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1화. 물들다 (10)
[선배님. 이렇게 하시죠.]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혈교의 광신자들이 자신의 혈맥을 폭주시키는 방식으로 동귀어진을 꾀하는 모습을 여럿 봐왔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잘 대처해왔지만….’
적군과 아군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환경에서 혈교의 호교법왕들이 그런 짓을 한다면 피해가 막심할 것이 자명했다.
‘천신만고 끝에 진괴량의 목을 떨어뜨린다고 한들, 그런 결과를 마주하게 돼서야 의미가 없지.’
하니, 숨구멍처럼 보이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는데.
[도망칩시다.]
그러한 생각을 함축한 말을 전하자.
캉!
카앙!!!
명영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어왔다.
[…도망?]
[작전상 후퇴라고나 할까요?]
[조금 구체적으로 들려줄 수 있겠나?]
[혈마가 원혈을 흡수하던 시설은 제가 파괴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선배님이 여기까지 침투한 것으로 진괴량도 밖의 상황을 얼추 짐작할 것입니다.]
카카카캉!!
[이런 상황에서 저희가 도망을 치면 저자가 어찌 나올까요?]
[그야 쫓아 나오겠지.]
[그 후에는요?]
[불타고 있는 혈천수라궁을 확인할 것이고, 수하들과 합류할 텐데… 그래서야 맹수를 풀어 놓는 꼴이 되지 않겠나?]
명영은 머리를 되찾은 마인들이 파상공세를 펼쳐올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기에는 그저 마귀 같아 보여도, 진괴량은 셈이 밝은 자입니다. 야욕과 한이 있죠.]
당금 천마신교의 교주 혁련강.
진괴량은 자신의 가문을 멸문 직전까지 몰고 간 그를 증오했다.
그리고, 혁련강이 누리는 모든 지위와 권위를 탐냈다.
[우리와 싸워봐야 천마신교만 웃는 일이 될 거라는 걸 단박에 깨달을 텐데….]
그런 마음을 갖고도 구밀복검의 자세로 혁련강 밑에 붙어있던 자가 진괴량이었다.
[딱 맞춰 숨구멍을 틔워주면 되레 진괴량이 달아날 겁니다. 저희와 싸우는 것보단 도망치는 것이 진괴량의 야욕이 이루어지는 길과 통할 테니까요.]
카아아앙!!!
[그리되면 자연스럽게 섞여 있던 적아가 분리되긴 하겠군.]
내 말에 명영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아직 석연치 않은 점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랬다가 혈마와 수하들을 아주 놓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혈라문 쪽을 막아둔 형국이긴 하나,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난창강이 있네. 그를 통해 대해로 나가버리면 엄청난 후환이 될 것이야.]
[난창강의 삼각지 부근에는 동도회주님과 점창의 제자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류에는 하북에서부터 바닷길을 따라오고 있는 원군이 있습니다.]
[하북에서부터? 하기야 자네가 무당에만 안배를 해뒀을 리가 없지. 그랬군, 그랬어.]
[예. 그러니 저들이 보기엔 숨구멍 같아도 결국 외통수가 될 겁니다.]
[…금적금왕이 아닌 사면초가를 노린다는 게로구만. 지금 상황에선 그게 맞는 듯하군.]
그 물음에 막힘없이 답하자, 명영은 그제야 안심한 듯 내 말에 동의했다.
[자네의 판단을 믿겠네.]
* * *
[하면 내가 어찌하면 되겠나? 남을 속이는 재주는 좀 부족한 편인데….]
[정현을 봐오기도 했고, 아까 진괴량과 나누는 말씀에서 이미 짐작했습니다.]
어차피 이 비동을 나가는 것이 진괴량에게도 과제일 터였으니, 이렇다 할 유인책은 필요치 않았다.
[제가 틈을 봐서 신호를 드릴 테니 그냥 내달리시면 됩니다.]
[알겠네.]
그렇게 뜻을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아 명영의 검이 진괴량의 공세를 크게 떨쳐냈다.
나는 지체 없이 입을 열었고.
“지금!”
곧바로 걸음을 돌려 비영파천보를 시전했는데.
명영 역시 무당 특유의 제운종을 선보이며 나를 따랐다.
진괴량은 그렇게 도망치기 시작한 우리를 보고는 의아해했다.
“…갑자기 도망을?”
하나, 놈에게는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예상대로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오기 시작했다.
물론 얌전히 달려온 것은 아니었고.
슉! 슉! 슉! 슉! 슉!
암기나 다름없는 핏줄기를 뿜으며 나와 명영의 등을 노려왔다.
그런 진괴량의 수작을 막아냄과 동시에, 놈의 조바심을 부추길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비동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그리고 진괴량을 향해 달려들게 했는데.
그렇게 시체병사들을 던져 넣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가며 걸음을 옮겨낸 지 잠시.
챙! 챙!
채채채챙!!
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들릴 정도로, 비동의 초입에 다다를 수 있었다.
“혈용!”
나는 마지막으로 혈용을 소환해 진괴량을 향해 달려들게 한 뒤.
그어어어!!
비동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팟-
나와 명영이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비동을 빠져나오자.
비동 아래에서 사투를 벌이던 이들 중 아군의 얼굴엔 화색이.
“언용운! 언용운이다!!”
“무극검도 있다!”
적군의 얼굴엔 하늘이 무너진 듯한 난색이 스몄다.
“…어찌 저자들만?”
“…설마 교주님께 무슨 일이라도?!”
그에 요란하게 부딪히던 날붙이들이 일순 멈추게 되었고.
그 틈을 타 나는 사자후를 내질렀다.
“모두 물러나!”
홍군과 백군은 그 말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뒷걸음질 쳤는데.
자왕을 중심으로 한 혈교의 호교법왕은 그런 우리를 향해 날을 세웠으나.
“한 놈도 살려둬선 안 된다!”
이윽고 피칠갑을 한 진괴량이 우리 뒤를 쫓아 나오자.
“언용우운! 이게 무슨 수작이냐?!!”
곧바로 태세를 바꿔 진괴량을 향해 걸음을 돌렸는데.
“교주님! 교주님을 모셔라!”
그렇게 섞여 있던 적아가 갈라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상대로 혈교의 수뇌부가 퇴각하기 시작했다.
“교주님. 아뢰기 황망하나 당장은 본단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축왕! 자네가 앞장을 서고! 인왕! 그대는 중군을 맡아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게!”
유사시를 대비한 기관을 마련해 두었던 모양인지.
그렇게 혈교의 수뇌부가 걸음을 돌리자마자 혈천수라궁의 외벽 중 하나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쾅!
콰아앙!!!
그 길을 통해 마인들이 썰물처럼 퇴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아군을 향해 뜻을 전했다.
“쫓읍시다!”
명영부터 도중광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달리기 시작했는데.
그런 우리의 걸음을 저지하고자, 지연조의 마인들이 덤벼왔다.
“막아라!”
촤악!
촤아악!
난 그들을 베어내며 아군을 향해 유의해야 할 점을 전했는데.
“적을 쫓는 것이 급하나 흥분해서 고립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각 제대에 퍼져 있는 언동생들은 잠시 내 쪽으로!”
그러자, 진혈단주의 역할을 하고 있는 독고철을 제외한 모든 언동생들이 모여들었다.
“일단 다들 무사한 것 같네.”
그중 먼저 입을 연 건 당옥기였는데.
“그러는 너는 괜찮아? 진괴량이라는 인간… 잠깐 시선이 스친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던데.”
“무극검 선배님이 제때 와주신 덕분에 멀쩡해.”
내 입에서 명영의 이야기가 나오자, 정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사문의 이야기만 나오면 낯빛이 파리해지던 녀석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보니.
녀석과 무당 사이에 무언가 진전이 있던 모양이었다.
“…빈도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지요?”
“뭔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예?”
“아니다.”
잠시 그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은하연이 입을 열었다.
“언 공자야말로 제때 나와주셨네요. 마인들이 이판사판으로 몸을 터트려 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자연스럽게 적아가 분리됐어요.”
“진괴량이라는 자의 본질을 믿고 수를 던져봤는데, 다행히 생각대로 되었소. 이대로 난창강변까지만 몰아붙이면 자연스럽게 적을 궁지에 몰 수 있겠지.”
“그런데, 혈교가 천마신교와 손을 잡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러다 이어진 은하연의 질문.
나는 그에 답을 하려 했는데.
“정말 막다르다 생각되면 그럴 수도 있겠….”
이때 우소릉이 우측을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
“어, 언 형! 저쪽에 불이 오르는데요?!”
옆에 있던 은하성도 황급히 입을 열었다.
“어. 저기는 동도회주님이 주둔하고 계신 곳 아닙니까? 누님 말대로 천마신교 놈들이 움직이는 걸까요?”
그사이 불길이 퍼지는 모양새를 확인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혈천수라궁이 무너지는 걸 봤을 테니, 천마신교도 무슨 움직임이 있긴 하겠지만… 저건 놈들이 놓은 불이 아니다.”
곧바로 제갈설지가 한마디를 더했다.
“용운님 말씀이 맞아요. 할아버님이 마뇌에게 공격당한 거라면, 저렇게 강변을 따라 불이 퍼지는 게 아니라 진지 쪽에 불이 났을 거예요. 이건 할아버님이 저희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이때 사부님께서 자문자답하셨다.
- 불을 놓는 게 어찌 도와주는 일이 되느냐? 아, 혈마 놈과 수하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목을 좁히니까?
‘예. 거기에 더해 진괴량의 심 중에 천마신교에 대한 의심암귀를 일으키고자 하는 생각도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대꾸한 나는 제갈설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요란하게 저지르면 어떻게든 이쪽의 의도를 눈치채 주시리라 봤는데. 과연 천기묘산 어르신이요.”
그 말에 남궁윤이 고개를 끄덕여왔는데.
“그렇군. 이리되면 혈교 입장에서는… 좌면과 후면은 우리가. 우면은 불길이, 전면은 난창강이 막게 되는가?”
그러다 말고 우려를 표하니.
“한데, 상대는 마인들이다. 강물이 큰 제약은 되지 못할 텐데? 해로를 통해 오기로 한 지원군은 딱히 소식이 없고. 이 계획 정말로 괜찮은 것 맞나?”
남궁영이 아미를 좁히며 제 오라버니를 타박했다.
“초 치지 마세요. 오라버니. 말이 씨가 돼요.”
“혹여라도 간과하고 있을까 봐 짚은 것일 뿐이다.”
그 말에 난 다시 입을 열었다.
“도착했어야 할 시각에 도착하지 못한 것을 보면 하북조가 풍랑을 만났지 싶은데. 따로 조치를 취해 뒀으니 아주 늦지는 않을 거다.”
“거보세요. 용운 선배가 어디 보통 사람인가요?”
“…너는 도대체 누구 동생이냐.”
그리고 다시 한번 언동생들을 다잡았다.
“지금까지 거쳐온 싸움들에서 나는 늘 너무 긴장해선 안 된다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궁지에 몰린 혈교인은 아무리 긴장해도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다. 언제든 스스로를 터트려 동귀어진을 해올 수 있다는 거 잊지 마.”
“예!”
이어서 편제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지금부터 제대의 배치를 조금 바꾼다. 무당의 제자들과 홍군 그리고 내가 중앙에 서고. 은 소저는 노삼 교수님과 함께 좌익을 제갈소저는 우익을….”
그러면서 밀림의 수풀을 헤쳐나가길 잠시.
어느 순간 시야가 확 트이며, 강변의 모래사장에 우뚝 선 혈교의 군세와 그들의 앞을 막고선 선단(船團)이 눈에 들어왔다.
『하오문주 목염약.』
일곱 글자가 수놓인 깃대들이 꽂힌 선단에는 아버지를 비롯해 익숙한 얼굴들이 대거 탑승하고 있었다.
그에 우소릉을 필두로 언동생들이 알은체를 했는데.
“언 형! 가주님이세요! 작은 언 형이랑 팽 누님도 보이고요!”
“장호랑 소천이 형도 보인다!”
이때.
혈교의 호교법왕 중 자왕이 진괴량을 향해 허리를 낮추는가 싶더니.
이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백도의 무리는 들으시오. 정말로 사생결단을 낸다면 당신들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이오. 그대들이 신봉하는 도경(道經)에도 만족하고 그치면 욕됨이 없다는 말이 있지 않소?”
그리고는 몸을 슬쩍 틀어 선단의 기함을 향해 재차 입을 열었는데.
“하오문주는 들으시오! 백도의 원군을 실어 온 행위는 눈감아 주겠소. 하류 인생들이 모인 것이 그대들인 만큼, 저들의 말을 거역하기 어려웠겠지. 단! 이번엔 우리를 태워주시오. 그럼 양쪽 모두에 손을 들어준 꼴이니, 지금처럼 정사지간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오.”
아버지의 옆에 서 있던 중년 여인은 그런 자왕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거기 뒤쪽에 계신 공자님이 소문의 괴룡인가 보네요?”
그에, 그녀가 하오문주임을 알아본 나는 곧바로 포권을 취했는데.
“무림말학 언용운이 밤의 주인을 뵙습니다.”
“듣던 대로 외모는 훤칠하고 기도는 헌앙하군요. 어머님과 아버님의 잘난 부분만 빼닮은 모양이네요.”
그런 목염약의 태도에.
자왕은 이를 갈며 언성을 높였다.
“……! 목 문주. 그 결정에 후회 없겠소? 우리 중 단 한 명만 살아나가도 하오문은 피로 물들 것이오!”
그제야, 목염약의 시선이 자왕을 향했는데.
“이미 이 가슴은 어떤 젊은이의 의기에 물들어버렸는지라. 그럴 수가 없겠습니다. 쉽지는 않으실 겁니다. 질기디질긴 것이 저희네 목숨 줄기이니까요.”
이어진 목염약의 말에.
진괴량의 전신에는 전에 없이 강렬한 혈기가 감겼다.
“됐다. 자왕은 천한 년과 더 말을 섞어 본좌의 체면을 상하게 하지 말라! 모두 죽여 없애면 그만이야!”
그런 진괴량을 따라 마인들은 저마다 혈기를 휘어감았고.
그에 맞서는 아군 역시 각자의 병장기를 고쳐 쥐며 기수식을 취했는데.
“자신이 없다.”
아군 사이사이에 보이는 언동생들의 모습.
바로 곁에선 무당의 제자.
그리고 사겸과 독고철의 모습에.
내 입이 절로 한마디를 뱉어냈다.
“질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