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3화 진혈단 (10)
손청정은 한쪽 무릎을 굽히며 내게 예를 표했는데.
그러길 잠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지금 사겸 대주교 쪽에….”
그런 손청정의 태도와 입고 있는 창의(鳖衣)에서 묻어나는 혈향.
그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경위롤 바로 짐작해낸 나는, 곧바로 언동 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 학사와 대주교가 있는 곳에 다녀올 터이니. 너희는 이곳을 수습하고 있거라.”
“예!”
그리고 손청정을 향해 앞장서라 턱짓하니.
그가 몸을 일으켜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려가던 중, 손청정은 내게 질문을 해왔다.
“…이야기도 다 듣지 않으시고 따라오십니까?”
“꼭 이야기를 해야 아는가? 자네의 무복에서 나는 혈향은 우리가 있던 계곡에서 벤 게 아니야. 직전까지 싸우다 왔다는 증거겠지.”
"……."
“상대는 혈풍대일 것이고? 계곡까지 쫓아 내려온 대주와 수하들의 수를 감안하면… 진동철이 일개 조 정도를 떼어 놓았을 터, 그들과 싸우다 왔겠지.”
"……."
내 말에도 묵묵부답으로 있는 손청정의 모습에.
나는 다른 침입자가 있는가 생각하며 되물었다.
“노부의 말이 틀렸는가?”
그리 묻자, 손청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뇨. 단주님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혈풍대가 침입한 직후, 사겸 대주교는 그들의 행보를 저지하려 했습니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저만 먼저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맞다고 하면 될 것을 왜 그리 묘한 표정을 지었나?”
“일면 중의 극히 일부만 보시고, 거기까지 짚어내신 혜안에 놀랐습 니다. 그리고….”
“그리고?”
“…사실 제가 여쭌 건 제 이야기를 다 듣지 않으셨다는 부분이 아니 라, 어찌 저를 따라오시냐는 부분입니다.”
이어진 손청정의 말에,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짐작이 갔지만.
혹여라도 억측하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되물음을 던지니.
“뭘 믿고 자네를 따라가고 있느냐. 그런 이야기로구먼? 함정으로 유인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지?”
손청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그것도 혈선녀님들과 호위 분들도 떼어놓고 흘로 말입니 다.”
그 물음에, 나는 픽 웃으며 답을 했는데.
“녀석들을 떼어 놓고 온 이유는 본교 특유의 폭사기 때문이야. 우 르르 몰려가서야, 혈풍대 놈들이 상황이 틀렸음을 깨닫고 혈뢰격을 펼쳐오지 않겠나?”
“그건 그렇습니다.”
“뭐, 자네가 진심인지 어떤지는 그냥 보면 알아. 지금만 봐도 확실 하지. 세상천지에 함정으로 유인하는 중이라고 떠벌리는 계략이 어 디 있나?”
손청정은 진지한 어투로 계속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실제로 혈풍대와 단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했습니 다. 이러시는 저의가 무엇인지, 당신의 뒤를 따르는 게 맞는지 끊임 없이 고민했습니다.”
“꼬박꼬박 단주님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지금은 그 저울질을 끝 낸 모양이로군?”
“…예.”
“학사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하는 성격이로구만.”
사서 고생을 하고, 모가 나서 정을 맞는 성정.
“영리한 사람이 왜 과거시험에 떨어졌는지 알겠어. 딱 보니까 써내 라는 답만 써내면 될 것을, 조정과 관리들을 신랄하게 비판할 위인이야.”
하나, 나는 그런 성정을 싫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솔직한 심정을 내게 토로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한번은 기회를 주는 사람일세.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 난 존재가 의술 좀 베풀었다고 마음속 깊이 박힌 불신의 뿌리가 봅히 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
"……."
“누구나 저울질을 하지 않나? 나 역시 저울질을 하고 있네, 내 손을 거쳐 간 모든 교인을 오롯이 믿고 있지는 않아. 실제로 혈풍대가 내 가 있는 곳을 찾아왔고.”
"……."
“단지, 기댈 곳이 없어 본교에 귀의한 자라면, 종국에는 진혈단의 대의에 결국 동참하게 되리라 기대할 분이야. 뭐, 이 이야기와는 별 개로 선택을 했으면 그 결심이 굳건하길 바라네.”
“…예.”
“엄포를 놓으려 하는 말이 아니라, 그게 자네한테 좋아. 다가을 혈 사에선 우물쭈물해서는 살아남기 힘들 테니 말이야.”
손청정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긴 지 잠시.
매캐한 탄내를 뚫고, 비릿한 혈향이 진하게 풍겨온다 싶더니.
캉! 캉!!!!
카카카캉!!!!!!
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귀에 잡히기 시작했는데.
“이 근방인 모양이로군.”
“예. 제가 떠나오기 전보다 장소가 조금 옮겨진 듯합니다.”
오감을 집중해 격 전의 현장으로 자리를 옮기니 .
피투성이가 된 사겸이 우리를 맞았다.
“어르신! 무사하셨군요!”
내가 무사하다는 것은, 어쨌거나 본대의 계획이 제대로 풀리지 않 았다는 뜻.
"!"
그 사실을 깨달은 혈풍대의 마인들이 일 순 멈칫하는 때.
“간신히 사지를 빠져나왔는데… 이것 참 진퇴양난이로고. 진동철이 도착하기 전에, 남해 대주교를 구하려면 서둘러야겠어.”
나는 놈들이 도망이나 자폭하는 대신, 나를 막아서는 일에 집중하 도록 거짓 정보를 던진 뒤.
손청정을 향해 작전을 말하니.
“내가 좌측을 맡을 테니, 학사가 우측을 맡게.”
양손에 핏빛 아지 랑이를 감은 손청정이 지체없이 땅을 박찼다.
* * *
남은 혈풍대의 인원.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본디 사겸 홀로 묶어두고 있던 적 들이었는데.
나와 손청정이 가세하고.
거기다, 내가 정말로 진동철에게 쫓기고 있는 듯 조급한 티를 곁들 이니.
놈들과의 싸움은 어렵지 않게 끝났다.
촤악!
촤아악!!!
그렇게 남아있던 모든 혈풍대원들이 쓰러지자. 사겸이 다급한 표정으로 산등성이를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시지요. 제가 후미를 지키겠습니다. 학사 자네가 앞장 을서게!”
“그럴 필요 없네.”
“예? 혈풍대주가 쫓아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저놈들이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게 하려고 던진 말이고. 실 은….”
그런 사겸을 향해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된 것일세.”
“그 혈풍대를… 말씀이십니까?”
“그 반응은 뭔가? 내가 놈들에게 당할 줄 알았나?”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 어르신이시라면 놈들에게 쉬이 당하시진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되레 정리해버리실 줄이야.”
그렇게 사겸이 감탄하고 있는 때.
손청정이 질문을 해왔다.
“이제 다음 계획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저희는 무엇을 하면 될는 지요?”
“대주교는 부상의 정도가 어떻지? 움직일 수 있겠나?”
“이래저래 상처는 났지만 크지는 않습니다. 충분합니다.”
“하면, 대주교는 영명 (宁明). 학사는 천등(天等). 각각 방금 말한 집 결지로 가서, 모여있는 교인들을 모아오게.”
나는 그 말에 답하며, 널브러진 마인들의 시신을 가리켰다.
“이 자들이 입고 있는 피풍의를 하나씩 챙겨가면 교인들을 통제하 는 데 도움이 될걸세.”
“새빨간 피풍의는 그 자체로 혈풍대를 상징하니, 진혈단이 저들을 이겼다는 증좌가 되겠군요.”
“그래. 그렇게 해서 숭좌의 서쪽 편에 위치한 봉우리로 오도록.”
내 말에 사겸과 손청정은 군례를 표했다.
“예!"
“명올 받듭니다.”
그들을 뒤로하고 진동철과 격 전을 벌였던 계곡으로 돌아오니 .
언동생들이 마인들의 시신을 가지런히 모아놓은 가운데, 은하연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마침 속을 고르는 일이 끝난 것인지, 은하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 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속은 괜찮소? 그러니까 빠지라는데 왜 달려들었소?”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고.
“속은 괜찮아요. 언 공자의 말에 따르지 않은 이유는, 싸우다 보니 까 제가 익힌 빙공과 저들의 무공이 상극이더라고요. 제가 나서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이어서 은하성이 한마디를 더했다.
“방금은 서당개 어쩌고 하시면서 자기 생각보다 낫다고 하시지 않 으셨습니까?”
“결과는 좋았다만. 지휘체계를 어겼잖아.”
“전형적으로 형님이 즐겨 하시는 행동 아닙니까? 주변 사람 간 떨 어지게 만들지만, 결과는 좋은? 어때요. 저희 마음을 이제 좀 아시겠 습니까?”
녀석이 그렇게 볼멘소리를 내오는 때.
정현이 내 편을 들고 나섰다.
“말씀 자체는 언 소협의 말씀이 맞습니다. 은 소저의 기지 덕분에 모두가 무사합니다만. 체계를 지키는 것은 중요한 도이지요.”
그에, 은하성과 우소릉이 죽을 맞춰 정현을 힐난했는데.
“저저. 모처럼 형님을 몰아붙일 기회였는데. 도사가 아니라 웬수 야, 웬수.”
“맞아요!”
“…웨, 웬수. 크홈.”
정현은 헛기침으로 그 말을 넘기고는, 나를 향해 질문을 했다.
“그보다 손 학사와 함께 구하러 갔던 사 대주교는 어찌 되었습니 까?”
“남은 혈풍대는 처치했고. 두 사람은 철이에게 맡긴 집결지랑 다른 곳으로 각각 보냈다. 숭좌에서 만나게 되겠지.”
“…최종 집결지인 숭좌를 일러주셨군요.”
그런 내 말을 정현이 곱씹는 때.
남궁영이 고개를 끄덕이면 입을 열었다.
“혈풍대라는 존재가 혈교인들에게 가지는 위상이 상당한 것 같던 데. 그런데도 맞선 두 분이라면 조금은 믿어도 되겠죠.”
그런 남궁영의 말에, 다른 언동생들도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최초에 교인들을 신뢰할 수 있냐고 묻던 녀석들의 달라진 태도에. 내 입가에 절로 엷은 미소가 걸리는 때.
사부님께서 한 말씀을 해오셨는데.
- 어떻게 한 고비를 넘었구나.
'예. 다행히 크게 다친 녀석은 없고. 진혈단이라는 조직도 한 걸음 을 내디딘 것 같네요.'
그 말에 답을 하고 있으니, 장선이 머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철이 친구는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다. 혈풍대는 귀면옹을 잡는 걸 우선 과제로 여기고 있 었어, 여러 토끼를 잡으려 하면 다 잃는 법인데. 그중에서도 집토끼 단속은 후 순위라는 걸 아는 거야.”
“아?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형님께서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죠! 그럼 저희는 바로 숭좌채로 가는 건가요?”
“아니. 그전에 혈풍대의 시체들부터 제대로 수습해야지.”
* * *
내가 혈풍대의 시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당옥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수습해 놓으라고 해서 모아놓기는 했는데, 제대로 수습한다는 건 무슨 소리야? 뭘 어쩌려고?”
“강시로 만들 생각이다.”
“엥? 지금?”
“그럼 뭐 내년에 만들까?”
“캭! 그 이야기가 아니라. 강시 그거 그렇게 뚝딱 만들어지는 거 아 니잖아?!”
그렇게 녀석과 몇 마디를 나누고 있는 때.
은하연이 당옥기를 응시하며 말했다.
“강시라는 게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긴 하지.”
“그러니까!”
“하지만 언 공자도 평범한 술사는 아니잖아?”
그리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제대로 된 강시가 아니라, 만겹산까지 가져갈 수 있을 정도로 처 리를 하시겠다는 거죠?”
“정확하오. 꿰맬 곳만 좀 꿰매고 간단히 방부처리 정도만 할 생각이오.”
“제가 빙공을 더하고… 방부처리는 옥기가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일 러주면,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면 되겠네요.”
“좋군. 그럼 은 소저가 전반적으로 지휘를 해주시오.”
“언 공자는요? 어디 가시려고요?”
“어디를 가려는 건 아니고. 저기. 혈풍대주의 시신은 내가 직접 뭘 좀 해보려고 하오.”
“아하. 알겠어요.”
그렇게 졸개들을 은하연에게 맡겨둔 나는 진동철의 시신으로 향했 는데.
그런 나를 향해 사부님께서 질문을 해오셨다.
- 암객 같은 사령기사를 만들려 하느냐?
'그건 아닙니다.'
- 아니라고?
진동철의 영혼이 지닌 격이야 '사령기사' 그러니까 데스나이트를 만드는 데 충분할 터였지만.
그 술법은 어쨌거나 사령과 군신 계약을 맺어야 했다.
'암객을 만들 때도 간신히 만들었던 것 기억 안 나십니까?'
암객의 근간이 되었던 기염곡주만 해도 계약을 받아들이게 하는 일 이 쉽지 않았다.
호식종의 술로 묶어 둘 수야 있겠지만.
'광신자였던 진동철의 영혼은 제게 복종하느니 사멸할 가능성이 큽 니다.'
하지만 해볼 만했다.
진동철은 자폭하지도, 진원진기까지 끌어다 쓰는 강환도 짜낸 바 없었다.
그 말은즉.
평생 쌓아온 혈조술의 기운이 그대로 있다는 것.
- 하면 무엇을 하려고?
'혼이 아니라 육신에 남은 기운을 흡수해서 뭘 좀 만들 겁니다. 왜, 예전에 한 번 보여드렸던 것 같은데요?'
블러드 골렘.
진동철을 매개 삼는다면, 제대로 된 녀석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