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427화 (427/444)

제427화. 물결 (1)

천하십검.

우소릉이 무심코 내뱉은 단어의 무게에, 좌중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

그렇게 언동생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삼키고 있기를 잠시.

장선이 그 정적을 깨며 질문했다.

“…어. 그 말은 용운 형이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인이 되셨다는 건가요?!”

덩치만 컸지 여즉 세상 물정엔 어두운 장선의 물음에, 팽소진이 답해주었는데.

“도객과 권사, 창수나 궁사 등등은 빠지는 거니까 엄밀히 말하면 좀 다르지? 물론, 천하십검으로 묶이는 분들 하나하나가 천하제일인을 논할 때 이름이나 별호가 튀어나오곤 하는 분들이긴 하지만.”

듣고 있던 모용길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흠. 언용운이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천장호가 침을 튀기며 일갈했다.

“어휴. 용길이 형. 거, 사람이 좀 되쇼.”

“용길이 아니라 모용… 후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아니, 용운 형한테 조금 시달렸기로 서니. 아직도 꽁해서 그렇게 궁시렁궁시렁 음해를 하는 거 아닙니까?”

“누굴 좀생이로 아느냐. 언용운이 나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내가 미숙한 부분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런 걸로 꽁하진 않아.”

“그런데 왜 구시렁거리고 있습니까.”

“혼자 생각을 한다는 게 입으로 튀어나왔을 뿐이다. 언용운이 우리 중엔 가장 날고 기는 녀석이긴 하지만, 천하십검이라 불리는 분들을 한번 생각을 해봐라.”

그 말에 은하성이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는데.

“교수님 중엔 창량 교수님하고 모용린 교수님. 그리고 무극검 선배님이랑 궁윤이 형네 할아버지랑 아버지. 화산의 무각주 매화검선 어르신. 그리고 무림맹주님이랑….”

은하성의 손가락이 일곱 개째 접힐 즈음.

은하연이 반대로 손가락 하나씩 펴며 나머지 세 사람을 말했다.

“곤륜의 무각주 덕성자 어르신, 종남의 장문인 황백월 어르신. 그리고 정사마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재야의 인사로 랑야검(浪野劍) 장철한 대협을 말석으로들 꼽지. 꼽고 나니 기라성 같은 분들이긴 하네요.”

그 말에 정현은 엷은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는데.

“…하나 명영 사백조께서는 내력을 잃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랑야검 대협은 근 오 년간 강호에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공석이 생겼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듣고 있던 당옥기가 한마디를 더하는 때.

“그러네. 약간 공석이 생긴 느낌이긴 하네.”

나는 단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공석은 무슨 공석이냐. 일전에 무극검 선배님이 검을 들고 서 계신 뒷모습을 봤다. 내력이 없으시다는 것을 일순 잊어버릴 정도로 휘두르는 식에는 틈이 없으셨어. 언제고 회복하실 것이니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마라.”

“아! 그래서 ‘약간’ 이라고 그랬잖아!”

그런 내 말에 당옥기가 빽! 하고 항변하는 때.

나는 다른 녀석들을 응시하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야. 내가 헛바람이 드는 유형인지를 알아보려고 백광호가 찔러본 말로 괜히 호들갑 떨지 마라.”

한데, 예해수 선배가 손바닥을 보이며 내 말을 막았다.

“아니에요.”

“예?”

“호들갑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라고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후배님이 제게 하신 부탁 있잖아요.”

“부탁? 아. 강호인들의 속을 긁어달라고 한 것 말씀입니까?”

“예. 천하십검. 이걸 활용하면 강호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게 가능할 것 같아요. 소릉 후배. 거기 붓 좀 주시겠어요?”

“예? 아! 예! 여기요!”

그렇게 말을 마친 예해수는 우소릉에게 건네받은 붓을 들더니.

소식지에 들어갈 글귀를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장강의 앞 물결은 뒷 물결에 밀려나고야 말 것인가?

정무학관에서 지난 정진대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규모의 무림대회를 주최한다.

검황 남궁원, 약왕 오균천, 산서금붕 이길환, 강남상왕 은세평.

기라성 같은 거물들이 후원자로 나선 이 대회는 배분과 출신 성분을 내려 놓고 진정한 무를 논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괴룡 언용운을 비롯한 신진고수들과 화산의 매화검수들이 참가를 공언한 이 대회에서 어쩌면 천하십검의 한 자리가 바뀔지도 모른다.』

예해수가 갈겨쓴 소식지는 사방으로 날아갔다.

안경의 남궁세가는 그 소식지를 받아본 곳 중 하나였는데.

소식지의 내용을 확인한 남궁원은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껄껄껄. 이 친구 이거 또 재미있는 일을 벌였구먼. 새삼 은퇴를 번복한 보람을 느끼게 하는 녀석이란 말이지. 재미있어. 참 재밌는 친구야. 껄껄껄.”

하나, 소식지를 보고 웃음 짓는 남궁원과는 다르게.

청해의 곤륜산엔 소식지를 받자마자 그것을 구겨낸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곤륜의 장문인인 덕명자였다.

“…허허허. 잘한다 잘한다 추켜 세워주니까, 괴룡의 기가 너무도 살았구먼.”

그런 덕명자의 말에.

천하십검의 일인이자 곤륜의 무각주를 담당하고 있는 덕성자가 입을 열었다.

“복마전선의 선봉에선 곤륜의 사정은 고려치 않고 천지로 날뛰더니… 기고만장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장문사형. 아무래도 빈도가 이 친구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아야겠습니다. 제자들의 출산(出山)을 허락해 주십시오.”

“마교와의 전선에 이상은 없겠나?”

“번이 조금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하나, 최근 마인들의 동향을 보면 괜찮을 성싶습니다. 그리고 속에서부터 곪은 나무는 결국 바스러지기 마련 아닙니까? 바로잡을 수 있을 때 바로잡아야 합니다.”

“흐음. 마인들 역시 내부 단속으로 바쁜 시기이니… 다녀오도록 하시게.”

그렇게 곤륜에선 소식지가 구겨졌다면.

이곳 종남산에 도착한 소식지는 찢겨나가고 있었다.

찌지지지직-

단숨에 소식지를 찢어발긴 종남의 장문인 황백월은 노기등등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뭐라?!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 천하십검의 한자리가 바뀌어?!”

황백월의 사제이자 백본회의 부회주를 맡고 있는 장손립은 급히 입을 열었다.

“고정하십시오 사형.”

“지금 고정하게 생겼는가?! 그래 언가의 망나니가 천하십검을 넘볼 경지에 올라섰다 치자! 내력을 잃은 무극검과 랑야검이 강호에서 보이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기실 공석이 두 자리나 있는 것인데… 콕 찝어 한자리가 바뀌어? 이게 지금 누구를 두고 하는 말 이겠나?! 내 평생 이런 모욕은 처음일세!”

“…그러게 제가 진즉에 싹을 밟아 놔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은 그렇게 해놓고 되레 놈이 활개를 치도록 판을 깔아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가?!”

“…그, 그건.”

“긴말할 것 없네. 학관에 참가하겠다는 서간을 써 보내고. 지금 당장 유운검수들을 소집해!”

그처럼 주기적으로 소식지를 받아보는 곳들의 반응이 갈리는 때.

민초들이 보라고 관아의 방이 나붙는 자리에 붙여놓은 소식지를 뜯어 읽는 죽립인도 있었는데.

“…괴룡이라.”

그 방을 함께 지켜보고 있던 이가 죽립인의 행동에 한마디를 하는 때.

“이보시오. 한창 읽고 있는데 그걸 뜯어내면 어쩝… 어. 어디 갔지?”

장본인은 사라진 뒤였다.

*    *    *

천무대회라 이름 붙은 무의 대제전을 잘 치러내기 위해 총학생회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나, 우리의 목표는 그저 대회를 잘 치러내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대회를 통해 천마신교 문제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던 백도의 문파와 재야의 인사들을 동도회에 끌어들이는 게 진짜 목표였다.

하여, 일신을 단련하는 일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캉! 캉!

카카카캉! 카아앙!

하여, 정현 그리고 원철과의 대련 시간은 중요한 일과가 되었는데.

“원철 스님. 어떻습니까?”

내가 여느 때와 같이 대련을 마친 뒤 질문하자.

원철은 머쓱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었다.

“만겹산에서 돌아오신 직후보다는 조금 가벼워지신 느낌이십니다.”

“조금 나아진 것 같다. 딱 그 정도죠?”

그런 내 말에, 원철이 반장(半掌)하며 입을 열었는데.

“스승님께서 이르시길 경지가 높아질수록 몸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려워진다고 하셨습니다. 마치 늪을 헤쳐나가는 것처럼 된다고요. 그만하면 잘 해내고 계신 겁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늪을 빠져나오고 계시지 않습니까?”

원철이 말을 마치며 다시 한번 반장하자.

곁에서 땀을 닦고 있던 정현이 나를 향해 질문했는데.

“요즘 수련을 마무리하실 때마다 하시는 명상 덕분인지요? 저희와 대련을 하실 때보다 더 땀을 많이 흘리시곤 하시지 않습니까?”

“…뭐 그렇다고 봐야지.”

그 말에 대답하고 있는 때.

멀찍이서 새카만 장포를 휘날리며 다가오는 창량 교수가 보였다.

하여, 의관을 바로 하고 포권을 취하니.

“교수님을 뵙습니다.”

“열심히들이로구만.”

“예. 한데 교수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천무대회를 추진하는 일로 바쁘지 않으신지요?”

“안 그래도 그 일로 왔네. 대회의 세부사항이 정해져서 알려주려고.”

그러고 보니 창량의 손에 공문으로 보이는 서간이 들려있는 게 보였다.

“저희를 부르든 사람을 보내시든 하시지 직접 오셨습니까?”

“직접 전해야 하는 이야기도 있고 해서.”

독대가 필요한 이야긴가 싶어 나는 바로 질문했다.

“아하. 그럼 두 사람은 들여보낼까요?”

하나, 창량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수련을 덜 끝낸 것 아닌가? 긴한 이야기는 아니니 그럴 필요는 없다.”

“아. 옙.”

그리고 소식지 이야기를 꺼냈다.

“참. 소식지는 보았다. 또 보란 듯이 저질렀더구나?”

“큼. 그게 말입니다. 백도의 무인중엔 상금과 상품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 분들이 더러 계시지 않습니까? 고육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뭐라 하려고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니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다. 그 정도는 돼야 이 핑계 저 핑계로 뒷짐을 지던 이들이 이를 갈며 달려 올 테지. 아무튼 여기 이게 운영위의 결정사항이다.”

창량이 건넨 서류엔 대회의 승자를 어떻게 가를지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있었다.

“…집단전이로군요. 입관시험의 조별과제 관문처럼 여럿이 하나의 조를 이뤄 승패를 가르는?”

“그래. 그거야말로 너희들이 보내온 시간을 증명하는 것이지 않겠냐? 평범한 대련은 다가올 난세에 대비한다는 대회의 기치와도 맞지 않거니와, 승자에게 돌아가는 찬사가 개인의 무재 덕분으로 치부될 수 있지 않으냐. 하여 그런 결론이 났다.”

이는 호재였다.

그도 그럴 게, 서로 간의 호흡만큼은 맹주님이 이끄는 타격대에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나와 언동생들이었다.

“저희로서는 반길 일입니다만…. 이렇게 되면 저랑 제 동무들한테 많이 유리할 듯한데요?”

하여, 무심코 그런 생각이 입 밖으로 흘러 나왔는데.

창량은 마른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더니.

“강호에서 맞닥뜨릴 상황이 그럴진대 참가자의 유불리를 어찌 논하겠나? 겨울을 겪어야 봄이 오고 그렇게 사계가 순환돼야 매화가 피는 법. 그간 허송세월을 했다면 그 아픔을 뼈저리게 겪게 되겠지.”

이어, 나를 향해 뼈있는 말을 건넸다.

“하나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쓰린 겨울을 겪는 건 너희가 될 수도 있다.”

“…….”

“너와 동무들이 겪은 파랑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하나, 무인의 명성 역시 가벼이 쌓이지 않는다. 오랜 역사를 가진 문파의 힘은 더더욱 그러하다. 단단히 뿌리 내린 나무는 어지간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니까. 그 점을 명심하거라.”

말을 마친 창량은 볼일은 끝났다는 듯, 걸음을 돌렸다.

나는 그를 향해 다시금 포권을 하며 생각했다.

‘맞는 말이다.’

나와 언동생들에게 유리한 방식임에는 틀림 없었으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언동생들도 각자의 역할을 다해내야 하고. 나도 몸을 둔하게 만드는 무게감을 떨쳐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난 정현과 원철을 불렀다.

“명상하자. 내가 먼저 하고 다음은 정현 그 다음은 원철 순으로.”

그리고 의식을 심상 속으로 침전시키며 사부님을 불렀다.

‘사부님 좀 내려와 보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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