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6화. 직시 (7)
백광호와의 일을 매듭지은 우리는 서둘러 북상했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봄방학 기간이 끝나기 전에 학관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후. 늦지 않게 도착했군. 이제 조용히 총학생회실로 돌아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까운 곳에 볼일을 보고 온 행색으로 정문을 지나치려 하니.
정문 경비를 서고 있던 수위부의 선배님이 내게 말을 걸었다.
“…언 회장?”
“…예?”
“오거들랑 바로 본관으로 보내라는 총장님의 분부가 있으셨네.”
그 말에 따라 우리는 본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경혜를 필두로 굳은 얼굴로 마중을 나온 사감 교수님들이 보였다.
“…….”
“…….”
나는 포권을 취하는 한편, 그 틈바구니에 난처한 표정으로 섞여 있는 제갈척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어르신?]
[…….]
[들키셨군요.]
[…그렇게 됐다.]
[하늘의 기밀도 꿰뚫어 보신다는 천기묘산 어르신이 정무학관의 울타리를 못 뚫었네요. 이거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걸까요?]
[…인석아 그만 놀려라. 애초에 네 녀석이 쌓은 업보가 있어서 교수진들이 의심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내 선조님 되시는 충무후께서 살아 돌아오셔도 이 친구들은 못 속여!]
뭐, 우리 중 다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쨌거나 사도련의 일은 매듭이 지어졌다.
‘미봉책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의 결과지.’
앞으로의 일을 논하려면 다녀온 일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하여, 걸렸으면 걸린 대로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치는 때.
경혜가 천장호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광주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귤 광주리 같군요. 싱그러운 향취가 뚫고 나오는 듯한데, 어디서 난 귤입니까?”
“딸국.”
그녀 곁에 서 있던 창량은 당옥기를 노려보며 말했다.
“동도회주님의 심부름을 다녀왔다지? 당옥기 생도가 우리 향란관을 대표해서 갔다고 들었는데, 향란의 역사와 전통에 걸맞은 위엄을 보이고 왔는가?”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인 당옥기는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급히 찌르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어떻게 좀 해봐. 나 숨이 안 쉬어져.”
파랗게 질려가는 언동생들의 모습에,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다른 생도들은 저 때문에 휩쓸린 거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찬찬히 해명해 드릴 테니 이 녀석들은 돌려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사실 맡길 일도 좀 있습니다.”
경혜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곧바로 언동생들을 향해 말했다.
“소릉이는 마방연 가서 입문생들 진도는 어떤지 보고서 좀 받아오고.”
“네! 언 형!”
“교수님들이랑 이야기 끝나면 안건 정리해서 자치회장들 소집할 거니까, 나머지는 총학생회실로 가서 그거 준비 좀 해. 아, 다녀온 이야기도 좀 전해주고.”
그렇게 언동생들을 먼저 보낸 나는 교수님들과 함께 본관의 소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그렇게 이동한 자리에서 재차 입을 여니.
팽재혁이 팔짱을 끼며 질문해왔다.
“이젠 형식적인 죄송하다는 말조차 생략하는 거냐?”
“아닙니다. 단순히 죄송하다는 말을 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말을 아낀 겁니다.”
그 물음에 대꾸한 나는 경혜를 응시하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일전에 총장님께서 저더러 이제 어엿한 백도의 무인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백도의 무인으로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입니다. 그러니 행동 자체는 죄송할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
“물론. 교수님들께서 걱정하시리라는 것은 알았습니다만. 그런 교수님들이 계시기에, 사도련주도 저희를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
“저희를 아끼시는 총장님 이하 교수님들의 마음이 백광호에게 있어 억제제가 된 것이고. 그 덕분에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이니. 죄송하다는 말보다는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 내 말에 묵묵히 듣고 있던 경혜가 한숨을 폭 내쉬어온 건 이때였는데.
“하여간에 말은 잘해요. 처음 빈니에게 저 입을 놀릴 때. 말을 예쁘게 한다고 칭찬할 게 아니라 혼을 냈어야 했는데….”
조금 누그러진 듯한 분위기에, 제갈척이 입을 열었다.
“그거 보게. 내가 괜히 괴룡의 편을 들어준 게 아니라니까? 심지 자체가 곧은 녀석이 일리 있는 계획을 들고 오니 내가 협조를 안 할 수가….”
“선배님은 조용히 하시고요.”
하나, 경혜의 한마디에 제갈척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내가 없는 사이 된통 혼이 나신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좌중의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진 듯했기에.
나는 백광호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일단 다녀온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 *
나는 우선 백광호의 함선을 부순 이야기를 담백하게 전했다.
그리고 백광호와 나눈 이야기들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이어나간 끝에, ‘기고만장한 망나니’라는 위명을 앞세워 매듭을 지어낸 일을 말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끝났을 때.
윤국관의 제갈민은 턱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망나니가 동정총호를 들이받았다…. 썩 괜찮은 명분이로고. 이렇게 되면 마교는 사도련을 완전히 적대하지도 그렇다고 진정한 동료로 삼지도 못할 테고. 우리만 잘하면 그 연계를 끊어낼 수도 있겠구만? 지금으로선 최선의 결과인 것 같은데?”
“예. 해서 백광호가 보낸 신호를 눈치채자마자 한시라도 급히 움직여야 했습니다. 자칫 하오문이나 녹림이 피를 볼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덧붙인 내 말엔 자리한 이들 대부분이 제갈민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나, 딱 한 사람, 창량은 긴 한숨과 함께 발언권을 요구했다.
“후우. 애썼다는 말을 우선 해주고 싶구나. 하나, 쓴소리도 한마디 하고 싶다. 그래도 되겠나?”
“예.”
“자네의 행동은 전형적인 선조치 후보고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무학관의 일원으로서 그 결정에 동의한다. 그리고 강호의 선배로서는 대견하다고 생각한다.”
“…….”
“하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자네를 가까이서 지켜 보아왔기 때문이다.”
“…….”
“백광호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는가? 짜고 치듯 함선을 좀 부숴주고, 이후로 푹 쉬다가 환대 속에 차나 나누다 온 것인가?”
“…그건 아닙니다.”
“아니지? 분명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살다 보면 당장에는 이로워 보여도 실상은 크게 이롭지 않은 일이 더러 있다. 혹여 언 회장이 잘못되었다면? 이제 약관을 막 지난 자네가 우리만큼 나이를 먹어가며 구할 수 있는 이들의 삶은 어찌 되는가?”
“…….”
“자네는 적이 많아. 단순히 사마외도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백도무림 내에도 그리고 저기 북직예에도 질투와 고까움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모난 돌은 정을 맞는다는 말을 기억했으면 한다. 둥글게 살라는 판에 박힌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어진 창량의 말에.
사부님께서는 헛웃음을 흘리셨는데.
- …허. 화산의 말코 녀석이 말로는 쓴소리를 한다고 해놓고, 어째 용운이 너를 대들보 취급을 하는 느낌인데?
‘…그, 그러게요.’
사부님께 답하며 멋쩍어하고 있기를 잠시.
경혜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창량의 말에 동조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교수님께서 다해주셨네요.”
“일단 총장님의 마음과 창량 교수님의 말씀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일단? 다른 이야기가 남았습니까?”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었다.
마침 제갈민과 창량이 한 말에 그 이야기가 녹아있었기에, 나는 두 사람을 차례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앞서 제갈민 교수님께서는 우리만 잘하면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지.”
“그리고 창량 교수님께서는 백도 무림 내에도 질투나 고까움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렇죠”
“…그렇기는 했지.”
“확실히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난세를 외면해온 분들이 있어 왔습니다. 나름의 사정들이 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분들도 이제는 당면한 위난을 직시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다가올 위난에 대처하려면 백도 무림의 저력을 모두 끌어모아야 했으니, 눈가리고 아웅 하는 행동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었는데.
그런 내 말에 제갈척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종남과 곤륜 그리고 화산을 말하는 것이냐?”
“다른 재야(在野)의 고수들도 포함하고 한 말입니다만. 대표적으로는 그렇게 세 파가 되겠습니다.”
“해서? 구체적으로 뭘 어쩌자고?”
“단꿈을 깨는 데엔 예로부터 몽둥… 저와 언동생들이 각파의 정예 무인들과 겨룰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뒷짐만 지고 있는 동안, 저희가 어떤 시간을 보내 어떤 무인이 됐는지. 제대로 보여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 *
동도회주 제갈척과 운영위원회의 교수님들에게서 공감을 얻어낸 뒤.
나는 곧바로 총학생회실로 돌아와 본관에서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총장님과 사감 교수님들의 동의는 받아냈다.”
“…용운 님?”
“말씀하시오.”
“그러니까. 춘계대항전 대신 정진대회 같은 무림대회가 열릴 거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평범한 무림대회는 아닐 거요. 정진대회와도 조금은 다를 테지. 그 정신은 계승하되 무(武)에 집중하고 참가자의 범주는 크게 늘리게 될 테니까. 일단 창량 교수님께서 매화검수들은 무조건 참가토록 하겠다고 단언하셨소.”
“먼저 학생회실에 돌아온 사람들이 사도련의 일이 매듭지어졌다고 하길래… 이거 일감이 줄겠구나 하고 학점 꽉 채워서 수강 신청을 할 준비를 해뒀는데요.”
이어진 제갈설지의 한탄에, 은하연은 혀를 찼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아직도 언 공자를 모르냐고. 절대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그랬죠?”
그런 은하연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반론이 나가던 때.
“거, 절대 절대는 너무 강조하는 느낌 아니요?”
남궁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희는 뭘 준비하면 되나요?”
“곧 운영위에서 공문이 내려오겠지만, 여러 가지로 준비할 게 많다. 우선은 후원인이다.”
명문대파의 최정예 전력을 대접하고 재야의 고수들을 끌어들이려면 그만한 상금과 상품이 필요했다.
“내가 약왕 어르신이랑 산서에 계신 외조부님께 연락할 테니. 영이 너는 검황 어르신한테 후원과 여러 고수의 참가를 독려하는 글 한 줄 써달라고 부탁 좀 해라.”
“예! 선배!”
“은 소저도 강남상왕께 한 통 쓰시오. 소진 누님이랑 옥기 너도 아버지께 한 통씩 쓰고. 천장호.”
“방주님한테 쓰면 됩니까?”
“그래. 아, 원철 스님도 한 통 씁시다. 무당은 코 앞이니 주말에 정현 네가 직접 다녀와라.”
그를 위한 지시를 내린 나는, 이어 예해수 선배를 향해 말했다.
“예 선배. 우선은 가볍게 무림대회가 열릴 거라는 소식만 뿌립시다. 그리고 얘네들이 보낸 서신이 모두 되돌아오면. 그때 선배님의 재능을 뽐내면 됩니다.”
“제 재능 말씀인가요 후배님?”
“대저 백도무림의 무인들은 상품과 상금만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좀 긁어줄 필요가 있죠.”
“…긁어? 아! 마, 맡겨 주세요!”
“예. 천불이 나서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문장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있기를 잠시.
은하성이 질문을 해왔는데.
“용운 형님. 그런데 말입니다. 좀 전에 매화검수가 참가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매화검수면 화산의 최정예 검수들인데, 그게 사실은 창량 교수님을 포함해서 그렇게 취급한다고 알고 있거든요?”
“근데?”
“교수님께서 직접 나오시는 건 아니죠?”
“맞는데?”
“예에?!”
그 물음에 답을 하고 있으니.
곁에 있던 우소릉이 일순 눈을 크게 뜨며 백광호를 언급해왔다.
“엇! 어엇?! 그, 그러고 보니 사도련주님이….”
창량이 화산의 검수를 이끌고 나선다는 말에 경악하고 있던 은하성은 그런 우소릉을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왜?! 너는 또 뭐야?”
“아니 이번에 저희끼리 동정호에 갔잖아요?”
“또또 내 앞에서 우쭐하려고 그러지 너. 용운 형님이 나를 거르고 너는 데려갔다 그 이야기 아냐?!”
“그게 아니고요! 거기서 사도련주가 언 형 보고 천하십검에도 들겠다고 했걸랑요?”
“처, 천하십검?”
“언 형이 말씀하신 대회 취지라면… 어쩌면 정말로 천하십검의 한 사람으로 언 형이 공인되는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