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4화. 가관 (3)
자왕과 축왕마저 제물로 삼는 진괴량의 모습에.
중앙의 전장에서 맞붙고 있던 이들이 적아(敵我)를 막론하고 굳은 듯 멈춰 서게 되었다.
“원시천존. 접하는 것만으로도 살에 한기가 스미는 끔찍한 기도로다. 저 마공을 연마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된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구만… 마귀로다. 마귀.”
그중 무당의 제자들은 입으로는 학을 떼면서도, 진괴량을 향해 뛰어들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 더더욱 인세에 풀어두어선 안 되겠지요. 대사형께서는 우리의 걸음이 여기에 이른 것이 도라 하셨지요?”
“그랬지.”
“아무래도 천존과 진무대제께서 저자를 막으라고 이 자리에 우리를 보내신 듯합니다.”
“동의하네. 저자의 이기(利己)만큼은 천하에 덮이게 두어선 안 되네.”
나는 그들이 행동에 나서는 걸 말리고자 급히 입을 열었는데.
“지금 공격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무당 오협의 막내 명한이 내게 질문해왔다.
“어째서? 저자의 흡성대법이 끝나기 전에 쳐야 하는 것 아닌가?”
“진괴량의 몸에 운집하고 있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느껴지네. 끔찍하고도 추잡한 기운이.”
“반탄력만으로도 선배님들이 내상을 입게 되실 수 있습니다. 최악으론 흡성대법의 대상이 되실 수도 있고요.”
“……!”
흡성대법에 대항하는 가장 간단하고도 위력적인 방법은 공력을 끌어올려 기운을 빨아가려는 마공의 힘을 밀어내는 것이다.
무당의 심법은 정종 토납법의 정수인지라, 기본적으로 진괴량의 기운과는 상극일 터였다.
하나, 이 경우엔 진괴량 쪽에 운집한 기운이 너무 커서 상극을 떠나 순식간에 추가 기울 것이 자명하다는 게 문제였다.
‘…진괴량에게서 원혈을 빨아내는 일은 무당의 제자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들이 곁에서 놈의 공격을 막아주고 버텨줘야 가능한 일이었으니, 내상을 입거나 진괴량의 먹잇감이 되어서는 안 됐다.
하여, 내가 조심해야 할 점을 입에 올리자.
이번엔 명일이 질문을 해왔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이때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혈마가 호법들의 진기를 다 흡수하도록 내버려 두면, 우리와 더욱 격차가 벌어질 텐데? 그때 가서 막을 방도가 있을 리가….”
한데, 정현이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자세를 바꿨다.
녀석은 금방이라도 땅을 박찰 듯하던 자세에서,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검만 치켜세운 기수식을 취했는데.
“…정현 너는 있다고 믿는 것이냐?”
명일은 정현과 나를 차례로 훑어보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있다고?”
명영이 정현과 같은 자세로 기수식을 취하며 입을 연 건 이때였다.
“무당산에서 산세나 감상하고 있던 우리보단, 저런 마귀들과 숱하게 싸워온 이들의 생각이 도에 가까울 테지. 나는 괴룡의 판단에 걸어보겠네.”
이어 남은 무당오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수식을 바꿨고.
독고철을 필두로 진혈단의 고수들도 같은 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진괴량을 상대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말을 전했는데.
“우선은 이인 일조로 움직이던 것을, 저와 명영 선배님 그리고 나머지 열둘. 이렇게 두 조로 바꿉니다.”
“혹여라도 붙들리면 공력을 합쳐 떨쳐내라는 거군.”
“예.”
이때.
진괴량의 입에서 인간이 내는 소리라고 믿기 힘든 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르르르-
그에, 정현은 언젠가 상대해 보았던 존재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 소리는… 천마신교의 괴인들이 내질렀던 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 듯합니다만?”
“감당하지 못할 진기를 받아들인 것까지는 같으니까… 하지만 전혀 다를 거다. 진괴량은 혈우신공을 익히고 있는 자니까.”
그렇게 주지해야 할 사항과 경각심을 일러두었으니.
이제 남은 문제는 딱 하나였는데.
- 한데, 저놈이 내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자왕 그 쥐새끼 놈이 도망치라 하지 않았느냐?
어찌 꿰뚫어 보셨는지, 사부님께서는 내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먼저 말씀하셨다.
‘…그럼 일이 어려워지겠죠.’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늘을 지르밟는 듯한 신법을 보인 혈마였다.
난창강은 강폭이 넓었고 유속이 빨랐으나, 어마어마한 원기를 받아들인 혈마라면 그 위를 내달리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그 뒤를 추격하는 일은 지난하고 위험한 일이 되겠죠…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끝을 봐야 합니다.’
하여 나는 입을 열었다.
“가관이구나 진괴량! 혈마라 자부하던 자가 개처럼 도망치고자, 끝까지 네놈 곁에 섰던 교인들에게 흡성대법을 사용하느냐!”
* * *
“…….”
“…….”
“…….”
“…….”
나로서는 진괴량을 잡아 두기 위해 입을 연 것이었는데, 의외로 혈교의 남은 잔당들이 움찔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여, 일석이조라고 생각하며 계속해 말을 잇는 때.
“특히나 그 자왕이라는 자는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지 않냐? 어린 시절부터 네놈을 걷어 먹인 가복이었을 텐데? 토사구팽은 본디 사냥이 끝나고 하는 것인데. 네놈은 시작부터 가족을 삶아 먹고 내빼려 하는구나!”
사겸과 손천정을 시작으로 홍군의 진혈단원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더해왔다.
“저게 우리가 교주로 받들던 자의 실체다!”
“교인들은 정신을 차리시오! 진괴량을 추종하는 길의 끝엔 현세도 내세도 없소! 저자의 뱃속에 들어가게 될 뿐이오!”
“옳소! 그대들도 눈이 있을 것 아니오?! 광신의 대가가 처참한 말로로 돌아온 것이 보이지 않소?!”
그에 혈교의 잔당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는데.
이 순간.
진괴량이 바싹 말라비틀어진 꼴이 된 두 호교법왕을 손에서 놓았다.
툭.
투욱.
그리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놈은 눈자위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져 시뻘건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더니.
톱날의 그것처럼 뾰족해진 치아를 드러냄과 동시에.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내 말의 뜻은….”
공력이 섞인 고함성을 내질렀다.
“네놈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그리하겠다는 뜻이다!!!!!!”
엄청난 원기를 흡수해낸 직후였기에, 그런 진괴량의 음성에선 끔찍한 귀곡성이 함께 울려 퍼졌다.
끼애애애애애액!!!!
동시에 수백, 수천 명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사자후에, 내력이 심후하지 못한 이들이 저마다 귀를 막거나 피를 토하는 때.
진괴량이 땅을 박차왔다.
쌔애애애애애액!!!
그 움직임은, 화경에 들어선 나조차 놈의 신형이 흩어지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여, 우리 중 그 움직임에 제대로 대처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명영 뿐이었으나.
카앙!!!
나는 명영의 움직임을 등대 삼음과 동시에, 동물적인 감각의 영역에 몸을 맡겨 진괴량의 움직임에 대처해냈다.
채채채채채챙!!
물론, 모두가 나와 같은 움직임을 보일 수 있던 건 아니었다.
촤아아악!!
하여 진괴량이 휘둘러낸 강기에, 혈교의 잔당과 홍군의 일부가 순식간에 반으로 썰려 나갔고.
무당오협 중에서도 가장 무위가 처지는 명은은 한 웅큼 피를 토했다.
“쿨럭!”
진괴량은 그 틈을 노려, 시뻘건 혈기가 감긴 검과 손톱을 세운 왼손을 휘저어 왔는데.
쐐애애애애애액!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음에도 무당오협과 진혈단의 고수들은 내가 했던 말을 믿고 열두 명이 하나가 되어 진괴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채채채챙!
그에, 나와 명영이 기회를 잡을 틈이 생겼다.
그 틈을 타 명영은 태극혜검의 초식을 그어냈고.
쌔액! 쌔액!
쌔애애!!
나는 그런 명영을 방패 삼아 진괴량의 뒤를 향해 돌아 들어갔는데.
진괴량은 한줄기 비소를 흘리며, 명영의 검을 쳐내고는 나를 향해 손톱을 세워왔다.
쐐애애액!
하나,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내 수준으로는 진괴량의 수준을 오롯이 쫓을 수 없지만… 놈의 손속도 이 각도에선 딱 여기까지가 한계겠지.’
나는 혈천수라궁에서부터 이어진 싸움에서 진괴량이 보여온 버릇들과, 방금 보여준 움직임 그리고 명영의 위치를 바탕으로 미리 몸을 움직여 놈의 공격을 피해낸 뒤.
휘릭-
혈륜을 개방한 채, 파천의 내력을 감은 손을 뻗어 진괴량의 팔목을 가볍게 부여잡았다.
그리고 놈의 몸에서 줄줄 새는 원기를 가볍게 빨아들였다.
슈욱-
그러자, 진괴량이 발작을 하듯 손을 빼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시뻘건 안광이 넘실거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향해 물었다.
“…네놈은 도대체 뭐냐?”
나는 놈에게서 받아들인 약간의 원기를 파천의 내력에 녹여 정화해낸 뒤.
“꺼억.”
과장되게 트림하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말해줬잖아? 아마 네 할아버지쯤 될 거라고.”
* * *
내가 진괴량에게서 원기를 흡수하는 과정을 비유하자면 뱀독에 물렸을 때 빨아서 뱉는 것과 비슷한 방식과 비슷했다.
하여, 원리나 실상은 조금 달랐지만, 내가 한 행동이 진괴량에게는 흡성대법과 똑같이 느껴진 모양인지.
내게 공력을 빨린 직후.
놈의 움직임은 나를 의식해 조심스러워졌다.
쐐액!
쐐애애액!
덕분에 진괴량이 틈을 보이는 일이 잦아졌고.
나는 그 틈을 노려 독사에게 물린 상처를 빨아내듯 야금야금 놈의 원기를 흡수해냈다.
‘이 정도씩은 괜찮네.’
괜히 욕심을 내면 진괴량에게 붙들려 찢겨 나갈 수도 있었거니와, 파천의 내력이 정화해주는 양에 한계가 있기에 자칫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는데.
슈욱-
그런 식으로 내가 빨아낸 공력은 여전히 진괴량에게 있어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그를 통해 내 무위가 당장에 진일보를 한 것도 아니었기에.
카카카카카아아앙!!!!!!!!!
여전히 진괴량의 공격은 무시무시한 위력과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여,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에도.
“깔짝깔짝 성가시게도 구는구나!”
진괴량의 검이 내 가슴팍을 스치며,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기도 했다.
스거억-
그에 얇은 혈선이 가슴팍에 새겨지자.
채채채챙!!
명영은 바쁘게 검을 휘두르는 와중, 시선을 주며 내 상태를 확인했는데.
“괴룡! 괜찮은가?!”
“보시다시피 일단 목은 멀쩡하게 잘 붙어 있습니다.”
“이 와중에도 그런 말을 하다니, 간덩이하고는.”
그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답을 하고서 다시 진괴량을 향해 회한을 휘둘러 나가길 잠시.
반가운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용운아!”
“후. 염병할 광신자 놈들이 끈질기기도 하다.”
아버지와 노삼.
“언 공자! 가세할게요! 아, 우 소협과 하성이는 제 재량으로 부상자들을 돌보라고 했어요!”
그리고 은하연을 시작으로 불러들인 언동생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는데.
그중 가장 마지막으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제갈설지와 딸려 보낸 두 병아리였다.
“용운 님!”
“용운이 형!”
“용운 선배!”
난창강의 상류에서 중류로 넘어오는 길목.
마뇌가 개입한다면 그쪽일 수밖에 없던 부근을, 그녀에게 맡겨 두었었는데.
“삼각주에서 출발했던 마뇌의 선단은 지류를 타고 다른 방면으로 사라졌어요! 혈교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에요!”
“설지 선배 말이 맞아요! 동도회주님은 그 뒤를 쫓아가셨고요!”
제갈설지는 내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을 전해왔다.
저 말이 녀석들의 계략이든 진실이든.
이 순간 혈교의 수명은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땡그랑.
이 상황을 진정한 사면초가로 받아들인 혈교의 잔당들이, 마침내 저마다 병장기를 던지기 시작했으니까.
기실 진괴량이 그려내고자 한 혈염천하가 종지부를 찍은 순간이었는데.
이때 진괴량이 한 행동은 양천광소를 내지르는 것이었다.
“크하하하하하!”
끼애애애애액!
그렇게 귀곡성이 섞여나오는 웃음을 터트리던 놈은 어느 순간 그 웃음을 뚝 멈추더니, 몇 마디 말을 뇌까리기 시작했는데.
“내가 네놈들을 다 죽여봐야 마뇌 그 늙은이랑 혁련강을 기쁘게 해주는 일이겠지? 이것 참. 그건 죽기보다 싫은데….”
어느 순간 정색을 하고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언용운 네놈도 싫다. 콩만 하던 네놈 하나가 이리 튀고 저리 튀어 여기까지 왔구나.”
그리고 나를 향해 땅을 박차왔다.
“혁련강은 너무 멀리 있으니, 네놈에게라도 화풀이를 해야겠다. 너를 죽이면, 적어도 여기 있는 백도 놈들은 눈이 벌게져서 십만대산으로 향하지 않을까?”
그런 진괴량을 막고자.
아버지, 노삼 명영을 필두로 자리한 이들이 모두 몸을 던져 왔는데.
“용운아!”
“마두 놈이 지랄을!”
“피하거라!”
본인 쪽이 열세가 된 이후로 여력을 남겨두고 싸우고 있던 진괴량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듯 혈우신공의 절초들을 흩뿌려 대니.
그중 무위가 부족한 사람들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차졌고.
퓩! 퓩! 퓩! 퓩! 퓩!
모두를 없애는 것에서 나를 죽이는 것으로 목표를 바꾼 탓으로, 진괴량의 진격은 집요해졌다.
놈은 노삼의 장력과 아버지의 권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해왔고.
퍼퍼퍼퍽!!!!
퍼퍼퍽!!!
명영의 검초에 오른팔이 날아가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과연 이것도 감당할 수 있는지 보자!”
그리고 마침내 내 앞에 이르러 장심을 내질렀는데.
‘혈우만곤장?’
그렇게 질러내는 진괴량의 절초가, 내게는 되레 해볼 만하다고 느껴졌기에.
나는 파천의 내력을 모조리 끌어올려 우수에 휘감은 뒤.
“감당해주지.”
혈륜을 개방하여 원기를 빨아들일 준비를 마치고 진괴량의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맞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