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1화. 귀면옹 (8)
후둑!
후두두둑!!!
퍼붓는 장대비 속에서 사겸은 대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뒤에는 사겸 앞에는 나,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닥뜨린 마인들은 흠칫했다.
“귀면에 저 대도는… 사겸이다! 진혈단이 여기까지?! 하지만 혈풍대는 어떻게?”
입에 올린 이야기로 짐작건대, 혈교 내부에서 우리를 두고 도는 이야기가 있던 모양이었는데.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회한을 휘둘러 나갔다.
촤악!!
촤아악!!!
그렇게 손발을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 입을 열어 별동대에게 명을 내리니.
“공격!”
은하성은 우소릉과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내게 말했다.
“대주교가 후미를 막았으니까, 저희는 그럼 우측을 맡아서 저놈들을 귀찮게 만들겠습니다!”
나와 함께 산전수전을 겪어왔기 때문인지, 은하성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를 첨언해주었다.
“빗줄기가 심상치 않으니까. 여러모로 조심해.”
“예!”
그렇게 짝을 이룬 두 녀석이 서로를 도우며 마인들을 베어나가기 시작한 때.
별동대를 이루고 있는 다른 망자들은 내가 뱉은 언령을 받들어 적을 향해 뛰어 들었는데.
그중 암객은 은하성과 우소릉이 떠나며 비게 된 내 등에 붙어서며 입을 열었고.
- 전장의 상황이 어지러워질 듯합니다. 저는 주군의 뒤를 지키겠습니다.
다른 녀석들은 계곡 안에 괴성을 채우며 마인들을 밀어붙여 나갔다.
크어!
크어어어!!
발군은 단연 혈용이었다.
그아아아!
녀석은 거구를 그대로 부딪쳐나가는 몸통 박치기로, 마인들의 합격진을 헝클어뜨렸다.
뻐엉!!!!
혈용을 맞닥뜨린 마인들은 녀석의 힘과 형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커흑. 무슨 힘이?! 괴, 괴인인가?!”
“저건… 괴인 같은 것이 아니다. 십만대산에 속해있던 시절에 괴인화한 버러지들을 본 적이 있는데, 전혀 달라. 뻥 뚫린 이목구비에 비릿한 혈향까지. 저건 사람이 아니야.”
“그, 그럼. 요괴란 말입니까? 귀면옹이라는 자가 신선이라도 되지 않고서야…!”
그런 감정들은 자연스럽게 당황을 낳았고, 마인들의 진형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난 그 틈을 거침없이 헤집어 나갔다.
촤악!
촤아아악!!
하나, 흑도보다 몇 배는 잔혹한 환경에서 굴러온 이들이 마인들이었다.
놈들은 계속 당황하고만 있진 않았다.
“저 피로 된 거구가 제일 문제다! 저놈이 우리 대형을 다 어그러뜨리고 있어!”
“예! 주교님! 개체 자체는 딱 하나뿐인 모양이니 저것부터 없애야 할듯합니다!”
“그래. 혈풍대주 행세를 하던 놈의 무위가 매섭고, 사겸도 좌시할 수 없는 위인이지만… 저 거구부터 쓰러뜨려야 된다!”
나름대로 방법을 궁리해낸 지부의 책임 주교가 명을 내렸고.
“팔다리를 노려라! 어쨌거나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몸통만 남아서야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에, 전후좌우를 견제하기 위해 사방으로 검을 겨누고 있던 마인들이 검진을 풀고, 혈용을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쌔애액!
쌔애애액!!
하나, 그 방법이야말로 패착이었다.
그어어어!!!
혈용이 고함을 내지르며 크게 용을 쓰자.
새빨갛던 녀석의 빛깔이 검붉게 변하며 바위처럼 굳어 버렸는데.
“?!”
“!”
동시에 혈조술의 기운이 감긴 마인들의 검이 함께 굳으며, 혈용의 몸에 틀어박혀 버렸으니까.
‘멍청한 놈들.’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비웃음이 스치는 때.
그어어!!!
혈용은 다시 한번 용을 쓰며 팽이처럼 회전했다.
그에 애병을 뽑아내려 붙들고 있던 마인들은 자연히 사방으로 날아가 처박히게 되었고.
가까스로 손잡이를 놓은 마인들은 무기 없이 전장에 서게 되었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회한을 휘둘러 나갔다.
촤악! 촤악!
촤아아악!!
그렇게 이어지는 파천의 검초와 별동대의 맹공, 거기에 사겸이 이끌고 온 지원대의 공격까지 더해지니.
최초에 계곡 안으로 진입했던 마인들은 순식간에 줄어 절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내리는 빗줄기로 인해 곡절이 있긴 했으나, 바둑으로 치면 저들은 이미 잡힌 돌들이 되었구나.
사부님의 말씀대로였다.
이 시점에 놈들에게 남은 건 전멸과 항복밖에 없었으니.
싸움의 승기가 완전히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나, 나는 되레 호흡을 골라내며 회한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보통은 그런데, 저놈들이 순순히 항복해올 놈들이 아니라는 게 문제죠.’
아니나 다를까.
마인들을 지휘하던 주교의 눈빛이 독살 맞게 변하는가 싶더니.
“저놈들에게 속는 바람에 혈천수라궁으로 통하는 물길을 내주게 됐다! 전원 옥쇄하라!”
궁지에 몰린 혈교인이 빼 들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을 입에 올렸다.
“배교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지옥으로 데리고 가야한다!”
그런 주교의 명에 따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마인들은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펑! 펑!!!
나는 비영파천보를 시전해 바쁘게 걸음을 물리는 한편.
“일어나라!”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적시에 일으키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몸을 폭탄으로 만든 마인들의 진로를 방해했다.
펑!
그런 식으로 은하성과 우소릉 그리고 사겸의 수하들의 안위도 살펴주었는데.
“일어나라!”
펑! 펑!
퍼어엉!!!!
모든 상황이 내 뜻대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후둑!
후두두둑!!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계속해 퍼부어대는 빗줄기였다.
‘…우리로서는 최악인 환경이다.’
내리는 비는 체온을 낮추고, 병장기를 쥔 손을 미끄럽게 하며, 후각과 시각 청각까지 방해한다.
그렇게 무인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발 디딜 자리들을 질척이게 만드니.
펑!
퍼어엉!!
달려드는 폭탄 인간들을 피해내기엔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화경에 이른 몸이었기에 이런 악천후 속에서도 제대로 걸음을 디뎌 낼 수 있었다.
하나, 우소릉과 은하성은 나와 같은 경지에 올라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퍼엉!!!
하여, 마인들의 자폭을 피해내려다 질어진 흙바닥에 발이 미끄러진 순간.
“!”
“은 형!”
녀석들의 측면을 노리고 있던 마인 하나가 달려들며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달려가기엔 거리가 멀었다.
그에, 녀석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체를 일으켜 마인에게 달려들라는 명을 내렸으나.
“일어나!”
자폭에 대처하느라, 널려있던 시신 대부분이 육편으로 변한 터라.
막 일으킨 시체가 닿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하여, 두 녀석이 알아서 기지를 발휘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절체절명의 순간.
쌔애애액!
자폭하는 마인과 언동생들 사이에 사겸이 끼어들더니.
대도를 땅에 박아 넣으며 고함을 내질렀다.
“대가리 숙여!”
그 말에 은하성과 우소릉이 몸을 낮추자마자.
녀석들 바로 앞에서 마인이 터져나갔다.
퍼어어엉!!!
이윽고 세 사람이 서있던 자리를 확인하니.
옷이 너절해져서 그렇지, 다행히 세 사람 모두 멀쩡해 보였는데.
휘릭.
곧바로 대도를 고쳐잡은 사겸은 다시금 마인들을 향해 도초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나 역시 다시금 땅을 박차 회한을 휘둘러 나갔다.
촤악!
촤아아악!!!
그렇게 몸을 터트려 오는 마인들을 피해가며, 닥치는 대로 마인들을 베어내길 한참.
투두둑. 투둑.
툭.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언제 그랬냐는 듯 쨍쨍한 해가 고개를 내밀었는데.
“남만의 날씨가 그렇게 지랄 맞다더니… 진짜 어이가 없네.”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마디를 뱉는 때.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시선을 돌리니.
피칠갑을 한 상태로 대도를 움켜쥐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 사겸의 모습이 보였다.
“…….”
“…….”
그에 내 머릿속엔 여러 생각이 스쳤다.
‘사겸은 나를 어찌 생각할까?’
정말 내가 귀면옹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넘어가는 걸까.
‘안다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을 텐데?’
여러 의문이 스치는 때.
사겸이 먼저 대도를 갈무리하더니 몸을 돌렸다.
* * *
빗속의 싸움을 끝내고 계곡을 빠져나오니.
멀찍이 보이는 노가의 성채에 ‘진혈단’ 세 글자가 적힌 깃발이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에 성채 쪽으로 걸음을 옮기길 잠시.
그쪽에서도 한 무리의 사람이 우리를 향해 달려 나왔는데.
선두에 선 이가 누군지 유심히 살펴보니, 혈선녀로 분한 은하연이었다.
“고생 많으셨다는 단주님의 전언입니다.”
보는 눈이 많았기에, 그녀는 본인이 맡은 혈선녀의 역할에 충실했다.
나도 그에 맞춰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답했다.
“지원 감사드립니다. 육로와 수로로 이동하다 보니 기민한 연락이 불가능했는데, 어찌 알고 보내주셨습니까?”
“척하면 척… 이십니다 단주님은. 선착장의 병력이 예상보다 적은데, 매복하기 좋은 지형이 주변에 있고, 거기에 남만 특유의 소낙비까지 쏟아지기에 대주교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셨군요. 덕분에 무리하지 않고 적을 소탕할 수 있었습니다.”
“별말씀을요. 아무튼. 노가 땅이 수중에 들어왔네요. 하나, 기뻐할 새는 없을 듯합니다.”
“예. 이 정도로 가까워졌으면, 혈교의 본단에서도 진혈단에 동맹이 있다는 것과 다시 등장한 혈풍대가 좀 이상하다는 눈치를 챘을 겁니다. 빠르게 정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의견을 교환한 직후.
우리는 뒤를 따르는 개방의 제자들에게 전령을 보내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몇몇은 일대의 원주민을 통한 정보수집에 나섰다.
그렇게 성내가 바쁘게 돌아가는 때.
난 치료소에서 부상자를 돌보는 당옥기와 장선을 돕고 있었는데.
“선아! 거기 금창약 좀 가져와!”
“예!”
“언용운 너는… 아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갑자기 당옥기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리기에.
“…저기. 해적 아저씨가 보이는데?”
고개를 돌리니, 치료소의 입구에 사겸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눈빛으로 당옥기에게 다녀오겠다는 뜻을 전한 뒤.
사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수하분들은 적절한 조치를 받고 있습니다. 아마 금세 회복하게 될 듯합니다만. 궁금하시면 둘러보셔도 됩니다.”
“…살아남을 운명이면 살고 뒈질 운명이면 뒈지겠지.”
“…하하. 뭐. 그건 그렇고. 아까 계곡에서는 도움 감사했습니다. 선배님의 도움 덕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좀 걷겠소?”
“그러시죠.”
그렇게 사겸의 걸음을 따라 도착한 곳은 노가 땅을 돌아나가는 강물이 보이는 한적한 곳이었는데.
우리 둘 외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곳에 다다르자, 사겸의 어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위기까지야. 그저 피로감이 줄도록 도왔을 뿐, 홀로서도 능히 감당해내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갑자기 존대를 하십니까?”
그에, 질문을 던지니.
사겸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굳이 저를 처음 보는 백도의 총아 흉내를 내실 필요 없으십니다.”
“…….”
“귀면옹 아니십니까? 남해서 뵈었고. 주교회의 때 뵈었던. 그 귀면옹 어르신 말입니다.”
“역시…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하고 계셨던 거군요.”
“…주교회의부터 혈풍대가 들이닥친 일까지. 원체 상황이 급박해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으나, 깊이 생각하면 무언가 이상하기는 했으니까요.”
“…….”
“은하군도에서 저를 찾아왔던 독고철은 분명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기도 했고. 그 외에도 대체 어찌 그런 일들이 가능할까 싶은 일들이 많았는데. 괴룡이 귀면옹이라면 얼추 아귀가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사겸의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사과의 말을 꺼냈다.
“…나름대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행한 일입니다만. 결과적으론 선배와 다른 교인들을 속인 일이 되었습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십니다.”
“…그런가요? 제가 선배라면 배신감이 들었을 것도 같고, 말씀하신 대로 백도의 총아 소리를 듣는 제가 귀면옹인 게 가당한가,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은데요?”
그런 내 말에, 사겸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련의 일들을 마주해오며, 그런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이고. 당신이 그런 길을 보여줄 사람이라고 제가 확신한다는 거겠지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마디를 뱉었다.
“그 길은 제가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겁니다.”
* * *
한편, 만겹산 깊숙이 자리한 혈교의 본단 혈천수라궁.
“하나!”
“하!”
“두울!”
“하!”
이곳에는 혈교의 주요 전력들이 모두 모여 연일 수련 소리를 높이고 있었는데.
수천에 달하는 대병력을 집합시켜 놓고도, 진혈단이 야금야금 혈천수라궁을 향해 진격해오는 것을 방조한 데에는.
수뇌부의 혼란이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삼군으로 나눌 정도면 귀면옹의 세력 역시 수천에 달한다는 처음의 보고가 맞다는 것 아니겠소?”
“그럴 리가 없소이다. 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으로 연일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들 중 좋은 이야기라곤 없었다.
어디가 무너졌다, 저기가 함락됐다.
“최소한 혈풍대의 다음 보고는 기다려야 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 보고가 맞다면, 머릿수만큼은 대등하다는 이야긴데…. 전력을 이끌고 나갔다가 조금이라도 상하게 되면 천마신교나 남만야수궁이 이빨을 드러낼 수도 있소.”
그런 이야기가 줄을 잇는 데다가, 진위까지 모호했으니.
휘하의 전력을 함부로 움직이지를 못하는 것이었는데.
석조전에 모인 호교법왕들과 대주교들이 갑론을박에 한창이던 때.
스윽-
혈마 진괴량은 본인 앞에 놓인 각탁의 서랍을 열었다.
그 서랍엔 아직 마뇌가 보낸 서신이 그대로 있었다.
『형세가 도저히 어렵다 느껴지거든 펼쳐보시라』
처음 이 서신을 받을 때만 해도, 읽는 것만으로도 마뇌의 계략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에 펼치지 않았던 진괴량이었으나.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고 나니, 서신을 펼쳐 들 수밖에 없었는데.
사락-
그렇게 펼쳐 든 서간엔, 마뇌가 원하는 것과 본인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혈우신공을 내놓게. 나는 난창강(闌滄江) 중류의 삼각지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정보가 함께 적혀 있었다.
『아, 자네의 선택과는 별개로 그간의 연을 생각해 한 가지 알려주지.
괴룡 언용운.
만겹산 자락을 따라 자네에게 날아들고 있는 비수의 중심엔 그가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