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95화 (395/444)

제395화. 귀면옹 (2)

기특한 다짐을 해오는 독고철.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 어쨌거나 용운이 너를 대신해야 하는 일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철이가 잘 해낼 수 있겠느냐?

‘멸문지화를 겪은 가문의 후예로 살아가는 일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세상사 깊이 들여다보면, 곡절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냐만.

과거의 영광과 대비되는 시궁창 같은 현실은 청년(靑年)의 인생을 시커멓게 물들이기에 충분한 환경이다.

‘철이가 혈교에 귀의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죠.’

습한 음지에 곰팡이가 슬 듯, 그런 간극은 증오가 피어나도록 만드는 법이니까.

‘하지만, 녀석은 인간으로서의 끈 만큼은 놓지 않았습니다.’

그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의 양심이라는 것은, 한번 닳아버리고 나면 어지간해선 회복이 되지 않는다.

괜히 나쁜 짓은 처음 한 번이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철이는 단단한 녀석입니다.’

비교대상을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원작의 언용운을 보면 독고철의 기특함이 두드러진다.

쇠락했다고 하나, 그래도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가.

자식 걱정에 밤잠 설치는 어머니, 겉으로는 엄해도 속정이 깊은 아버지.

충분한 잠재력을 갖춘 육신.

‘모든 것을 쥐고 태어났음에도, 쥐지 못한 것을 탐하다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주변에 상처를 남기는 녀석도 있으니까요.’

- …누굴 말하는 게냐?

‘그냥 일반적인 예를 한번 떠올려 봤습니다. 아무튼, 잘 해낼 겁니다. 귀면옹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려면… 준비가 좀 필요하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재주도 있는 녀석입니다. 영이만 봐도 알 수 있죠.’

남궁영.

성격이 곰살맞아서 그렇지, 녀석의 몸에 흐르는 남궁세가의 피는 어디 가지 않는다.

‘마인들을 신뢰할 수 있냐고 묻던 녀석이 철이 만큼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 사부님도 보셨지 않습니까?’

- 네 녀석이 어떤 복심을 가졌는지는 알겠다. 사겸과 손청정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있으니, 그 사이 철이가 귀면옹의 겉모습을 흉내 내는 것은 가능하다 보는 것이겠지.

사부님께서는 내 의견에 동의해주시는 듯하였으나.

그 목소리에는 아직 노파심이 남아 있었다.

‘뭐. 교인들을 묶어 내기 위한 연설문도 준비할 것이니, 마냥 겉모습만 흉내 내는 것은 아닙니다. 화해의 상징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죠.’

하여 답을 드리고 있자니, 진짜 속내를 말해오셨다.

-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다.

‘…하면?

- 본격적으로 혈천수라궁과 싸움이 시작되면, 혈풍대가 그리하였듯 집중적으로 귀면옹을 노려오지 않겠느냐?

‘아. 철이의 무위가 걱정이라는 말씀이십니까?’

- 맞다. 결국 녀석이 살아남을 수 있어야, 네 녀석이 말한 ‘화해의 상징’도 될 것 아니냐.

‘…한데, 은근히 화해의 상징이라는 말을 강조하십니다?’

그런 사부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의지에, 나는 되물음을 던졌다.

‘역시 마인들이 신경이 쓰이긴 하시는 거죠? 어쨌거나 저희 파천검문에서 비롯된 이들이긴 하니까요.’

- 흥. 내게 육신이 있었다면, 내 손으로 없애려 나섰을 것이다. 용운이 네가 만날 나더러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다고 비난하는데….

‘에이. 비난이라뇨. 어찌 하늘 같은 사부님을 제자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런 소리를 하려면, 말이나 끊지 말거라.

‘…옙.’

- 아무튼. 돌이켜보면 나는 실제로 그리 살았다. 앞을 막아서는 이는 베었고, 눈에 밟히는 게 보이면 이따금 가진 재주를 베풀기도 했지. 인간 위철진의 삶에 후회는 없다. 하나, 용운이 네 사부 된 입장으론 부끄럽기는 하구나.

‘…사부님께서 부끄러워 하실 일은 아닌데요.’

- 그건 네 생각이고. 나로 말미암아 태어난 천마신교. 그들이 천하에 끼치는 누로 인해 민초들이 신음하고 네가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드느니라.

‘…….’

- 마도로 이어지는 길만 끊어낸다면, 저들도 민초들이 기댈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라…. 그야말로 청출어람인 게지.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부님께서는 담담한 어조로 내게 질문하셨다.

- 용운이 네가 혈조술을 사용하는 방식을 지켜본바. 철이 녀석에게 그 방식을 전수해주려면 파천의 심결 중 일부를 일러주어야 하겠지?

‘…예? 아, 예. 그렇긴 하죠?’

- 나와는 달리 한 걸음을 걸을 때도 전후좌우를 다 살피는 게 네 녀석이니, 련금이 놈에게 구결을 베풀었던 나와는 다른 결과를 빚어낼 터. 필요하다면 가르쳐주어도 좋다.

그렇게 사부님으로부터 역혈수라대법을 고쳐 쓰는 데 필요한 구결을 일러줘도 된다는 허락을 득할 무렵.

독고철이 마른침을 삼키며 전음을 보내왔다.

[제 얼굴을 뚫어지라 보시는데…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것입니까?]

그런 녀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실수한 건 없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고민하다 보니 빤히 보고 있었네.]

[아, 예.]

[사겸과 손청정이 도착하기 전까지 준비할 게 많다. 오늘부터 특훈이야.]

[예! 말투와 행동 여러모로 차질이 없어야 하겠지요. 각오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혈조술도 수련한다.]

[…혈조술 말씀입니까?]

돌아온 독고철의 물음.

[그래. 네가 중급 이하 간부들에게 허락된 무공만 익히고 있어서는 안 돼. 귀면옹의 위엄을 드러내기에도 부족하고, 다가올 본단과의 싸움에서는 위험해지겠지.]

그렇게 운을 뗀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는데.

[너는 대법의 부작용을 막는 시료를 받은 지 제법 시간이 되었으니, 내가 당부한 것들을 잘 지켰다면 혈도의 순환이 안정되었을 텐데?]

[아, 예. 기를 운용할 때. 느껴지던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은 지 오래되긴 했습니다.]

[그럼 다음 계단을 올라낼 준비는 충분할 거야.]

[제가 감히 그런 것을 누려도….]

내가 단호한 어조로 뜻을 전하자.

[쓰흡.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내가 맡긴 일, 해내겠다며?]

[…예? 아, 예!]

[사겸, 손청정. 두 사람이 도착하려면 열흘쯤 걸릴 텐데. 이거 많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 없어.]

[예.]

[그럼 가부좌 틀고 앉아.]

독고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나는 그런 독고철의 등에 손바닥을 대며 말했다.

[내 진기를 네 혈도에 흘려 넣어 줄 건데, 그 길을 잘 기억해라.]

그리고 암객을 불러내 호법을 맡긴 뒤.

‘암객.’

- 예. 주군.

‘너는 호법을 서라.’

- 존 명.

독고철의 혈도에 진기를 흘려 넣어 새로운 길을 일러주기 시작했다.

사학-

난생처음 두드리는 혈자리에, 독고철은 낮게 신음하며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으나.

“큿.”

행해지는 주천이 반복됨에 따라, 점차 편안한 표정으로 빠르게 진기를 돌려내기 시작했다.

그에, 막혀있던 혈이 열리며 독고철의 의복에 흘러나온 노폐물이 물들기 시작한 지 한참.

운기를 마친 녀석이 번쩍 눈을 떴다.

- 제대로 익혀낸 것 같구나.

‘그러게요.’

그 눈동자에 감도는 이채를 확인한 나는 계속해 말을 이었는데.

[앞으로 사흘간은 방금의 혈자리들에 내력을 돌리는 것에 열중하고 그 뒤로는 혈륜에서 짜낸 기운을 싣는 수련을 하게 될 거다.]

이때, 독고철이 질문을 해왔다.

[…제가 회장님에 비해 식견이 일천하나. 역혈수라대법이 본교의 다른 신공들을 익히기 위한 거름이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한데?]

[이건 본교의 무공이 아닙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독고철이 보내오는 눈빛에 나는 턱을 긁으며 입을 열었는데.

[…말하자면 긴데. 그냥 내가 창안했다고 보면 된다.]

그러자, 독고철이 나를 향해 절을 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나는 녀석의 소매를 붙들며 입을 열었다.

[…뭐하냐?]

[하면… 구배지례를 올리는 게 순서 아니겠습니까?]

[뭔, 구배지례야. 다른 애들 앞에서 족보를 어쩌려고.]

[하지만. 제게 스승이 되시는 것은 맞지 않습니까?]

그런 녀석의 행동에, 내가 곤란해 하던 때.

‘…이 녀석이 묘한 곳에서 명문가 출신 티가 나네.’

사부님께서는 박장대소를 터트리셨다.

- 푸하하하.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저희 문파의 족보도 꼬이게 생겼는데요?’

- 파천검문의 족보가 왜 꼬여? 내가 허락한 건, 심결의 일부일 뿐인데. 나는 워낙에 유별난 제자를 둔 터라, 하나로도 벅차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이 곤란을 무마할 생각이 하나 스쳤다.

[너 내가 준 귀면옹의 가면 좀 다시 이리 내봐,]

[가면 말씀입니까?]

[그래. 꼭 구배지례를 해야겠거든 너는 귀면옹의 제자인 걸로 치자.]

* * *

한편, 제갈척이 이끄는 사절단은 차마고도를 따라 여정을 계속해 마침내 남만 야수궁에 들어서게 되었다.

야수궁의 환대는 언뜻 성대해 보였다.

궁주인 맹륭이 직접 나와 사절단을 맞아 주었고.

“대군사님! 어서 오십시오! 중원의 객들이 오신다고 하여, 내 좋은 과일주를 준비해두고 있었습니다!”

“허허. 이 늙은이는 대군사직에서 물러난 지 제법 되었다오.”

“물러나셨다 하나, 제게는 천기묘산 어르신이 대군사님이십니다!”

걸판진 상차림에, 남국의 무희들이 선보이는 춤사위.

거기에 야수궁의 무인들이 저마다 해괴한 맹수들을 타고 연회장에 들어와 곡예와 무위를 선보였으니까.

뿌오오오오오!!!

“헉.”

“그러고 보니 윤님은 코끼리를 본 적이 없다고 하셨죠? 놀라실 만도 하네요.”

“…놀란 게 아니라, 호기심이 조금 동한 것이다.”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입은 좀 닫고 그런 말씀을 하시죠?”

그에, 처음에는 그 연회를 가볍게 즐기던 중원의 사절단이었으나.

점차 성대한 대접과는 별개로 궁주인 맹륭의 행동에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궁주. 이 늙은이가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이까?”

“당연히 들어드려야지요!”

“…하면.”

“하나. 우선 저희가 준비한 환대부터 다 받아주시고 난 뒤에 해주시지요.”

“…….”

“저희는 손님을 성대하게 맞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자칫 무거운 이야기로 인해 흥이 깨지면, 궁인들 앞에서 이 사람의 체면이 우스워집니다.”

“…허허허. 그리 하십시다.”

남만야수궁의 위치가 치우쳐 있다고 하나, 차마고도를 교역로로 삼는 그들이 무림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과하게 태평한 모습을 보이는 맹륭의 태도에.

제갈설지는 할아버지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어쩐지 궁주님의 태도가 좀 이상한데요? 궁금한 것이든 원하는 것이든 떠보기 위해서라도 할아버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 슬슬 피하는 게 좀….]

[태도가 미적지근한 것도 그렇지만, 나는 맞은편에 놓인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걸리는구나.]

[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소궁주님이나 야수궁의 백관들이 앉을 자리인가 했는데… 그들의 자리라면 궁주님이 자리해 계시는데 비어있는 게 말이 안 되죠?]

이때.

금장갑주를 갖춰 입은 야수궁의 궁인 하나가 연회장으로 달려 들어와 입을 열었는데.

“궁주님! 대산에서 온 손님들도 당도했습니다!”

“안으로 뫼셔라.”

흘려듣기 힘든 지명에, 제갈척 휘하의 사절단들이 저마다 미간을 좁히는 때.

한 무리의 행렬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저벅저벅.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남궁윤과 매진악을 필두로 한 사절단의 후기지수들은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검을 뽑았다.

채채채챙!!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행렬을 이끌고 온 노인이 입고 있는 의복에 새겨진 문양.

그 문양은 학관이 습격당하고, 초왕부가 공격당할 때 익히 보아온 천마신교 마뇌부의 문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몸을 일으킨 남궁윤은 분에 찬 목소리로 일갈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마인들이 얼굴을 들이미는가!?”

그 노성에, 마인들을 이끌고 온 노인은 슬쩍 눈썹을 들어 올려 남궁윤을 확인하고는 끓는 목소리로 웃음 지었다.

“끌끌끌. 누추한 이 몸이 뵙기에 야수궁주님은 존귀하신 분이긴 합니다만… 거기 계신 공자님께서는 어째 남만이 중원이 영토인 듯 엄포를 놓으십니다그려? 이 땅에 발을 딛는 데엔 궁주님의 허락만 있으면 족한 것으로 아는데, 중원인들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었소이까?”

한 마디로 남궁윤을 남만야수궁을 우습게 보는 자로 만들어 버린 노마두의 행동.

“……!”

그에 남궁윤이 아차하는 표정을 짓는 때.

제갈척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괜한 소란 피우지 말고, 다들 앉거라.”

그렇게 후기지수들을 진정시킨 제갈척은 노마두를 응시하며 피식 웃었다.

“그쪽이 십만대산의 마뇌 되시는가? 평생을 맞수로 살아온 터라.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는구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