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404화 (404/444)

제404화. 물들다 (3)

하오문주 목염약.

떼지어 나타난 어선들의 깃대에 적힌 일곱 글자를 확인한 언정웅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오문주가 어찌 이곳에.”

반면 천장호는 반색하며 손뼉을 쳤다.

“용운 형이 하오문과 이래저래 연이 있습니다! 도와주러 오셨나 본데요?!”

언용명도 덩달아 화색을 띠며 말했다.

“장호 저 친구 말이 맞습니다. 그… 형님이 저희 가문에서 쫓겨나셨을 때 있지 않습니까? 어머니께서 내어주셨던 은자로 형님께서 태호의 퇴기들을 도운 바가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라, 아버님도 알고 계실 텐데요? 곤란하던 차에, 때를 맞춰 도우러 와주신 듯합니다.”

언용운이 쫓겨났던 건 언정웅에게는 약점과도 같은지라, 그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기 일쑤였으나.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언정웅은 하오문의 어선들을 향해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하오문주다. 야월주… 그러니까 밤의 주인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그 말은 하오문주를 만만히 봐선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오문은 일반적인 문파와는 달랐다.

백도의 문파뿐만 아니라 사도련에 적을 둔 흑도방파와 비교해도 그랬다.

“저들이 정사지간으로 지낼 수 있는 건, 하오문주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야.”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억지력이 되는 존재가 있다.

그런 존재가 움직이는 순간, 갈등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 하오문이라는 조직도 함께 의심을 받게 된다.

더는 중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편을 정할 것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용운이가 하오문과 맺은 연은 작지 않다. 하나, 저기 걸린 깃발은 하오문주다. 대저 하오문의 문도가 몇이더냐?”

“…….”

“…….”

“…셀 수가 없지. 그녀는 감히 어림잡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인생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여자다.”

그 많은 하오문도의 명줄 앞에선 언용운과 맺은 인연도 감히 크다고 할 수도 없을 터였으니.

수많은 이들의 생사가 달린 일을, 고작 인연 하나에 메여 결정할 리 만무했다.

그에, 언정웅은 수평선을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적으로 온 것일 수도 있다. 너희에게 의심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진 않지만, 세상사가 그런 것이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는 무정한 곳이 강호니 말이다.”

그런 언정웅의 말에, 팽소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숙부의 말에 동의해. 지금까지 용운이를 도운 하오문의 행수들은 어쨌거나 개개인 또는 한 지부의 행동이라 봐도 무방했어. 하지만 목염약의 이름이 전면에 내걸린 이상. 용운이와의 인연은 떼어 놓고 봐야 해. 우선은 경계 태세를 갖추는 게 좋겠어.”

그런 두 사람의 말에 언동생들의 표정이 굳던 중, 천장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쓰흡.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팽소진은 그런 천장호를 향해 불호령을 내렸는데.

“그런 것 같으면 움직여! 돼지랑 용명이 너도. 적룡궁 사람들이랑 해남파 제자들한테 경계 태세 갖추라고 빨리들 알려!”

그에, 어떻게든 난파한 배를 살려보려 씨름하고 있던 이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경계 태세를 갖춘 때.

코앞까지 당도한 하오문의 어선들이 일제히 배를 틀며 닻을 내렸는데.

끼기기긱.

하오문주의 깃발이 내걸려있던 배의 선실에서 무인들이 우르르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뒤이어 면사가 둘린 죽립을 쓴 여인이 걸어 나와 입을 열었다.

“하북권웅 되십니까?”

“예. 언정웅이라 합니다. 걸린 깃대에 하오문주님이라 되어 있던데, 처음 뵙겠습니다.”

그에 언정웅이 깍듯하게 포권을 취하자, 여인은 쓰고 있던 죽립의 면사를 들며 입을 열었다.

“목염약이라 합니다. 사실 천녀로서 처음 뵙는 것은 아닙니다만… 뭐, 그런 것으로 치지요. 그보다 어서 타시지요?”

그런 목염약을 향해, 언정웅은 다시 한번 깍듯이 포권을 취하며 질문했는데.

“송구합니다만. 어찌 이곳에 나타나셨는지, 그리고 무슨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먼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는데요?”

“…예?”

돌아온 답에 언정웅이 멍한 표정을 지은 때.

목염약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꽉 막힌 건 여전하십니다.”

“…….”

“아, 흉을 보는 건 아닙니다. 올곧으시다는 말인데… 지금 동도회 분들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시지 않은지요?”

그렇게 운을 뗀 목염약은 경계 태세가 완연한 하북조를 훑어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천녀는 괴룡을 돕고자 왔습니다. 저희가 사도련의 일원인 만큼 경계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만, 시간이 없습니다. 이곳 어부들의 말에 의하면 조류가 곧 바뀐다고 하니, 일단 타시지요.”

“…….”

“달리 대안도 없으실 텐데요? 우선 타시고 이상하다 싶으면 배 위에서 일신의 무위들을 뽐내셔도 늦지 않으실 듯합니다만?”

목염약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언정웅은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하면,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승선하세.”

* * *

그렇게 하북조를 실은 하오문의 선단이 남만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때.

언정웅은 여즉 선수에 서 있던 목염약을 찾아와 읍을 올렸다.

“…하오문주님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만.”

예를 표하는 언정웅의 모습에, 목염약은 가볍게 목례하며 답했다.

“이렇게까지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닌 듯한데… 협의지사로 이름난 가주님께 이리 인사를 받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요.”

“아닙니다. 낭패를 마주한 상황이었는데. 덕분에 큰 시름을 덜었습니다.”

“외에도 천녀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 표정이신데요?”

“저희 동도회로서는 감사드릴 일이나… 괜찮겠습니까. 이 싸움은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장담하던데요?”

“…예?”

다시 한번 언정웅이 멍한 표정을 짓게 만든 목염약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댁 큰 아드님이 장담했습니다. 자신들이 이길 거라고요.”

“…예?”

그런 목염약의 말에 언정웅은 언용운을 생각했다.

‘역시 녀석이 연락을 취했던 모양이로군.’

하기야, 우연이라고 하기엔 하오문의 선단이 등장한 시기가 너무도 절묘했다.

‘그나저나 이길 거라 장담을 했다니, 녀석. 그런 큰소리를 쳤는가.’

호랑이의 그것에 비견될 정도로 대담한 언용운의 간덩이에 아비로서 웃음이 나올 뻔했으나.

언정웅은 하북권웅으로서의 소신을 입에 올렸다.

“마인들은 지독한 자들입니다. 백여 년을 이어온 이 싸움이 어찌 끝날지는 누구도 장담치 못합니다.”

“…일단 계속해 보시지요.”

“더욱이 사도련주. 동정총호 백광호도 문주님의 이런 움직임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겁니다. 이 결정은 하오문을 멸문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런 언정웅의 말에, 목염약은 마른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우리네 인생은 늘 위험해 왔습니다.”

“…….”

“그리고 하오문은 멸문하지 않습니다. 천녀의 학식이 짧습니다만, 언제고 더럽고 천한 일들은 있어 온 것으로 압니다. 앞으로도 그러하겠지요. 하오문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이번 일로 위험해지는 사람은 기껏해야 저와 제 수양 아들딸들 정도겠지요.”

잠시 말을 끊고는 본인의 호위를 서고 있는 이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았습니다. 기녀들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더군요.”

“…….”

“마부와 짐꾼들은 괴룡이 해를 입으면 먹고살기가 팍팍해진다며 돕자 했고.”

“…….”

“어부와 뱃사공들은 이처럼 배를 모아왔습니다. 아, 사환이나 점소이들은 괴룡 같은 이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어야 정사마를 막론하고 못살게 구는 이가 없을 것이라 하더군요. 나는 순간 내가 하오문주가 아니라, 무림맹주였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큼. 크흠.”

“아무래도 그 댁 장남에게 다들 단단히 물이 들었나 봅니다.”

피식 웃어 보인 목염약은 다시금 언정웅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 목숨이 그리 대단한 목숨이 아닙니다. 가여운 인생들을 품어준 인연으로 지금껏 문주입네 대접받아왔을 뿐이지요. 뒷방이나 퇴기촌으로 밀려나 추레하게 늙어갈 기녀가 덕분에 호의호식했으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요.”

그런 목염약의 말에, 묵묵히 듣고만 있던 언정웅이 다시금 입술을 뗀 때.

“…문주.”

목염약은 멀찍이 눈에 들어오는 남만 땅을 응시하며 언정웅에게 질문했다.

“부모 노릇 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렇게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 * *

혈마의 초대에 응하기로 마음을 먹은 지, 이틀이 지난 때.

호룩!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영지에 응용이를 어깨에 올린 제갈설지와 남궁윤이 도착했다.

단강구에서 출발해 점창과 남만야수궁을 거쳐 다시 여기까지.

나름대로 수고가 많았을 두 녀석에게 나는 인사를 건넸는데.

“고생했다.”

제갈설지와 남궁윤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용운 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더욱이. 야수궁의 일도 깔끔하게 마무리된 게 아니라 아쉬울 뿐인걸요. 야수궁의 일이 더 잘 풀렸다면 혈교를 포위하는 전략이 단단해졌을 텐데요.”

“미안하다. 일이 그렇게 되는 바람에 남만조에서 지원할 수 있는 인원이 나와 제갈설지 둘 뿐이게 되었다.”

“애초에 그럴 수 있다고 보지 않았냐. 북로와 남로의 전력은 제대로 오고 있고. 당장은 너희 둘만 해도 천군만마야.”

내가 그 말에 답하자.

남궁윤은 어째선지 입이 흐물거리는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는데.

“큼. 천군만마. 한데 영이는 어디 있지? 이 녀석은 꼭 이런 때에 안 보인단 말이지.”

“서간에 시시콜콜한 내용은 써넣기가 힘들어서 생략한 이야기가 많은데. 영이랑 은 소저는 홍군에 있어.”

그렇게 운을 뗀 나는, 떨어져 있던 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추려 말했다.

“…그렇게 된 거다.”

“홍군이 무늬만 진혈단이 아니라 정말로 전력이 되었다는 이야긴데. 그리 넉넉한 기간도 아니었는데. 역시 용운 님이시네요.”

“다른 녀석들도 애쓴 결과지, 특히 철이가 잘해줬고. 그래서 천기묘산 어르신이 계신 곳은 상황이 어때?”

“난창강 중류에 삼각지가 있는데, 그 일대에 마뇌가 이끄는 천마신교의 전력이 진을 치고 있어요. 인원은 삼백 정도? 할아버님은 그들을 묶어두고 계세요.”

그런 제갈설지의 말에, 나는 제갈척의 복안을 읽을 수 있었다.

“…퇴로처럼 보이는 곳은 우선 그대로 두는 게 혈교인들의 마음속에 ‘여차하면’ 하는 방심을 낳게 만든다는 심산이신가?”

“묶어두고 계신다는 말만 듣고 바로 알아채시네요. 예. 맞아요.”

“그렇군. 일단 알겠고. 이틀 뒤면 혈마의 초대에 응해야 하는데, 두 사람 모두 같이 갈 거니까. 몸 상태를 만전으로 만들어 놓도록 해.”

이틀이라는 시간은 금방 지났고.

숙영지를 정리한 우리는 북강 땅으로 나아갔다.

우리가 걸어 들어가는 반대 방향에서 혈교의 정예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평천우마군(平天牛魔軍).

혼야서마군(混野鼠魔軍).

이산호마군(移山虎魔軍).

세 명의 호교법왕을 따라 걸음한 마인들은, 기실 본인들의 앞마당까지 몰린 상황임에도 날 선 예기를 뿜어냈다.

그들에게서 묻어나는 귀기에, 우소릉은 마른침을 삼켰고.

“헙.”

은하성은 복화술을 하듯 입을 열었다.

“…이런 자리는 기세 싸움인데. 용운 형님 따라 산전수전 다 겪어봤으면서 벌써 왜 그래.”

“…혈풍대도 이겼으니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보니까 또 다른 느낌이라서요. 그러는 은 형도 목덜미에 식은땀 흐르는데요.”

“…혈마가 나온다잖아. 진짜 우리 형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줄은 알았지만 이걸 받네.”

녀석들의 중얼거림이 이어지길 잠시.

먼저 걸어 나온 마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지독한 사기가 일대에 내리깔리는가 싶더니.

“온다.”

피처럼 붉은 장포를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하늘을 걷듯이 날아와 우리 앞에 내려섰다.

후드드득-

중년인에게서 풍겨오는 지독한 혈향은 우리 모두의 미간을 찡그리게 만들었는데.

“…무슨 피 냄새가 이 정도로.”

이때.

사부님께서도 한마디를 해오셨다.

- 코만 찌르는 게 아니다. 저 놈의 영혼에 말라붙은 피 냄새도 지독하구나. 순간적으로 이지가 흐러질 지경이다.

‘저도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절규하는 원기들이… 아무래도 직전까지 원혈을 흡수하다 나온 모양입니다.’

그처럼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드는 원기들의 절규에, 나도 모르게 손이 회한으로 향하려 했으나.

난 가까스로 손을 멈추고, 진괴량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언용운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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