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417화 (417/444)

제417화. 회자정리 (1)

혈마는 사라졌고.

조촐한 술자리를 끝으로 위령제도 끝을 맺었다.

거악(巨惡)에 대항하고자 정사마(正邪魔)가 동도란 이름으로 뭉쳤던 합종군이 해산할 때가 된 것이다.

“서둘러라! 갈 길이 멀다!”

“너희도 움직여라! 대두령이 나오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해!”

세 세력의 무인들이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채비를 시작한 때.

내 뜻에 따라 수뇌부들은 한데 모이게 되었는데.

“하연 님. 하오문에 지급할 금액에 폭약 값이 빠져있는 것 같은데요?”

“그건 문서로 남길 수는 없으니까요.”

“앗, 빠진 게 없나에만 몰두하다 보니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와중에 부산스레 주판을 튕기고 있는 은하연과 제갈설지의 모습에.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흐음. 저 둘은 내도록 저러고 있구나. 보아하니 돈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은데 괜찮은 것이냐? 위령제에서 보인 태도들로 미루어 짐작건대… 이런 싸움을 두고 목숨값을 매기는 일을 과연 달가워할까 싶은데?

‘사부님은 참….’

- 왜. 또 뭐.

‘은근히 협객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하려 했는데. 살짝 과민반응을 하십니다?’

- 네 녀석이 사부 알기를 동네북으로 아니 그렇지! 그리고 낯간지럽게 협객은 무슨 협객이냐?! 나는 네 녀석이 이따금 하는 말처럼 내키는 대로 살았을 뿐이야.

‘예. 사부님께서는 오롯이 본인의 의지로 검을 휘두르셨죠. 하지만 하오문도나 녹림도는 다릅니다. 저들은 모두 매검(賣劍)을 해본 이들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돈이라도 있는 게 낫다고 여길 겁니다. 진혈단원들도 마찬가지고요.

금전을 바라고자 나선 싸움이 아닌데다, 정사마가 섞여 있는 자리인지라.

구태여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을 뿐일 터였기에.

“언 공자. 다됐어요.”

은하연이 손에서 붓을 놓는 순간.

나는 주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함께 싸우던 이들의 면면이 여전히 아른거리는 상황에서, 돈이야기를 꺼내는 게 거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이야기이니 제가 나서겠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나는 도중광과 목염약 그리고 독고철을 차례차례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동도회엔 기금이 있습니다. 목숨값이란 것이 얼마를 내든 충분치는 않겠습니다만. 이번 싸움에서 전사한 이들 한분 한분을 휘상에서 표두가 순직했을 때 지불하는 금액으로 갈음해 보상금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은하연과 제갈설지를 가리킨 뒤.

“두 소저가 방금까지 정리하고 있던 게 그에 관한 서류입니다. 받아보시고 계산이 틀렸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시면 이야기를 주십시오.”

개방을 대표하고 있는 노삼과 타격대의 명태성을 응시하며 말을 맺었는데.

“아, 타격대는 무림맹의 규약이. 개방의 방도들은 방규가 따로 있기에 제외했습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주억이는 때.

작성된 서류의 검토를 끝낸 목염약이 미소를 띠며 답했다.

“과연, 괴룡의 명성엔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군요. 백도의 공자님이 떠올리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내주셨네요.”

이어 도중광도 입을 열었는데.

“확인했다. 별개로 할 말이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당분간은 백도의 무림인들이 녹림채를 토벌하겠다고 각을 세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이번 일을 공 삼아 횡포를 부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통행세로 염병을 떨지 못하도록 휘하 채주들에게 단단히 일러 놓을 것이다.”

그는 말하는 중 다른 화두 하나를 끄집어냈다.

“알겠지만 녹림은 마교 놈들이 침투하기에 너무도 취약한 구조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도련주에게 따로 허락을 구한 상황은 아니라. 아마 그 친구도 눈을 벌겋게 뜨고 있을 테니. 조금 더 확실한 평화가 필요할 성싶다.”

그 제안에 답한 건 아버지였다,

“그건 이 언정웅이 확언을 드리겠습니다. 응당 필요한 조치이니, 동도회와 백본회의 동의를 받아내도록 하겠습니다.”

*    *    *

아버지의 답이 흡족했던 모양인지, 도중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가 도중광의 이야기 속에 섞여 있던 이름 하나를 끄집어낸 건 이때였다.

“말씀이 나온 김에 사도련주, 동정총호 백광호의 이야기를 조금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도중광과 목염약이 차례로 팔짱을 꼈는데.

“흠. 사도련의 문제는 되레 네가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만?”

목염약의 의견은 도중광과는 달랐다.

“이미 저희가 련주님과 상의도 없이 전력을 움직인 상황이니. 여기서 백도 무림이 더 엮이면 역효과가 날 수 있겠지요. 그걸 괴룡이 모르지 않을 텐데,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설마… 패룡도의 건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사도련주의 신표인 패룡도를 찾아주었던 일과 거기에 새겨진 용 조각의 눈알 하나를 빼돌린 일을 말했다.

그러자, 도중광이 입을 쩍 벌렸다.

“네 녀석의 간덩이는 알면 알수록 더 커지는 느낌이로구나.”

피식 웃어 보인 나는 곧이어 본론을 전했는데.

“그간 학관의 비고에 그걸 보관해왔는데. 반을 잘라서 두 분께 드리면 도움이 되겠습니까?”

잠시 고민을 하던 도중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건 가르는 순간 의미나 가치가 떨어진다. 나는 안 받겠다. 어차피 은퇴할 몸이니 녹림으로 향하는 화살은 내가 책임지면 될 일. 딸린 식구가 많은 하오문주가 받던지 하시오.”

그러자, 목염약이 도중광과 나를 향해 꾸벅 포권을 취해왔는데.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과례에 답하기 위해, 내가 포권을 취하니.

목염약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빙긋 웃었다.

“하하. 그나저나 괴룡은 정말로 탐이 나네요. 하북권웅이 계시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가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하북의 기녀들 중에 조금 저돌적인 아이가 있었다면, 괴룡이 본녀의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을까요?”

그에 아버지와 나는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는데.

“…….”

“…….”

도중광은 목염약을 향해 크게 혀를 차더니.

“흰소리는 그쯤 하시오. 목 문주.”

노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늙은 거지. 이번에는 꼭 약속을 지켜야 할거요.”

“금분세수를 말하는 거면, 그건 맹주랑 이야기해야지. 애초에 처음에도 나는 전해만 준다고 하지 않았냐?”

“흥. 뭐, 그럼 나눌 이야기는 다 끝난 듯하니… 우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소.”

그리고는 몸을 일으켰는데.

동시에 남궁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녹림산장까지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런 남궁윤의 말에, 도중광은 미간을 좁혔다.

“엥. 필요 없다 너 같은 놈.”

하나, 남궁윤은 지지 않고 입을 열었고.

“큰 부상을 당하시지 않았습니까?”

곁에 있던 당옥기도 한마디를 더했다.

“녹림왕 아저씨. 그거 작은 부상 아니에요. 제가 잘 꿰매놓긴 했는데. 무리하면 상처가 터질 거예요. 지금 사도련주도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상황이라면서요?”

그 말에 도중광은 말려달라는 듯 난처한 기색으로 나를 응시했는데.

“거… 이번엔 어쩌다 아귀가 맞았지만. 흑도와 백도가 붙어 다녀봐야 양쪽 모두에 좋을 게 없다니까 그러네.”

내가 묵묵부답으로 있는 사이, 남궁윤은 도중광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거창하게 여럿을 이끌고 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냥 저 혼자 다녀오겠다는 겁니다. 의복만 갈아입어도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나를 응시해왔다.

“언용운. 네 덕에 세상을 달리 보게 되었으나. 이번 싸움으로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 선배의 안전을 기할 겸, 흑도의 삶을 조금 더 눈에 담아보고 싶다.”

고고히 세상을 내려다보기만 하던 남궁윤.

그랬던 녀석이 흑도의 삶 안으로 들어가보겠다고 말하는 건, 괄목할 만한 모습이었다.

‘…눈동자가 깊어졌다 싶더니. 무언가 심경에 변화가 있었나 보네.’

학관으로 돌아가면 산재한 일들이 있을 테지만, 녀석 한 명 정도야 괜찮을 테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    *    *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막상 따라나서는 남궁윤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모양인지.

도중광은 남궁윤을 향해 이런저런 조언을 건네며 막사를 떠났다.

“하여간에. 이래서 백도 녀석들이랑 연이 깊어지면 귀찮단 말이야. 함께 갈 거면 그 귀티 나는 면상부터 어떻게 해라.”

이어서 목염약도 하오문도들을 이끌고 나갔다.

“하면 천녀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본문의 정보가 필요하시걸랑 두둑한 전낭과 함께 가까운 객점을 찾아주시길.”

그렇게 흑도의 두 일파가 떠나가고 나니.

막사엔 백도의 어른들과 진혈단만 남게 되었는데.

이때.

사겸이 좌중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읍을 해왔다.

“이 싸움이 끝나면 진괴량의 대주교로 살아온 나날에 대한 죗값을 치르기로 하였지. 내 몸에 말라붙은 피비린내가 지독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소. 무엇이든 따르겠소. 함거에 타 돌팔매를 감당하라 하면 그리할 것이고. 낙양에서 마두로 죽는다고 해도 따를 것이오.”

그 말에, 장내에 정적이 내리깔리길 잠시.

무당오협의 맏이, 무극검 명영이 무겁게 입술을 뗐다.

“안 그래도 괴룡이 그 이야기를 했었소. 하여, 모두가 전장을 수습하는 며칠간 쭉 고민해보았지. 이보시오, 사 단주.”

“…말씀하시오.”

“그 손에 묻은 피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소. 그대를 참한다고 하여 그네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닐 터. 진괴량의 잔당들을 진혈단을 매개로 꾸려내시오. 그리하여 짊어진 살업(殺業)을 눌러 내는 날까지 활인(活人)의 도를 걷도록 하시오.”

그리고 둘째인 명일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용서를 하는 것은 아니오. 손에 묻혀온 피를 짊어지시오. 그 마음을 잊는다면 무당의 검이 그대들을 찾아갈 것이오.”

그에 사겸이 다시 한번 무겁게 포권을 취하자.

무당오협 역시 포권을 취했는데.

그중 명한이 나와 정현을 차례로 응시하며 입을 열더니.

“하면 우리도 짐을 싸러 나가 보겠습니다. 정현, 너는 괴룡과 남은 볼일이 있지?”

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막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무당오협을 따라 아버지를 비롯한 백도의 어른들도 몸을 일으켜 나갔고.

진혈단에서도 사겸과 손천정이 꾸벅 포권을 취하고 밖으로 나갔다.

덕분에 막사 안에 언동생들만 남게 되자, 독고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회장님의 역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합니다. 심력이 모조리 빨려 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그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으니.

언용명이 입을 열었다.

“이제 진혈단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혈교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에 천장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는데.

“그럼 진괴량이 생각나는 혈(血)자를 떼어버리고 기치인 혈염천하에서 따와서… 염천교. 어떨까요?”

“…진지한 거지 지금?”

“그럼요.”

“구려.”

내가 녀석의 의견을 일축하는 때.

독고철이 재차 입을 열었다.

“…실은 제가 생각해둔 것이 하나 있긴 합니다.”

“오호. 차기 교주님이라 이거야? 뭔데? 이야기해봐.”

“차기 교주… 저는 사실 종교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몸입니다. 회장님처럼 강력한 지도력이 있지도 않고, 경륜도 짧으며, 누군가를 이끌고 일깨울만한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습니다.”

“흠. 일단 계속해봐.”

“화해의 상징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회장님의 흉내를 조금 내보긴 했으나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고. 또….”

“또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가능하다면 언제고 독고세가로 돌아가야 하는 몸입니다.”

“가능하다면 같은 사족은 왜 붙이냐. 무조건 가능한 일인데.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준다.”

“…하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회장님께서 이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도로 통하는 길만 봉하면 저희가 걷게 된 길 또한 버팀목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여 초개회(草芥會)란 이름을 생각해봤습니다.”

나는 녀석이 한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는데.

“회는… 교가 버겁다고 했으니. 언제고 마땅한 후임자가 생기면 내려놓을 수 있는 조직이니 일리가 있긴 한데… 초개면 지푸라기 아니냐?”

“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이들을 마다치 않겠다는 뜻이고. 그런 길을 위해 초개같이 몸을 던지겠다. 뭐, 그런 뜻입니다.”

이어진 말에, 우소릉과 은하성이 입을 쩍 벌리는 때.

“…처, 철이가 뭔가 확 멀어진 느낌이에요. 제가 선밴데.”

“…그냥 멀어진 게 아니라. 뭔가 용운 형님을 빼다 박은 느낌이야. 저 귀면옹 가면에 뭐가 있나? 나도 써볼까?”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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