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98화 (398/444)

제398화. 귀면옹 (5)

암흑동화와 귀식대법을 응용해 독고철과 사겸의 독대를 지켜보기를 한참.

당사자들은 흩어졌고, 내 신진대사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발끝의 감각까지 모두 돌아왔군.’

나는 굳어있던 몸을 풀며, 사겸이 걸어 나간 방면을 응시했다.

‘일단은 철이가 연기하는 귀면옹을 인정하기로 한 모양인데… 그럼 도 선배와 교수님을 뵈러 가볼까.’

당장에 급한 불은 껐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집결지의 반대 방면에 있는 숭좌채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부님께서 입을 여신 건 이때였다.

- 흐음. 철이 저 녀석….

말끝을 흐리시는 사부님의 모습에, 나는 질문을 던졌다.

‘비교적 잘 대처한 것 같은데요? 무엇보다도 목에 칼이 들어온 순간에도 침착하게 귀면옹의 모습을 유지해낸 게 고무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사겸이 긴가민가한 상태였다면 그 대목에서 흔들렸을 만큼, 독고철의 대처는 침착했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하느니라.

‘한데 방금은 왜 침음성을 내셨습니까?’

- 아 그거? 그건 그냥 제자의 제자 놈에게서도 요사스러운 혓바닥의 조짐이 보여서 그런 것인데?

‘…예?’

- 철이 저 녀석이 일학년인지라, 만날 이선에서 명령을 듣는 처지라 그렇지. 이번에 보니까 혀가 뱀의 재질이야. 누구랑 닮았어.

‘그 누구가 혹시 접니까?’

- 글쎄다? 찔리느냐?

‘…아주 숨 쉬듯이 음해를 하시네요. 그리고 혓바닥 이야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제자의 제자라는 요상한 거리두기는 도대체 뭡니까? 저희가 부끄럽습니까?’

- 쓰흡. 그것 참 어려운 질문이구나. 세상 거리낄 것 없이 살아온 나다만, 언젠가 스승님 앞에 선다 생각하면…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이것 참.

‘?’

- ?

‘???’

그렇게 나를 놀리시기를 잠시.

사부님께서는 이내 곧 제대로 된 소감을 말씀하셨다.

- 그래도 품은 뜻은 확고해 보이더구나. 가면 뒤의 얼굴이 누구냐가 아니라 진혈단의 뜻이 중요하다는 말을 한 철이도, 그 말에 걸음을 돌린 사겸도 말이다.

‘예. 통과의례로는 적절한 듯합니다.’

사부님의 말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겸 쪽은 지켜보겠다는 사족을 붙이긴 했습니다만.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죠.’

혈천수라궁과 싸워나가려면, 모든 일의 기본을 경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사부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산을 넘다 보니.

어느덧 초소가 세워져 있는 동쪽 봉우리에 이르게 되었는데.

보초를 서고 있던 녹림도에게 신호를 보내니.

목책의 문이 드르륵- 올라가며, 노삼과 도중광이 나를 맞아 주었다.

“왔느냐.”

“예. 교수님.”

“조금 전에 거지새끼 하나가 기다란 상행단이 이 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던데… 요 앞으로는 개미새끼 하나도 지나가지 않았고, 저쪽 봉우리에 해적 두목 놈이 도착했나 보지?”

“반나절쯤 전에 도착했습니다.”

“한데, 용운이 니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을 보면… 철이의 귀면옹 흉내가 제법 그럴싸했던 모양이로구나. 안 걸렸느냐?”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일단은 잘 넘어갔습니다.”

그런 내 말에 노삼은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일단은? 흠. 하기야, 애초에 번갯불에 콩 볶듯 할 일이 아니긴 하지. 사겸이 혈교와의 일을 헤쳐나가는 데 꼭 필요한 인물이기도 하고, 사마외도 중에 그만한 인물이 드무니 말이다.”

도중광이 입을 연 건 이때였다.

“흥. 해적 놈들은 본디 단순무식한데다가, 내빼면 끝인 바다에서 도적질하는 놈들이라,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들인데. 뭘 그리 금칠을 하시오?”

“허이고, 지금 도중광이 너랑 사겸을 비교하는 자리인 줄 아냐? 은근히 턱을 드네 이 도적놈이.”

“참나, 내가 언제 턱을 들었다고 그러시오?”

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다시 집중시켰다.

“아무튼, 집결지 쪽은 준비가 됐다고 보시면 되고. 며칠 내로 천등(天等)으로 갔던 손천정도 당도할 텐데, 그럼 출정입니다. 두 분은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런 내 말에, 노삼이 되물었다.

“단순히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이라기보다는, 뭔가 더 있는 눈치 같은데?”

“고단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단순히 다가올 적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 있지만. 그 싸움을 이겨낸다고 하더라도, 저들을 품어내는 일이 남습니다.”

마도로 통하는 길을 끊어 버팀목이 되게 한다는 나름의 청사진을 갖고 진행하는 일이었으나.

세상만사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

어쨌거나 마인들을 인정하는 일인 만큼, 속이 꼬인 이들에게는 좋게 보일 리 만무한 일이니.

‘날파리 같은 자들이 꼬일 수가 있지.’

하여, 세상만사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두 분이 간과하고 있을 이야기를 하자.

노삼이 콧방귀와 함께 팔짱을 끼고 나섰다.

“…용운이 너 예전에 방주님을 뵈었던 기억을 까먹었느냐? 그때 산서의 거지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길, 세상에 하등 쓸모없는 게 거지이니 의롭기라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번 일은 충분히 의로운 일이다. 그럼 행하면 그뿐이야. 뭔 소리를 하는가 했네.”

곁에 있던 도중광도 한마디를 더했는데.

“흥. 일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당하고는 못 사는 성미야. 혈마인지 뭔지 곤죽을 만들어 놓기 전엔 잠이 안 온다. 나중 일은 나중에 가서 생각하면 돼.”

의(義)라는 말을 직접 뱉은 것이 멋쩍었던 모양인지, 노삼은 괜히 도중광의 트집을 잡았다.

“금분세수를 하겠다는 놈이 나중이 어딨어? 괜히 멋있는 척하지 마라.”

“본인이나 잘하시오. 나보고 턱을 들었다 어쩐다 하던데, 당신이 방금 지은 표정이야말로 재수 없기 그지없소. 어디 가서 함부로 짓지 마시오. 사흘은 밥맛이 떨어질 것 같으니.”

천하의 악우 같아 보여도, 합을 맞출 땐 또 철석같이 맞추는 두 사람이었기에.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리 알고, 출정식을 치를 때쯤 다시 기별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

“오냐.”

“두 분께 전해드릴 말은 다 했고. 온 김에 강시들 좀 봐야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노삼과 도중광을 뒤로하고 본디 숭좌채의 녹림도들이 식재료를 보관하던 동굴로 향했는데.

“옥기가 처리를 잘해놨네.”

혈풍대의 시신으로 만든 강시들을 보고 있자니.

“후. 남만은 천기묘산 어르신이 직접 간 이상, 최소한 중립 이상의 성과는 거둘 거고. 그렇다면 필요한 조각들이 다 모인 건데….”

자연히 혈마 진괴량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결국 혈마를 감당해내지 못하면 말짱 꽝이겠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나는 혈용과 암객을 동시에 불러냈다.

“나와.”

그리고 강시가 안치돼 있는 관에 일제히 상단전에서 뽑아낸 내력을 밀어 넣으며, 언령을 내뱉었다.

“덤벼.”

* * *

혈천수라궁.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의 주인인 혈마 진괴량은 혈우신공을 가다듬느라 여념이 없었고.

궁인들은 그런 진괴량의 성취를 자축하며 다가올 창시선언을 준비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였다.

하나, 귀면옹이라는 인물이 모습을 내보인 이후로, 모든 체계가 아귀가 맞지 않는 목재처럼 삐걱대고 있었다.

쾅!!!

하여, 진괴량은 비동에 들어가는 대신.

오늘도 거칠게 석조전의 문을 열고 들어와 태사의에 앉았다.

“자왕! 혈풍대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인가?!”

진괴량의 노성에, 자왕이라 불린 노인이 이마를 땅에 붙이며 입을 열었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아직 혈풍대에서 어떠한 연락도 당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귀면옹의 집단이 숭좌에 몰려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숭좌면 광서에서 만겹산으로 넘어오는 동쪽 관문이 아닌가? 진동철이 이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

“후. 혈풍대가 배교자들을 한 번에 처단하기 위해 기다릴 가능성은?”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대주가 아직 보고를 하지 않는 것이….”

“보고를 하지 않는 것이 뭐?”

“…….”

“혈풍대가 몰살이라도 당했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염두에 두고 자시고, 그게 가능한 일이야? 귀면옹 그놈이 우리 혈천계의 마공을 사용한다면서? 호법 넷 중에 묘왕은 그런 무위를 갖추지 못했고 나머지 셋은 이 궁에 있는데. 대체 누가 혈풍대를 그리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노기등등한 진괴량의 모습에, 자왕은 잠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는데.

그러길 잠시, 분을 토해낸 진괴량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십만대산의 농간일 가능성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린 자왕은 소매 춤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진괴량에게 내밀었다.

“공교롭게도 마뇌에게서 서간 하나가 날아왔습니다.”

“뭐라?”

건네받은 봉투엔 한마디가 글귀가 쓰여있다.

『형세가 도저히 어렵다 느껴지거든 펼쳐보시라』

그에, 진괴량은 서신을 열어보지도 않고 찢으려 했다.

“이 늙은이가 감히 희롱질을.”

그저 노기에 휩싸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배교자인 진괴량을 용서했다간, 십만대산의 귀성팔족에게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터.

천마신교가 혈교를 인정하거나 진괴량을 다시 받아들인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하여, 찢어버리려 했으나.

문득, 마뇌의 서신은 언제나 길을 보여주긴 한다는 생각이 진괴량의 뇌리에 스쳤다.

하나, 그렇다고 서신을 열어본다는 선택도 하기 힘들었다.

‘…마뇌의 서신을 읽는 것만으로도 계략에 빠져 그 늙은이의 뜻대로 놀아날 수가 있다.’

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를 갈고 있기를 잠시.

결국 진괴량은 들고 있던 서신을 찢어버리지 못하고 각탁 위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확인 가능한가?”

“소인이 이미 확인했습니다. 남만입니다.”

“…남만?”

“예. 그쪽에 나가 있는 간자가 이르길, 마뇌와 백도의 동도회주가 동시에 야수궁에 초청을 받았었다 합니다.”

“해서, 야수궁이 천마신교와 손을 잡았나?”

“그건 아닌 듯합니다. 보고 상으론 어느 쪽과도 손을 잡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럼 천마신교가 서편으로 넘어올 일은 없다. 만겹산으로 통하는 동로의 경계를 강화하라는 전언을 지부에 하달하고, 그 외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혈천수라궁에 집결시켜, 귀면옹과 진혈단에 집중한다!”

* * *

손천정이 도착하며 진혈단에 함께 하기로 한 모든 교인들이 최종 집결지에 도착했다.

진혈단의 수뇌부는 그들이 여독을 풀도록 이틀의 시간을 주었는데.

그 시간이 끝났을 때.

“내일 자정 출정식이 있을 것이오.”

출정하게 될 것이라는 전언과 함께, 숙영지로 사용되던 천막들이 모두 걷히고, 그 자리에 단상 하나가 세워졌는데.

자정에 맞춰 단상 앞에 모여선 교인들이 저마다 입을 열었다.

“교단에 정면으로 대항한다니. 후, 달리 답이 없어 예까지 왔네만… 이거 정말로 승산이 있을까?”

“그쪽 인솔자는 혈풍대의 피풍의를 보여주지 않던가? 그 혈풍대를 꺾은 단주님이야. 나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네.”

“그렇긴 한데, 정작 그 귀면옹이 누군지도 모르지 않나?!”

“결국 본인은 철저하게 신분을 숨기고 있는 것이지. 일이 잘못되면 본인부터 몸을 빼려고 그리하는 것 아닌가?”

그런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때.

혈조술로 빚은 마귀의 날개를 펼친 독고철이 단상 위에 내려앉았다.

후두두둑-

귀면옹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 독고철의 모습에, 웅성거리던 좌중이 일순 고요해진 때.

독고철이 늙은 목소리를 흉내 내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노부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더군.”

그리고 쓰고 있던 가면을 천천히 벗었다.

“노부는. 아니, 나는 백도의 심부(心部)에 잠입해있던 독고철이다.”

드러난 젊디젊은 얼굴에, 교인들이 다시 한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나, 그런 웅성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고철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남녕의 주교회의! 우리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남해 대주교 사겸을 통해 교단에 사실대로 고했다!”

그에, 들끓던 좌중은 차츰차츰 잦아 들어갔는데.

“대주교도 우리도 죽음을 각오하고 응당한 검증을 받겠다고 한 것이나, 혈천수라궁은 그런 우리에게 혈풍대를 보냈지! 이제 본단은 우리를 배교자라 부르고, 세인들은 우리를 마귀라 여긴다! 우리의 처지가 천하에 파다해진다면, 흑도들은 아마 먹이라 생각하겠지… 기실 이제 우리는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되었다.”

그런 웅성거림이 완전히 멈추고.

다시금 고요가 찾아든 때.

독고철은 잠시 다물고 있던 입을 다시 열었다.

“그런데, 그저 같은 길을 가는 이라면 누가 됐던 벗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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