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399화 (399/444)

제399화. 귀면옹 (6)

독고철이 동도회의 기치(旗幟)를 입에 담자.

듣고 있던 교인 중, 적수학사 손천정이 입을 열었다.

“…혹 괴룡의 무리를 일컬으시는 겁니까?”

“정확히는 동도회라는 단체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

손천정의 물음에, 독고철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다들 강호의 일에 귀를 세우고 살아왔을 테니. 내가 백도의 심부에서 누구와 어울렸는지, 동도회라는 단체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역용한 채 인파의 끄트머리에 서 있던 나는, 독고철의 모습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번 출정식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다.

독고철이 말했듯, 진혈단에 속하게 된 혈교인들에겐 기실 남은 길이 없었다.

하나, 도살장에 소를 끌고 가듯 저들을 전장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

‘억지로 끌고 가서야, 저들은 목숨을 우리는 승기를 잃는다.’

그런 일이 없게 하려면, 이 출정이 사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활로를 찾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해야 했다.

그리고 동도회와의 공조를 이해시켜야 했다.

‘혹독하게 준비시킨 보람이 있네.’

때문에, 그 뜻이 곡해되지 않도록 머리를 맞대 연설내용을 짜냈고.

독고철의 어조와 손짓 하나까지 섬세하게 준비시켰다.

하여, 손천정이 던진 물음이 뒤따를 것도 예상한 바였는데.

‘…손천정이 운을 뗐으니, 슬슬 다른 교인들도 나설 텐데?’

이때.

예상대로 모여있던 이들 중 입을 여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백도 놈들을 믿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놈들은 본인의 위신 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단주님께서는 그를 모르십니까?!”

“예! 저희가 물이라면 그 위선자 놈들은 기름인데 어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정파놈들이 마인이라 불리는 저희와 손을 잡는다고요?! 함정일 것입니다! 어디로 몰아서 몰살할 계략이겠지요!”

하나, 독고철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본교에 귀의하여 역혈대법을 익히게 된 것엔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웅성거리는 좌중에도, 독고철은 준비한 연설내용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태연히 말을 이어나갔다.

“몇 푼에 팔려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백도, 흑도, 관아, 고리대 등 무엇이 되었든 각자 맺힌 한이 있겠지.”

지켜보고 있던 사부님께선 한마디를 해오셨는데.

- 잘하고 있구나. 역시 누구 혀를 닮았어.

‘…잘하고 있다는 부분에만 동의하겠습니다.’

사부님의 말씀에 대꾸하고 있는 때.

독고철이 돌발행동을 해왔다.

“내 경우엔 백도무림이다! 입으로는 의와 협을 말하면서도, 정작 전우의 쇠락을 방관한 그들로 인해 내 가문은 멸문지화를 겪었다!”

그 행동에, 나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독고세가가 무너진 자리엔, 그들의 민낯이 추악하게 스며들었다. 우리 가문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누군가는 객사를. 누군가는 아사하게 되었지. 그 한이 서린 토양 위에서 여전히 떵떵거리고 있는 저들을 나는 증오해 마지않았다.”

- …저런 이야기를 준비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되었느냐?

‘…안 했죠. 동도회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왜 저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교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독고철의 말에 불이 붙은 자들이 나왔다.

“바로 그겁니다! 그런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찌 백도 놈들을 믿자 하십니까?!”

“정무학관의 안락한 생활에 젖어 버리신 겁니까?!”

뭐, 독고철의 의도는 알 것 같았다.

백도라 하여 모두 싸잡아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겠지.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을 거고.’

독고세가의 장원이 생기고 현판이 내걸렸다 하여, 멸문지화의 상처가 씻은 듯 사라진 것은 아닐 테니까.

그렇게 백도무림을 증오하던 녀석이, 무엇을 지키고 싶어 저 자리에 섰을까 생각하니.

‘…우리인가.’

괜스레 대견함이 들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이 판을 잘 살리면 되레 진혈단원들을 제대로 묶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다른 단원들도 그저 반대를 위한 아우성을 지르는 게 아니다. 저의를 묻고 있는 자들이 있어.’

독고철이 진심을 보인 덕에 찾아온 판을 살려내기 위해.

‘적당히 운을 떼면, 혈선녀나 호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다른 언동생들이 철이의 남은 말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줄 테지.’

나는 군중 속에서 한마디를 던졌다.

“단주님께서 학관 생활에 젖었다면, 굳이 왜 이런 일에 나섰겠소!”

한데, 언동생들보다 송호겸을 비롯한 독고세가 소속 교인들의 입이 먼저 열렸다.

“맞소! 단주님께서는 애초에 주교회의에 소집되셨던 분도 아니오. 남녕이 아니라, 혈천수라궁으로 오라는 전언을 받으셨지. 천마신교와의 싸움이 본교의 승리로 끝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셨던 분이니까.”

“그렇소. 그런데도 여기 계시는 거요!”

그리고 묵묵히 있던 사겸이 한마디를 하더니.

“…같은 교인이라고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백도 놈들이라고 모두 못 믿을 놈인 것은 아니다. 은하군도의 일을 겪은 우리 금범단이 산 증인이야.”

애병인 대도를 바닥에 꽂아 넣으며 남은 말을 뱉었다.

“그리고 예의를 보여라! 우리를 위해 굳이 세상에 나와 혈풍대와 맞서신 단주님… 이시고. 쓰고 있어도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을 가면까지 벗어던지신 분이다. 최소한 그 말씀을 끝까지 들으라!”

그 덕에 좌중이 고요를 되찾자.

독고철은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역시 백도무림을 증오했다. 하나, 그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있다 보니 바를 정(正)자를 가져다 붙여도 될만한 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독고철의 이야기.

“호의호식과 창창한 미래를 마다하고.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듯 북으로 남으로 배회하며 본인과 하등 상관없는 죽음들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그런 이들이.”

그 이야기는, 내 낯을 간지럽게 만드는 순간을 지나.

마침내 원래의 궤도로 돌아왔다.

“물론 그대들의 마음도 이해한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이 길의 끝에 우리가 어찌할지다. 그를 돕기 위해 내가 동도회와 나눈 이야기를 담백하게 말해주겠다.”

“…….”

“나는 저들에게서 약조를 얻어 냈다. 마기에 잠식되는 본교의 무공을 고쳐낼 수만 있다면, 불가나 도가처럼 우리를 민초들의 버팀목으로서 인정해주겠다는 약속을.”

“……!”

“그러니 그대들은 이곳에 이를 때 그랬듯, 다시 한번 선택하면 된다. 저기 보이는 봉우리에 괴룡의 무리가 기다리고 있다. 공격을 해도 되고 손을 잡아도 된다.”

귀면옹의 호위로 분한 언동생들은 때를 맞춰 인원수대로 준비해 놓은 귀면을 교인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가면을 나눠주는 일이 끝났을 때.

독고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주라는 이름으로 그대들을 여기까지 불러 모았으나, 목줄을 틀어쥐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나 역시 똑같은 한 명의 단원일 뿐이다. 내 의견에 동참하고 싶은 자는 그 가면을 쓰고. 아닌 자는 부숴라.”

그 말에, 좌중에 정적이 내리깔린 지 한참.

“…….”

가장 먼저 사겸이 가면을 걸쳐 쓴 것을 시작으로.

자리한 교인들이 하나둘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 * *

독고철의 호소가 적절했던 것인지.

출정식에 참여한 교인 중, 동도회와 싸운다는 선택을 한 이는 없었다.

그 자리에서 혈교인들이 뜻을 모으는 모습을 직접 확인한 나였지만.

백도무림과 진혈단이 본격적으로 동행을 하려면, 전략에 대한 견해도 나눠야 했고.

양측의 대표가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가 필요했다.

하여, 양자 간에 회담이 잡혔다.

“중간지점에 회담장을 마련하겠습니다. 거기서 봅시다.”

내가 진짜 귀면옹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것은 아니었기에.

양측의 대표는 노삼과 독고철이 되었다.

그에, 나는 회담에 앞서 미리 장소를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귀면옹의 수하로 분한 언동생들과 먼저 모일 수 있게 되었는데.

“각탁에 의자 지도까지. 회담을 치를 준비는 다 된 것 같고. 어느 쪽으로 어떻게 치고 들어갈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이때, 응용이가 막사 안으로 날아들었다.

호루루룩!

한데, 본디 새하얀 녀석의 몸 곳곳에 핏자국이 있었다.

나는 재빨리 당옥기를 향해 손짓했다.

“옥기. 얘 좀 봐줘라. 여기저기 울긋불긋한데?”

“쪼인 상천데? 공격당했나 봐!”

그에 당옥기는 놀란 눈을 했는데, 정작 응용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리에 감긴 서통을 들어 보였다.

안에 든 서간을 확인하니, 발신인이 제갈척이었다.

“어르신의 서신이면 남만에서 온 거고, 그럼 천마신교 놈들이 푼 매랑 싸운 모양인데… 그래서 이겼어?”

그런 내 말에, 응용이는 가슴을 쭉 펴 보였다.

호루욱!

녀석의 먹이 당번을 전담해왔던 우소릉은 그런 녀석의 태도를 통역하듯 말했다.

“…자기가 이 정도면 상대는 어떻겠냐고 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자 당옥기가 진저리를 쳤다.

“캭! 이겼어가 뭐야 이겼어가! 우쭐하는 응용이 너도 마찬가지고! 아주 엉망이 돼서 와선! 아주 주인이고 새고 똑같아!”

그러면서도 응용이의 환부를 유심히 살피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안심하고 서신을 펼쳤다.

암어로 된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야수궁에 마뇌가 왔었다네? 남만은 중립을 서기로 했고. 어르신은 마뇌의 계략을 저지하는 데 힘쓰시겠다는군.”

그런 내 말에, 정현은 미간을 좁혔다.

“야수궁이 그런 선택을… 내렸군요. 하면 천마신교와 혈교가 연계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천기묘산 어르신에 궁윤이랑 제갈 소저도 있고. 그걸 떠나서 당장에 나쁠 것은 없다.”

“그렇습니까?”

“그래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혈마의 입지와 성향을 생각하면 초장부터 죽이 맞을 수는 없을 거야. 그리고 우리 쪽이 지금 정파와 마인이 손을 잡은 형국 아니냐?”

“…겉으로 보기에는 확실히 정마 간에 오월동주가 일어난 형국이지요.”

“그러니, 공격해 들어갈 때는 되레 어수선한 편이 이득이 있다. 계획이 모두 이루어져, 우리가 혈천수라궁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면… 도망칠 구멍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혈마가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니 숲을 보는 건 여기까지. 지금부턴 나무를 보자고.”

그렇게 언동생들을 집중시킨 나는.

“편의상 노삼 교수님이 이끄는 전력은 백군. 철이가 이끄는 군단은 홍군. 내가 이끄는 별동대로 나눈다.”

본격적으로 편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옥기는 별동대에 합류한다. 은 소저와 영이. 두 혈선녀는 홍군의 머리 역할을 하도록.”

“알겠어요.”

“예. 선배님.”

“정현은 백군의 대표로 홍군에 종군한다는 명분으로 가면을 벗고 홍군으로.”

“예.”

“나머지는 반대로, 홍군의 대표라는 명분으로 백군과 별동대에 합류한다.”

그 이야기가 끝났을 때. 펼쳐놓은 지도에 그려진 길목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는데.

“큰 틀은 이래. 백군은 이쪽 길을 따라 서쪽으로. 홍군은 강물을 따라 동쪽으로. 그리고 별동대는 남쪽에 있는 여기 부녕의 혈교 지부를 치고 들어간다.”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이 아미를 좁히며 되물었다.

“부녕을요?”

“이곳 숭좌가 만겹산으로 통하는 입이라면 부녕은 목구멍 아니겠소? 이곳만 떨어뜨리면 혈천수라궁의 발등에 불이 떨어질 것이오. 자연히 셋으로 나눈 진격로 모두에 탄력이 붙겠지.”

“…그치만, 저희가 숭좌에 모여있다는 소식이 들어갔을 테니. 혈천수라궁에서도 대비를 할 텐데요? 가장 인력이 적은 별동대가 거기로 가시겠다고요?”

* * *

진혈단과 백도무림 간의 회담.

공식적으로는 양자 간의 첫 만남이었지만.

진혈단의 머리 역할을 하러 들어간 은하연과 내가 미리 전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놓았기에.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럼. 혈천수라궁에서 봅시다.”

“무운을 빌겠소.”

“단주님도 교수님도 보중하십시오.”

그리하여 홍군과 백군은 각각 맡은 행로를 따라 출정을 시작했고.

“우리도 가자.”

나도 남은 언동생들과 함께 부녕으로 길을 잡았는데.

이때, 은하성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후. 부녕에 있는 지부는 말만 지부지 실상 혈교의 요새나 다름없는 곳이라던데… 이 작전 이거 통하겠죠?”

“그럼 하성이는 여기 살아. 우리는 갈 테니까. 얘는 안 간데. 우리끼리 가자.”

“아! 누가 안 간데요?!”

쫄래쫄래 따라오는 은하성을 보며 피식 웃은 나는, 들고 있던 혈풍대의 피풍의를 둘러쓴 뒤.

준비해 놓은 혈풍대의 시신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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