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403화 (403/444)

제403화. 물들다 (2)

노마두의 등장에 백군을 이끌고 있던 두 사람 노삼과 도중광이 각각 장심과 언월도를 내 뻗었고.

홍군의 구성원들도 각자의 병장기를 빼 들었다.

채채채채챙!!!

우리 중 날붙이를 빼 들지 않은 사람은, 귀면옹 행세를 하고 있는 독고철과 나, 이렇게 둘 뿐이었는데.

이때 대도를 치켜세우고 있던 사겸이 입을 열었다.

“…호교법왕 서열 일위 자왕입니다.”

귀신 가면을 쓰고 있던 사겸이었으나, 그를 단박에 알아본 자왕은 비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대주교. 오랜만에 봅니다. 어떻게, 새 주인이 내어주는 뼈다귀는 달콤하십니까?”

“…….”

자왕의 이죽거림에도 사겸은 묵묵히 그를 주시할 뿐이었는데.

이때, 노삼이 입을 열었다.

“어디서 개수작이냐?! 제 발로 기어들어 온 마두를 쳐 죽이지 않고서야 내 주먹이 울지!”

그리고는 언행얼치를 하겠다는 듯 양손에 아지랑이를 감았는데.

나는 빠르게 손을 내뻗어 그런 노삼을 만류했다.

“교수님. 일단 이야기는 들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에, 노삼이 마지못해 팔을 내리는 때.

사부님께서 질문해오셨다.

- 저 쥐새끼처럼 생긴 늙은이가 혈교의 호교법왕이라면, 죽여 놓는 게 이득 아니냐?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방금 보셨겠지만, 경신술이 대단한 늙은이입니다.’

- 발놀림이 예사롭지 않긴 하더구나. 그래서 자왕이라 불리는 건가? 쥐새끼같이 잘 도망친다고 말이다.

‘…아무튼 작정하고 도망치면, 잡을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운 자이고. 더욱이 혈교와의 싸움은 결국 혈마라는 뿌리를 제거해야 끝나는 싸움입니다.’

- 저 늙은이 같은 줄기나 싹은 아무리 잘라봐야 또 자라난다는 소리로구나.

‘예. 더욱이 이곳은 한나절이면 닿을 정도로 혈천수라궁이 지척인 곳인데. 자왕 홀로 왔다는 것은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일 테니. 살초를 내지른다 쳐도, 최소한 그건 알아보고 내야죠.’

사부님의 물음에 답하고 있기를 잠시.

자왕은 나와 독고철을 훑는다 싶더니, 얇은 턱수염을 비비 꼬며 입을 열었다.

“그쪽이 위명이 자자한 괴룡이십니까? 그리고 이쪽은 귀면옹?”

“…….”

“흐음. 본교의 늙은이들 중에 당신 같은 이를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 가면 뒤에 대체 누가 있는 것인지….”

나는 그런 자왕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찔러봐야 얻어갈 건 없을 것이오. 괜히 입 아프게 떠들지 말고 본론이나 나눕시다. 교주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뭐요?”

그러자, 자왕은 나를 비꼬았다.

“허허. 약관의 나이에 천하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서 그런지 몰라도, 예의가 상당히 바르십니다 그려.”

“내가 원래 싸가지가 좀 없소.”

그런 자왕의 비꼼을 나는 콧방귀로 응수했다.

“혈천수라궁의 정보력이 그것밖에 안 되나? 하기야. 덕분에 여기까지 쉽게 오긴 했지.”

“…….”

“그리고, 우린 피차 적 아니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한 시점에서 충분한 싸가지를 보인 듯합니다만?”

“…….”

“어떻게, 입씨름을 더 하시겠소? 아니면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시겠소?”

“듣던 대로 괴룡의 혀 놀림이 남다르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내 말에, 자왕은 탐탁지 않다는 듯 미간을 구겼으나.

이내 곧, 내 요구대로 본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앞서 한 이야기는 말 그대로입니다. 교주님께서 그대들을 만나보고자 하십니다.”

그는 운을 뗀 직후, 홍군을 이루고 있는 진혈단원들을 응시하더니.

“본교는 천마신교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부득이 점조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하여, 조직이 폐쇄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지요. 윗물과 아랫물 사이에 간극이 생겼음을 교주님께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계십니다.”

나와 백군을 훑으며 말을 맺었는데.

“그리고 그대들 백도가 진혈단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계십니다. 기왕지사 마인이라 불리는 무리와 손을 잡을 생각을 했다면, 혈천수라궁과도 대화를 나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끝났을 때.

도중광이 고함을 치듯 입을 열었다.

“이봐 괴룡. 설마 저 미친놈들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 백이면 백 함정일 것이다!”

그러자, 자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도중광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그쪽은 산적 두목 되시겠군요? 그대 같은 흑도 나부랭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닙니다. 운 좋게 목숨을 건졌으면, 버러지답게 쥐 죽은 듯 사십시오.”

“뭣?!”

도중광의 이마에 핏대가 서는 순간이었는데.

나는 도중광의 손에 들린 언월도 자루를 부여잡으며 그를 말렸다.

“저 말이야말로 선배의 속을 긁으려는 수작입니다. 고정하십시오.”

자왕이 다시 입을 연 건 이때였다.

“오는 길에 비워둔 지부들을 못 보셨습니까? 그를 통해 저희 의지를 조금은 확인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설령 함정이라 할지라도 잃을 건 없으실 텐데요? 이미 혈천수라궁의 코앞까지 온 마당 아닙니까? 내일 싸우나 며칠 뒤에 싸우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렇게 나온 말 중, 나는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짚어냈다.

“며칠 뒤?”

“손님들도 예까지 오느라 여독들이 있으실 테고, 본교도 갑작스레 손님을 맞으려니 준비가 좀 필요합니다. 혈천수라궁 안으로 들어오라 하면 걸음 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흠.”

“혈천수라궁의 동편… 손님들에게는 서편이 되겠군요. 북강이라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나흘 뒤까지 그곳에 회담의 장을 마련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 * *

말을 마친 자왕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럼 저는 이만.”

혈천수라궁의 제안은 우리에게도 나쁘지 않았기에.

우리는 떠나는 자왕의 뒤를 쫓는 대신 숙영지를 차렸다.

그리고 혈마의 초대에 대한 숙고에 들어갔는데.

“…나흘이라.”

함께 자리해 있던 언동생들 중, 은하연이 입을 열었다.

“…미묘한 시간이네요. 동도회의 움직임을 눈치챈 걸까요?”

동도회의 움직임.

그건, 최선을 다해 숨겼던 우리의 남녕행이 들통난 순간부터 진행되도록 준비해놓은 혈교 포위 전략이었다.

‘야수궁에서 출발한 일군이 서쪽.’

하북 천진에서 바닷길을 따라 내려온 일군이 남쪽.

초왕부에서 대기하고 있는 타격대가 우리를 도와 북쪽까지.

즉 혈교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사방을 완전히 틀어막는 전략이었다.

“그건 아닐 것이오. 혈풍대의 진위도 최근에서야 눈치챈 저들이, 신중에 신중을 기한 그 전략을 알 리는 만무하지.”

“저도 같은 생각을 하긴 했는데, 나흘이라는 시간이 너무 절묘하게 느껴져서요. 초왕부에서 출발했다는 타격대만 해도 저희와 닷새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잖아요.”

“다른 곳은 얼마쯤 걸리겠소?”

“바닷길을 타고 계신 분들은 마지막 연락내용이 이틀이면 뇌주에 닿을 것 같다고 하셨으니… 대략 칠 일은 걸릴 거고. 남만야수궁에 갔던 사람들과는 연락할 수단이 응용이 뿐인데, 저희랑 함께 있잖아요.”

“그렇지. 그러면 일단 그쪽에 응용이부터 보내는게 좋겠군. 선아. 지필묵 좀.”

그렇게 은하연과의 대화를 나눈 나는 응용이의 다리에 이쪽 사정을 적어 날려 보냈는데.

“네가 날아올 때, 야수궁의 일을 매듭짓고 이리로 오겠다고 하셨으니. 지금쯤 만겹산 서쪽 지역 어디쯤 계실 텐데… 똘똘한 녀석이니 알아서 찾아갈 수 있지?”

호룩!

그러고 나니, 머릿속이 명료해졌다.

“시간을 좀 벌어야 한다는 결론이네. 아무래도 혈마의 초대에 응해야겠다.”

그런 내 말에, 당옥기가 아미를 좁히며 입을 열었는데.

“응하겠다고? 산적 아저씨 말대로 함정이면 어쩌려고?”

“우리의 공세로 혈교는 교세가 크게 쭈그러들었어. 혈천수라궁에 모으고 있는 전력이 기실 남은 밑천의 전부일 텐데. 그게 상한다면 뒤가 없어지게 된다. 꿍꿍이가 있기야 하겠지만 완전한 함정은 아닐 거야.”

“그, 그런가?”

“그래. 대화를 하자는 말 만큼은 진짜일 테니. 그걸 이용하면 최소한 한나절은 벌겠지.”

정현이 질문을 해온 건 이때였다.

“하나 결국 그 꿍꿍이라는 것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무슨 생각으로 대화를 하자고 하는지 말입니다.”

“그야 뻔하지. 이간질하려는 거 아니겠냐. 홍군과 백군의 동행은 저들의 눈에는 개와 고양이가 잠시 한배를 탄 모습으로 보일 테니 말이야.”

그 말에 답을 하다 보니.

문득 본인에게서 피냄새가 지독하게 난다며 자조하던 사겸의 모습이 스쳐 갔다.

“우리는 그런 수작에 흔들리지 않아. 나는 단원들을 믿는다.”

그저 덮어놓고 신뢰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만 해도 집결지가 샜었고, 그로 인해 혈풍대가 찾아왔었다. 하나, 이번에 철이가 귀면옹이라는 사실은 새지 않았지.”

자왕은 귀면옹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에, 나는 진혈단을 향한 생각을 덮어두고, 동도회의 전력에 다시 집중했다.

“동도회의 남은 전력도 한시가 급하다며 오고 있을 테니. 딱 한나절만 어떻게든 벌면 될 거야. 문제는 바닷길을 타고 오는 분들인데….”

이때 은하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엥? 그쪽은 언 가주님이 지휘 하실 테니 누구보다도 재촉해서 올 텐데요?”

“하성이 네가 은하군도에 안 따라와서 모르나 본데. 바닷길은 재촉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치만 적룡궁이랑 해남파가 돕기로 했지 않습니까?”

“두 곳 모두 바다에 정통한 곳이긴 하지만, 각각 대해와 해남도 일대에 빠삭한 거지. 남만 인근의 해역은 또 달라. 특히나 지랄 맞은 천기는 그야말로 불가항력이다.”“…아. 하기야 저희만 해도 노가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서 개고생을 했죠.”

우소릉이 입을 연 건 이때였는데.

“고작 고생이라뇨. 은 형이랑 저는 죽을 뻔했잖아요!”

“아이, 우 동생. 모르면 가만히 있어. 원래 죽다 살아난 일을 말할 때는 고생 정도로 낮춰서 말해야 멋있어 보이는 거야.”

이어진 은하성의 너스레에, 막사안에 가득하던 긴장감이 가시고 웃음이 번지길 잠시.

나는 언동생들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조치를 좀 취해야겠는데. 이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소릉이만 좀 남고. 나머지는 다들 몸 상태를 만전으로 만드는 데 집중해. 저 너머에 혈마가 있다.”

* * *

막사에서 출발한 응용이는 빠르게 만겹산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호룩!

그런 응용이의 날갯짓을 처음엔 혈교의 까마귀들이 떼지어 방해하려 들었으나.

대칸을 구했다는 차간송홀의 후예인 응용이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꽥! 꽤액!!!

호루욱!!

숱한 까마귀 떼를 모두 물리치고 혈천수라궁의 강역을 벗어났을 땐.

천마신교의 매들이 덤벼들어 왔으나,

빼액!!!

그놈들 역시 응용이 앞에선 한낱 미물에 불과했다.

호룩!!

그렇게 덤벼드는 미물들을 모두 물리치고, 난창강 유역에 이르게 된 응용이는 비상한 시각과 후각을 십분 활용해.

남궁윤과 제갈설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을 찾아 내려앉았는데.

호루룩!!

그런 응용이에게 어깨를 내어준 제갈설지는, 서통에 든 서간을 확인하자마자 할아버지를 찾았다.

“용운 님 쪽의 상황이 이렇다는데… 저희는 지금 마뇌를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함께 그 서간을 확인한 남궁윤은 미간을 구겼다.

“…대국적으론 야수궁이 중립을 택하게 해서 천마신교의 수를 막아냈지만. 결국 그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한 눈덩이가 불어 일이 이렇게 돼버렸군. 우리의 실책이다.”

그런 두 사람의 말에, 제갈척은 허허롭게 웃는가 싶더니.

“허허허. 세상만사 계획 대로만은 되지 않는 법이지.”

“할아버님. 웃을 때가 아니잖아요! 혈교를 포위하는 일군을 담당하려던 본래의 계획에 구멍이 나게 생겼어요!”

“그래… 생각을 해봐야겠지.”

이윽고 눈동자를 매섭게 빛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일군을 담당할 수는 없겠지. 하나 설지 너와 비룡검 둘은 보낼 수 있다. 서신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괴룡에게는 홍군이라는 전력이 생겼다. 다만 그들이 괴룡의 뜻을 너희처럼 읽고 움직이지는 못할 테다. 그런 상황에, 너희가 가서 그들을 지휘한다면 그건 새로운 일군이 될 수 있겠지.”

그 말에 제갈설지와 남궁윤이 크게 눈을 뜨자, 제갈척은 남은 말을 뱉었다.

“천마신교의 늙어빠진 모사꾼은 나와 여기 점창의 제자들이면 충분하다. 어서 가보거라.”

한편, 천진에서 은휘상단의 배를 빌려 남해안을 돌아 만겹산의 남쪽으로 향하던 하북조의 선단은, 때아닌 풍랑을 만나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퍼붓는 폭우와, 미친 듯이 부는 바람에 일렁이는 성난 파도는.

우직!

우지지직!

그들이 탄 배들을 좌초시키고 말았다.

선단에 함께하고 있던 해남의 제자들과 적룡궁의 선원들이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사람이 상하는 일은 없었으나.

“아버님. 이래서야 다시 띄울 수 있는 배가 없겠습니다.”

타고 온 함선들이 돛대가 됐든 용골이 됐든 크게 상해버렸기에, 약속한 때에 만겹산에 도달하는 일은 힘들어지게 되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송구합니다. 해도를 완벽하게 숙지했으나, 결국 본궁의 해역이 아니라 익숙지 않아서.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자네들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네.”

언정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고 있는 때.

“어? 누님. 저기 좀 보십시오.”

“돼지. 정신 사납게 하지 마. 지금 심각해.”

“아니. 그게 아니라. 장호 너라도 봐봐 저기 좀.”

“거, 참 오늘따라 더럽게 귀찮게 하시… 어? 지, 진짜로 다들 저기 좀 보셔야겠는데요?!”

수평선을 뒤덮은 크고 작은 어선들이 나타났다.

그중 한가운데 있는 배엔.

하오문주 목염약이라는 깃발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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