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2화. 물들다 (1)
서간의 말미에 적힌 이름에.
‘언용운?’
혈마 진괴량은 다시금 서간을 주시했다.
필체의 주인이 마뇌가 맞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갈효봉. 그 늙은이의 필체가 맞군.’
그 확인이 끝났을 때.
진괴량은 휘하의 호교법왕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사대호법은 이리 와서 이걸 좀 보라.”
자, 축, 인, 묘.
십이간지의 가장 앞에 오는 네 지지(地支)를 상징으로 삼은 혈교의 호교법왕들이 명에 따라 태사의 앞에 서자.
진괴량은 들고 있던 서간을 내보였는데.
네 사람 중, 축왕(丑王)은 서간의 첫 줄을 읽자마자 하얀 눈썹을 치켜뜨며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감히 혈우신공을 내놓으라니! 이 늙은이가 드디어 노망이 났군!”
그리고 진괴량을 향해 무릎을 굽히며 포권을 취했는데.
“교주님!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직접 평천우마군을 이끌고 저 늙은이가 처박혀 있는 곳으로 가서 한 줌 핏물로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진괴량은 축왕의 말을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는 듯 귀를 후볐다.
그에, 자왕이 축왕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이건 혈우신공보다는, 마뇌가 머무르고 있다는 삼각주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그쪽에 빠져나갈 길목을 열어놓겠다는 주장인데… 본교가 무너질 것을 상정하고 하는 말이니, 이 역시 부아가 치밀긴 합니다만. 마뇌 특유의 농간 아니겠습니까? 하니, 크게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마뇌에게 놀아나는 꼴이 될 테니까요.”
운을 뗀 자왕은 계속해 말을 이었는데.
“저는 그보다 그 아래 써놓은 말이 더 신경 쓰입니다. 만겹산을 따라 날아드는 비수에 괴룡이 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 말에, 호랑이 수염을 한 인왕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괴룡이면… 정파 놈들이 천하제일후기지수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는 놈 아닌가?”
“그러합니다.”
“그럼 진혈단 그 배교자 놈들이 백도무림과 손을 잡았다는 말이 되는데?”
“…마뇌는 그리 판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서간의 내용 전체가 농간일 것이다! 녹림 같은 흑도 놈들은 마관정(魔官正)을 가리지 않고 개처럼 꼬리를 쳐가며 빌어먹는 놈들이니, 붙어먹는 게 가능할지 모른다. 한데, 정파 놈들이 배교자 놈들에게 협력한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군.”
그렇게 인왕의 헛웃음이 이어지는 때, 진괴량이 입을 열었다.
“이 서간을 보낸 데엔 마뇌 나름의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하나, 그 늙은이가 구태여 저런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남만야수궁의 중립 선언은 중원이라는 옥토에 자리 잡고 있는 백도 무림에 이로운 일이었고.
천마신교로서는 백도무림의 머리채를 잡아줄 패가 없어진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리다 했다.”
혈우신공을 내놓으라는 말에서도 그런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쭉정이만 남은 진가라도 살려보겠다는 것일 터.
그건 진괴량과 측근들을 품는 것은 곤란해도, 혈마계 자체는 필요하다는 반증이었다.
서간에서 묻어나는 마뇌의 속내에, 진괴량은 마른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인왕. 그 늙은이는 우리가 완전히 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 하니,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배교자 놈들도 정파 놈들 눈에는 똑같은 마인입니다. 정파 놈들이 마인과 손을 잡는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 한데, 지금 그런 상황이 일어나고 있지 않으냐.”
정확히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배교자 놈들이 어찌 주인을 물 생각을 했는지. 오합지졸이어야 마땅할 그놈들이, 어떻게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왜 혈풍대가 연락이 되지 않는지.”
하나 정파 놈들이 진혈단을 돕는다는 전제를 하면 혈교가 처한 난국이 완벽하게 설명이 됐다.
“놈들에게 백도무림이라는 새 주인이 생겼다면 그것들이 모두 설명이 돼. 그리고 그 괴룡이라는 놈은 충분히 마인하고도 손을 잡을 수 있는 놈이야.”
그렇게 인왕의 물음을 일축한 진괴량은, 자왕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왕.”
“예. 교주님.”
“자네는 사천에서 도올월마의 목이 날아갔을 때, 나와 함께 운남에 있었지. 그때 언용운이라는 놈이 어찌 움직이는지 확인했잖아? 내 말이 틀려?”
“…확실히 별종이라는 말 외엔 달리 수식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해괴한 인사이긴 했습니다. 하여, 교주님께서는 어찌 대응할 요량이십니까?”
“혈풍대에 관한 보고를 마지막으로 해온 곳이 어디지?”
“판납과 홍원 지부입니다.”
“그럼 노가까지 놈들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두 지부 이남에 있는 모든 전력을 본단으로 소환하라.”
이어져 나온 진괴량의 명에.
자리한 사대호법 모두가 미간을 좁히는 가운데, 자왕이 입을 열었다.
“…길을 열어주자는 말씀이십니까?”
“놈들이 괴룡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우선 맨 처음 진혈단의 수가 수천에 달한다는 보고. 그건 아마 망자를 부린다는 술법일 것이야.”
“…무림맹을 비롯한 백도 전력의 움직임이 있지는 않았으니.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런 놈을 상대로 전력을 나누어 보내서야 야금야금 갉아 먹힐 뿐이다.”
“…하기야, 수작을 부려뒀을 수도 있으니, 굳이 저희 쪽에서 치고 들어갈 이유도 없겠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때에, 우리가 선택한 장소에서 싸우자. 그런 말씀이시군요.”
“그래. 이곳 혈천수라궁으로 놈들을 불러들이는 거다.”
자왕이 제 생각을 알아들은 듯 보이자, 진괴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마정 간의 오월동주가 굳건할 리 없을 것이다.”
그에, 축왕과 인왕도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고.
“교주님의 위엄과 혈천수라궁의 위용을 확인하면. 진혈단이라는 헛꿈을 꾸는 놈들은 본단의 위엄에 기가 질릴 것입니다.”
“백도무림 놈들도 손을 잡아야 할 상대를 잘못 골랐음을 깨닫게 될 듯하군요. 양자 중 한쪽이라도 동요하면 마정 간의 오월동주는 자연히 삐걱거리겠지요.”
진괴량은 씩 웃으며 남은 말을 이었다.
“그 틈을 노려. 백도의 총아들을 사로잡는다면, 근래의 굴욕들은 모두 갚고도 남을 테지. 위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말이야.”
그 말에 자왕은 꾸벅 고개를 숙였고.
“그럼, 그렇게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다른 호교법왕들은 입을 모았는데.
“존명!”
진괴량은 네 명의 호교법왕 중, 입 한번을 떼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던, 붉은 눈의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도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겠는데… 묘왕. 원혈은 충분히 준비가 됐나?”
“그것이, 고아들을 보내오던 북부의 거점들을 배교자들에게 장악을 당한 지라….”
“하면, 인근의 토인들이라도 잡아와야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는 아닐 텐데?”
“안 그래도 보내놨습니다. 곧 준비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 *
진정한 혈염천하의 길은 같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말을 하자.
사겸이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같이 만들어간다, 라… 그것참. 옳은 말인 듯합니다.”
그로 인해 나와 그 사이에 멋쩍은 침묵이 흐르길 잠시.
문득 사겸이 뱉은 말 중, 걸리는 부분이 뇌리에 스쳤다.
“한데, 선배님.”
“…피차 정체를 드러내신 마당에 말씀 편하게 하시지요. 연공을 떠나 은인이고 구도자가 되십니다. 존대를 하시니 멋쩍습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선배님은 저를 인정하실지 몰라도, 대다수 교인들의 생각은 다를 겁니다. 평소에도 조심하는 게 좋죠.”
“흠.”
“되레 선배님이 말씀을 낮추셔야 합니다. 귀면옹은 하나의 상징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떠올라서는 안 됩니다.”
“…알겠네. 하여, 내게 무언가 물을 게 있는 눈친데?”
“아, 다른 건 아니고. 아까 말씀하시며 제가 귀면옹이라면 ‘얼추’ 아귀가 맞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선배님이야말로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시지요. 말씀하신 대로 정체를 드러낸 마당에, 괜한 의심을 낳을 구석은 없애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자네의 혈조술 만큼은 여전히 의문이긴 하군.”
그렇게 운을 뗀 사겸은 눈동자를 빛내며 말을 이었다.
“천하의 정평이 난 무재(武才)이니, 남다른 성취야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났다고 쳐도. 진주언가에서 나고 자란 자네가 본교의 역혈대법을 어디서 접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막연히 나를 다른 계파라 여겼던 독고철과 달리.
내 혈조술의 근원을 묻는 사겸의 물음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과연 인간사의 고락을 겪을 대로 겪은 사람답네.’
그런 사겸이라면 내 혈조술의 근간을 조금은 일러줘도 될 것 같았기에.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다 말씀을 드리기엔 너무 긴 이야기라 요점만 말씀드리자면. 가문에서 쫓겨났던 시절 기연을 얻었습니다.”
“기연?”
“예. 혈교가 어디서 뻗어 나왔는지 쭉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닿게 되는 분의 무덤을 찾았거든요.”
그런 내 말에, 사겸은 기함하며 입을 열었다.
“…추존 천마?! 지금 그분의 무덤을 말하는 건가?”
“예.”
“허. 그 전설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랬군, 그랬어.”
“어째 바로 알아들으십니다?”
“나도 교단의 명을 받아 진짜 태호라는 것을 찾아왔으니까. 바다의 은유일 수도 있다고 하여 내내 찾아왔었지.”
“그러셨군요. 한데 어디냐고는 묻지 않으시네요?”
“구태여 물을 필요가 없지. 그럼… 자네의 귀면옹 행세가 완전한 연기는 아니었던 게로군. 그분의 의발을 이었다면. 애초에 배분이 까마득해지니 말이야.”
그런 사겸의 말에.
나는 사부님을 향해 생각을 전했다.
‘…라는데요?
- 엄밀히 말하면 아니지. 용운이 네가 사용하는 혈조술은 파천의 내력에 네 녀석의 술법을 곁들인 것 아니냐?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저런 놈들 모른다.
그에 사부님께서 퉁명스런 답을 해오시는 때.
사겸은 나를 향해 질문을 던지더니.
“괴룡이라 불리는 자네의 방술이라면… 그분의 영혼을 마주했을 성싶은데?”
“…뭐, 그렇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른 웃음을 지었는데.
“그런 자네가 백도무림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혈교와 천마신교는 틀렸다는 것이로군. 솔직히 말해주어 고맙네. 조금 더 확신이 생겼어. 그리고 부끄럽군.”
“제가 그분의 후인인 게 선배님이 부끄러우실 일이 되나요?”
“나는 손에 넣은 마공의 힘을 그저 분노를 쏟아내는데 써왔네. 반면, 자네는 나보다 훨씬 어린데도 악의 고리를 끊을 길을 찾아왔다는 것 아닌가. 그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군.”
그는 이내 눈을 살짝 감고는 말을 맺었다.
“오늘따라 몸에 말라붙은 피 냄새가 더 진하게 느껴지는구만. 이번 일이 끝나고도 내 숨이 붙어있다면… 이 죗값을 치르도록 하겠네.”
* * *
홍군의 정비가 끝났을 때.
우리는 노가 땅을 벗어나 다시금 만겹산 깊숙이 자리한 혈천수라궁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 여기도 텅 비었구나?
’그러게요?‘
본디 마인들이 들어차 있어야 할 혈교의 지부들이 텅텅 비어있다 싶더니.
우리와는 다른 길을 통해 합류 지점에 도착한 백군의 노삼 교수님도 똑같은 말을 했다.
“만겹산의 능선 쪽을 돌아오며 두어 번 전투를 치렀는데. 어느 순간 교인들이 짚어준 곳들이 비어있더구나?”
그런 교수님과 함께 도착한 녹림왕 도중광은 아예 사겸을 향해 눈을 흘겼다.
“거기. 해적 놈! 거, 정보를 잘못된 정보를 준 거 아니냐?”
“뭐라?”
사겸의 눈썹이 뒤틀리는 순간이었는데.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선배님. 원래 도 선배의 말투가 거친 편입니다.”
“…자네가 그렇다니 넘어가도록 하지. 거기 산적 놈.”
“뭐라?”
“나도 말투가 좀 거친 편이다. 그리고 정보는 제대로 주었다.”
은하연이 입을 연 건 이때였다.
“지부를 옮기는 일을 행하기엔… 시간적으로나 비용적으로나 쉬운 선택이 아닐 듯하고. 이 경우엔 전력을 빼돌렸다고 보는 게 맞을 거 같은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정리했고.
“일장일단이 있는데… 일종의 청야 전술로 독을 풀었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며 이동해야겠소.”
우리는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워 걸음을 옮기길 며칠.
혈천수라궁의 목전이라 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후두두둑-
피처럼 붉은 장포를 걸친 쥐상의 노인이, 땅을 접어 달리들 다가오는 듯싶더니.
남다른 기도를 풍겨오며 입을 열었다.
“교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