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407화 (407/444)

제407화. 물들다 (6)

“어딨냐 진괴량! 손님이 왔으면 물이라도 한잔내지 않고!”

비동에 진입한 나는 동굴 깊숙한 곳에서 새어 나오는 혈향과 한기를 쫓아 들어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는데.

“좋은 말로 할 때 대가리를 내밀어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사부님께서 질문해오신 건 이때였다.

- …전혀 좋은 말이 아니구만. 그리고 어찌 그리 고성을 지르느냐? 그래서야 적들이 듣고 몰려올 텐데?

‘몰려오라고 그런 겁니다.’

이는 비동 깊숙이 들어앉아 있을 진괴량이 조금이라도 주화입마에 가까워지길 바라는 동시에, 놈을 지키는 전력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는데.

‘어차피 진괴량을 지키는 놈들이 있을 테고, 몰래 들어갈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앞뒤로 둘러싸이는 것보단 줄여나가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 이놈들은 역시 양반은 아니네요.’

말하기가 무섭게, 멀찍이 보이는 동굴 안쪽에서부터 적들이 시뻘건 안광을 늘어뜨리며 내게 쇄도했다.

한데, 가까워지며 드러난 적들의 모습은 이지를 갖춘 사람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르르르-

“양반이 아닌 게 아니라… 사람이 아닌가.”

입가에 흐르는 침부터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해 짐승처럼 땅을 박차기까지.

달려오는 적들의 모습은 천마신교의 잠폭단을 잘못 받아들인 괴인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으니까.

“암객!”

- 예, 주군.

빠르게 암객을 불러낸 나는, 녀석과 합을 맞춰 달려드는 괴인들을 베어내는 한편.

촤악! 촤악!

촤아악!!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을 정리했다.

‘…천마신교의 지원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괴인들의 피부가 하나같이 거무잡잡하고 팔이 길어 보이는 것이, 남만의 토착민들과 닮아 있었다.

아무래도 묘왕이 그들을 실험체로 삼은 모양이었다.

‘혈교의 연단방(煉丹房)을 책임지는 묘왕.’

이는 비동 안을 지키는 호교법왕이 묘왕일 것이라는 내 예상과 일치했다.

그렇다면 거리낄 것이 없었다.

‘묘왕은 무위보단 연단술에 관한 지식과 재주 덕분에 호교법왕이 된 자니까.’

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조심조심 내딛던 걸음을 크게 내딛기 시작했다.

촤악! 촤악!!!

괴인들의 수가 많긴 했으나, 이지를 갖추지 못한 놈들은 나와 암객이 펼치는 합공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에 난 비동 안으로 점점 가까워졌는데.

촤아악!!!

걸음을 옮겨갈수록 코끝에 감도는 피비린내가 진해져 갔다.

‘…이 지독한 혈향은 내가 괴인들의 피를 뒤집어쓴 탓이 아니다.’

난 직감적으로 진괴량이 있는 곳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내디딘 걸음 끝에, 마침내 마주하게 된 만년현철로 된 문.

‘암객. 일단 돌아와라.’

- 예. 주군.

나는 사용할 수 있는 패를 숨기기 위해 암객을 역소환한 뒤.

들어갈 공간을 만들고자, 강기를 감은 회한을 휘둘렀는데.

써거거겅!!!

그렇게 생겨난 틈에서 뜨거운 증기가 찜통의 뚜껑을 갑자기 열었을 때처럼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익!!!

전체적으로 한기가 감돌던 행로와 전혀 다른 온도인데다, 띠는 빛깔조차 선홍빛인 기분 나쁜 기체.

나는 그것을 곧바로 날려버렸는데.

그러자, 코안의 점막이 헐어버릴 것 같은 피비린내가 스며옴과 동시에.

“…혈견(血絹).”

사람으로 만든 수천 개의 고치가 천장 위에 매달린 가운데.

그 중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치들에서 짜낸 원혈을 가죽관을 통해 수혈받고 있는 진괴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글줄로 접한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역겹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하나, 팔자 좋게 감상을 떠올리고 있을 새는 없었다.

쌔애애액!

나는 진괴량에게 원혈을 공급하는 관들을 향해 회한을 휘둘러 나갔는데.

촤악!

원혈이 통하는 가죽관 중 가까이 있던 하나를 베어낸 순간.

맞은 편에 서 있던 노마두가 나를 향해 쇄도해 왔다.

“안돼!”

봉두난발을 한 머리에 시뻘건 눈동자.

난 그 정체를 단박에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안돼!!”

길길이 날뛰며 덤벼오는 노마두의 정체는, 혈천수라궁 연단방의 주인이자 혈교 호교법왕 중 서열 사위에 해당하는 묘왕이 분명했다.

캉! 캉!!!

카아앙!!!!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정종문파의 연무장이었다면 묘왕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을 것이다.’

아니, 그냥 이 장소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무위는 쳐질지 몰라도 묘왕은 독공과 연단술에 남다른 조예가 있는 자로, 본인만의 지평을 개척한 싸움법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선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다.’

지금 묘왕에겐 지켜야 할 것이 세 개나 있기 때문이었다.

본인의 연단술을 집대성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곳의 시설.

혈마 진괴량.

그리고 본인의 몸.

“안 되긴 뭐가 안돼! 돼!!”

나는 그 점을 십분 활용해 회한을 휘둘러 나갔다.

촤아악!!

묘왕을 위협하며, 가죽관들을 베어냈고.

“이런 죽일 놈이!!”

그러다 말고 진괴량을 노리는 척하다가.

“죽일 놈은 느그 교주가 죽일 놈이고!”

“이노오오오옴!!!”

“실은 훼이크야.”

“…해익구(害益口)?”

“영감부터 죽이고 싶다고.”

묘왕을 향해 검초를 쏟아냈다.

쌔액!

쌔액! 쌔애애액!!!

물론, 그러는 와중.

진괴량의 주화입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놈의 속을 긁는 말을 쏟아내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진괴량! 귀는 뚫려 있겠지? 교주는 무슨. 사겸의 말이 딱 맞아. 멍청한 놈이다, 너는! 멍청하기만 하면 다행이었을 텐데, 용기도 없지!”

“감히 교주님께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그 입 닥치지 못할까!”

“당연히 못 닥친다! 내가 당신 말을 왜 들어야 하는데? 재주가 있으면 멈춰보든가! 자 여기 자르기 좋게 아주 혀를 내밀어 줄게. 엘레벨레베레벨.”

“이! 이이이!!!”

캉! 캉!

“아이. 저 늙은이 때문에 하던 말을 까먹었네. 어디까지 했지? 괴량아! 사람이 말을 하면 답을 좀 해라! 아! 멍청한데 용기도 없다고까지 했구나 참!”

카캉! 카카카카앙!!

“아랫물에서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직접 나서야지. 젠체한다고 혈풍대만 내보내니깐 이런 일이 생긴 거 아니냐! 어차피 좁밥이긴 했지만, 그래도 걔들이라도 있었으면, 느그 집구석 사정이 조금은 달라졌을 거 아니냐! 에라이 멍청한 놈!”

그런 내 모습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는데.

- 내 제자지만 참… 네 녀석이 지닌 재주 중에 천하에서 제일 가는 것을 딱 하나 꼽으라면 역시나 혀다 혀. 천하제일후기지수니, 신진제일협이니 할 게 아니라 이놈은 천하제일설(天下第一舌)이라 불려야 해.

이 순간.

진괴량의 얼굴에 핏대가 꿈틀거리더니.

놈의 입에서 주륵 흘러내리는 핏줄기가 보였다.

*    *    *

한편, 언용운이 이끌던 제대에서 가장 먼저 떨어져나온 남궁윤과 도중광.

그들은 인왕과 그의 군단을 상대로 소폭 열세에 놓여있었다.

크게 밀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인왕의 군세가 두 배는 되었던 터라 전력이 줄어갈수록 어려워질 게 분명한 전황에.

남궁윤은 입술을 씹었다.

‘…….’

그리고 숙영지를 떠나기 전 언용운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는데.

‘자존심과 대나무. 그리고 이 싸움은 기숙사 대항전 같은 대결이 아니라 그랬지.’

바쁘게 검을 휘두르는 와중 그 말을 곱씹으니, 어떤 생각 하나가 남궁윤의 머릿속에 번뜩 스쳐 지나갔다.

그에 남궁윤은 도중광을 향해 급히 전음을 보냈다.

[선배님. 도망치시죠.]

남궁윤의 말에, 도중광은 안 그래도 좁히고 있던 미간을 더욱 구기며 답했다.

[뭣이? 나더러 내빼라는 거냐? 남궁가의 도련님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더니?]

[그런 말이 아닙니다.]

[아니기는. 우리가 녹림도라고 무시하는 것인가? 안 왔으면 모를까 여기까지 온 놈 중에 도망칠 놈은 없다! 모든 강호인이 산적이라 얕잡아보는 우리지만. 우리도 밟으면 꿈틀해!]

[정말로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잠시 작전상의 후퇴를 하셨다가, 다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

[선배님의 각오와 별개로, 녹림도가 도망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자는 없고. 남궁가의 장남이 남는 것을 이상하다고 여길 리도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사로잡고 싶은 대상일 겁니다.]

[…….]

[말씀대로 남궁가의 도련님이니까요. 그를 노리면 제가 잠시는 버틸 수 있습니다. 그동안 돌아오셔서 저들의 뒤를 치십시오.]

가문의 명성과 스스로의 목숨을 이 판에 올리겠다는 남궁윤의 모습에.

도중광은 나이와 배분을 떠나 어떤 경외감을 느꼈다.

‘…이런 게 백도 무림의 진정한 저력인 것인가.’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도중광은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을 바로 전했다.

[…미끼가 되겠다는 말인데, 우리가 진짜 그 길로 내빼면 어쩌려고 우릴 믿느냐? 괴룡 그 녀석을 믿는 건가.]

[선배님께서 그 이유를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밟으면 꿈틀하신다고요. 그 마음을 믿습니다. 전음으로 나누는 이야기지만, 길어지면 수상할 겁니다. 그 방법밖에 없으니. 시작하시죠.]

그 대화가 끝났을 때.

도중광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니기미! 안 되겠다! 백도 놈들에게 붙으면 떡고물이 떨어질 듯해서 붙었는데, 다 뒈지면 무슨 소용이냐! 튀어!!!”

그런 도중광을 따라 녹림도들은 꽁지가 빠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에라이! 그러니까 애초부터 이거 아닌 것 같다고 제가 그랬잖습니까?!”

“그딴 걸 따질 때냐?! 토끼기나 해 이 새끼들아!”

애초에 도망에 이골이 난 녹림도 인데다, 따로 언질을 줬던 적이 없었기에 그 모습은 정말로 꼴사나운 패잔병 그 자체였다.

하여, 그들과 싸우던 마인들은 비웃음을 머금었고.

“풉.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구나. 남궁윤.”

“…….”

“여러모로 활용 가치가 있는 놈이다! 사로잡아!”

그걸 확인한 남궁윤은 남궁세가의 비전무공인 제왕검형을 펼칠 준비에 들어갔다.

“와라.”

*    *    *

남궁윤이 뇌기가 번쩍이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때.

독고철과 정현을 위시로 한 홍군은 완전한 열세에 놓여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택한 행로 곳곳에 세워져 있는 초소와 관문들을 넘느라 전력들이 지치고 상했는데.

그들과 맞서는 축왕(丑王)의 대력우마군은 혈풍대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군단이었고.

머릿수 또한 수천에 달했으니까.

챙! 챙!

채채채챙!!!

지친 와중에 그들을 상대하느라, 예봉이 꺾이게 된 홍군의 모습에.

적수학사 손천정은 다른 홍군의 수뇌를 향해 급히 입을 열었다.

“이거 퇴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손천정의 말에, 사겸은 딱 잘라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귀신 가면을 쓰고 도망을 치자니?”

“완전히가 아니라! 전열을 정비하자는 겁니다! 지연조를 남겨 지나온 관문 중 하나를 틀어막고 지원군을 기다리는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사겸은 독고철과 정현을 향해 물었다.

“단주님과 도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정현 역시 언용운이 했던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끊임없이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하라.’

단순하게 생각하면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말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컥.”

“커흑.”

근처에서 쓰러져가는 진혈단원들이 있으니 더욱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쏠렸다.

‘눈앞의 옳고 그름은 늘 단순하다.’

과거의 정현은 눈앞에 보이는 도가 바른지 아닌지, 그것만을 쫓았다.

하나, 이제는 세상만사가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태극과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 소협과 함께해온 시간들을 대입하면 그 말뜻은 전혀 달라진다.’

단순히 눈앞의 생사에 무거움만 봐선 안 된다.

죽음을 각오한 이들의 뜻.

그리고 그들과 같은 뜻을 품은 동도들의 뜻을 살리기 위한 선택을 해야 했는데.

‘…언 소협은 늘 이런 선택을 해오셨는가.’

찰나의 고민 끝에, 어렵게 뜻을 세운 정현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버텨야 합니다. 물러나려면 한 관문으로는 안 되고. 최소한 세 관문을 물러나야 합니다. 지연조도 그만큼 희생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독고철 역시 동의를 해왔다.

“저도 검룡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 관문까지 이르는 데 걸린 노력과 희생, 그리고 시간을 생각한다면…. 다시 오를 때. 물러선 만큼 새로운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지원군을 믿고 버텨야 합니다.”

논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혈단주인 독고철의 뜻에 따라 홍군은 선 자리에서 버티며 전열 정비에 들어갔고.

챙! 챙!

채채채챙!!

그를 돕기 위해 정현은 태극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는데.

쌔액! 쌔액!

쌔애애액!!!!

빗발치는 단말마 속에서 정현이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러 낸 지 한참.

“원군이다!”

아군의 외침이 들리는가 싶더니.

여러 개의 그림자가 정현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어 내려섰다.

“무당 오협! 무당 오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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