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416화 (416/444)

제416화. 가관 (5)

“…….”

흘러나온 사부님의 이름에 내가 묵묵부답으로 있는 사이.

명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검마라는 호칭이 불쾌할지도 모르겠는데, 달리 별호가 없으신 분이라 그리 지칭을 했으니. 이해해주시게.”

여기까지 온 판국에 내 사문을 숨길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백도에선 신승이, 진혈단에선 사겸이 알고 있는 사실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불쾌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무맥을 제가 이은 것도 맞습니다.”

그러자 명영은 마른 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랬군. 돌이켜보면 자네가 사용하는 그 피를 사용하는 무공….”

“혈조술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그렇구만. 자네의 혈조술은 단순히 친우인 독고철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엔 질이 달라 보였지. 그러고 보니, 혈마가 이따금 멈칫하던 모습들도 떠오르는군.”

“어째 지난 일을 되짚는 투신데… 격체전공을 해주시다 확신하셨나 보군요?”

“맞네. 처음만 해도 긴가민가했었지. 왜, 내가 무당에서 자네의 검을 봐주지 않았나? 자네의 무공은 패도적인 기상이 묻어나긴 해도, 모든 것을 품고자 하는 불가(佛家)의 따듯함이 느껴졌었거든.”

“…….”

“한데, 이번 일을 겪으며 확신하게 되었네. 자네의 무공은 마인들의 그것과 조금 닮아있다는 것을… 아무튼 격체전공 이후로 기력이 다해 쓰러졌는데, 사제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호들갑을 떨어서 이리 쉬게 되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이름이 떠오르더군.”

운을 뗀 명영은 계속해 말을 이었는데.

“위철진. 소림 출신으로 두타승에게 이어받은 무공을 정립해 천마신교의 뿌리가 되는 무공을 남긴 이가 말이야.”

그런 명영의 말에 사부님께서 무심코 한마디를 해오시는 때.

- …이 말코 녀석은 백 년도 더 된 이야기를 왜 지금 끄집어내는 것인가?

명영은 사부님과 곤륜논검을 벌였던 세 명 중, 한 사람의 도호를 입에 올렸다.

“무극검제. 공교롭게도 그분의 별호에서 딱 한 글자가 빠지면 내 별호가 되는데. 내게 조사님이 되는 그분은 자네가 무맥을 이은 위 대협의 행보를 막아섰던 이들 중 한 명이었지.”

“…….”

“무극검제께서 곤륜논검의 당사자이시다는 것 외의 내막은 모르네만… 후인인 내가 모르는 것 자체가 후세에 무용담으로 들려줄 법한 당당한 역사는 아니라는 이야기일 테지.”

명영의 어투에서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기에, 나는 그를 향해 질문했다.

“사죄를… 하시는 겁니까?”

하나, 명영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뭐라고 사죄를 하겠나? 내막을 알지 못하면서 하는 사죄에 알맹이가 있을 리 없거니와, 흘러간 물을 주워담을 수 없는 것 아니겠나. 다만 도가 통했음을 느꼈을 뿐이고. 그 도의 무거움을 느꼈을 뿐이야.”

그리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자네가 백도의 후기지수가 된 것처럼… 어쩌면 위철진이라는 검수도 검마라는 위명이 아닌 다른 이름을 역사에 새겼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되짚자면 끝도 없을 테지만. 옳지 않은 도를 좇은 결과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새삼 느꼈다네.”

그렇게 명영이 담담히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잠시.

그는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남은 말을 더했다.

“이건 사죄 같은 게 아닐세. 이 난세에 무극검이 필요하다 하였나? 내가 보기엔 나보단 자네가 필요해 보이네. 나는 그렇게 느꼈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주었을 뿐이야. 단지 그뿐일세.”

*    *    *

몸을 추스른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산혈해가 된 일대를 수습하는 일을 도왔다.

딸랑- 딸랑-

묻혀야 할 고향이 있는 백도의 망자들은 관(棺)으로, 그런 것을 알 수 없게 된 혈교의 망자들은 한 줌의 재로 돌려보내는 일을 마친 직후.

명영과 독고철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을 대표로, 우리는 경건하게 위령제를 올렸는데.

화륵-

화르륵-

마지막으로 망자에게 노잣돈으로 쥐여 보낼 지전을 사르는 것으로 혈교와의 싸움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을 때.

사겸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죽을 자리를 찾겠다는 각오로 진괴량과의 싸움에 임했는데, 불행히도 살아남고야 말았네. 이 싸움에서 살아남는다면 술 한잔 나누기로 했던 것 같은데. 괴룡도 그렇고 다들 어떠신가?”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곁에 있던 적수학사 손천정이었다.

“저를 따르던 교인들도 절반이 넘게 귀천했습니다. 맨정신으로 보내는 오늘 밤은 조금 울적할 성싶습니다만. 정작 나눠 마실 술이 없습니다. 술은 제례에 올린 저 한 병이 전부였습니다.”

뒤이어 독고철도 고개를 주억이며 한마디를 더했는데.

“진괴량과 그 무리가 이 땅에서도 패악질을 일삼은지라, 토착민들도 중원인이라면 치를 떨고 있어서 저 한 병도 망자에게 올릴 것이라는 말로 간신히 구하지 않았는가.”

듣고 있던 하오문주 목염약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있는데요? 진괴량은 조만간 창시선언을 하려 했었지요. 그때 쓰려고 했는지 미주들을 많이도 모아 뒀더군요.”

그리고는 본인의 뒤에 선 이들에게 손짓을 하니.

하오문도들이 그녀가 기거하던 막사에서 백자로 된 고급스러운 술동이들이 줄줄이 날라 왔는데.

모두가 그 광경을 보며 놀라는 때.

목염약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

“전사한 이들의 혼을 위무하는 자리에, 혈교인들의 술을 쓰는 것은 아닌 듯하여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살아남은 이들이 또 살아가기 위해 나누기엔 적합한 듯합니다.”

그녀에 뜻에 따라 하오문도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이 싸움에 참여한 이들 중 무위는 최약체였지만,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이들이었다.

“어부들! 자네들 어지간한 목수 흉내는 낼 수 있지?”

“식탁들을 짜 맞춰 내라는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그에 조촐한 술상이 금세 차려졌고.

사람들은 그 자리에 둘러앉아 하나둘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꼴꼴꼴꼴꼴-

떠난 이들을 기리는 자리였던 만큼.

흥겨운 잔치는 아니었다.

누군가는 친우였던 이의 이름을 부르며, 누군가는 멀찍이 보이는 강변을 향해 술 한잔을 치며.

그렇게 각자 앞에 놓인 술을 비워갔는데.

이때.

사겸이 명일을 향해 술동이를 들며 입을 열었다.

“무당의 도사들은 금주가 계율은 아닌 것으로 아는데… 술 한 잔 받으시겠소?”

“…….”

한데, 명일이 사겸의 말에 바로 답을 하지 않아 좌중에는 정적이 내리깔리고 말았다.

“…….”

“…….”

“…….”

급히 그 정적을 깨고 나선 건 무당오협의 막내 명한이었는데.

“크흠. 사겸 도우님이 제대로 알고 계신 게 맞습니다. 금주가 본문의 계율은 아닙니다만. 둘째 사형이 개인적으로 술 마시는 걸 꺼려하시는 지라….”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명일이 사겸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한 잔 나눕시다.”

“스스로 세운 계율이 있으시다면 억지로 권할 생각은 없소만.”

“아닙니다. 오늘 같은 날은. 곡차 한잔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백도와 마도로 갈리어 결코 만날 수 없는 양극단을 향해 달리던 이들이 등을 맞대어 살아남은 끝에 술잔을 맞댄다.

그 광경은 나로 하여금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는데.

나만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곁에서 같은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명영이 문득 빙그레 웃는 게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 번지는 미소에, 나는 다시 한 번 복잡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후배는 선배님의 내력을 받게 되는 바람에, 이제 강호에 나가면 무극검의 몫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게 생겼는데요?”

하여, 명영을 향해 그 마음을 가볍게 전했는데.

명영은 머금고 있던 웃음을 유지한 채.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런, 안 되었구만. 나는 덕분에 홀가분하다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그리할 걸 그랬어.”

명영 딴에는 부담을 갖지 말라는 뜻으로 나름의 농을 한 모양이었지만.

그 말속에 은퇴를 생각하는 듯한 의지가 묻어났기에,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홀가분하시다뇨. 저희 사이에 지각비가 남아있는데요.”

“…지각비?”

“예.”

“…자네가 세 번이나 농을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지각한 값을 치르라는 그 이야기가 설마 진심이었나?”

“예. 제 조부님이 산서금붕되십니다. 저는 돈 이야기는 허투루 하지 않죠. 세 번 모두 진심이었습니다.”

“……?”

“?”

그런 내 말에, 명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내 재산이라고 해봐야 바랑 하나와 이 송문검 한 자루가 전부이네만. 아, 벽곡단 정도는 빚을 수 있긴 한데… 얼마를 줘야 하는가?”

“선배님께서 늦으셔서 제 목숨이 위험했었으니. 제 목숨 값을 주셔야겠습니다. 제 목숨 값이 얼마겠습니까?”

“이거 보아하니. 내가 얼마를 말하든 천하에 자네가 필요하단 말의 값이 그것밖에 안 되냐고 하겠구만… 정말로 원하는 게 뭔가?”

“동도회에 간사로 들어와 주십시오. 선배님께서 해주실 일이 많습니다.”

내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명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리하겠네.”

그리고 진혈단과 동도회 그리고 하오문이 섞여 술을 나누는 광경을 다시금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이 광경만큼은 억만금을 주고도 못 볼 광경이로구만.”

그에 나도 주변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본디 이곳은 혈마를 신봉하는 마귀의 소굴로 여겨졌던 곳이었으나.

모든 싸움이 다 끝나고 보니, 산세는 웅장하고 숲은 울창했다.

거기에 굽이치는 물줄기가 더해져 수려하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풍광이었는데.

그 같은 풍경 속에, 같은 길을 걷기로 한 이들이 섞여가는 모습에.

“그러게요. 이 광경이야말로 가관(可觀)인 듯합니다.”

난 그를 따라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만겹산에서 북서쪽으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십만대산.

살을 에는 삭풍이 한참 몰아치는 이곳에 한 사내가 당도했으니.

다름 아닌 천마신교의 광명우사 백리구였다.

“오랜만이오. 좌사.”

본디 십만대산의 서쪽, 즉 대막의 태양궁과 천축의 뢰음사와의 관계를 관할해오던 그의 등장에.

혁련강을 대신해 만마전을 총괄하고 있던 광명좌사 변철영이 훑고 있던 서간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지금 우사가 여기 왔다는 것은… 혈교가 무너졌나 보군.”

변철영의 말에 백리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백도 놈들이 완전히 이겼소. 하오문이 불문율을 깨고 백도에 붙는 바람에 진괴량과 호법을 자처하던 놈의 가복들은 모두 죽음을 맞았다오.”

“크하하핫. 하오문에게 발목을 잡히다니. 교주님께 반기를 든 역적의 말로로는 퍽 어울리는 결과로구먼.”

백리구의 말에 변철영이 웃음 지을 수 있던 이유는, 혈교의 몰락이 천마신교에 있어 딱히 실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놈을 우리 손으로 처단치 못한 것은 아쉽지만. 놈이 비참하게 죽었으면 되었지. 덕분에 태양궁과 뢰음사와의 동맹은 굳건해지겠군.”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무너진다면 중원을 막아주는 방파제가 사라지는 꼴이니 그리되겠지. 안 그래도 마뇌가 그들과의 결속을 강화하러 갔다는 이야기를 전하러 온 참이요.”

“대치하고 있던 제갈척은?”

“제갈척이 이끄는 전력이 많지는 않기에, 천장산맥 너머로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합디다.”

그렇게 변철영의 질문에 답하던 백리구는 만마전에 자리한 본인의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번엔 본인이 질문을 했다.

“본단은 요즘 어떻소? 교주님께서 공자님들 중 소교주를 세우시려 한다는 보고야 들었소만? 윤곽이 나왔나?”

“큰 공자님과 막내 공자님 둘로 압축이 됐소.”

“흐음. 그렇다면 귀성팔족들도 정리가 됐겠군?”

“그렇소. 진괴량의 일로 진가가 바싹 엎드린 상태에서 남은 일곱 가문이 아귀다툼을 벌이던 형국이었는데. 둘째 공자의 세력이 몰락하며, 남은 다섯 가문이 숨을 고르고 있는 형국이오. 이제 혈교의 일이 전해질 테니, 더욱 그리되겠지.”

이어진 답에 백리구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직 그의 속내엔 다른 궁금증이 남아있었다.

그를 해소하기 위해 백리구는 재차 입을 열었는데.

“…그렇구만. 요즘 교주님은 어떻소? 지금 만나 뵙는 것이 가능하신가?”

“그건 불가능하오. 얼마 전에 여덟 번째 관문을 통과하시고 지금은 아홉 번째 관문에 들어계시오.”

이어진 변철영의 말에.

백리구의 몸이 절로 혁련강이 들어있을 비동을 향해 경건하게 숙여졌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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