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9화. 물들다 (8)
흙탕물을 그냥 마실 수는 없듯, 원혈도 거저 흡수할 수는 없다.
원혈(怨血) 속에 눌러 담은 음기를 공력으로 흡수하려면, 당연히 정제가 필요했다.
이는 진괴량쯤 되는 대마두라 할지라도 지난(至難)한 운기과정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데, 진괴량의 몸 상태는 애초에 위태로운 상태였다.
현경의 고수에 준해 있는 그였으나.
그의 몸 상태를 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물이 가득 찬 그릇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무공이 수련과 깨달음을 통해 그릇을 넓혀가며 차츰차츰 많은 물을 받아들인다면.
진괴량이 익힌 혈우신공은 우선 물을 가득 채워놓고, 서서히 그릇을 녹여내는 무공이었는데.
원혈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런 몸 상태에 한 방울씩 물을 더하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고, 모든 심력을 쏟아야 했는데.
웬 미꾸라지 같은 놈이 하나 쳐들어와서 난장을 피우니.
‘…언용운.’
그릇이 흔들리며 그 안에 가득 차 있던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진괴량의 오장육부는 어떤 것은 타는 듯이, 어떤 것은 에는 듯이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고.
전신의 경맥이 들끓었다.
위태로움 속에 아슬아슬하게 조화를 이뤄, 진괴량이 무의 끝을 넘볼 수 있도록 돕던 육신이 엉망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른바 주화입마가 찾아온 것이었는데.
“…나더러 혁련강 밑에서 십장이나 하면 딱 맞을 거라 그랬더냐?”
“기억력이 아주 나쁘지는 않네.”
그런 속을 다스려 내느라 시간과 심력을 소모하고 나니.
기껏 공수해놓은 혈견들도 모두 못쓰게 되었고.
가복으로 시작해, 오랜 시간 진괴량을 보좌해온 심복 중 하나인 묘왕은 목이 날아간 시체가 되어있었다.
진괴량은 부글거리는 속에서 끄집어 올린 한마디를 뱉어냈다.
“내 오늘 네놈의 목을 비틀어 그 피를 마셔주마.”
쓰렁-
그리고 바로 옆에 두었던 애검을 잡아 뽑은 뒤.
검집을 내던져버리고 언용운을 향해 땅을 박찼다.
쐐애애애액!!
주화입마의 여파로, 기실 기경팔맥이 만신창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진괴량이었으나.
평생 마공에 손을 대온 그에게는 그런 몸 상태를 이용하는 요령이 있었다.
“솜털도 덜 가신 애송이가 본좌를 여기까지 밀어붙이다니. 제법이긴 하다만.”
그리고 편법이나마 무의 끝을 엿본 적이 있는 진괴량과 그렇지 못한 언용운 사이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네놈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진괴량은 순식간에 언용운과의 거리를 좁혔고.
머릿속으로 반신이 너덜너덜해진 언용운의 미래를 그리며 맹렬한 검초를 내 질렀는데.
슉! 슉! 슉! 슉! 슉!
이때.
널브러져 있던 묘왕의 시신이 벌떡 일어나더니, 언용운과 진괴량 사이에 끼어들었다.
푹! 푹! 푹! 푹! 푹!
그에, 진괴량이 내다보았던 미래의 모습이 조금 달라지게 된 때.
언용운은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괴룡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라는 듯.
뒤를 쫓는 진괴량의 걸음을 비동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막아왔다.
‘그래. 역천괴마 그 늙은이의 제자들을 물 먹인 재주가 있는 놈이었지 참.’
이렇다 할 부적이나 요령(妖鈴) 같은 무구(巫具)도 쓰지 않고, 손짓 한 번으로 시체를 부리는 재주도 재주였지만.
그것 말고도 무언가 더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무슨 수가 더 있는 듯한데… 하하. 미심쩍어하는 이런 의심까지 이용하는 건가?’
그를 통해 딱 대여섯 걸음을 앞서 도망치는 언용운의 모습에, 진괴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쳐죽일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북강에서 처음 언용운을 마주했을 때.
손만 뻗으면 목을 비틀 수 있는 거리에 놈이 있었다.
‘하나, 그때는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적의 군세가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원혈을 흡수한다는 선택을 내린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지리라 생각했던 진혈단은 단단했고.
백도무림의 저력을 생각하면 당연히 지원군도 있을 터였으니.
혈교가 처하게 된 상황은 난국 중의 난국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그걸 돌파하려면 방법은 한가지 뿐이었다.
‘본좌가 혈우신공을 대성하는 것.’
그를 통해 압도적인 힘으로 혈마라는 존재를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
그것만이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나,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이 뒤틀려 버렸다.
그 바람에 대업도 진괴량의 무위도 퇴보해 버렸다.
픽! 픽! 픽! 픽! 픽!
언용운의 뒤통수에 핏줄기를 내뻗으며, 진괴량은 이 난국의 기원을 가만히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사실 언용운을 잡아 죽일 기회는 많았다.
역천괴마가 산서와 북해에서 크게 한 방을 먹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만 해도 재밌는 놈이라 생각했다.’
사천에서 도올월마의 목을 떨어뜨렸을 때.
그땐, 하늘 또는 검마 위철진이 그의 대업을 돕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십마대산을 곤란한 지경으로 모는 녀석을 죽여 없앨 이유가 없었지.’
그에, 진괴량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마침표를 찍었다.
‘확실한 건. 지금은 저놈을 죽여야 내 주화입마가 끝날 거라는 거다.’
그리고 울컥 치미는 토기를 참아내며, 혈조술의 기운을 크게 일으킨 뒤.
퍼 올린 공력과 함께 진하게 압축해 쏘아냈다.
쐐애애애애애액!!!!!!!!!!!!!
강렬한 강환(罡環)으로 화한 기운이 대기를 찢는 파공음을 내며 언용운에게 쇄도하는 와중, 앞을 막아서는 시체들을 두부처럼 잘라냈다.
그 바람에 일으켜 세울 근처의 시체들은 모조리 토막이 난데다, 어지간한 반탄기공 같은 것으로 막아낼 수 있는 강환이 아니었기에.
진괴량의 입꼬리가 슬쩍 비틀려 올라갔는데.
이 순간.
휙!
언용운은 급격하게 몸을 비틀며 쥐고 있던 검으로 진괴량이 쏘아낸 강환을 건드렸다.
본래라면 그 순간 강환이 일파만파 분열하며 핏빛 반월에 언용운이 수천 갈래로 조각이 났어야 마땅했다.
하나, 이번에도 진괴량이 내다본 미래는 모습을 바꿨다.
카앙!!!
진괴량이 내뻗은 강환은 분열하지 않고 튕기며 궤도를 바꿨고.
휘릭!
언용운은 덕분에 생겨난 약간의 공간에 기가 막히게 몸을 비틀어 넣는 것으로 사지를 빠져나왔다.
그걸 가능케 한 건, 최초에 강환을 튕겨낸 언용운의 검에 감긴 혈조술의 기운이었다.
“네놈이 어떻게 혈조술을?”
이 순간.
진괴량의 머릿속에서 사념의 파편들이 조각을 맞췄는데.
“…독고철이 아니라 네가 귀면옹이였구나?”
하나 간신히 진실을 추려낸 진괴량의 사념은 이내 곧 부서져 내렸다.
‘…언제부터?’
서로를 모르는 점조직이었는데 어디서부터?
백도무림과 철천지원수를 진 독고철은 어떻게?
명문세가의 장자가 무림공적으로 몰릴 수 있는 일을 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진괴량은 달리던 걸음도 멈추고 입을 열었는데.
“…도대체 뭐냐 너는?”
그 말에 언용운이 땍!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거 질문이냐? 그럼 예의를 지켜라 새끼야! 족보로 따지면 인마 너는 까마득해!”
* * *
혈라문 쪽에 불이 오른 것을 확인한 인왕은 날아간 왼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빠르게 어깻죽지에 점혈을 하더니.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모양이다! 전군 자왕에게로 간다!”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선배님!”
“오냐! 쫓자!”
남궁윤은 도중광을 위시한 녹림의 전력과 함께 그런 인왕의 군단을 쫓았는데.
그렇게 미로처럼 된 혈천 수라궁의 성내를 달리길 잠시.
앞서 달려 나가던 인왕의 군단의 뒤에.
『평천우마군(平天牛魔軍)』
축왕의 군단기를 든 마인들이 합쳐졌다.
그에, 두 사람의 뒤를 따르던 산적들이 기겁하며 걸음을 멈췄는데.
“헉. 가, 갑자기 적이 다, 다섯 배가 넘게 늘었는데?”
“다섯 배는 무슨… 대충 세도 열 배는 되겠는데.”
그런 평천우마군의 뒤로, 시퍼런 검강을 휘둘러 내는 일곱 도사와 저마다 귀신가면을 쓴 일군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에 남궁윤은 반색하며 달려 나갔고.
“홍군!”
도중광과 녹림도도 그 뒤를 따랐는데.
“안경 남궁가의 윤이 무극검 선배님을 뵙….”
남궁윤이 난리 통에 예를 차리려 하자, 홍군의 선두에 있던 명영이 급히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됐네. 지금 한가롭게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가세,”
“예!”
그에 다시금 마인들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한 때.
명영은 도중광을 향해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도 선배님. 큰마음을 먹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무사하셨군요.”
그런 명영의 인사에 도중광은 헛기침을 했고.
“크흠. 뭐. 크흐흠.”
수하들은 그런 도중광을 향해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제가 아까 토끼자고 하지 않았습니까요.”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당오협이라는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이유는, 그들이 민초를 괴롭히는 이들을 응징했기 때문이었는데.
그중엔 탐관오리도 있었지만, 비율적으로 흑도들이 많았고, 당연히 산적들도 끼어 있었다.
자다가도 명영이 온다고 하면 경기를 할 판인데, 그런 사람이 바로 옆에 있으니.
절로 위축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깨 펴라 새끼들아. 뭐 죄지었냐?”
“짓기야 지었죠.”
“그렇긴 한데… 어지간한 건 이번 일로 어떻게 좀 갚아지겠지.”
그렇게 달려 나가던 걸음들은.
혈마의 비동 앞에서 펄럭이는 자왕의 군단기 앞에서 멈추게 됐다.
『혼야서마군(混野鼠魔軍)』
그에, 가장 안쪽에는 자왕의 군단과 노삼이 이끄는 백군이.
그다음에는 축왕과 인왕의 군단이.
마지막으로 홍군과 합쳐진 백도의 전력이 어지러이 마주 서게 됐는데.
이 상황을 가장 빨리 인지한 은하연이 공력을 실어 입을 열었다.
“무당오협이 왔다! 마인들은 끝이다!!!”
이는 안쪽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아군에게 원군이 왔음을 알리고, 적의 사기를 끌어 내리기 위한 계략이었는데.
녹림도들이 함께 목청을 높이는 때.
“그래! 저놈들이 제일 악질이지! 무당오협이 왔다!!”
“통행료를 조금 받을 뿐이고, 나름대로 다리도 놓고 잡놈들도 막는 우리 녹림과는 질이 다르지!”
“와아!!!”
혈교 쪽에서는 자왕이 목청을 높였는데.
“인왕! 축왕!! 교주님을 모셔야 한다! 뒤를 잡히는 것을 생각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동시에, 백군의 노삼도 사자후를 내 질렀다.
“무당오협? 그럼 거기 명영 후배 있는가?!”
“예!”
“저기 보이는 비동! 비동으로 가게! 거기 용운이가 혼자 들어갔네!”
* * *
평범한 무인들에겐 쥐약이나 다름없는 혈조술로 빚은 강환이 내겐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
진괴량은 혈조술을 오롯이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것에 집중했다.
쌔액! 쌔액!
쌔애애액!!!
나 역시 혈조술을 혈맥 속에서 돌려 그런 진괴량의 움직임을 막아냈으나.
샥!
서걱! 서거걱!
입고 있던 무복이 걸레짝이 되어감은 물론이요.
크고 작은 생채기가 계속해 늘어가고 있었다.
“이래도 어떻게 본교와 천마신교의 무공을 훔쳐냈는지 답하지 않을 테냐?”
“아까 말해줬잖아. 사실 내가 니 할애비라니까?”
그에 사부님께서는 한마디를 해 오셨다.
- 저 진가 놈이 주화입마가 온 것만은 확실하다만. 그런데도 너를 웃돌고 있다. 결코 방심해도 좋을 상대는 아니니라.
‘…알고 있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것쯤은.’
처음만 하더라도 어쩌면 진괴량을 나 홀로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진괴량이 생각보다 빨리 주화입마를 눌러내고 눈을 떴을 때 어려워질 것 같았지만.’
어찌어찌 딱 한 번의 방심만 유도해 낸다면.
‘숨기고 있는 암객과 혈용을 활용해서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비동에 진입하며 처치했던 시체들을 방패막이로 써먹는 것도, 이젠 끝이었고.
“그럼 네놈의 몸 안에 고인 피라도 마셔야겠다.”
“그거, 아까도 한 말 같은데. 협박으로 써먹을 말이 그거밖에 없냐?”
“처음에는 악에 받쳐 뇌까린 말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네놈은 내게 있어 걸어 다니는 영약인 듯하구나.”
팟!!
진괴량은 안광을 번뜩이며 앞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세로 나를 향해 쇄도했다.
더는 패를 숨기고 있을 수 없게 되었기에.
‘암객.’
- 예. 주군.
‘지금 곧 혈용을 소환할 거다. 녀석이 진괴량의 공격을 한번은 받아 줄 거야.’
- 그때 놈의 뒤를 노리겠습니다.
‘그래.’
나는 암객을 향해 명을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혈용을 불러냈다.
“혈용!”
그어어어!!
“숨기고 있던 패가 이거였나?”
“아니. 하나 더 있다.”
혈용은 소환하자마자, 반으로 갈라졌지만.
의도대로 진괴량의 검을 한번은 받아 주었고.
쌔애애애액!!
그 틈을 타, 그림자에서 솟아난 암객이 시커먼 반월을 그어냈고.
그런 녀석의 검초에 발맞춰 나도 회한을 그어냈는데.
쌔액! 쌔액!
쌔애애액!!
진괴량은 번개처럼 보법을 밟아 내가 내지른 검초를 피해내고는.
신들린 듯 검을 휘둘러 암객을 난자했다.
쿵!!!!!!
그리고는 진각을 밟아 일으킨 풍압으로 암객을 역 소환시켜버렸는데.
그로 인한 여파로 내가 시커먼 핏물을 토하자.
“쿨럭.”
“이젠 정말로 끝이지?”
입꼬리를 히죽 늘어뜨리며 이죽이더니.
정색하고 다시금 나를 향해 쇄도해 왔다.
‘…이건 정말 위험한데.’
그에 대응하기 위해 나는 뒤를 향해 비영파천보를 시전함과 동시에, 회한을 휘저었는데.
챙! 챙!
채채채채챙!!!
회한이 그리는 투로를 헤집고 들어 온 일격이 내 몸을 꿰뚫으려는 때.
뒤에서부터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이는가 싶더니.
“허리를 숙이게.”
어느새 내 바로 옆까지 다가선 명영이, 시퍼런 검강이 감긴 검을 부드럽게 휘저어 진괴량의 검을 떨쳐 올렸다.
떠어어어엉---
그에 검이 공명하는 소리와 함께 진괴량이 걸음을 물린 때.
“무극검?”
명영은 나를 응시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늦지 않게 온 건가.”
“조금 늦으셨습니다.”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
“그건 아닌데. 나중에 지각비를 좀 내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