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1화. 직시 (2)
혁련일은 천마신교의 당대 교주 혁련강의 장자였다.
하여, 십만대산 일대에선 대공자로 떠받들어져 왔다.
‘나를 알아봐?’
하나, 그가 중원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알아본 백광호의 눈썰미에, 혁련일은 자신을 수행한 노마두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내사. 본교의 대표로 내가 나설 것이라는 이야기를 백광호에게 전했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동맹을 위해 사람을 보내겠다고 전했을 뿐. 대공자께서 친림한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련의 수뇌부와 하오문과의 관계가 냉랭한 지금, 혁련일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백광호 개인의 눈치와 정보수집 능력이 상당하다는 결론이었는데.
‘…쓰레기들의 집합일지라도 거르고 걸러져 꼭대기에 앉게 된 자는 수완이 있다 이거군.’
그렇게 혁련일이 생각을 곱씹는 때.
백광호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분위기를 보니 맞나보군.”
“맞습니다. 제가 교주님의 장남 혁련일입니다.”
“백광호요.”
가벼운 통성명 끝에 입을 연 이는 혁련일이었다.
“방금은 실례했습니다. 기실 강호초출이나 다름없는 이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시기에, 사도련의 저력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 깨달아 멍하니 있게 되었습니다.”
“저력이랄 것까지야. 천마신교가 이래저래 홍역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어쭙잖은 위인을 내게 보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을 뿐이오.”
“그렇다면 련주님께 혜안이 있으신 것이로군요.”
“그렇지도 않소. 실은 막내 공자 정도가 올 줄 알았지.”
그러다 나온 천마신교의 막내공자 이야기에 혁련일의 표정이 묘하게 굳는 때.
백광호는 피식 웃으며 남은 말을 이었다.
“십만대산의 동향을 주목하는 건 백도무림 뿐만이 아니오. 흑도로 살아남으려면 귀가 밝아야 하는지라, 구체적으론 몰라도 나도 대략 돌아가는 사정은 알고 있소.”
“…….”
“소교주 위를 결정하는 일. 대공자가 유리한 상황 아닌가?”
“…하하. 소교주를 세우는 일은 유불리랄 게 없습니다. 그저 교주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아, 불쾌해하지는 마시오. 우리는 단순무식해서 ‘그래서 누가 이길까?’ 하는 생각만 하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간 것이니.”
“예. 불쾌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사정이 급한 막내공자 쪽에서 동맹을 구하고자 이 사람을 찾는가 했소만. 대공자가 직접 오다니… 본인에게 유리한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굳히고자 하는 모양이구려?”
그렇게 이어진 말에, 혁련일은 머금고 있던 의례용 웃음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사도련과의 동맹을 쟁취해 돌아가면 제 입지는 더더욱 공고해지겠지요. 눈썰미도 좋고 이해도 빠르시니, 이야기가 쉽겠습니다. 천하의 상황도 이와 비슷합니다.”
“천하?”
“툭 까놓고 말해서 본교의 계획은 많이 어그러졌습니다. 백도 무림의 아성이 공고해진 것이 사실이지요. 이대로 놈들이 승기를 굳히면 어떻게 될까요?”
“…천마신교가 무너지면 다음은 우리라는 이야기인가?”
“역시 이해가 빠르십니다. 흑과 백은 결국 섞일 수가 없습니다. 본교라는 대적자가 사라지면 저들의 칼날은 반드시 련주님을 향할 겁니다.”
“…….”
“본교의 승리가 사도련에도 이득이라는 궤변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본교와 흑도 그리고 백도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상황이 유지되는 것은 분명 사도련의 이득 아니겠습니까?”
묵묵히 혁련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광호가 물음을 던진 건 이때였는데.
“그래서?”
“우선 본교의 영약과 신공들을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돌아온 물음에 백광호는 콧방귀를 끼며 답했다.
“흥. 딱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닌데? 나름대로 내 한 몸 건사할 재주는 있거니와, 그것들엔 부작용이 있잖소? 그 부작용을… 숙주를 잠식하는 기생충처럼 활용하는 천마신교의 수법도 익히 알고 있고.”
그러자 혁련일을 수행하던 노마두가 까득 이를 갈며 기도를 드러냈다.
“뭐라? 지금 본교를 두고 기생충이라 하였느냐?”
채채채채챙!
그에, 백광호의 수하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드는 때.
“내사!”
혁련일이 노마두를 향해 눈초리를 보내며 말했다.
“사도련주께서 막내 이야기를 들먹이실 적에 미리 어투가 투박하다고 양해를 구하셨거늘, 어찌 경솔하게 행동을 하는가!”
그에, 노마두가 즉시 선창에 머리를 찧었고.
“송구합니다.”
백광호는 수하들을 향해 병장기를 거두라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실언을 하긴 했소. 하나, 대공자의 제안이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오.”
“본교의 연단술과 무공에 대해 의혹을 품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꼭 본인이 취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그렇게 운을 뗀 혁련일은 재차 말했는데.
“본교의 비술들이 의심이 된다면 휘하에 조직을 하나 만드시고 그들에게 지급하여 련주님의 전력으로 삼으시면 될 텐데요? 그리고 저는 우선적으로 드리는 제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나? 하면, 다음 제안까지 들어보기로 하지.”
묘한 태도로 모든 패를 까보도록 만드는 백광호의 행동에.
혁련일은 마른 웃음을 지었다.
‘동정호에 웅크린 호랑이라는 별호가 딱 맞군.’
천마신교의 대공자로 살아온 혁련일으로서는 그런 백광호의 태도가 고깝기 그지없었으나.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천마신교였다.
하여, 혁련일은 머금고 있던 웃음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천하 수운의 주인이 되게 해드리겠습니다. 본교가 십만대산에 처박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초대 천마님의 유지(遺志) 덕분에 천하의 물길과 호수들은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무슨 유지이길래?”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아무튼, 물길과 호수 곳곳에 자리한 진채들의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손을 잡고 있는 수적단과 해적단 그리고 수로채와 강상(江商)들도 넘겨드리겠습니다.”
“거기다 내 세력을 합치면… 천하 수운의 주인이란 말도 과언이 아니긴 하겠군. 그래서 내게 바라는 것은?”
“녹림과 하오문이 이번과 같이 움직이는 일이 없도록 엄히 단속해 주십시오.”
“부탁은 그것뿐이오?”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와 백도 무림이 싸우게 된다면 아마 저들의 침공으로 시작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때 백도 놈들의 등 뒤에서 비수가 되어주십시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백광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하지. 동맹.”
“좋습니다.”
“동맹 발효 시점은 내가 하오문과 녹림을 단죄하는 때겠지?”
“예. 그 소식이 들려오면 사람을 보내 약속한 것을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약과 무공은 그때까지 고민해보십시오.”
“그러지. 손님 가신다. 길을 터줘라.”
혁련일은 타고 온 배에 올라 유유히 멀어져 갔는데.
백광호가 그 모습을 보며 콧방귀를 끼고 있는 때.
“흥.”
민머리의 옆통수에 화상흔이 선명한 사도련의 우군총사, 순우욱이 입을 열었다.
“마교의 대공자를 썩 달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신 듯합니다.”
“오만하더군.”
“꼬박꼬박 존대를 하지 않았습니까?”
“말투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야. 아주 소교주 경쟁에서 본인이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더군. 백도와의 싸움만 논하다 가다니…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지, 제 아비가 손바닥을 뒤집으면 끝나는 것인데 말이야.”
“한데, 왜 손을 잡기로 하셨습니까?”
“저자가 한 말 자체는 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딱히 손해 보는 건 아니니까. 하오문과 녹림에 대한 단속은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잖나?”
“그건 그렇습니다.”
“그걸 빼면 백도 놈들의 등 뒤를 노려달라는 건데, 그건 나중의 일이다. 그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모르는 법이고. 흑도의 약속이란 서로 간의 이해득실이 달라지면 뒤집힐 수도 있는 것이니까.”
백광호는 말하며 정무학관이 있는 방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소매 춤에서 녹옥(綠玉)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 녹옥은 본디 언용운이 빼갔다가 하오문을 통해 돌려준 패룡도의 용안이었다.
‘아울러 언용운. 그 녀석이 어찌 나올지도 볼 수 있겠지.’
* * *
나와 언동생들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바빴는데, 갑작스레 입관시험의 종목 하나가 늘어난 상황이었고.
마방연에 사령술사를 길러내기 위한 부서가 새롭게 설치된 참이었으니까.
“상단전을 이용해 내력을 사용하는 방식은 몸 안에서 내력을 돌리는 일과는 전혀 다르다! 상단전은 연다는 생각으로! 내력은 실을 직조해 낸다는 생각으로 짜내야 하는 것이다!”
하여,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때.
우소릉이 손에 서신 한 장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언 형! 남궁 형이! 남궁 형이!”
남궁윤.
녹림산장에 도중광을 데려다 주고 오겠다던 녀석은, 한참 전에 돌아오고도 남았을 시간에도 연락 한번이 없었다.
하여, 우소릉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을 때.
나는 영환에게 입문생들을 맡겼다.
“교수님. 오늘 오후 교육은 모산에 맡겨도 괜찮겠습니까?”
“알겠네.”
그리고 우소릉에게 손을 뻗어 서신을 낚아챈 뒤.
“이리 내봐.”
“여기요!”
학생회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는데.
그런 내게 사부님께서 한마디를 해오셨다.
- 다른 녀석들이 걱정할 때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더니. 막상 용운이 너도 걱정을 하긴 했던 모양이로구나?
‘지금 궁윤이 이 자식이 저희가 모여서 회의를 할 때마다 반다경 정도씩 잡아먹는 주제였는데. 합당한 이유 없이 연락 한번 없었던 거면… 진심을 다해 쥐어박고 싶긴 하네요. 이것도 걱정의 일종일까요?’
- …글쎄다?
그렇게 학생회실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언동생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남궁윤에게서 온 서신을 펼쳐 들었다.
『진즉에 연락을 취하려 하였으나, 사정이 좀 있었다.
대군사님의 배려로 약왕 어르신을 만나게 된 게 그 사정인데, 자칫 치료를 받는 곳이 노출될 수가 있을 듯하여, 연락할 수가 없었다.
선배님의 치료는 잘되었고 이제야 녹림산장에 도착해 이렇게 붓을 드는데.
한 가지 하고 싶은 부탁이 있다.
이번 여정에서 여러모로 배우는 게 많은데, 내가 휴학을 하는 것이 너희들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더 이 배움을 이어나가고 싶다.
추신. 도중광 선배 곁에 내가 붙어있으면 이분의 은퇴를 조금 미뤄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 너희들의 벗 남궁윤.』
함께 서신을 확인한 이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당옥기였는데.
“그냥 남궁윤이라고 쓰면 되지, 그 앞에 오글거리게 너희들의 벗 소리는 왜 써놓은 거야.”
그 말에 제갈설지가 서신의 마지막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내는 때.
“심지어 그 글자 앞에 먹물이 살짝 튀어있고, 필체도 묘하게 헝클어진 게… 음. 본인도 고민한 느낌이야.”
“가만 보면 궁윤이 얘가 제일 웃겨.”
나는 남궁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랑 영이 네가 편지 한 통씩 써야겠다.”
그러자 녀석은 질색했고.
“엑. 제가요? 오라버니한테요?”
천장호와 팽씨 남매가 연이어 입을 여는 때.
“진심으로 싫다는 표정이네… 친남매 맞나.”
“저 반응이야말로 진짜 친남매란 뜻이지. 나도 돼지 싫은데?”
“저는 누님 좋은데요!”
나는 손뼉을 쳐 주위를 환기하며 말했다.
“궁윤이한테는 내가 쓸 테니까. 영이 너는 남궁세가에 쓴다. 궁윤이가 폐관수련 들어갔다고 공표해달라고 보내.”
“아. 그렇게 하면 녹림산장 쪽에 괜히 날파리들이 꼬이는 일이 없어지겠군요. 바로 쓰겠습니다!”
그렇게 나와 남궁영이 붓을 들자, 은하연이 내 쪽으로 다가와 질문했다.
“언 공자는 뭐라고 쓰시려고요?”
“백광호는 반드시 움직일 거요. 아울러 소교주위 쟁탈전의 여파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써야지.”
“휴학은 허락하시려고요?”
“녀석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고. 겸사겸사 흑도 내의 분위기도 볼 수 있을 듯하군. 밖에서 보는 거랑은 또 다를 테니까.”
앉은 자리에서 일필휘지로 서신을 써 내린 나는 우소릉에게 그걸 건넨 뒤.
“소릉이는 이거 응용이 다리에 메서 날려 보내고.”
천장호를 향해 입을 열었는데.
“천장호.”
“옙?”
“너는 소림에 연락 좀 해봐. 궁윤이 연락까지 온 마당인데 원철 스님은 왜 이렇게 안 와?”
똑똑.
말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싶더니.
총학생회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원철이, 반장(半掌)을 하며 인사를 해왔는데.
“아미타불. 혈교의 일을 전해 듣고 혈기가 들끓었습니다만. 동도회주님과 괴룡시주가 남긴 소림은 정중동하란 말을 지침 삼아 마음만 끓였습니다.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입….”
원철이 하던 말을 멈추고 되물음을 던지자.
“…한데, 분위기가 왜 이렇습니까? 다들 저를 너무 과하게 주목하시는 듯합니다만.”
언용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해 주었다.
“…아하하. 마침 형님께서 스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딱 오셔서요.”
“…제, 제 이야기를 말입니까? 갑자기 식은땀이 조금 나는 듯한데. 무슨 이야기였을지 이것 참.”
그사이 나는 정현에게 오라는 손짓을 한 뒤.
“정현. 이리로.”
녀석의 어깨에 오른팔을 걸고 함께 원철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남은 팔을 원철의 어깨에 걸었다.
“정현은 알고 있는 사실인데, 제가 이번에 기연 아닌 기연을 좀 얻었습니다.”
“…….”
“…….”
나는 그렇게 마른침을 삼키는 두 녀석과 함께 연무장을 향해 걸음을 옮긴 뒤.
“이 기연이 참 무겁고도 버거운 기연인데요.”
연무장에 다다랐을 때.
목과 어깨 관절을 풀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이 내 샌드배… 아니 수련 상대가 좀 되어줘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