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0화. 물들다 (9)
명영은 진괴량을 주시한 채 내 말을 곱씹었는데.
“…지각비?”
이윽고 헛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농이로구만? 이 사람아, 늦었다는 말에 어디 다치기라도 한 줄 알고 놀랐잖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비교적 멀쩡한 모양이로군.”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신 건 이때였다.
- 쓰흡. 우리 용운이가 돈 내놓으라는 소리를 농으로 할 녀석은 아닌데… 지각비를 내라는 말이 농담이었더냐? 아니지?
‘…….’
- …이것 보라지. 아니라는 말이 바로 안 나오잖아.
‘…숨 고른 겁니다. 숨.’
명영이 가세한 덕분에 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
진괴량은 시선을 명영 쪽에 고정했다.
“무극검?”
“그대가 혈마요?”
양자 모두 기도를 드러내기를 감추지 않으니.
비동 안의 대기가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는 자리엔 불꽃이 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
“…….”
그 정적을 깬 건 진괴량 쪽이었다.
“무당산에 틀어 박혀있어야 할 네놈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대무당파는 봉문을 깨고 퇴마전선의 선두에 서기로 결의하였소.”
“백도의 지원군이 혈라문을 넘었다는 것인가? 붙어 다니는 사형제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호교법왕들이 붙들고 있나 보군.”
진괴량의 말은 생각을 정리하려는 모습 같기도 했고, 명영을 떠보겠다는 의도도 있어 보였는데.
그에 답하는 명영의 화법이 묘했다.
“혈교의 혹세무민은 오늘로 막을 내릴 것이오.”
거짓을 말하지 않되, 진괴량이 원하는 답을 주지도 않았다.
“역사에 마귀로 이름을 남기고 무간지옥에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 투항하시오.”
정현이 오랜 세파(世波)를 견뎌내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명영의 말에.
“쌓아온 악업을 모두 씻어 낼 순 없을 것이나, 그대의 몸에 진동하는 혈향을 조금이나마 씻어낼 기회를 드리리다.”
“산중에 처박혀 있다 보니 콧대가 높아졌는지, 말코 놈이 퍽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천하를 진동시키는 유일무이한 마(魔)가 되는 것이라면 본좌가 염원해 마지않는 바이니라.”
진괴량은 미간을 좁히며 이죽거리더니.
나와 명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마쳤다.
“다음 대의 천하제일검? 천하제일 후기지수? 네놈들의 천하가 얼마나 좁은지,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본좌가 가르쳐 주도록 하마.”
그리고 곧바로 땅을 박찼다.
쇄도해오는 진괴량을 맞이하는 명영의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속을 고르시게.”
명영은 내게 한마디를 남기고는 진괴량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에 명영이 그어내는 푸른 강기와 진괴량이 쏟아내는 붉은 혈기가 비동이 떠나가라 굉음을 내며 얽히기 시작했는데.
캉! 캉!
카카캉! 카아앙!!!!
범인은 감히 인지도 하지 못할 찰나 속에 수십 초가 교환되는 상황 속에서도, 명영의 표정과 움직임은 고요했다.
‘…진괴량이 명영보다 한 수 아래라고 보기엔 어려워 보이는데도 저렇게나 차분하네.’
그런 고요함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눌러 밟는 명영의 걸음은 삼라만상을 품기라도 한 듯 차분하게 원(圓)을 그리며 진퇴를 거듭했는데.
스윽- 스윽-
스으윽-
그 걸음에서 출발한 부드러운 회전은 허리와 어깨 그리고 손목에서 또 다른 원을 더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검 끝에서 펼쳐지는 태극.
쌔액! 쌔액!
쌔애애액!!!
그 태극은 대기와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며 간격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을 흐름 속에 가둬 냈다.
진괴량의 검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챙! 챙!
채채채챙!!
그러한 흐름에 휘말린 진괴량의 공세는 무뎌졌고.
이윽고 휘둘러지는 명영의 검이 갖춘 묵직함에, 진괴량은 몇 번이고 아슬아슬한 순간을 맞아야 했다.
“큭.”
무당 검의 정수란 어떤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그 모습은.
명영에게 지도를 받았던 나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에, 절로 감탄하고 말았는데.
“누가 무당의 검을 두고 공격적이지 않은 대신 침범할 수 없다 했지? 저건 감히 침범할 수도 없거니와 강맹하기까지 한데….”
극에 닿은 부드러운 검은 제압이 아닌 진압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때.
사부님께서도 한마디를 해오셨는데.
- 태극혜검(太極慧劍). 무당 최고의 절기라 할 수 있는 검이니라.
‘아. 그러고 보니 사부님께서는 곤륜논검 때 겨뤄본 적이 있으시지요?’
- 무극검제(無極劍帝)라 불리던 말코 놈이었다. 장삼봉이 추구한 묘리를 오롯이 이해해낸 말코의 손에서 저 검이 펼쳐지면 상대하는 입장에선 곤혹스럽기 그지없지.
그렇게 사부님과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명영이 주도하는 흐름을 나름대로 대처해내던 진괴량이.
퍼엉!!!
명영의 손에서 뻗어낸 장력을 맞고 시커먼 선지피를 토해냈다.
“쿨럭!”
하나, 나와 사부님은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방금 저건….’
- …일부러 맞은 것으로 보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진괴량은 토혈한 직후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하하악-
전신에 감긴 핏빛 아지랑이가 한층 더 진해지며 흘러나오는 기도가 더욱 매서워지는가 싶더니.
움직임과 휘둘러지는 검이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캉! 캉!
카카카카앙!!!
진괴량의 검에 명영이 그리는 태극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는데.
동시에 난 진괴량이 한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일부러 내상을 초래해. 주화입마에서 기인한 체내의 불균형을 맞춘 건가?’
이른바 이독제독인 것이다.
몸에 무리가 가는 행동임은 자명했으나.
전황이 몰릴 대로 몰릴 판국인 만큼, 진괴량은 그런 것을 따질 처지는 아니었고.
역혈수라대법과 혈우신공을 익히며 경맥에 관한 편법에는 도가 튼 위인이니 해볼 만하다 싶었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악재인데. 서둘러 기혈을 정리해야 한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속을 고르는 운기에 힘을 썼는데.
그러면서 다시 팽팽해진 명영과 진괴량의 싸움을 지켜보길 잠시.
쐐애애애애액!!!!!!!!!!!!
진괴량이 쏘아낸 강환을 이전처럼 태극 속에 가두어 받아내려는 명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저렇게 받아내면 안 되는데?’
마침 기혈을 고르던 것이 얼추 끝이 났기에.
나는 비영파천보로 땅을 박차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숙이십쇼!”
* * *
차기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는 입지라면, 새카만 후배의 말을 무시할 법도 한데.
휙.
명영은 내 말에 따라 부드럽게 허리를 꺾어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나는 혈조술을 감은 회한으로 날아드는 강환의 궤적을 살짝 바꿔냈다.
터엉!
그에 튕겨 나간 강환은 우리가 서 있던 자리의 뒤쪽에 있던 벽을 산산이 갈라버렸는데.
와륵-
와르르륵-
명영은 사지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금 부드럽게 기수식을 취하며, 내게 감사 인사를 해왔다.
“덕분에 살았네.”
“저도 선배님 덕분에 살았으니….”
“피장파장이라는 건가? 사람이 겸손하기도….”
“아뇨. 이제 저희 사이엔 지각비만 남네요.”
“……?”
그는 이어진 내 말에 마른 웃음을 짓더니.
“이, 이런 상황에서도 농을 잊지 않다니 역시 배포가 남다르구만.”
이윽고 부서져 내린 벽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종무공이랑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야 하고 있었네만. 그야말로 마공이구만. 이만큼 합을 섞어 냈는데, 공력의 바닥이 보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어찌 강기가 살아 있는 듯 변모한단 말인가.”
“혈교인과 싸워본 적이 없으시군요?”
“내가 젊었던 시절만 하더라도 마인들은 비교적 잠잠했지. 일전에 학관이 습격당한 때를 비롯해 몇 번 마인들을 상대해보긴 했으나 혈교 쪽 인사들과는 기실 오늘이 처음이군.”
“일단 제가 가세하겠습니다.”
“좋네. 가도록 하세.”
그렇게 나는 명영과 함께 진괴량을 공격해 들어갔다.
캉! 캉!
정현은 가장 오래 나와 합을 맞춰온 상대였는데, 그런 녀석의 근간은 모두 명자배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더욱이 나는 명영에게 따로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었기에.
그와 내 호흡은 아주 잘 맞았다.
카카카캉!!!
우리의 합공은 명영이 태극을 그려내 진괴량의 검식 전반을 받아내는 동안.
터엉!
내가 혈조술 특유의 성질을 이용한 공격을 쳐내는 한편.
혈용이나 암객 등 여러 잡기를 활용해 공격해 들어갈 틈을 노리는 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카앙!!!!!!
난 그러는 틈틈이 전음을 통해 혈술의 특징들을 명영에게 전달했다.
[저 혈조술이라는 것은 방금처럼 갈래갈래 분열하기도 하지만, 엿가락처럼 늘어나거나 폭약처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폭약?]
[저놈들은 말 그대로 혈맥을 폭주시켜 터트리는 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때.
명영의 낯빛에 일순 파리함이 스쳤다.
캉! 캉
카카카캉!!!!!
진괴량의 공격을 쳐내는 와중에 그걸 확인한 나는 곧바로 질문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비동 밖의 상황이 떠올라서 말이야.]
[어떻길래요?]
[적아(敵我)가 켜켜이 뒤섞여 있네.]
혈라문을 뚫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어도, 전황이 완전히 우리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일단은 괜찮을 겁니다. 정현을 포함해서 저랑 어울리는 생도들을 언동생이라 하는데, 실제로 자폭을 시도하는 혈교의 마인들과 싸워보기도 했으니. 슬기롭게 대처해낼 겁니다.]
나는 우선 희망적인 말을 명영에게 전했다.
그러자, 명영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는데.
[부끄럽구만. 우리가 고루하게 무당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에 집착하고 있던 동안, 자네들 같은 젊은이가 마교라는 풍파에 적응해낸 것을 보니…. 부끄럽기 그지없어.]
나는 한편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진괴량을 처리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카카카캉!
카앙!! 캉캉! 캉!!!
혼자 몸으로 우리가 내뻗는 공격을 신들린 듯 쳐내는 진괴량.
저 대마두를 당장에 처리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었으나.
만약을 더해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해도,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함께 스쳐 지나갔다.
‘적아가 얽혀있다면, 머리를 베어 몸통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형국은 어렵겠는데….’
요원한 금적금왕.
혈교의 잔당들의 폭주와 함께 혈천수라궁이 통째로 날아가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짐에 따라.
나는 작전을 좀 바꿔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배님. 이렇게 하시죠.]
* * *
한편 혈천수라궁에서 서편으로 쭉 내달리다 보면 만나게 되는 란창강의 삼각주 일대.
이곳엔, 마뇌를 견제키 위해 제갈척과 점창의 제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혈천수라궁 쪽에서 굉음이 들려온다 싶더니.
쾅!
콰아앙!!!
외벽 중 한 곳이 와르르 무너짐과 동시에 혈교의 군세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걸 확인한 매진악은 급히 입을 열었다.
“회주님! 동편 쪽에서부터 불이 올라온 것도 그렇고, 언 회장 쪽이 승세를 잡은 모양입니다!”
사실 이는 약속된 상황은 아니었다.
그에 제갈척은 미간을 좁혔는데.
“흐음, 가만있자. 용운이 녀석이 무슨 꾀를 쓴 것인가? 혈교 놈들이 우세한 상황이라면 멀쩡한 본인들의 본단을 저리 부수며 도망칠 이유가 없으니 아군이 승세를 잡은 것은 분명한데….”
제갈척의 답이 즉시 나오지 않자, 매진악은 재차 입을 열었다.
“저들을 일망타진하려면 저희가 한쪽을 차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로로 오기로 한 지원군이 당도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자리를 뜨면 천마신교 놈들이 자유로워지지 않는가.”
제갈척은 이어진 물음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삼각지로 옮겼다.
마뇌가 이끌고 온 천마신교의 전력도 혈천수라궁 쪽 전황을 확인했는지, 묘한 분주함이 감돌고 있었다.
“우리는 마뇌에게서 눈을 떼선 안 되네.”
“하면,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는 시선을 란창강의 줄기 쪽으로 옮기며 생각을 거듭했다.
‘언정웅 그 친구가 늦는 것을 보니 무언가 변고를 만난 듯한데… 용운이 녀석의 목숨이 걸렸으니, 어떻게든 오긴 올 것인즉. 이 강변을 모조리 못 쓰게 만들어 버리면, 조금 아래쪽에서 퇴각하던 혈교의 군세가 자연히 그 선단과 마주치게 되겠지.’
생각을 마친 제갈척은 급히 입을 열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저들끼리 무언가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 찢어져 나온 사이에 오롯이 믿지도 못하겠지. 지금 당장 이 일대에 불을 놓는다!”
“예? 불을 말씀입니까?”
“그래. 하면 혈교 놈들은 퇴로가 끊어졌다고 판단하든. 마뇌가 무슨 수작을 부린다고 판단하든 삼각지가 아닌 하류 쪽으로 향할 것이다!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