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3화. 직시 (4)
우리는 백광호의 근거지인 동정호에 이르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동정호의 어귀라 할 수 있는 악양 땅에 이르러 잠시 걸음을 멈췄다.
‘동정총호 백광호.’
이는 백광호가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별호에 동정호의 이름이 붙어있는 녀석이었지만, 놈에겐 정해진 거처가 없었다.
‘따르는 선단을 이끌고 동정호 곳곳을 누비다, 한 곳에 선단을 정박시키는 생활을 하는 게 백광호니까.’
한마디로 어딘가에 배를 정박시키면 그곳이 거처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 어딘가를 찾는 것이 우리의 숙제였다.
문제는 동정호가 말이 호수지, 어지간한 소국(小國)보다도 넓었다는 점이었다.
‘품고 있는 호중도도 거짓말 좀 보태서 별처럼 무수하고.’
하여, 요즘 백광호가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를 알아 오라고 천장호를 보내 놓았는데.
악양의 상점가 틈바구니에 있는 골목길에서 천장호를 기다리고 있기를 잠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되돌아온 천장호가 쓰고 있던 죽립을 들어 올렸다.
“알아냈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고.
천장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래?”
한데 내가 되묻자, 녀석은 슬쩍 몸을 빼며 검지를 세워 보였다.
“밥. 밥부터 사주십쇼. 악양루도 식후경이라고 합니다. 지금 쉬지도 않고 달려왔는데, ‘그런 곳’에 갈 예정이면 적어도 밥은 먹여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말 안 하렵니다!”
끼니를 악양에서 때울 예정이기는 했다.
하여, 나는 천장호를 차분히 타일렀는데.
“…글쎄. 밥은 먹고 갈 거라니까? 허기진 채로 갈 곳은 아니라고 애초에 말했잖아. 지금 나 못 믿는 거냐?”
이때.
사부님께서 혀를 차 오셨다.
- …못 믿지. 못 믿고 말고.
‘?’
- 뭘 억울한 척이냐? 자비롭기로 유명한 부처님도 네 밑에서 언동생을 했으면, 아마 네 말은 팥으로 죽을 쑨 데도 한 번쯤 고민하셨을 것이다. 원철이에게 물어보거라.
그 말씀에, 나도 모르게 원철을 응시해버렸는데.
“…소승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이때 천장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어차피 밥 먹고 가기로 하셨으면 더더욱 어려운 거 아니잖습니까? 이 입에 뭐라도 하나 딱 들어오면 제가 털어놓겠습니다. 갈 때 가더라도 밥 한 끼 정도는 괜찮잖아요?! 아니면 그냥 배 째십쇼.”
“오냐….”
그에, ‘오냐 그게 소원이라면 째주마.’ 소리가 턱밑까지 올라온 나였으나.
정말로 백광호를 마주하기 전에 허기는 달래놓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기에, 하려던 말을 바꿨다.
“…알았다 알았어.”
그리고는 언동생들을 이끌고 인근의 객점으로 향한 뒤.
음식들을 주문했다.
“주문하신 만두 나왔고요! 다른 요리들도 차차 나올 것입니다요!”
그 음식들이 나오자, 천장호는 김이 펄펄 나는 만두를 향해 허겁지겁 손을 가져갔고.
다른 녀석들도 젓가락을 들기 시작했다.
나도 출출했던 터라 만두 하나를 찢어 삼켰는데.
“천천히 먹어라. 안 뜨겁냐?”
“뱃헉해허 힉히믄 됩믿하.”
“…뱃속에서 식히면 된다고? 미친놈. 그래서 어디야? 어디에 있대?”
말미에 백광호가 거처로 삼고 있는 곳이 어딘지 묻자.
천장호는 입 안의 음식을 꿀꺽 삼킨 뒤, 능청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형님. 그거 아십니까? 동정호의 귤을 먹으면 장수한답니다. 여기서 식사 딱 끝내고 후식으로 귤까지 하나….”
“얘야.”
“…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장수? 쓰흡. 내 생각에 단명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나는 젓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주먹을 풀었다.
“요즘 내가 여기 있는 이 친구랑 멀리 있는 그 친구, 그렇게 둘하고만 어울린다고 너희들은 풀어놔서 요즘 좀 안 처맞았지? 장수? 그래 몸에 좋은 경혈들 위주로 자극 좀 하자 오늘.”
“말하겠습니다! 말합니다!”
그러자 천장호는 기겁하며 입 모양으로 백광호의 거처를 말해왔다.
‘창록도?’
나는 그곳의 정확한 위치를 떠올리며 식사를 끝냈고.
직후 언동생들과 함께 배를 타고 동정호의 물살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때.
팽소진이 질문을 해왔다.
“용운이 너한테 무슨 복안이 있으니까 그리로 가고 있는 거겠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서 그런데, 이거… 괜찮은 거니? 하오문과 녹림이 보고도 없이 움직인 일로 백광호가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텐데.”
“그렇겠죠.”
“그런 백광호라면 지금 천하가 돌아가는 판세에서는… 마교와 손을 잡는 일도 고려할 것 같은데? 내가 사도련주라면 그렇게 할 것 같거든.”
그 질문에 내가 재차 입을 열자.
“고려하는 게 아니라, 이미 손을 잡았을 겁니다.”
노를 젓고 있던 우소릉은 ‘헉!’하고 놀란 눈을 떴고.
“마, 마교요?”
오는 중에 기어코 귤 한 광주리를 사와 옆에서 까먹고 있던 천장호는 사레가 들렸다.
“켁!”
당옥기는 그런 천장호의 등을 성질대로 두드리며 나를 향해 살쾡이 같은 눈을 떠왔다.
“미쳤나 봐! 좀 천천히 좀 먹지 오늘만 사는 것처럼 먹냐?! 아니지, 진짜 미친 사람은 언용운 너지. 뭐? 마교랑 손을 잡았을 거라고?”
“어. 잡았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어.”
“캭! 근데 우리끼리 저기 들어가자고?”
“단, 운명공동체 같은 단단한 동맹은 아닐 거다. 백광호는 나름대로 수완이 있는 자야. 천마신교가 흑도를 잠식하는 수법을 모를 리 없고, 천마신교도 당장엔 백광호를 틀어쥘 여력이 못되니까… 양측은 아마 아주 가벼운 동맹을 맺었을 거야.”
“…가벼운 동맹?”
“응. 사도련이 사도련으로 남을 수 있고. 천마신교는 그 사도련이 백도의 목에 걸린 가시가 되어주길 바라는 정도의 가벼운 동맹.”
내가 말을 마치자, 원철이 질문을 해왔다.
“그래도 동맹은 동맹 아닌지요? 마인들의 사주를 받아 괴룡 시주에게 해를 끼치려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단호히 가로저었다.
“백광호가 나를 죽여서 얻는 이득이 없는 데다, 나와는 약속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나는 사도련주의 신물인 패룡도를 찾아주었던 일을 원철에게 가볍게 말했는데.
“…허. 괴룡 시주와 사도련주 사이에 그런 연이 있었군요.”
그 말에 원철이 입을 벌리며 헛숨을 삼키는 때.
“언 형. 그치만 그 약속은 패룡도의 녹옥을 돌려주시면서 끝난 거 아닌가요?”
우소릉이 잊었냐는 듯 말을 해왔는데.
“아니지. 그날 나와 백광호가 나눈 약속은 내가 필요할 때 사도련주가 힘을 빌려주는 거였어. 녹옥은 그 약속을 보증하는 증표일 뿐이고.”
“아?!”
“아무리 약속을 손바닥처럼 뒤집는 게 흑도라지만. 새파란 후기지수와의 약속을 뒤엎기엔, 면이 서지 않을 거다.”
녀석의 질문에 답하자, 묵묵히 듣고 있던 팽소진이 한마디를 더했다.
“그것도 하오문과 녹림도가 너와 친하게 지내는 상황에서 말이지?”
그에 나는 수평선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예. 백광호는 지금 그걸 청산하고 싶은 겁니다.”
* * *
한편, 정무학관의 총장실.
이곳에선 학관의 총장인 경혜와 동도회주 제갈척 사이에 미묘한 기운이 흐르며 차가 식어가고 있었다.
그러길 잠시.
운영위원들을 소집하라는 지시를 받아 나간 대학원생이 돌아왔는데.
“총장님, 내리신 말씀을….”
쾅!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운매관의 사감 팽재혁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이어 함께 들이닥친 다른 교수들 중 향란관의 창량이 입을 열었는데.
“용운이가 또 없어졌다고요?!”
그 말에, 제갈척이 허허로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없어진 게 아니라 내가 심부름을 좀 보냈다네. 확인들을 해보게. 괴룡만 없어진 게 아닐 것이야. 기숙사별로 한 명씩에, 소림의 원철 스님까지 함께 보냈다네.”
그 말에 경혜가 한숨을 폭 내쉬는 때.
“하아. 한데 어디로 무슨 심부름을 보내셨는지는 말씀을 해주지 않고 계십니다.”
윤국관의 사감 제갈민이 입을 열었다.
“언용운, 당옥기, 우소릉, 팽소진, 천장호, 원철. 이렇게 여섯 생도가 나간 것으로 압니다만. 정말로 아버님께서 심부름을 보내신 것이라면 이리 인선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물음에 제갈척은 태연하게 답을 했다.
“그건 사대기숙사의 대표라는 구색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하나, 제갈민은 본인의 아버지에 관해 너무도 잘 알았다.
그리고 사대기숙사의 생도들에 관해선 훨씬 더 잘 알았다.
“단순히 구색만 필요한 자리라면 아버님께서 당옥기 생도는 보내셨을 리 없습니다. 그 친구 무복만 향란관의 것이지 청죽관 생도나 다름없는 생도입니다.”
“…….”
그 덕에 단숨에 제갈척의 말에서 허점을 찾아낸 제갈민은 따지듯 되물었고.
“의원으로 간 것이겠지요. 즉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고요. 표면적으로나마 평화가 찾아온 지금 위험한 일이라면… 사도련입니까?”
할 말이 없어진 제갈척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거 참. 들켜버렸구만.”
기왕지사 들킨 이상 묵묵부답으로 있는 것보단 눈앞의 운영위원들을 단속하는 것이 나았다.
그에, 제갈척은 재차 입을 열었는데.
“하지만 다들 모르는 척 잠자코들 있게나. 우리가 가만히 있어 주는 게 괴룡을 도와주는 일일세. 일이 계획대로 풀린다면 어차피 당장은 봄방학 아닌가.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모두들 돌아올 것일세.”
창량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는데.
“또! 또! 이 녀석의 병이 도졌구만!”
그 말에 제갈척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때.
“크헬헬. 하여간에 괴룡 이 친구는 아주 물건이야. 창량 저 친구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경혜가 각탁을 내려치며 사자후를 내질렀다.
“선배니이이이이임!!!!!!!!!!!!!!”
“…….”
“지금! 뭘 잘하셨다고 킬킬거리십니까? 생도들이 동정총호의 아가리 속으로 기어들어 갔는데!!”
“아가….”
“지금!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아아!!!!!”
“…….”
“아무리 하늘 같으신 선배님이고! 천하와 강호를 위해 평생을 다 바치신 선배님이시지만! 그런 태도는 못 참습니다!!!”
그에, 제갈척은 새삼 경혜의 별호가 멸마사태였다는 것을 상기하며.
처음으로 다시 강호에 나온 것을 조금 후회했다.
‘…얘들아, 되도록 빨리 돌아오너라.’
* * *
나룻배가 우리를 싣고 동정호의 물살을 저어가길 한참.
우리는 마침내 목표로 삼은 창록도 인근에 이르렀다.
창록도.
뻗어나가는 사슴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듯.
이 섬은 숫사슴과 비스름한 형상을 한 섬이었다.
백광호의 선단은, 그중에서도 뿔에 해당하는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기준 삼아 켜켜이 진을 이루고 있었는데.
물 위에 떠 있는 성채나 다름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
“…….”
“…….”
“…….”
“…….”
언동생들은 저마다 헛숨을 들이켰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향해 새겨둬야 할 사안에 대해 말했는데.
“다들 ‘기관과 진식’ 수업시간에 안 졸았으면 알고 있겠지만. 지금 저 선단들은 진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침입자가 발생하면 물 위라는 특성을 이용해 생문과 사문이 계속해서 바뀔 수 있다.”
그런 내 말에 천장호는 울상을 하면서 입을 열었고.
“쉽게 풀릴 거라면서요!”
“정확히는 ‘생각보다 쉽게’ 풀릴 거라고 했지.”
이어서 당옥기도 한마디를 했는데.
“백광호가 초대하는 거라면서!”
“그렇다고 초대장이 날아온 건 아니고.”
“캬악!!!”
그렇게 두 사람의 말에 답하자.
우소릉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서 어떻게 들어가나요? 기별을 넣는 걸까요?”
“아니. 강제로 들어간다.”
그런 내 말에, 언동생들이 다시 한번 헛숨을 들이키는 때.
나는 씩 웃으며 팔을 걷어붙였다.
“쉽게 들어가면 나올 때가 어려워져. 우리가 머릿수는 여섯이지만…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수틀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제대로 보여줘야지.”
협상을 승리로 이끄는 법.
일단 협상 상대를 쥐어팬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