팔구 절체절 명의 순간에 들었으리라.
하나, 나는 혈교인들이 싸우는 방식에 빠삭했다.
'원작에, 독고세가 녀석들 그리고 사겸과 노병오까지 겪어봤으니까.'
하여, 대처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똑같이 혈조술을 감아낸 회한을 바브게 휘저어, 놈이 쏘아낸 핏방울들을 홉수하는 한편.
픽! 픽! 픽! 픽! 픽!
혈맥을 달리고 있는 파천의 기운에, 혈조술을 얹어 진동철의 움직 임까지 따라잡았다.
“그거 너희만 할 수 있는 거 아닌데?”
“!”
혈교를 들쑤시던 귀면옹이 실은 나였다는 사실.
게다가, 본인들의 신공을 백도무림의 종아인 내가 똑같이 사용하는 상황.
혈교인이 라면 충분히 당황할법한 순간이 었다.
하나, 진동철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본신의 위력을 삼 할도 채 끌 어내지 못했던 노병오와는 달랐다.
'과연 혈마의 오른팔이라 이건가.'
진동철의 대응은 즉각 이루어졌다.
놈은 발작하듯 걸음을 물렸고.
동시에, 핏빛 아지랑이가 감긴 좌수와 우수에 들린 검을 미친 듯이 휘둘러 냈다.
그에 순식간에 수십 초가 교환되며,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캉! 카앙!
캉! 캉! 캉!!
다만, 그렇다고 진동철이 전혀 동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해진다. 놈의 동요가.'
화경에 이르며 심신을 오롯이 통제하게 되었고.
이후로 여러 절대고수의 무위를 견식한 덕에 약간의 성취를 더 얻게 되었다.
그 덕에 예리해질 대로 예리해진 내 기감은, 능히 의도를 숨겨내는 고수의 미세한 감정까지 잡아낼 수 있게 되었는데.
'급소를 노려오는 날붙이, 내딛는 걸음, 악다문 입, 내 검초를 아슬 아슬하게 막아내고 있는 와중에도 바쁘게 전황을 읽는 동공.'
그 감각이, 지금 진동철이 조급해하고 있다고 말해왔다.
'이해가 가긴 한다.'
혈마의 그림자로 지금껏 온갖 경험을 해봤을 진동철이었지만.
아군이었던 자가 적군이 되어 일어서는 기괴한 싸움을 해 보기는 처음일 테니까.
뭐, 생각은 여기까지.
캉! 캉!
카아앙!
나는 바쁘게 회한을 휘젓는 한편.
진동철의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조급함을 키우기 위해 말을 붙였다.
“이봐진동철.”
카앙
카카카캉!!!!
“어차피 내 부하가 될 텐데. 이쯤에서 그냥 항복하는 게 어때? 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
“…그 주둥아리를 반드시 찢어놓고 말 것이다.”
“나 원 참. 생각을 해줘도 지랄이네. 나도 사실 뒈진 놈이 더 좋아! 배신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훨씬 싸게 먹혀!”
그런 나를 향해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는데.
- …이놈아. 말을 해도 싸게 먹혀가 뭐냐, 싸게 먹혀가. 모양 빠지 게. 에이잉. 천하의 짠돌이라는 네 동생들 말이 틀린 게 없다.
'…격장지계입니다. 저놈 속을 뒤집으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고요.'
- 격장지계와는 별개로 그냥 평소의 정신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거 겠지.
이때.
진동철이 혈풍대를 향해 새로운 명을 내렸다.
“양인(雨刃) 대형으로!”
대주가 명을 내리자, 혈풍대가 펼치던 합검진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저마다 시뻘건 검을 든 이들이 그런 움직임을 보이니.
마치 개화하는 피안화《彼岸花) 같다는 생각이 드는 때.
'꽃이 피는 것 같네.,
혈풍대의 대형이 둘로 갈라졌다.
그중 하나는 그대로 언동생들을 몰아붙이는 대형을 유지하고.
척! 척! 척!
척! 척!
다른 한 무리가 반월의 형태로 산개해 나를 둘러쌌다.
진동철 입장에서는 언동생들과 맞붙고 있는 전황이 밀리게 되더라 도, 나를 확실히 제거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는데.
사실 이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순간이었다.
‘드디어. 때가 됐나?'
혈교의 마인들을 상대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혈맥을 폭주시켜, 일신의 진기를 한순간에 터트리는 자폭기 혈뢰격이었다.
'평범한 동귀어진의 수와는 다르게 지근거리에서 맞닥뜨리면 그야 말로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니까.'
놈들이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려면, 초장부터 몰아붙여선 안됐다.
아슬아슬하다는 인상을 주다가, 때를 봐서 단숨에 수를 줄여야 했는데.
딱 기다리던 때가온 것이다.
'내 쪽으로 몸을 돌린 녀석들만 일거에 제거하면… 승부의 추가 완전히 우리 쪽으로 기울게 되겠지.'
쌔액! 쌔액!
쌔애액!!!
그랬기에, 살기를 품고 쏟아지는 무수한 날붙이의 향연 속에서도 나는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물론 웃고만 있지는 않았다.
쌔애애-
회한을 벼락처럼 휘저어 쏟아지는 혈풍대의 검초들올 빨아들이듯 붙여 냈고.
창! 창!
차차차창! 차아앙!!!
'암객.‘
- 예. 주군.
그러자마자, 암객을 불러낸 뒤.
녀석의 검이 시커먼 반월을 그려내는 때.
촤아악!!
나도 같이 파천단악의 초식을 그어냈다.
촤아아아악!!!!!!!
그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마인들의 몸들이 잘려 나간 대나무처럼 어슷 허물어지는 때.
가까스로 참격을 피해낸 진동철이 보였다.
나는 놈을 향해 곧바로 땅을 박차 나갔다.
팟!
그런 나를 저지하고자, 살아남은 혈풍대의 마인들은 일제히 검초를 쏟아냈으나.
쌔액! 쌔액! 쌔액! 쌔액!
늘어지는 시간 속에, 그 핏빛 검 림의 틈바구니를 사정없이 헤집고 들어간 나는.
촤악! 촤악! 촤악! 촤악!
확신 없이 그어져 나오는 진동철의 검을, 허리를 꺾어 미끄러지듯 피하고는.
무릎 그리고 회한을 쥔 팔꿈치롤 일시에 틀어 놈의 턱에 회한을 찔 러 올렸다.
* * *
회한에 머리가 꿰뚫린 진동철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쿵.
합격진의 핵이자 혈풍의 눈 역할을 하던 놈이 쓰러지자.
혈풍대가 자랑하는 혈풍만곤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본디 주공(主攻)을 담당해주던 진동철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내가 가차 없이 마인들을 베어내기 시작했으니까.
촤악!
촤아아악!!!!
거기다, 앞서 세 개조에 해당하는 인원이 나와 암객이 질러낸 참격 의 이슬이 되었기에.
이제 놈들에게 남은 전력은 십수 명뿐이었다.
그 틈바구니엔, 부대주로 추정되는 녀석이 남아 있었는데.
“…대주님께서.”
전황이 완전히 기울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놈이 선택한 길은 전원 옥쇄 (玉碎) 였다.
“우리가 저놈들을 살려 내보내면, 놈들은 반드시 본교의 대계를 어 그러뜨릴 것이다! 전원 목숨을 바쳐 교주님께 헌신하라!”
그 말이 떨어지길 무섭게.
혈풍대의 마인들은 청수채의 채주 두흥이 그랬듯, 가슴팍에 손가락 들을 찔러넣어 혈맥을 폭주시키기 시작했는데.
“피….”
내가 걸음을 물리며 피하라 나는 말을 외치려는 때.
언동생들이 알아서 바브게 걸음을 물리기 시작했다.
'짜식들.‘
하나, 마인들도 집요했다.
두흥과 달리, 혈맥이 터져나가는 순간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모양인지.
펑!!
놈들은 필사적으로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펑!!!
퍼엉!!!!!!!
그렇게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쫓아와 터져나가는 마인들을 피 해 계속해 걸음을 물리다 보니.
퍼어엉!!!!!!
자연스럽게 나와 언동생들은 넓게 퍼진 형태로 계곡의 끄트머리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일순 어마어마한 살기가 한 곳에 모여든다 싶어 시선을 옮기니.
"끝이다."
온 얼굴에 끔찍하게 핏대가 불거져 나온 몰골이 된, 혈풍대의 부대 주가 우리를 향해 어 린애 머 리통만 한 혈환(血丸)을 쏘아냈다.
“혈우폭?!”
그게 혈조술을 응용한 강환의 일종임을 알아챈 나는, 언동생들을 향해 한마디 경고를 남겼다.
“다들 뒤로 빠져서 기운으로 몸을 감싸!”
그리고 날아드는 혈환을 갈라내기 위해 땅을 박찼는데.
이때, 은하연이 내 말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혈환을 향해 튀어 나간 다 싶더니.
양 손바닥을 펼쳐 빙공을 쏟아냈다.
"으으”
그에, 혈환에 허연 서리가 내려앉으며 얼어붙었는데.
꽈득! 꽈드득!!!
그러자마자, 은하연은 정현의 이름을 불렀다.
“정현 도장!”
그 말에 달려 나온 정현은 들고 있던 송문검을 땅에 박더니, 빙그르 르 걸음을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현의 걸음이 원을 그리는 때, 녀석의 손은 태극을 그렸다.
그 손아귀로 말미암아 일기 시작한 한 줄기 바람은, 부드럽게 돌고 돌아 마침내 돌개바람이 되었고.
생겨난 돌개바람은 얼어붙은 혈환을 감싸 하늘로 치솟았는데.
그렇게 치솟은 혈환은 이내 곧 귀를 때리는 굉음과 함께 터져나갔다.
퍼어어어엉!!!!!!!
덕분에 우리 위로 피로 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난 그 비를 맞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이번엔 내가 생각한 방법보 다 나은데?”
* * *
귀면옹을 쫓으려 하는 혈풍대의 발목을 붙들려던 사겸의 계획.
이 계획은, 혈풍대에서 떨어져 나온 조가 사겸과 손청정을 상대하 기 시작하면서 어그러졌다.
챙! 챙!!!
채채채챙!!!!!
십만대산 출신이 아님에도 몇 되지 않는 대주교 자리에 오른 사겸 의 무위가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으나.
명을 받은 대로 사겸이 본대의 실력행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혈 풍대 일원들이 진로를 막는 그 모습에.
손청정은 다시 한번 막막함을 느꼈다.
'…과면 혈풍대다.'
그런 손청 정을 향해 사겸 이 전음을 보내온 건 이 때 였다.
[이봐 학사.]
[말씀하시지요.]
[이래서는 끝도 없겠어. 내가 어떻게든 길을 열어 줄 테니까. 자네 만이라도 단주님을 도우러 가.]
[저는 딱히 도우려고 대주교를 쫓아온 게 아닙니다. 그저 귀면옹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었올….]
[거, 아무튼! 예서 이러고 있는 것보단 그쪽으로 가는 게 자네한테 도 나은 선택 아닌가!?]
[……]
[알아들은 것으로 알겠네.]
본인의 할 말을 마친 사겸은 맹렬하게 대도를 휘둘러 나갔다.
캉! 카앙!
캉캉캉!!!!
덕분에 정말로 빠져나갈 길이 열리게 되었고.
그 길로 손청정은 산장이 있던 정상으로 향했는데.
그 사이 불길은 더욱 커져 있었고, 매캐한 탄내가 자욱했다.
"……."
자연스럽게 손청정의 머릿속엔, 저곳에 남아 있던 자들의 흔적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생각과는 달리, 손청정은 어렵지 않게 혈풍대의 진로를 알 수 있었다.
“…지나간 길이 나 있군.”
바위든 거목이든 막아서는 모든 것을 밀어버리며 이동한 무지막지 한 집단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흔적을 쫓아 내려가는 길에서, 손청정은 혈풍대라는 이름의 무 게를 또 한 번 체감할 수 있었는데.
“가히 교인들 사이에서 죽음의 다른 이름이라 불리는 게 아닐 테 지.”
그렇게 내딛어낸 걸음이 옹녕의 산자락 한편에 위치한 어떤 계곡에 이를 즈음.
진하디진한 혈향이 코를 찔러왔다.
‘역혈수라대법을 익힌 내가 진하다고 느낄 정도면, 혈풍대가 그 유 명한 혈풍만곤진을 펼친 건가?'
그에, 손청정의 마음속엔 본능적인 두려움이 일었고.
동시에 어떠한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내가 지금 여기까지 왜 와있는 거지?'
하나, 그는 이내 곧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떨쳐냈다.
'사 대주교의 움직임에 함께한 이상.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다.'
생각을 마친 손청정은 새어 나오는 혈향을 쫓아 계속해 계곡 안으 로 들어갔는데.
‘!?‘
계곡 곳곳에 혈풍대의 상징인 새빨간 피풍의를 입은 시신들이 널브 러져 있다 싶더니.
계곡의 안쪽엔 귀면옹과 그의 측근들이 무사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웬 놈… 이 아니고. 적수 학사가 아니신가?”
죽음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존재로 느껴지 던 혈풍대.
그들과 정말로 맞서 싸우고, 잠재운 귀면옹의 모습에.
손청정은 순수한 감탄과 그런 귀면옹을 의심한 스스로에 대한 부끄 러움을 느꼈다.
그 부끄러움을 자각했을 때.
손청정의 무릎은 굽혀지고 있었다.
척.
그렇게 한쪽 무릎을 굽힌 손청정은, 줄곧 귀면옹이라 부르던 호칭 올 버리고 입을 열었다.
“단주님. 무사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