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7화. 귀면옹 (4)
사겸이 오고 있다는 전언.
나는 다시금 귀면옹의 가면을 걸쳐 쓰는 독고철을 향해 특별히 기억해 두어야 할 사안에 대해 말했는데.
“사겸이 향했던 집결지는 영명(宁明)이다. 그리로 출발하기 전에 사겸은 혈풍대와의 싸움으로 상처를 입었었고.”
“그렇습니까?”
“그래. 당시 내가 부상의 정도가 어떤지 물은 적이 있다.”
“기억해두겠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을 보면, 아마 영명으로 본인 휘하의 금범단원 중 일부를 불렀을 거야. 그 점도 유의하고.”
“예.”
할 말을 마치고, 다른 언동생들과 함께 호위가 있어야 할 자리에 가서 서니.
사부님께서 질문을 던져오셨다.
- 괜찮겠느냐?
‘사겸 말씀이십니까?
- 그래. 철이의 귀면옹 행세가 제법 감쪽같기는 하구나. 독고세가의 사람들도 모르고 넘어갈 정도니까. 하나, 절대고수의 반열에 오르면 오감이 발달하고 직감 역시 곤두서느니라. 너도 알 텐데?
‘…예. 거기다 사겸은 흑도 바닥에서 구른 위인이니. 더욱 조심해야겠죠.’
- …알면서 철이를 내세운단 말이냐?
‘어쨌거나 철이는 귀면옹의 모습으로 사겸 앞에 서야 합니다. 저는 오히려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선은 독고철이 연기하는 귀면옹을, 사겸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일 테다.
하나, 설령 귀면옹 행세를 하는 자가 바뀌었다는 것을 사겸이 눈치채더라도, 그가 당장에 깽판을 칠 리는 없었다.
‘혈풍대에 맞서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사겸은 이미 저희 사람이 됐습니다. 설령 눈앞의 귀면옹이 가짜라는 판단이 서더라도… 섣부른 행동을 하진 않을 겁니다.’
내가 자신을 시험한다고 여기거나, 다른 복심이 있는지를 고민할 터였으니까.
그렇게 사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를 잠시.
남궁영이 다시금 소식을 알려왔다.
“단주님. 남해대주교와 교인들이 도착하여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전언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나와 언동생들은, 귀면옹으로 분한 독고철의 뒤를 따라 막사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자, 이미 무릎을 굽히고 있던 사겸과 휘하의 교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남해 대주교 사겸. 단주님의 명을 받들어, 영명에 집결해 있던 진혈단원들을 데려왔습니다.”
“은하군도에서 보았던 얼굴들도 보이는구만?”
“예. 제가 이끄는 금범단의 인원 중 일부도 불러올렸습니다.”
독고철은 그들을 근엄한 태도로 맞아 주었다.
“다들 어려운 선택들을 하였다. 다른 집결지에서 오고 있는 교인들이 이곳에 당도하면 진정한 혈염천하로 통하는 길에 나설 것이니. 모두 여독을 풀고 심신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라.”
“존 명!”
“혈선녀 둘은 당도한 교인들의 숙영지를 알려주도록.”
“예.”
“대주교는 노부를 따르시게.”
그리고는 사겸을 막사 안으로 불러들인 뒤.
태연하게 보고를 듣기 시작했다.
“그래. 오는 길에 별다른 일은 없던가?”
“예. 이 정도 규모로 교인들이 움직이면, 교단 쪽에서 움직임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만… 혈풍대가 단주님의 손에 궤멸된 덕인 것 같습니다.”
“그쪽의 보고가 뚝 끊겼으니. 안 그래도 점조직으로 돌아가던 교단의 체계가 일시적으로 마비가 됐겠지.”
“예. 그런 듯합니다.”
나는 오감을 집중해, 사겸과 독고철이 말하는 태도를 주시했는데.
“앞서 노부가 교인들에게 만전을 기하라 했는데, 대주교는 어떤가? 혈풍대와 전투 중에 입은 상처 말이야.”
“…아. 상처는 다 회복하였습니다.”
“하면, 옹녕에서 그랬던 것처럼 근방의 경비를 자네와 금범단의 인원들이 맡아주게.”
“예.”
그러고 있기를 잠시.
사겸이 꾸벅 포권을 취하고 막사를 나갔다.
그에 막사 안에 일순 정적이 찾아들었다.
“…….”
“…….”
“…….”
“…….”
그 정적이 깨진 건, 교인들에게 숙영지를 안내하라고 보낸 당옥기와 남궁영이 돌아왔을 때였다.
“…뭐야. 다들 왜 시체처럼 그러고 있어? 아, 해적 아저씨는 숙영지 쪽으로 갔어.”
“예.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그에, 언동생들이 죽이고 있던 숨을 후- 하고 토해냈는데.
그중 은하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확인을 구했다.
“저러고 물러났으면 눈치 못 챈 거 맞죠? 잘된 거죠?”
그 말에, 장선은 머리를 긁었고.
“저는 잘 모르겠네요.”
은하연과 정현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선이의 의견에 저도 동의를 해야겠네요. 철이가 실수를 한 것 같진 않은데, 대주교를 직접적으로 마주한 적이 사실 손에 꼽아서 잘 모르겠어요.”
“원시천존. 본디, 한 길 사람의 속이 열 길 물속보다 어려운 법 아니겠습니까.”
우소릉은 어색하게 웃으며 본인의 희망을 늘어놓았다.
“자, 잘된 거였으면 좋겠네요. 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도 속으론 진짜 조마조마했는데… 철아, 대단하다.”
그렇게 언동생들이 저마다 한마디씩을 해오는 때.
사부님께서 질문해오셨다.
- 용운이 네 생각은 어떠냐?
‘남녕의 주교회의 이후로 언제나 귀면옹 앞에선 공손했던 사겸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뱃사람 특유의 거침없는 기색이 있었는데. 착 가라앉은 느낌이 드는 게… 아무래도 알아챈 것 같습니다.’
- 하면 어쩌려느냐?
‘말씀드린 대로, 알아챘다 하여 섣불리 움직일 사겸이 아니긴 합니다.’
그렇게 이어진 물음에 입을 연 나는, 잠시 염두에 두고 있는 청사진을 떠올려 보았는데.
‘…새롭게 태어날 혈교는 결국 독고철과 사겸 그리고 손천정이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고 나니.
생각이 명료해졌다.
‘이거, 어쩌면 통과의례이자 기회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통과의례는 철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고. 기회라니? 그건 무슨 소리냐?
‘예. 철이에게 어디까지 맡길 수 있는지 확인하는 통과의례이고. 사겸의 진심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드네요.’
- …그냥 두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일단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겸 쪽에서 무슨 행동이 있을 듯하긴 하니…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려면 너무 떨어져 있어선 안 되겠지만요.’
* * *
언용운이 볼일이 있다며 종적을 감춘 때.
독고철이 혈조술을 수련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에, 언동생들은 지난 며칠간 그래왔듯 널찍하게 퍼져 번을 서는 것으로, 독고철에게 주위를 크게 물린 공간을 마련해 주었는데.
그렇게 마련된 공터에서 독고철이 혈조술의 기운을 손에 막 감으려는 때.
사하악-
혈선녀의 역할을 하고 있던, 남궁영이 한마디 말을 전해왔다.
“…단주님. 사겸 대주교가 독대를 청하고 있습니다.”
“대주교가?”
“예.”
독고철은 여러모로 교묘하다고 생각했다.
‘귀면옹은 사겸을 홀대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하니, 여기서 다른 언동생들을 불러들이면 그 자체로 귀면옹이 아니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과 같았다.
‘대주교가 무언가 눈치를 챘나?’
그에 독고철의 뇌리에 경종이 울렸으나.
그렇다고 독대를 거절한다는 선택을 하기엔 그 역시 귀면옹이 아니라고 시인하는 것과 같았다.
외통수처럼 느껴지는 상황에, 독고철의 머릿속에 경종이 더욱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스치는 생각에, 독고철은 가만히 그간의 삶을 돌아보았다.
‘하나, 내 인생에 위험하거나 불안하지 않던 날이 있었던가?’
그나마 행복했던 기억이라 치부할 수 있는 기억이 정무학관의 생활이었으나.
그마저도 거짓으로 점철돼 있었기에, 언제나 독고철은 고뇌했다.
오늘 웃고 떠드는 친우들에게 검을 겨눠야 하는 상황을.
독고세가의 재건을 함께 기뻐해 주던 사람들이 배신감에 찬 눈빛을 보내올 순간을.
언제 일장춘몽으로 끝나도 이상할 게 없는 하루살이 같은 나날들을 보내왔던 독고철이었기에.
‘…화해의 상징.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얼음판에 올라가라 떠미는 교단이 아니라,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교단.’
그는 언용운이 들려준 앞으로의 혈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신에 스미려 하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그렇게 내심의 경종을 잠재운 독고철은 귀면옹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는데.
“들여보내라.”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걸어들어와 묵묵히 예를 표하던 사겸의 신형이, 일순 벼락같이 독고철을 향해 쇄도했다.
팟-
독고철은 자신이 사겸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고.
그에, 단숨에 지근거리까지 다가선 사겸이 차가운 날붙이를 독고철의 목덜미에 붙이며 입을 열었다.
“누구냐. 너는 단주님이 아니다.”
사겸은 말을 하며 붙이고 있는 날붙이를 슬쩍 틀었다.
그에, 독고철의 목덜미에 엷은 혈선이 생겼다.
주륵.
사겸은 그 날붙이를 충분히 더 파고들게 만들 수도 있는 사람.
독대를 받아들일 때, 이미 위험을 예견한 독고철이었으나.
이 순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두렵다.’
하나, 그 두려움은 그저 목숨을 잃는 것에서 기인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목숨을 잃음으로써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이 어그러지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언용운이라는 사람을 만났지만… 천하만민이 그런 기연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되면 제이 제삼의 독고세가와 독고철이 마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터.
독고철은 심중에 스미는 두려움을 가차없이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노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그래서? 노부? 네놈이 귀면옹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이 자리에 섰거늘. 계속 단주님 흉내를 내? 무슨 수작질이냐!?”
“노부가 네가 아는 귀면옹이 아니라 치자, 단주인 그분이 모든 사안을 일일이 자네와 의논해야 하는가?”
“…….”
독고철의 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사겸은 이윽고 되물음을 던졌다.
“…혹. 단주님이 나를 시험하시는 것이냐?”
“그건 내가 묻고 싶군. 대주교의 마음속에 있는 진혈단주는 그럴 사람인가?”
“…….”
“그리고 또 하나 묻고 싶군. 대주교 그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가? 귀신 가면의 뒤에 있는 얼굴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
그런 독고철의 호통에, 다시 한번 사겸의 말문이 막히길 잠시.
“…달리 뜻이 있으시다는 말이냐? 네가 그분의 행세를 하는 게 진혈단의 뜻과 이어진다는 말이고?”
재차 입을 연 사겸의 말에, 독고철이 답하자.
“모든 일엔 때가 있는 법일세.”
독고철의 목에 겨누고 있던 칼을 거둔 사겸이 몸을 돌렸고.
“…지켜볼 것이다.”
사라지는 사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독고철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피를 닦으며 막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사겸과 독고철이 자리를 떠난 지 한 참.
근처에 있던 수풀이 가볍게 흔들거렸다.
* * *
한편, 마뇌 갈효봉을 부축해 야수궁을 빠져나온 경몽은 백도무림의 후기지수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고 있었다.
“그 오만한 눈동자를 파내고 주둥이는 찢어놨어야 하는데!”
분을 참지 못하고 노성을 뱉던 경몽은 이내 갈효봉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스승님. 제자의 실수로 일을 그르친 듯합니다.”
“네가 설치는 게 실이라 봤으면 진즉에 입을 봉하였을 것이다. 떠들도록 둔 것은 그리 해야 맹륭의 심기가 들끓어 우리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 봤기 때문이야.”
“그러셨군요.”
“네 녀석이 아둔한 것과는 별개로. 애초에 남만은 중원과 교류가 깊은 곳이다. 우리가 접어주고 시작한 판이야.”
운을 뗀 갈효봉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저들의 오만은 백도무림의 강함을 나타낸다. 중원에 깊이 뿌리 내린 역사, 그 역사에서 비롯되는 부와 관맥(官脈), 그리고 무지렁이들의 추종까지 말이다. 그저 화를 내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두렵게 여기고 경계해야 하며 언제고 꺾을 계기를 마련해야지.”
“…예.”
“…그나저나 백도에는 젊은 싹이 괴룡만 있는 것이 아니더구나. 알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남궁윤이라는 녀석도 본인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
“특히나 그 제갈설지라는 녀석은 엄포를 놓은 제 할아버지가 스스로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절묘하게 꺼내 놓았어.”
그렇게 갈효봉이 백도무림의 후기지수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상기하고 있는 때.
경몽이 다시 입을 열었는데.
“…스승님. 한데, 이곳에 오기 전에 여러 계획을 말씀해주셨었습니다. 그중 어떤 것을 택할 요량이십니까?”
“야수궁을 교두보로 사용한다는 선택은 이래서야 할 수 없겠지. 뭐, 그래도 괴룡이 이곳에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여기 없다면, 혈교를 몰아붙이는 전선에 가 있을 터인데.”
여기까지 말한 갈효봉은 광서가 있는 방면을 응시하며 눈썹을 비틀었다.
“그래서 이 애송이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제 아비는 하북으로, 공손무결은 곤륜으로 보내놓고 제 놈은 만겹산으로 들어가 있냐는 건데… 괴룡 외에 경계할 싹들도 있으나. 결국 이놈이 제일 문제로군. 일단, 지필묵을 이리 내거라. 혈마에게 간만에 서신 한 통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