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8화. 회자정리 (2)
목염약은 하오문도를, 도중광은 녹림도를 이끌고 떠났고.
진혈단이 나아갈 길에 대한 의논도 마쳤다.
“다들 채비는 끝나셨습니까?!”
그리고 단강구로 돌아갈 이들도 복귀 준비가 끝났음을 말해왔다.
“타격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내 놓았네.”
“저희도 끝났어요. 언 공자.”
“우리는 바랑 한 개씩과 송문검 한 자루씩이 짐의 전부인지라. 뭐 채비랄 것이 없다네.”
기실 만겹산에서 매듭을 지어야 할 일은 다 끝난 것이라 봐도 무방했으나.
그렇다고 모든 걱정거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걱정거리 중 하나로 시선을 옮겼다.
‘혈천수라궁.’
진괴량과 놈의 추종자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본단으로 삼으려던 성채는 버젓이 남아 있었다.
난공불락의 요새인 저곳을, 흑심을 품은 누군가가 차지하게 두어선 안 됐다.
‘그랬다간. 지금까지의 고생이 무용지물이지.’
그리고 혈교가 똬리를 틀며 최악으로 치달은 이 지방의 민심을 회복하는 일도 필요했다.
하여, 동도회의 일원 중엔 개방의 거지들이 남기로 했는데.
“…….”
내가 잠시 혈천수라궁의 성채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있자.
거지들을 통솔하기 위해 남기로 한 노삼이 헛기침을 해왔다.
“에헴. 이곳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래 봬도 이런 일을 수습하는 것엔 일가견이 있다. 해적 두목 놈이랑 이래저래 맞춰가며 잘 단속해놓도록 하마.”
그렇게 운을 뗀 노삼이 본인의 걱정거리를 털어놓으려는 때.
“그나저나. 나는 학관이 걱정이구나. 졸업생도 챙겨야 하고 신입생도 받아야 하니. 청죽의 사감인 내가 딱 자리하고 있어야….”
천장호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참나. 언제부터 그렇게 학관 걱정을 하셨다고? 만날 뒹굴뒹굴하시다가 작풍월개 소리까지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용운이 들어오고 나서는 열심히 했어!”
“에이. 열심히라는 말은 용운 형이나 하연 누님 정도 돼야 할 수 있죠. 장로님 없어도 잘만 굴러갈걸요?”
노삼은 순식간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는 천장호를 향해 발길질을 시작했다.
“악!”
“네 눈엔 그래 보여도 나름 하는 일 많았어! 에라 거지새끼야!”
“아악! 본인도 거지시면서! 그리고 많으면 많고 적으면 적은 거지 나름 많은 건 뭡니까!?”
“나한테 잔소리 듣기 싫어서 운매관으로 내뺀 자식이 말이 많아!”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번지길 잠시.
사겸은 독고철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단주님.”
혈교의 대주교에서 진혈단원이 되었다가 이젠 초개회의 부회주가 된 사겸이었으나.
아직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았는지 ‘단주’ 소리가 나왔는데.
그 말에 적수학사 손천정이 바로 입을 열었다.
“이제 회주님이라고 하셔야죠. 이름에도 힘이 있습니다.”
“…아. 그렇지 참.”
그런 사겸을 향해 독고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회주님. 초개회가 제대로 걸음마를 시작하려면 초석부터 단단히 해야 합니다. 막중한 임무를 남기고 갑니다. 이곳을 잘 부탁드립니다.”
“때마다 연통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강호에서 초개회를 인정받아야 하는 역할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음을 굳게 먹으십시오.”
“예.”
그렇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의 시선은 동시에 나를 향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한마디를 전한 뒤.
“어려운 것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연락하십시오.”
복귀 행렬의 통솔자인 명영을 향해 출발해도 될 것 같다는 눈빛을 전했다.
그러자, 명영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는 법. 같은 도를 좇다 보면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이제 떠날 사람들은 떠납시다.”
* * *
복귀 여정은 살아남은 이들이 터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걸음이기도 했지만.
망자들에게 묻힐 자리를 찾아주기 위한 여정이기도 했다.
하여, 나는 명영이 배웅을 나온 사람들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전할 때.
곧바로 언령을 내뱉었다.
“일어나라!”
그에 상단전을 통해 뻗어나간 기운이 전사자들을 일으켜 세웠는데.
쿵! 쿵! 쿵! 쿵!
그네들과 함께 우리의 북상이 막 시작된 때.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네 아비의 눈에 물기가 어린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착각이 아니신 것 같은데요.’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는데.
그 바람에 눈이 마주치자 아버지는 묻지도 않은 말씀을 해오셨다.
“크흠. 누, 눈에 뭐가 들어갔나.”
하나, 태생적으로 거짓말이 익숙지 않은 분이셨던 터라 이내 곧 따지지도 않은 진실을 실토해 오셨다.
“…만감이 교차해서 그런다. 원래 강시술은 전사자들을 가족과 고향의 품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연구가 되었지.”
“…….”
“용운이 네 덕에, 우리 가문의 강시종이 되살아나 저들에게 고향을 찾아줄 수 있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는구나.”
기실 내가 사용하는 사령술은 진주언가의 강시종과는 궤가 달랐지만.
구태여 진실을 들려드릴 필요는 없겠다 싶어 가만히 있었는데.
이때, 아버지가 한 말 중 이상한 부분에 꽂힌 팽소천이 입을 열었다.
“그래. 요즘 언가장에 용운이 네 덕분인 일이 많다. 누님이랑 용명이랑 장호랑 진주에 갔다가 봤는데. 문턱이 닳도록 찾는 사람들이 많더라!”
그 말에 팽소진은 이마를 싸쥐었다.
“바보야.”
“만날 돼지라고 하시더니 이젠 바보입니까.”
“바보 같은 소리를 하니까 바보라고 하지. 언가장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야. 안 그러니 용명아?”
“…모두가 순수한 목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 숙부님은 심지가 곧고 숙모님은 현명하시니 잘 대처하고 계시지만 힘든 일이야.”
이때.
아버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런 일로 힘들다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일이 어쩌다 이리되었나 신기하고. 작은 법을 세우려다 용운이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일이 미안할 뿐이지.”
그 말에 섞여 있는 짙은 후회에, 되레 내 마음속에도 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끙. 당시엔 그 길이 정말로 최선이었는데. 아버지 마음은 또 그게 아니신가 보네.’
어느새 정말로 저 사람의 아들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저를 쫓아낸 일이 아직 마음에 맺혀계신다면 털어버리세요. 그런 단호함이 있었기에 진주언가가 부침을 겪어오면서도 버텨낸 거고, 그 덕에 이런 날도 있을 수 있는 거니까요.”
“…….”
그런 내 말에 잠시 묵묵부답으로 있으시던 아버지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크흠. 아. 그건 그렇고. 아까 소천이가 말한 진주언가를 찾는 이들 중에 강시종을 배우고 싶다는 후기지수들이 더러 있더구나?”
막상 그렇게 나온 이야기가 흘려듣기 힘든 이야기였기에.
나는 약간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정말로 진주언가의 강시술이 복원이 되려면 후학 양성도 중요하겠지요. 한데, 저는 그냥 할 수 있게 된 거고, 그 방도를 정립해 놓지도 않았습니다. 아직은 남을 가르칠 주제가 되지 못합니다.”
“하기야 본인이 사용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본디 다른 법이지.”
“예. 모산파의 도사들과 함께 연구를 하고 있긴 한데… 상단전을 사용할 수 있는 체질의 확인과 기초적인 술법은 학관에서 가르쳐주니. 그런 녀석들이 찾아오면 정무학관의 입관시험을 준비하라고 해주십시오.”
* * *
아버지, 무당오협, 타격대.
거기다 나름대로 이름을 알린 나와 언동생들이 함께 하는 행렬인데다, 휘하의 채주들을 단속하겠다던 도중광의 말이 퍼져나간 것인지.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그에 순조롭게 육로를 지나 장강으로 통하는 지류에 선단을 띄우게 되었는데.
우리를 실은 배가 물살을 가르길 한참.
마침내 장강의 본류에 합류하게 되었을 때.
호루우우욱!!
선두에서 하얀 매를 앞세운 채. 물살을 갈라오는 쾌선 한 척이 보였다.
사천방면에서 오는 게 분명한 쾌선의 등장에 우소릉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언 형! 응용이에요! 동도회주님이 오시나 봐요!”
“나도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응용이가 내려앉아 뽐을 내듯 턱을 들어 올렸다.
호루우욱!!!
“너도 고생했다.”
호룩?
“맨입이냐고? 알았다. 알았어. 누구 아무나 육포 가진 것 좀 줘봐.”
그렇게 응용이 녀석을 맞아주기를 잠시.
뒤따르던 쾌선이 우리 선단에 합류하더니, 제갈척이 이쪽의 기함으로 건너왔다.
“다들 고생이 많았는지 얼굴이 반쪽들이 됐구만.”
그렇게 건너온 제갈척은 기함에 타고 있던 이들의 면면을 쭈욱 훑으며 인사치레를 건넸다.
한데, 나와 명영에 이르러서는 잠시 말을 멈췄다.
“…….”
아무래도 단박에 명영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아챈 모양이었는데.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던 제갈척은 이내 곧 명영을 응시하며 농담조로 혀를 찼다.
“…나나 남궁가의 영감탱이도 늙은 몸을 이끌고 다시 강호에 나왔거늘. 자네는 한참 젊은 친구가 벌써 은퇴하려고 꾀를 부렸구먼.”
잘했다고 하기도, 왜 그랬냐 하기도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특유의 화법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이었는데.
명영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더니.
“하하.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은퇴는 아닙니다. 괴룡이 동도회의 일을 좀 봐달라고 하더군요.”
내가 지각비를 명목으로 삼아 본인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더라며 일종의 고자질을 했다.
“…글쎄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즘 장강의 뒷물결은 참으로 무서운 듯합니다.”
하나 제갈척은 되레 반색하며 내 어깨를 두드려왔다.
“내 진즉에 알아봤지만. 아주 물건이야 물건.”
그리고는 내 귓가에 한마디 말을 속삭여 왔는데.
“…아주 잘했다. 대저 다 말랐다고 생각되는 오징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오는 법. 저만한 위인을 놀려서야 강호의 손실이지.”
“그렇죠. 그렇죠. 또 붙어있다 보면 검을 향한 갈망도 생기실 거고요?”
“암. 암.”
“으흐흐흐.”
“후후후후”
그런 우리의 모습에.
당옥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고.
“…진짜. 친손자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꿍꿍이가 맞네. 설지 너보다 언용운 쪽이 더 손자 같아.”
이어서 은하성과 사부님도 한마디씩을 더했는데.
“분위기만 보면 그야말로 악당들이 따로 없습니다.”
- 하성이 녀석에게 ‘천하의’가 빠졌다는 말 좀 전해주거라.
나는 그런 말들을 못 들은 척하며, 제갈척을 향해 질문했다.
“해서, 마뇌랑은 어찌 되신 겁니까?”
“늙은 대머리 놈이 자신이 없는지 결착을 보지 않고 내내 대치만 하다가 내빼더구나. 천장 산맥 너머로 내빼길래 나는 돌아오는 길이다.”
그 말에 제갈설지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이상 들어가기엔 전력이 부족했죠.”
“오냐. 더 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남만야수궁에 갔을 적에, 뢰음사와 태양궁이 천마신교의 편인 것을 확인했으니. 그들의 강역에 발을 들일 이유가 없지.”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십만대산이 있는 서북을 향해 옮겨갔다.
“그렇군요. 혈교가 망한 반동으로 그들의 사이는 굳어지겠네요.”
“그럴 테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지를 살펴봐야겠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승자의 여유에 취해선 아니 될 것이야.”
* * *
정무학관의 총장 경혜.
생도들을 만겹산으로 보내놓고 내내 노심초사를 하던 그녀는, 언용운의 행렬이 단강구의 어귀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자마자 정문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별일 없이 도착해야 할 것인데.”
마음 같아선 멀찍이 마중을 나가고 싶었던 그녀였으나.
단강구엔 혈교를 토벌한 젊은 영웅들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인파와, 입관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일찍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후기지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하여, 정문의 뒤편에서 서성이고만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곁엔 운매관의 사감인 팽무혁과, 윤국관의 사감인 제갈민.
그리고 곤륜에 갔다 돌아온 공손무결과 창량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팽무혁이었다.
“입관시험 준비를 한다고 경황이 없어놔서 이제 인사드리는데, 맹주님과 창량 교수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말에 창량은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답했고.
“우리가 한 고생을 고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 공손무결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는데.
“창량 교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토벌조가 애를 썼지요. 특히나 용운이 녀석은 아주 세간에서 차기 무림맹주라고 여기더군요. 허허허.”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제갈민이 한마디 말을 전하는 때.
“언용운 생도를 비롯한 토벌조들이 대공을 세운 것과 별개로 맹주님과 창량 교수님. 그리고 혜아의 공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 이번 쾌거는 천마신교를 누르는 비수가 있어 가능했던 계획이었으니까요.”
경혜는 생도들이 복귀할 대로를 응시하며 걱정거리를 입에 담았는데.
“빈니는 독고철 생도가 걱정입니다. 진혈단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는데… 독고철 생도의 심지가 곧아 보이긴 했습니다만. 세인들이 과연 마인과 다르게 보아줄지가 걱정이군요.”
이 순간.
단강구가 떠나가라 함성이 들려왔다.
“괴룡이다! 괴룡!”
“신진제일협이 돌아왔다!!”
언용운의 무리가 환호 속에 복귀한 지 이틀.
이틀간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여독을 털어낸 언용운과 언동생들은.
만겹산에서 이를 악물고 뛰어다니던 게 언제냐는 듯, 바쁘게 다가올 학사일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오늘 교수님들이 입관시험에 출제할 진법 모의시험을 치른다고 들었는데, 진법석이 왜 이거밖에 없어?”
“제가 가서 챙기겠습니다.”
“철이 네가? 음. 마침 네가 하던 일이 없긴 하네. 그래 네가 가서 좀 챙겨라.”
그 와중에 경혜사태의 우려가 묘한 형태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헉! 귀면옹께서 나를 보셨어!”
“네가 들고 있는 진법석을 보신 거야.”
“아니. 날 선택하셨어. 괴룡과 함께하는 협의지사의 길에 날 데려가실 거야!”
그에 독고철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말았다.
‘…부끄러움에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