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6화. 귀면옹 (3)
제갈척이 마인들 중 가장 앞에 선 노인을 쏘아보자.
그를 부축하고 있던 시동(侍童)이 입을 열었다.
“그쪽은 천기묘산 어르신이시지요? 뭐, 하늘의 흐름을 읽는다는 별호를 지니신 분 치고는 딱히 스승님을 곤란케 한 적이 없으시지만 말입니다?”
짐짓 예의 바른 척하고 있으나,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분명한 모욕이었다.
할아버지를 향하는 모욕에, 제갈설지는 입을 열려 했다.
“지금 뭐라고….”
하나, 제갈척은 그런 손녀를 향해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리고 입을 놀린 시동을 향해 대꾸했다.
“그리 말을 해도 되겠느냐?”
“틀린 말을 하진 않은 듯합니다만?”
“아니, 말이야 맞지. 내가 평생 저 늙은이를 끌어내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은 사실이니까.”
자신을 향하는 모욕을 순순히 인정하는 제갈척의 모습에, 마인들 사이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번지는 때.
“나야 기실 은퇴했던 늙은이라, 그리 깎아내려 봐야 잃을 것이 없지. 하지만. 네 스승은 여즉 만마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위인 아니냐?”
제갈척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그 말대로라면 십만대산을 좌지우지하는 천하의 마뇌가, 새파란 애송이인 괴룡에게 끌려 나온 꼴이 될 텐데?”
“…….”
“내 말도 틀린 말은 아닌 듯하지?”
제갈척의 말에, 저마다 입을 다무는 마인들의 모습에.
백도무림 후기지수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중 매진악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고.
“역시 어르신이시다.”
제갈설지는 미소를 보이며 턱을 들어 올렸다.
“검황 어르신과 평생 실랑이를 해오셨는데, 저런 저급한 도발에 휘말릴 분이 아니시죠.”
남궁윤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실제로 언용운이 저자들을 끌어낸 것도 맞으니까.”
그에 젊은 마인들이 저마다 이를 가는 때.
마뇌가 손을 슬쩍 들어 그들을 제지하더니, 제갈척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갈효봉이라 하오.”
“제갈척이라 하네.”
통성명과 함께 두 노인의 시선은 공중에서 얽혔는데.
그로 인해 주변의 대기가 착 가라앉는 때.
짝!
야수궁주 맹륭이 거대한 손을 부딪치며 입을 열었다.
“허허허, 이것 참. 이 사람 때문에 두 분 모두 곤란하신 듯합니다.”
“…….”
“…….”
“이 맹모가 남만 땅에 틀어박혀 있지만. 강호의 일엔 귀를 열어놓고 사는지라, 정마 간의 다툼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나, 어느 쪽의 방문 요청도 물릴 수가 없어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제갈척과 갈효봉.
두 사람 모두 야수궁의 지원을 끌어내고자, 남만까지 온 것이었다.
“두 분 모두 이 맹륭의 얼굴을 봐서라도 묵은 감정은 잠시 내려놓아 주시지요.”
하여, 맹륭의 말은 일단 먹혀들었다.
그렇게 연회는 적막 속에서 재개되었는데.
이 같은 얄팍한 평화가 영원히 유지될 수는 없는 일.
슬슬 정마 양자를 두고 저울질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인지, 맹륭이 백도의 후기지수들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정무학관에 교류생으로 간 야수궁의 무인들을 잘 대해줬다지? 오늘 이 자리는 그런 자네들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네. 어떻게, 만족들 하는가?”
그런 맹륭의 말에.
제갈설지는 공손히 소매를 붙여 들며 입을 열었다.
“예.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궁주님.”
“다행이군. 조금 전에 자네들이 검을 뽑은 일은 괘념치 않을 것이니. 편히들 즐기도록 하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윤 님이 방금 검을 뽑아 든 것은 천마신교 사람들의 본질을 잘 알기에 그러한 것이지. 야수궁을 얕잡아 보고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이미 마음에 두지 않고 있다지 않나. 그나저나 본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천마신교는 야수궁이 대화상대로 삼을 이들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들은 교묘한 계략으로 북해빙궁을 삼키려 했고, 그를 위해 초원에선 일부러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중원 곳곳과 남해에선 입에 담기 힘든 참혹한 일을 벌였습니다. 저들이 정녕 대화를 나눌 상대로 느껴지십니까?”
그 말에, 앞서 제갈척을 모욕했던 마뇌의 제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에, 맹륭이 입을 열었다.
“마뇌의 제자분도 이 사람에게 할 말이 있으신가?”
“경몽이라 합니다. 정확히는 저 여자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제갈설지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턱을 들어 올렸다.
그에 경몽이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것이냐?”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시는군요.”
“너희는 우리의 적이다. 그리고 네가 열거한 이들은 모두 우리와 벗이 되길 거절하고, 너희를 이롭게 하려던 자들이었다.”
“무고한 백성들이 휘말린 게 얼마인데… 그런 호도(糊塗)를! 그야말로 마도답군요!”
“우리를 마인이라 부르며 벌레처럼 죽이고, 이이제이니 이호경식이니 하는 말을 써가며 하는 협잡질을 하는 건 누구인가? 그래놓고 너희는 정도, 본교의 행사는 마도라니. 오만하기 그지없다!”
불꽃이 튀는 듯한 제갈설지와 경몽.
맹륭은 괜히 멋쩍은 척 입을 열었다.
“내심 이 사람이 중재를 서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이것 참. 정마 간의 갈등이 실로 깊구려.”
자리에 앉은 뒤로, 줄곧 잠자코 있던 마뇌가 입을 연 건 이때였다.
“이 늙은이의 제자가 미욱한지라, 말이 좀 거칠었습니다만. 본교는 그저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뿐입니다. 저들의 말처럼 우리가 정말로 지옥에서 비롯된 마귀들의 집단이라면, 어찌 십만대산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운을 뗀 갈효봉은 맹륭의 어투를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 궁주님께서는 아까부터 본교와 저들을 동시에 칭해야 할 때면, 정(正)을 앞에 두고 계십니다. 역시 저들과의 연이 중하신 모양이지요?”
하나, 맹륭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천마신교와는 이번에 처음 마주하는 것이고, 중원의 손님들은 아무래도 오래 벗으로 지내왔다 보니 말이 그리 나오는구려.”
이는 칼자루를 자신이 쥐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는데.
“탓하는 게 아닙니다. 교류생을 보낼 정도로 오래 연을 맺어 왔다는 것을 이 늙은이도 모르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것을 상기하십시오.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리듯, 본교가 무너지면 야수궁의 처지가 상당히 고달파질 것입니다.”
“그게 무슨….”
“생각해 보십시오. 백도무림의 횡포를 본교가 누르고 있는 면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어진 갈효봉의 말에.
맹륭은 그만 미간을 구기고야 말았다.
“실제로, 본교가 위협적으로 느껴지자, 앙숙이던 점창도 대제자인 관일검까지 보내며 먼저 숙이고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 * *
맹륭이 동요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갈효봉은 계속해 말을 이어나갔는데.
“사실 독대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그때 소개하려 했는데… 궁주님께서 옛 인연을 중히 여긴다면 그 기회를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여기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하자, 갈효봉 옆에 앉아 있던 민머리의 승려와 매부리코의 무인이 각각 합장과 포권을 취해왔다.
“여기 두 분은 각각 천축의 뢰음사와 대막 너머의 태양궁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그저, 적아를 구분할 뿐이라는 이 늙은이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실 분들이지요.”
뢰음사와 태양궁.
각각 새외의 패자로 군림하는 두 집단의 등장에.
맹륭뿐만 아니라 백도의 사절단에도 긴장감이 서렸다.
그걸 확인한 갈효봉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맺었다.
“중원만 떼어 놓고 보면 본교가 조금 후퇴를 하게 된 형국이나. 저들이 괜히 십만대산으로 발을 들이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는 만겹산에 똬리를 튼 혈교를 박멸하길 원합니다. 어느 쪽이 야수궁에게 이득이 될 친구일지 잘 고민해 보십시오.”
그에, 연회장엔 무거운 정적이 찾아들었는데.
그러길 잠시, 남궁윤이 벌떡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안경. 남궁세가의 윤. 당장은 미흡할 따름이나, 저는 장차 남궁세가의 가주가 될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야수궁의 맹우가 되기를 서약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문서로 남겨도 좋습니다.”
남궁윤의 뒤를 이어, 매진악도 자리를 박차고 섰다.
“점창의 대제자 매진악도 같은 약조를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에, 제갈설지는 할아버지의 소매를 당겼다.
그런 제갈설지의 손을 다독인 제갈척은, 흐뭇한 표정으로 두 후기지수를 응시하더니.
맹륭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젊은 후기지수들의 마음이 보기 좋소만. 나는 다른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궁주.”
“…어떤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우리 제갈세가가 독하게 마음을 먹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
“제갈가가 독하게 마음먹고, 친인척들과 가문의 친우들을 모두 움직이면. 백도무림뿐만 아니라 조정을 움직여 남정군을 이리로 보낼 수도 있소.”
제갈척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맹륭은 쾅! 하고 탁자를 내려치며 입을 열었다.
“지금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하나, 제갈척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바로 맞췄소이다! 궁주가 저울질을 하시겠다니, 이쪽이 가진 무게추를 다 내보여야지. 그래야 계산을 제대로 하시지 않겠소?”
그 말에 갈효봉이 눈썹을 비틀며 입을 열었다.
“…허풍도 적당히 쳐야지. 방금의 말은 관무불가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이거니와, 결국 일개 세족이 하늘의 뜻을 움직였다는 것이 드러나면 당신들 제갈세가가 멸문지화를 겪게 될 텐데?”
“하여,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 하지 않았나? 염려해줘서 고맙네만. 내가 우리 손녀를 좀 많이 아껴서 말이야.”
“…….”
“이 녀석이 부나방처럼 뛰어드는 꼴을 보느니, 독하게 마음 한번 먹지 뭐.”
그렇게 이어진 제갈척의 엄포에, 맹륭과 갈효봉은 물론, 백도의 후기지수들도 입을 쩍 벌리게 되었다.
그에, 연회장에 벽력탄이 떨어진 듯한 분위기가 흐르길 잠시.
제갈설지가 손을 들어 올리며 그 분위기를 깨고 나섰다.
“궁주님은 빠지시는 게 좋겠어요.”
그런 제갈설지의 말에.
맹륭은 안 그래도 좁히고 있던 미간을 와락 구기며 말했다.
“지금 할아버님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인가?”
“제가 할아버님을 모시고 오긴 했지만, 저 역시 한 명의 사절로 이 자리에 왔어요. 그리고 장차 제갈세가를 이어갈 사람이기도 해요.”
“…….”
“저기 있는 노마두가 궁주님께 어느 쪽이 좋은 친구일지 고민해보라고 했죠?”
“…….”
“그 말은 결국 본인들과 함께 싸우자는 이야기죠. 같이 피를 흘리자는 친구보단, 너라도 피를 흘리지 말라는 친구가 더 좋은 친구 아닐까요?”
“…그게 무슨?”
“저울질을 그만두시고 정마 간의 싸움에서 완전히 빠지시라고요.”
“…….”
“누가 이기든 득은 볼 수 없겠으나. 그렇다고 실을 보지도 않겠죠. 물론, 이 제안은 차마고도의 이익을 향후 십 년간 내어드리겠다는 약속을 바탕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런 제갈설지의 말에, 맹륭이 좁히고 있던 미간을 풀고 턱을 만지는 때.
갈효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궁주님. 초청에 대한 답례품은 이 자리에 두고 가겠습니다. 언제고 또 뵐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장 밖을 향해 냉정하게 걸음을 돌렸다.
“가자.”
그 말에 따라,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마인들의 모습에.
남궁윤은 놀란 얼굴로 제갈척에게 물었다.
“…궁주님이 아직 아무런 답도 하지 않으셨는데, 그냥 가는 것 같습니다.”
그에, 제갈척이 수염을 쓸며 입을 열었다.
“방금 설지가 한 제안은 그 자체로 마인들에게 외통수일세.”
“…외통수 말씀이십니까?”
“피를 흘리지 말라는 우리 제안을 두고, 함께 피를 흘리자는 천마신교의 제안을 선택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원래 저희의 계획은 야수궁의 지원을 끌어내는 것 아니었는지요?”
“본디 전략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네. 적이 원하는 것을 망치는 것만으로 성공인데… 우리가 야수궁의 지원을 끌어내려 한 이유는 천마신교의 대병력이 만겹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어.”
“아. 야수궁이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것만으로 그 조건이 충족하는군요…!”
“그리되는 것이지.”
제갈척은 남궁윤의 말에 답하며, 제갈설지를 기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는데.
“성장했구나.”
“용운 님이라면 저 늙은이를 어떻게 엿을 먹여 줄까 고민했더니, 생각이 났어요.”
“…엿?”
“그보다 할아버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저희도 만겹산으로 움직여야죠.”
“그렇지. 천마신교가 대병력을 이리로 보내는 것은 막았으나, 마뇌가 끌고 온 인원이 있다. 교활한 늙은이가 허튼짓을 못하도록 하려면 고단한 여정이 될 것이니. 모두 단단히 채비하거라.”
* * *
독고철을 귀면옹의 제자로 들인지 여드레.
그간 나는 독고철에게 혈조술과 귀면옹의 태도를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다.
‘순찰조의 기척?’
하여, 숭좌채와 혈교인들의 집결지를 은밀히 오가야 했는데.
기척을 죽이고, 땅에 몸을 붙이고 있는 나를 보며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참, 힘들게 산다. 힘들게 살아.
‘…며칠 전만 해도 저를 보면 내키는 대로 살았던 게 부끄럽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사람은 본디 여러 감정을 느끼는 법이니라.
‘…검이시면서.’
- ?
‘?’
뭐, 보람은 있었다.
애초에 백도무림에 잠입하기 위한 훈련을 받아온 독고철이었다.
녀석은 좋은 눈썰미와 연기력으로 귀면옹의 행동거지를 그럴싸하게 흉내 내기 시작했고.
내가 전수한 혈조술에도 빠르게 적응해냈다.
- …방금 뭐라고 그랬느냐?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 분명히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아무튼. 이 짓도 오늘로 끝입니다.’
독고철이 내 모습을 그럴싸하게 소화해 낼 수 있게 되었기에.
나는 귀면옹이 집결지에 당도하는 일정을 추진했다.
“이 집결지에 와 있겠다는 선택을 한 그대들의 뜻을 노부는 무겁게 받을 것이다.”
그에, 본인이 이끌고 온 교인들 앞에 귀면옹의 모습으로 서게 된 독고철은 침착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냈는데.
“사겸과 손청정이 이끌고 올 교인들까지 더해지면 진정한 혈염천하로 향하는 길이 열릴 터. 다가올 혈사를 넘어 낼 수 있도록 교인들은 만전을 기하라.”
혈선녀와 호위로 분해, 그런 독고철의 모습을 확인한 언동생들은.
이윽고 이동한 막사에서 나와 독고철이 가면을 벗자, 저마다 감탄을 해왔다.
“헉!”
우소릉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랬고.
“소릉이는 조용. 주위를 물려놓긴 했지만 조심해야지.”
“…죄, 죄송해요. 저는 아직까지는 언 형이 귀면옹의 역할을 하고 계신 줄 알았는데, 철이가 나와서 놀래서요.”
은하연과 은하성도 각각 한마디씩을 해왔다.
“혈조술로 날개를 만드는 그거 언 공자만 하실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철이도 하던데요?”
“혈조술도 혈조술이지만. 어투나 몸가짐이 진짜 그럴싸했습니다. 정현 도장은 산적 흉내도 못 내는데, 어떻게 용운 형님을 흉내 내지.”
“…빈도 이야기가 거기서 왜.”
그런 언동생들의 모습에, 독고철이 뿌듯해하는 때.
나는 녀석을 향해 엄한 눈초리를 보냈다.
“마음 풀어지지 마라. 혹여라도 산통이 깨지면. 진혈단이 아니라 콩가루가 되는 거야.”
“…예.”
“내가 써준 연설문은 숙지하고 있지?”
“예!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았던지라, 그냥 외워졌습니다.”
“그게 제일 중요하다. 진혈단의 공식적인 창단식이 될 테니까. 말이 막히거나 절면 안 되니까 틈틈이 되뇌도록 해.”
“예!”
그렇게 독고철을 다잡고 있는 때.
당옥기와 함께 막사 밖의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남궁영이, 기별을 해왔다.
“단주님. 남해 대주교가 이끄는 교인들이 인근에 당도했다는 전언입니다.”
나는 벗고 있던 가면을 다시금 걸쳐 쓰며 입을 열었다.
“그러려면, 우선 흑도에서 구를 대로 구른 사겸의 눈부터 속일 수 있어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