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5화. 직시 (6)
백광호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 내 말을 되풀이했는데.
“경고?”
“예.”
내가 곧바로 답하자,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미간을 구겼다.
“지금 나와 해보자는 건가?”
“선배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을 텐데요?”
그에, 백광호의 수하들과 언동생들이 저마다 병장기에 손을 가져가니.
선창 위엔 험악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백광호가 다시 입을 연 건 이때였다.
“내 영역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함선들을 박살 내놓은 게 누군데?”
“그건 선배님께서 바라시던 행동일 텐데요?”
내 나름대로 확신하고 건넨 말이었다.
하나, 백광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하. 여기 있는 함선과 수하들은 내가 사도련주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운 악주검벌의 전력들이다. 그런데 내가 이 전력이 상하기를 바랐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를 하는군.”
그러나 본디 백광호라는 위인이 본인의 속내는 꽁꽁 감추고 남의 속내를 먼저 토해내게 하는 화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뭐, 그 이야기는 차차 하시기로 하고… 선배님께서 먼저 시작했다는 제 말은, 마지막에 저희에게 대포를 쏘신 일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거 경고하신 것 아닙니까?”
“침입자에 대처하다 생긴 일에 의미 부여가 과한 듯한데?”
“그렇습니까? 아무튼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나 백광호는 너희가 백도 무림에서 어떤 취급을 받던 수틀리면 날려버릴 수 있다. 이렇게요.”
“…….”
“해서 저도 똑같이 경고를 돌려드린 겁니다. 여기서 사생결단을 내자셔도 상관없다고요.”
그런 내 말에 백광호는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하나, 여전히 구겨져 있는 미간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진심으로 웃는 것은 아닌 듯했는데.
“…….”
“…….”
아니나 다를까.
이내 웃음을 뚝 하고 그친 백광호가 안쪽을 향해 턱짓하며 입을 열었다.
“내실로 가지.”
“그러시죠.”
의견을 일치시킨 백광호와 나는 동시에 걸음을 뗐다.
그런데 이때.
사도련의 졸개들과 언동생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련주님! 위험한 자입니다!”
“누가 할 소리?!”
백광호는 수하들을 향해 물러나라는 듯 손을 휘젓는 한편, 나를 향해 말했다.
“서로 간에 피차 신뢰가 있는 사이는 아니니 호위를 두도록 하지. 단, 한 명씩만. 우르르 몰려가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지 않겠나?”
그 말에 언동생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녀석들은 가장 무위가 뛰어난 원철의 등을 떠밀며 한걸음 씩 물러났다.
그에, 무위가 뛰어난 원철이 밖에 있는 게 맞지 않냐는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으나.
“원철 스님은….”
일순, 안의 이야기가 길어지면 언동생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원철과 함께 들어가 있으면… 이야기가 조금 길어진대도 잠자코 있겠지.’
난 하려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호위로 원철을 골랐고, 백광호는 나로서도 구면인 민머리를 골랐는데.
‘순우욱이라고 했었지.’
그 이름을 떠올리는 사이, 우리는 내실에 도착하게 되었다.
백광호는 상석에 놓인 태사의에 털썩 자리를 잡으며 내가 앉을 자리를 가리켰다.
“내 선단을 때려 부순 짓거리가 어째서 내가 바라던 것이 되지? 우선 그 이야기부터 해봐.”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짚을 것들이 있습니다.”
“뭔데?”
“천마신교랑 손잡으셨죠?”
내 물음에, 백광호는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잡았지.”
“역시 그러셨군요. 하지만 표면상의 동맹 여부와는 관계없이, 여전히 선배님께서는 고민 중이실 겁니다.”
“우리와 천마신교와의 동맹 여부를 방금 확인한 녀석이, 다 안다는 듯이 말을 하는데?”
“저는 누구보다도 마교의 수법을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흑도의 생리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확신은 못 해도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맞춰볼까요?”
“어디 한번 지껄여 보거라.”
백광호의 허락에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교 놈들은 군침이 도는 대가를 제시하며, 선배님께서 어차피 하시려던 일을 조건이랍시고 걸었을 겁니다. 예컨대 사도련의 규율을 어긴 하오문과 녹림도를 처벌하라는 일 같은 게 되겠네요.”
“…….”
“선배님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었을 겁니다. 지금 같은 난세에 흑도가 이쪽저쪽 간을 좀 봤기로서니 누가 힐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흑도의 생리인데요.”
여기까지 말하자.
백광호의 곁에 서 있던 순우욱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일갈했다.
“뭐라! 이쪽저쪽 간을 보는 것이 흑도의 생리다? 지금 우리를 얕잡는 것이냐?!”
그 앞을 원철이 막아선 때.
“아미타불. 두 분 사이에 남은 이야기가 더 있을 듯합니다… 고정하시지요.”
백광호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군총사. 왜 열을 내고 그래.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나?”
“…려, 련주님.”
“일단 남은 이야기부터 다 들어 보자고. 화는 그때 내도 늦지 않을 것 같으니. 계속해봐라, 언용운.”
“하지만 마음속엔 걸리는 게 있으셨을 겁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닌지라 확실치는 않지만… 천마신교의 제안은 본인들의 승리 또는 정사마가 지금의 현상을 유지한다는 것을 두고 이루어졌을 겁니다.”
그렇게 운을 뗀 나는 백광호가 우려하는 일을 바로 입에 올렸는데.
“하지만 백도무림이 이긴다는 미래도 있을 수 있죠. 사도련과 천마신교가 혈맹이 돼서 맹공하더라도 말입니다.”
“…….”
“아울러 일전에 저와 나눴던 약속도 걸리실 겁니다. 패룡도의 녹옥은 돌려드렸지만, 저희가 나눈 약속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말하자, 백광호가 쓴맛을 다시며 미간을 좁혔다.
“씁. 해서, 하고자 하는 말이 정확히 뭐냐?”
그 말은 내 추론이 맞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고민을 진득하게 하실 수 있도록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하하. 네가 말이냐?”
“사실 이미 드렸습니다. 백도무림의 망나니 놈이 그간의 승승장구로 기고만장하여 동정총호에게 싸움을 걸었다.”
“…….”
“천하의 동정총호라도 괴룡의 객기를 아무 피해 없이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 바람에 큰 손실을 보았는데, 차려진 밥상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동정총호는 다시금 웅크리기에 들어갔다.”
“…….”
“이 정도면 천마신교와의 동맹이 깨어지지 않는 선에서 정과 마 둘 중 어느 쪽이 유리해 보이는지, 간을 보실 시간이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
“그걸 바라시는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와서 어울려 드린 것인데. 이만하면 선배님이 바라는 일 아닌가요?”
내가 말을 마치자, 백광호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기고만장하기가 이를 데 없군.”
하나 이번에는 그 웃음이 딱히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맞았죠?”
* * *
동도회는 마교와 손을 잡은 사도련의 입장을 이해한다.
언용운의 난입을 핑계 삼아 사도련의 수뇌부는 칩거라는 명목으로 관망에 들어가고, 하오문과 녹림의 처우 결정은 미뤄진다.
백광호와 언용운의 대담은 두 가지 사안을 매듭지으며 끝났다.
할 일을 마친 언용운은 데려온 무리를 이끌고 창록도를 떠났다.
백광호는 그렇게 멀어져가는 언용운의 배를 선수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순우욱이 입을 연 건 이때였다.
“련주님을 저런 식으로 대하는 자는 처음인 듯합니다.”
“그러게 말이야. 본인의 태도도 태도지만, 자꾸 내가 속내를 드러내게 만드는군. 아주 곤란한 녀석이야.”
“하면, 제거하는 것도 고려해 보시지요. 아직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습니다.”
“제거? 우리 악주검벌만으로 저 녀석들을 제거하려면 아마 전력의 칠할 이상을 갈아 넣어야 할까 말까인데, 그런 짓을 왜 해?”
“그,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 구성원을 떠올려 봐. 사천당가의 적녀에, 도제의 장녀이자 무림맹주의 제자, 개방의 차차기 후계감과 소림의 차차기 방장. 언용운 그리고 뇌전편복의 아들을 빼더라도 곤란하기 그지없는 배경들인데, 우리가 뭐 천하일통이라도 노리나? 가진 것 다 털어서 저들을 제거하게?”
순우욱은 고개를 갸웃한 건 이때였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처음만 해도 련주님께서 대포를 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그때는 왜 그러셨습니까? 뒈졌으면 어쩌시려고요.”
“그때는 처음이었으니까! 내가 정말로 초대장을 보낸 것도 아니고 내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이밀었다가 그리되었으니. 무슨 일이 생겼다면 사도련주로서 유감을 표해야 할 일이 됐겠지.”
이어진 백광호의 말에도 그의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 순우욱. 련주님에 비하면 아둔하기 그지없지만. 언용운이 백도무림에서 점하는 위치를 모르지 않습니다. 유감을 표하는 정도로 끝이 날 일은 아니었지 싶습니다만?”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나,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정확하게 알아봤어야 했다.”
“언용운의 실력을 말입니까?”
“정확히는 ‘백도의 후계’라고 해야겠지. 정마대전이 다시 일어난다 치고 둘 중 어느 쪽이든 패색이 짙어진다면 각각 후계부터 살리려 하지 않겠나?”
“그게 천마신교는 혁련일이고 백도 무림은 언용운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하여, 녀석의 실력과 그릇 그리고 지모까지 모두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해서, 보시니 어떻습니까?”
순우욱의 되물음에.
백광호는 다시금 언용운을 태운채 떠나가는 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찍이 걸물임을 알아보긴 했지만. 못 본 사이 몇 계단이나 오른 무재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성정이 독종 중의 독종이야. 저런 종자는 본인이 얻고자 하는 결과를 어떻게든 얻고야 말지.”
“언용운 쪽이 나아 보인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그러고 보니 노잣돈도 챙겨….”
“쉿. 수하들 듣는다.”
“아. 옙.”
“아직 확신은 이르다. 하지만 시간을 벌었으니. 어찌 돌아갈지 두고 보자고.”
* * *
다시금 악양을 향해가는 배 위에서, 나는 언동생들에게 선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쭉 들려주었는데.
“…그렇게 된 거다.”
내가 말을 끝마친 때.
관찰력이 좋은 우소릉이, 내 허리춤에 새롭게 달린 주머니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언 형 그런데 그 주머니는 뭐에요? 아까만 해도 못 보던 건데요?”
“백광호한테 은자 좀 뜯었다.”
“사, 사도련주님한테 돈을 받아 내셨다고요? 예전에야 제사비라면서 그러셨지만 이번에는 무슨 명목으로요?”
“자고로 후배가 먼 길을 찾아와 인사를 드리고, 또 고민거리도 덜어드렸으면 거마비 정도는 선배 된 입장에서 내놓는 게 인지상정아니냐?”
이어진 녀석의 물음에 답하자.
당옥기와 사부님은 동시에 학을 뗐는데.
“이 와중에 돈을 뜯어내네 진짜 사람인가….”
- …지독하다 지독해.
“뭐, 다들 고생했다. 빡세게 몸을 움직였더니, 허기가 지네. 가는 길에 악양에서 이걸로 밥 먹고 가자.”
내가 그 전낭을 흔들어 보이자, 천장호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모두 후식까지 먹는겁니다?! 동정호의 귤을 먹으면 장수한다는 말 딱 맞았죠? 제가 모멸과 핍박을 받으면서 사달라고 했던 그 귤이 없었으면 어쩔뻔했습니까? 으하하!”
그렇게 천장호가 너스레를 떠는 때.
원철이 입을 열었다.
“한데, 사도련의 일은 이 정도로 충분한 것입니까?”
그런 원철의 말에. 팽소진은 고개를 갸웃했는데.
“스님은 그 자리에 있으셨잖아요? 백광호가 무언가 다른 생각을 품은 느낌이던가요? 아니지, 그럼 용운이가 눈치를 못챌 리가 없는데?”
“…아. 그런 것은 아니고. 예컨대 새외의의 교류생이나 초개회의 독고철 생도 같은 조치가 없는 듯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질문엔 내가 답했다.
“사도련은 저 이상 뭘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관망하게 두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죠. 나머지는 우리의 역할입니다.”
“…우리의 역할.”
“백도무림이 이 난세를 끝낼 고지를 점하면 자연히 저희 편에 설 겁니다.”
그러니까 벌게 된 시간을 잘 활용해서 백도무림의 모든 저력을 끌어모아야 했고.
눈앞에 있는 녀석들의 기량을 끌어올려야 했다.
하여,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원철을 향해 한마디를 전했다.
“그나저나 우리 원철 스님. 예상보다 훨씬 실전에서 미숙한 부분이 많으시던데요?”
“…소, 송구합니다.”
“송구하실 일은 아니고. 그냥 걱정이 되네요. 스님이 이 정도인데, 다른 대머리독수리들은 어떨지. 아예 함께 합을 맞춰본 적 자체가 없는 문파의 제자들은 또 어떨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