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6화. 물들다 (5)
혈교의 본단 혈천수라궁.
이곳은 만겹산을 이루는 숱한 산봉우리 중에서도 험준하기로 이름난 녀석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라는 말이 딱 맞다.’
거기에 토목기술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험준한 산봉우리에 무저갱 같은 해자가 더해진 외벽을 기어오른다는 선택지를 버리면.
진입로라 부를 수 있는 곳은 딱 두 곳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아(亞)자의 형태이겠지.’
그중 하나는 정문이라 할 수 있는 혈라문(血羅門)과 연결된 대로였는데.
아래로는 관도, 위로는 혈천수라궁과 연결돼있는 이 대로는 여러 대의 마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잘 닦인 길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목적은 친교가 아니라 토벌이니까.’
하나, 그 굽잇길마다 초소나 관문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뻔히 난항이 예상되는 행로인지라, 자연히 두 번째 진입로로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환몽의 숲.’
숲의 이름에 환(幻)이니 몽(夢)이니 하는 글자가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숲은 그렇게 눈을 돌린 이들을 말려 죽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다.
‘마음이 이쪽으로 쏠리는 것부터가 함정의 시작이라 할 수 있지.’
하여, 나는 숲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단언하는 제갈설지를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숙영지를 나서기 직전에 했던 충고를 기억하고 있소?”
“제 성정을 대나무에 비유하셨던 말씀 말이죠?”
그 말에, 제갈설지는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죠. 저는 지금 ‘제갈가의 파훼법 앞에선 혈교의 진법 따위 애들 장난이다.’ 하는 얄팍한 생각으로 호언장담한 게 아니에요.”
“그렇소?”
“예. 무공은 정마 간에 차이가 클지 모르나, 기관진식의 이치는 같아요. 음양과 오행의 묘리와 기를 품고 태어난 광물을 이용해, 자연스러운 이치를 비틀고 오감을 흐리는 게 본질이니까요. 파훼할 수 있어요. 해내야 하고요.”
“알겠소.”
특유의 호승심이나 오기로 단언한 게 아닌 것 같았기에, 나는 홍군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럼 진혈단주님은 혈라문으로 가주시면 되겠습니다. 정현 너도 함께 가도록 하고.”
그런 내 말에, 정현이 단호한 표정으로 답을 하는 때.
“예.”
독고철이 질문을 해왔다.
“숙영지에서 나눴던 전략 외에, 따로 유의할 점은 없겠습니까?”
“그쪽이 주공이라는 느낌을 적에게 주어야 합니다.”
“…환몽의 숲을 택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보이자 혈라문을 택한 것이다, 라는 인상을 주라는 말씀이시군요.”
내 의도를 단박에 알아채는 독고철이었으나.
여기서 헤어지고, 싸움이 시작되면 즉각적인 연통은 할 수 없게 될 터였기에 몇 마디를 덧붙였는데.
“예. 그리고… 우리가 혈천수라궁으로 침투해야 홍군이 담당한 방면의 싸움이 수월해질 테지만, 그쪽이 주공으로 보여야 우리 쪽이 수월해질 테고, 그러려면 최대한 많은 관문을 돌파해줘야 합니다. 물론,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니까 너무 서둘러선 안 되겠… 말을 하면서 무리한 주문의 연속인 것 같군요.”
독고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혈천수라궁에 반기를 든다는 결정을 내릴 때부터 지금까지, 무리하지 않은 순간은 없습니다. 괴룡의 말.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런 녀석에게 좀 더 살가운 격려를 건네고 싶었으나.
녀석은 지금 진혈단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마음을 접어두고, 포권과 함께 담담한 말을 건넸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나 역시 괴룡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그렇게 독고철과 인사를 나누고 나니.
옆에 있는 사겸도 눈에 들어왔는데, 나보다 그의 입이 먼저 열렸다.
“동도회와 동행한다는 결정을 내린 지가 제법 된 것 같은데, 막상 홍군과 백군이 술 한 잔 나눈 적이 없는 듯하구만.”
“여기까지 이르는 길만으로도 벅차고 바빴으니까요.”
“이 싸움이 끝난다면, 술 한잔 나누세.”
“그러시죠.”
* * *
홍군과 헤어진 나는 뒤따르고 있는 무리를 향해 진입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교수님. 도 선배. 그럼 진입하겠습니다. 소릉아!”
“예! 언 형! 시계 뒤집을게요!”
그리고 일다경을 재는 모래시계를 뒤집고는 환몽의 숲으로 발을 들였다.
“시선 처리를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시야가 일렁이나, 저희 가문의 비기 중 하나인 정관법(正觀法)으로 보면 그 묘리가 눈에 들어오죠.”
제갈설지는 숲 전체에 배치된 기관과 진식들을 차례차례 파훼하기 시작했다.
“이 진식은 배망면락(背邙面洛)의 묘리를 담고 있는데, 망은 본디 북망산을 말하나, 낙양에 있는 산이 여기 있을 리는 없으니. 북쪽을 등지라는 뜻인데. 여기서 북쪽이면….”
물론 제갈설지 혼자 모든 과정을 전담한 것은 아니었다.
정신면역 특성 덕분에 진식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는 정확한 방위를 그때그때 짚어 주었다.
“우리 숙영지가 저쪽에 있으니, 저기가 북쪽이요.”
그런 내 모습에, 남궁영은 기능을 상실한 나침반을 내보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풍경들은 일렁이고, 지남부침도 이렇게 뺑글뺑글 도는데 선배는 어떻게 방위를 아세요?”
“그냥 알아.”
“다른 사람이면 따져 묻고 싶은데, 용운 선배가 그렇다니까. 그냥 그런 것 같… 설지 선배님은 벌써 믿고 파훼를 시작하셨네.”
그렇게 나는 제갈설지가 파훼에 사용하는 시간을 줄이도록 도왔고.
다른 녀석들도 그녀의 지휘에 따라 각자의 재주를 더했다.
“여긴 소릉 님이 나서주셔야겠네요.”
“제, 제가요?”
“예. 파훼가 되긴 됐는데. 이 돌다리는 한 명이 지나가고 나면 시간 차를 두고 무너지게 돼 있어요. 파훼했다고 방심하면 그냥 추락하는 거죠.”
“…아. 그럼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밧줄을 둘러멘 채 제가 말씀드린 발판들을 밟아 먼저 넘어가시고. 이후에 저희가 그 줄을 다리 삼아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소릉이의 민첩함이 필요한 곳도 있었고.
순전히 힘이 필요한 곳도 있었다.
드륵-
드르르륵-
“어어? 설지 누님! 이거 석벽이 좁혀지는데요?!”
“다들 벽을 힘으로 밀어서 버티세요! 지금 파훼 중이에요!”
“켁! 벽에 박힌 철가시들은 조심해! 여기 독이 발려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찔리면 나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그렇게 우리는 환몽의 숲을 차근차근 헤쳐나갔는데.
숲의 초입에서 걸어 들어온 거리를 생각하면 슬슬 끝이 보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 즈음.
제갈설지가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여섯 개의 진법석 중에 하나를 뽑으면 이 안개가 걷히고 탈출로로 쓰기 위해 만들어 놓은 문이 드러날 것 같은데. 이렇게 세 개는 확실히 아니고… 남은 세 개 중에 뭐지.”
길어지는 그녀의 고민.
나는 우소릉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녀석이 이 숲에 진입하며 돌려놓은 모래시계를 슬쩍 내보였는데.
떨어져 내리는 모래가 슬슬 바닥이 나려 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나는 제갈설지를 향해 한마디를 건넸는데.
“차분하게 생각하시오. 아직 여유는 있소.”
사부님께서 질문해오신 건 이때였다.
- 여유가 있긴 뭐가 있어? 일다경이 다 되어가지 않느냐. 무조건 그 시간 안에 이 숲을 통과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긴 합니다.’
이 숲에 발을 딛은 순간, 혈천수라궁 내의 어딘가에서 이미 경종이 울렸을 터다.
그로 인해 적들이 혈라문으로 향한 홍군이 전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독고철이 이끌고 있는 이들과 우리 모두 위험해질 터였으니까.
‘하지만 이미 이 숲에 발을 들인 이상, 제갈 소저를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 그래도 정확히 남은 시간을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
‘아뇨. 애초에 제갈 소저 스스로가 시간을 재며 왔을 겁니다.’
소무후 소리를 듣는 그녀인 만큼 재고 있던 시간은 정확할 것이다.
그 시간이 촉박하다고 여겨지니, 파훼법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이리라.
‘빈말로라도 그녀가 평정심을 찾도록 돕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부님의 말에 대꾸하며, 묵묵히 제갈설지를 기다리길 잠시.
피가 마르는 장고의 시간을 끝내고 제갈설지가 입을 열었다.
“노란색! 노란색 진법석이요!”
그 말에, 우소릉이 훌쩍 뛰어올라 석벽에 박힌 진법석을 뽑아냈고.
나는 혈용을 불러내 명을 내렸다.
“부숴!”
* * *
콰아아아앙!!!!!!!
석벽이 뚫리며 흙먼지가 비산하는 와중.
혼비백산하는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쿠, 쿨럭. 적! 적이다!”
“…화, 환몽의 숲을 통과했다고?!”
“경종이 울리기야 했지만, 아니다 싶어 돌아 나간 것 아니었나? 그럼 혈라문 쪽의 병력은 뭐지?”
근방을 지키고 있던 혈교의 졸개들이 얼빠진 얼굴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마, 환몽의 숲을 이 정도로 빨리 돌파해내리라고 생각지는 못했을 테니까.
‘아니지, 애초에 혈천수라궁이 공격당해본 경험이 없나?’
아무튼.
예상대로 혈교의 주 전력들은 이곳이 아닌 혈라문과 혈마가 들어있을 비동에 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지체없이 입을 열었고.
“계획대로군! 쓸어버려!”
그 명에 따라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가는 혈용을 선두로.
우리는 적들을 향해 검을 휘둘러 나갔다.
그어어어어!!!!!!
혈용은 조악한 혈조술을 사용하는 무인의 천적과도 같은 존재였고.
우리가 튀어나온 곳에 배치돼있던 혈교의 전력 중엔 대단한 고수도 없었기에.
촤악! 촤악!
촤아아악!!!
혈용을 방벽 삼은 우리는 혈천수라궁의 후미를 거침없이 헤집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숲의 출구로부터 오십 보. 용운 님. 저기 보이는 저 봉우리가 진괴량이 있는 비동일 거예요.”
“그쪽으로 갑시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달려 나가길 잠시.
전에 없이 강렬한 기도가 우리 쪽으로 쇄도한다 싶더니.
“뭔가 온다!”
일군을 이끌고 나타난 노마두가, 혈교의 졸개들을 밀어붙이고 있던 혈용을 한칼에 두 동강을 내버렸다.
촤아아아악!!!
혈용이야 내력이 빠져나가서 그렇지, 다시금 소환하면 그만이었으나.
문제는 등장한 노마두였다.
호랑이 수염을 하고 있는 용모와, 뒤따르는 마인들의 깃대에 걸린 이산호마군(移山虎魔軍)이라는 군단의 이름.
나는 나타난 노마두의 정체를 짐작하고 입을 열었다.
“혈교의 호교법왕 중 서열 삼위. 인왕(寅王).”
그런 내 말에, 인왕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는데.
“삼위라니. 우리에게 붙은 지지는 강함의 척도가 아니다.”
이윽고 놈은 부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독고철과 사겸 두 놈의 목을 베는 것보단 손맛이 덜하겠지만. 회담 자리에서 감히 교주님께 반말을 찍찍 내뱉던 네놈의 혀를 자르는 재미는 또 다를 테지. 뭣들 하느냐! 모조리 도륙 내라!”
그에, 인왕과 그 수하들의 칼날이 혈향을 흩뿌리며 휘둘러지기 시작한 때.
캉! 캉!
카카카캉!!!
도중광이 애병인 언월도를 휘젓는 와중, 급히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에게 급한 건 혈마 놈이 무공을 대성하지 못하게 하는 거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면, 저 늙은 털보는 우리가 상대하마.”
그런 도중광의 말에, 노삼은 미간을 좁혔는데.
“산적 두목 놈. 너 혼자는 부족할 텐데?”
이때. 남궁윤이 입을 열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그러자, 도중광이 헛웃음을 지으며 남궁윤에게 되물었다.
“허. 남궁가의 도련님이, 시커먼 산적 놈들이랑 같이 내 보조를 맞출 수 있겠나?”
남궁윤은 일 초의 고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저는 남궁가의 도련님으로 여기 와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신가?”
“예. 그러니 선배님께서도 그냥 궁윤이라고 부르십시오.”
궁윤이라는 호칭은 하도 불러대니 체념했을 뿐, 녀석이 썩 좋아하는 별칭이 아니었다.
‘남궁이라는 성은 녀석의 긍지니까.’
하나, 남궁윤은 이 순간 그걸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서 녀석의 각오를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운을!”
남궁윤과 도중광이 이끄는 녹림도들을 뒤로 하고 진괴량이 들어앉아 있을 비동을 향해 걸음을 돌렸는데.
탁! 탁! 탁! 탁! 탁!
그렇게 달려 나가길 잠시.
또 다른 노마두가 우리의 앞길을 막아섰다.
“…혼야서마군(混野鼠魔軍). 당신이 여기를 지키고 있었나? 자왕(子王).”
세 번이나 마주치게 된 터라, 벌써 눈에 익어버린 쥐를 닮은 노마두의 모습에.
내 뇌리엔 혈교의 수뇌부가 품은 복안의 조각들이 착착 맞춰지기 시작했다.
‘진괴량의 혈우신공이 대성하는 순간, 모든 전황을 뒤집을 수 있다는 판단이군.’
호교법왕 내 서열 일위인 그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그를 증명했다.
‘…그렇다면 독고철과 정현이 간 혈라문 쪽엔 축왕이 이끄는 평천우마군이. 묘왕과 진괴량은 비동 안에 있다는 결론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곧바로 노삼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교수님이랑 제갈 소저 그리고 남은 백군이 자왕과 그 군단을 맡아주십시오.”
그런 내 말에, 노삼은 미간을 구기며 답했는데.
“너 혼자 혈마가 들어앉은 마굴로 들어가겠다는 말이냐? 차라리 저 쥐새끼 같은 놈을 함께 때려죽이고. 같이….”
“그래서야 늦습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아실 텐데요?”
내가 그 말에 답하는 때.
제갈설지가 입을 열었다.
“숙영지에서 반나절. 숲을 통과하는데 일다경. 여기까지 다시 반 다경… 난리가 났는데 진괴량이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그 원혈이라는 걸 흡수하는 중이겠죠. 그럼 꼼짝도 못 할 테니, 당장 용운 님의 상대는 아닐 거에요.”
“맞소. 아마도 묘왕이라는 자겠지. 교수님.”
“…….”
“그리 걱정되신다면, 저 자왕의 졸개들이 제 쪽으로 못 오게 하시면서, 가능한 빨리 정리하고 뒤따라오십시오.”
그렇게 이어진 내 말에, 노삼은 긴 숨을 내쉬며 소매를 걷어붙였고.
“하아. 그래 내 저 쥐새끼를 되도록 빠르게 요절내고 뒤따르도록 하마!”
은하연과 백군의 거지들도 저마다 기수식을 취했다.
“빨리 가보세요!”
그들을 뒤로한 채 비영파천보를 시전한 나는.
콰앙!!!
진괴량이 들어앉아 있을 비동의 문을 박차고 들어간 뒤.
조금이라도 놈이 주화입마에 빠지게 만드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 목청을 높였다.
“이리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