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94화 (394/444)

제394화. 귀면옹 (1)

회한을 뽑아 든 나는 진동철의 시신 주변에 술식을 그려 넣기 시작 했는데.

- …내게 보여준 적이 있다고?

내 말을 곱씹던 사부님께서 아! 소리를 내신 건 이때였다.

- 혈용(血俑)을 말하는 게냐?

그러고 보니 사부님께서는 블러드 골렘을 보고 피로 빚은 병마용 (兵焉俑)이냐며 저리 부르셨었다.

용(俑)이란 것이 보통 죽은 사람과 함께 부장하는 상(像)을 말하는 것이었으니, 퍽 어울리는 이름이라 할 수 있었는데.

'진명은 따로 있지만요.'

사부님의 말씀에 답하며, 술식을 그려나가길 잠시.

슥슥-

슥슥슥-

마침내 필요한 술식을 그려 넣는 일이 모두 끝이 났다.

나는 그렇게 완성된 술진을 처음부터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다시 밖으로.

두 번에 걸쳐 진을 이루고 있는 술식들을 뜯어보는 내 모습에, 사부 님께서 다시 입을 여셨다.

- 암객을 얻으려 했던 때보다 훨씬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 듯하구 나?

'예. 기회가 사실상 한 번뿐이니까요.,

암객을 얻기 위해 호식총의 술을 사용했을 땐, 내 내력을 바탕으로 사혼과 씨름을 했었다.

'사령기사의 술은 제 역량이 개입할 여지가 있었지만. 진동철의 시 신에서 혈조술의 기운을 흡수해내야 하는 지금은 술진을 발동시키고 나면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시신에서 뽑아낸 기운을 즉시 흡수해내지 못하면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니, 발동시킬 술진에 만전을 기해야 했는데.

훑어본 결과, 술식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

“다 제대로 그려 넣었군.”

그렇게 점검을 끝낸 나는 곧바로 상단전을 통해 뽑아낸 기운을 술 식에 불어 넣었다.

우웅-

그러자 내력이 뭉텅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술진 전체가 오래된 피의 색처럼 검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그 술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걱-

그리고 회한으로 검지의 끄트머리에 자그마한 상처를 낸 뒤.

술진의 중앙에 위치한 진동철의 시신 위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또옥.

그렇게 떨어져 내린 핏방울은, 일찍이 사부님께서 혈용이라는 이름 을 붙였던 쌀알만 한 사람의 형상으로 화했다.

그 모습을 확인 한 나는, 뒷걸음질을 쳐 술진의 경계 밖으로 나온 뒤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혈륜(血串韵의 종(拢)이여. 명왕의 적자가 허하노니, 망자가 구천에 남기고 간 유류를 취하라.”

그러자, 진동철의 시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 아지랑이들과 술진 특유의 검붉은 기운이 혈용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슈애애애액!!!!

덕분에 일대에 때아닌 강풍이 몰아치게 되었다.

'…술진은 완벽했는데?'

기 (氯)가 중만한 세상이 아니라 이 런 현상이 일어나는 모양이 었다.

나는 만근추의 묘리를 응용해 두 다리에 내력을 실어 버텨냄과 동 시에, 손바닥을 눈앞에 펼친 뒤.

그걸 가림막 삼아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했는데.

그러고 있은 지 반 각쯤 지났을 때.

성난 둣 날뛰던 대기가 우뚝 멈추며 시야가 온전히 확보되었다.

'…알의 형상.'

진동철의 시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리엔 시커먼 알의 형상이 남아있었다.

그 알에 우지직- 금이 가며 장대한 기골의 혈용이 그 안에서 튀어 나왔다.

그르르-

녀석이 그렇게 시뻘건 안광을 형형이 빛내고 있는 때.

언동생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당옥기였다.

“아니 혈풍대주의 시신으로 뭘 좀 하겠다길래… 좀 특별한 강시를 만드는가 했는데 뭔 천재지변을 일으켜? 진짜 요괴 아냐 이거?”

“…요괴? 아니, 요괴도 요괴지만 이거라니? 사람한테 할 소리냐?”

“캭!!! 약재랑 시체 다 날아갈 뻔했잖아! 말이라도 먼저 해주던지! 붇들고 있는다고 혼났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뭐, 덕분에 불도 다 꺼지고 좋네.”

당옥기가 그렇게 쫑알쫑알 쏘아 붙여오는 때.

은하성은 혈용에 관심을 보였다.

“용운 형님. 저거 물거나 그러지는 않죠?”

“내 명령 없이 그러지는 않지.”

“그래요? 선아 너 저 옆에 가서 한번 서봐.”

“…예?"

“아니다. 그럴 필요 없겠다. 너보다도 크네. 거의 소천이 형 정돈 데? 그래서 저건 또 뭡니까? 암객 같은 건가요?”

“혈용의 술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럼 이름이 혈용인가요?”

“그래. 어차피 자세히 설명해도 알아듣지는 못할 거고. 방금 말한 암객이랑 비슷하다고 알면 돼. 내 몸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필요할 때 꺼내는 건 똑같으니까.”

녀석의 말에 답하는 때.

우소릉이 순수한 표정으로 질문을 해왔다.

“암객보다 저게 강한 건가요? 일단 커 보이기는 하는데요?”

그 말에 은하연이 입을 열었고.

“사령술은 문외한이라 모르겠는데. 암객은 기염곡주의 혼으로 만 들었고, 저건 혈풍대주를 매개로 삼았으니 이쪽이 더 강하지 않을까요?”

그녀를 시작으로, 언동생들이 저마다 제 생각을 말해오던 때. 사부님께서도 한마디를 해오셨다.

- 내 보기엔… 눈이 시뻘게 가지고 침을 질질 흘리던 놈을 토대로 만들어 그런지 몰라도, 암객이랑은 다르게 좀 멍청해 보이는 것 같은데?

'…우직하다고 해주시죠. 애 듣습니다.'

그리 말은 했지만.

사부님의 감은 예리했다.

내 명을 가장 우선으로 두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암 객과 달리, 혈용은 그저 내가 내린 명을 우직하게 수행해낼 뿐이었으니까.

괜히 사령기사가 사령술의 꽃이라고 불리는 게 아닌 것이다.

'뭐, 혈용만의 장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소환과 역 소환의 부담이 덜했고.

혈술을 장기로 하는 마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천적 같은 힘을 낼 터 였다.

* * *

혈용을 갈무리한 나는 다른 언동생들을 도와 남은 혈풍대원들의 시 신을수습한 뒤.

최종집결지로 삼은 숭좌 땅으로 이동했다.

당초 노삼과 도중광에게 이곳의 산채를 장악하는 일을 부탁해두었 었는데.

그 계획이 차질없이 이루어진 모양인지, 두 사람이 당도한 우리를 맞아주었다.

“무사히 도착했구나.”

“예. 교수님도 무사하셨습니다.”

그중 먼저 운을 뗀 노삼에게 인사를 하고 있으니.

도중광이 헛기침을 해왔다.

“크흠.”

“선배님도 무사하셨군요.”

“그래. 사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백 장 종이도 맞 들면 낫다고 늙은 거지의 꼬질꼬질한 손이 없는 것보단 낫더군.”

“백 장 종이가 아니라 백지장! 에라 무식한 놈아!”

“당신한테 한 말 아니오. 그… 뭐냐. 예 있다 보니 옹녕에 불이 나는 것을 봤는데. 그거 네 녀석이랑 관련이 있었던 거지?”

그렇게 도중광과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오. 제가 따로 언질을 드린 것도 없는데, 그냥 불이 난 것만 보고 그걸 알아보셨군요? 역시 어쭙잖은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흑도에서 자수성가를 해내신 선배님답습니다.”

“흠흠. 뭐 따지고 보면 자수성가라는 말이 맞기는 하구만.”

노삼은 계속해 한마디씩 추임새를 넣어 왔는데.

“도적놈한테 자수성가는 무슨….”

도중광은 노삼 쪽으로 잠시 시선을 옮기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 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 이 늙은 거지를 너무 믿지마라.”

“예?”

“내가 옹녕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너희가 있는 것 같으니 구하러 가 자 했는데 꼼짝을 안 하더라. 피도 눈물도 없는 거지 같으니.”

“…아니 이놈이 사람을 아주 인간 말종으로 만드네?!”

우리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과 함께 채주가 쓰던 산장으로 이동했는데.

그렇게 옮긴 자리에서 나는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쭉 늘어놓았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노삼이 팔짱을 끼며 질문을 해왔다.

“하면 이제 앞으로 어찌 되는 것이냐?”

“거 리에 따라 도착시간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세 갈래로 보낸 혈교 인들은 이 산채의 반대편에 있는 봉우리에 집결할 겁니다.”

“안 그래도 무리를 이룬 집단 하나가 그쪽에 들어앉은 것을 확인하 긴했다.”

“예. 철이가 이끌고 온 교인들일 겁니다. 사겸과 손청정이 데리러 간 이들도 수일 내로 모일 거고요.”

나는 마침 각탁 위에 올려져 있던 일대의 지도에 손가락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혈풍대를 처치하며 적의 예봉을 꺾었고 시간도 벌었습니다. 하지 만 혈교의 전력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만겹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숟 한 적들이 나타날 겁니다.”

“그렇겠지. 안 그래도 우리가 이 산채를 장악하고 있던 뒤로 놈들 의 척후로 보이는 자들이 몇 번 덤벼왔었다.”

“예. 저희가 가진 모든 재주와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야 하는 싸움 이 될 텐데… 제가 귀면옹의 가면 뒤에 숨어있어서는 제대로 싸워나 갈수가 없습니다.”

그런 내 말에, 정현이 미간을 좁혔다.

“…하면 정체를 밝히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언 소협께서는 본인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파급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빈도의 짧은 생 각으론, 되레 교인들이 혼란스러워할 것 같습니다.”

“귀면옹이 나라는 사실을 공개하겠다는 게 아니야.”

“하면?”

“귀면옹과 괴룡이 동시에 이 판 위에 올라와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말하면, 진혈단의 귀면옹과 동도회의 괴룡이 손을 잡는다. 그렇게 되겠지.”

그런 내 말에, 노삼은 팔짱을 풀고 머리를 긁었는데.

“엥? 둘 다 너 아니냐? 뭔 소리야?”

“예. 실제론 둘 다 저죠. 제 입으로 말하기 뭐한데… 정현 말대로 저 는 백도무림의 상징 같은 게 돼버렸습니다. 제가 귀면옹이 었다고 나 서면 여러모로 좋을 게 없습니다.”

이때, 남궁영이 입을 열었는데.

“대역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어. 정확하다.”

“선배가 나서면 교인들을 묶어내지 못한다는 말이로군요. 하기야, 세인들은 가문에서 쫓겨나 망나니라 불리던 시절보다 백도무림의 종 아로 여겨지는 지금이 각인 돼 있겠죠. 하면, 누가 그 역할을….”

잠시 아미를 좁히던 녀석은, 이내 내가 심중에 둔 이름을 밖으로 꺼냈다.

“…철이인가요?”

“맞가.”

* * *

이윽고 찾아온 해질녘.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야음을 틈타, 독고철이 기다리고 있는 집결지로 향했다.

내 부름에 응한 녀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전음을 보내왔다.

[대놓고 오시지 않고, 왜 이렇게 은밀히 찾아오셨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너도 그렇게 짐작하고 전음을 보낸 거 아니냐?]

[예. 그렇긴 합니다.]

그런 녀석을 향해 나는 바로 본론을 전했다.

[귀 면옹이 가면을 벗는 장을 마련할 생각이다.]

[음, 하기야. 만겹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뭔가 교인들에게 좀 더 신뢰를 주는 장이 필요할 것 같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네가 쓰고 있는 가면 이리 내봐.]

내 말에, 독고철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내게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나는 귀면옹의 가면을 끌러 녀석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네가 귀면옹이 된다.]

“예?”

너무 놀라 육성으로 말을 한 독고철.

내 기감은 주변에 우리 외엔 없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하고자 검지를 입가에 가져갔는데.

그러자, 독고철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귀면옹의 모습으로 공공연하게 저를 지칭하시기도 하셨 고. 특히나 독고세가의 교인들을 함께 두들겨 맞… 교육을 받았는데요?]

[그런 건, 예로부터 위장을 하기 위해 흔히 쓰는 수 아니냐. 되레 더 욱 그럴싸하게 느껴질거야.]

그런 내 말에, 독고철은 잠시 침묵했는데.

이윽고 또박또박 전음을 보내왔다.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왜 하필 저입니까?]

[닥칠 싸움도 중요하지만, 나는 이 싸움이 끝난 뒤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싸움이 끝난 뒤 말씀이십니까?]

[철아. 본교의 이름 뒤에 붙는 교售攵)가 의미하는 게 뭐냐?]

[그야, 종교의 의미를 담은 글자입니다.]

[갓 태동한 본교 말고, 오랜 시간 중원에 이어져 내려온 것들을 생 각해 봐라. 불가의 석존도 도교의 천존도 단순하게 생각하면 버팀목 이다.]

[…….]

[무공에는 옳고 그름이 없으니. 마도로 이어지는 길만 끊어 낸다면, 혈교도 민초들이 기댈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 무공을 고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길로 나아가려면. 거기에 더해 희망과 화해의 상징이 필요하다.]

[…….]

[아니면 같은 역사가 반복될 뿐이야. 망나니 시절에 기연을 얻어 혈 교와 닿았다가 모든 권리가 복권된 나와 달리, 너와 독고세가는 백도 무림의 명암 사이에 놓여있다. 네가 적임이야.]

내 말이 끝났을 때.

나와독고철 사이엔 정적이 내리깔렸다.

그 정적은 깬 건 독고철이 었다.

녀석은 고요히 끓는 눈동자로 결심을 입에 올렸다.

[해보겠습니다. 아니 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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