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주언가 망나니-428화 (428/444)

제428화. 물결 (2)

화경에 이르며 몸을 의지대로 온전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면.

심검을 마주한 뒤론 마음이 굳건해지게 되었다.

굳건해진 마음은 기본적으로 정관(正觀), 그러니까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을 가능케 돕는다.

예컨대 대상이 진법이라면, 이지(理智)를 흩트리려 하는 술수에 동요치 않고 핵을 짚어 낼 수 있게 되고.

마주하게 된 무인이 대상이라면, 그 무인이 거쳐온 세월과 딛고 있는 경지를 조금 더 명확히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는데.

“…늙은 사부를 오라 가라 하다니. 언제고 우리 파천 검문의 범절을 제대로 세워야 할 터인데.”

내 경우엔 거기에 더해 심상 속으로 사부님을 불러들일 수 있게 되었다.

본디 사부님 정도 되는 영혼을 심상 속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심마나 주화입마를 초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래서 회한 속으로 들어가시게 된 거고.’

한데, 심검을 마주한 덕에 심상의 공간도 함께 굳건해졌고.

그 덕에 이렇듯 사부님을 마주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주야장천 사부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부님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일각, 그러니까 십오 분 정도였다.

‘실험을 통해 그 이상 사부님을 붙잡아두고 있으면 오한이 찾아들고 혈맥이 얼어붙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일각.

진득하게 합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기에,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나, 그 시간만으로도 내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시간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사부님이 휘둘러 내는 파천의 검을 지켜보고 또 상대하는 일은 그야말로 눈이 뜨이는 시간이었으니까.

“시작하시죠. 시간 없습니다.”

“명색이 사부인데. 객잔의 점소이한테 맡겨놓은 음식 내놓으라는 듯이 구는구나…. 스승님, 제가 이러고 삽니다.”

“사부님.”

“알았다 알았어. 녀석, 정색은.”

“창량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 들으셨겠지만. 제자를 벼르고 있는 자들이 작정하고 찾아올 겁니다. 일각이라는 시간도 짧지만, 천무대회도 금방이에요.”

“그만 보채거라. 기껏 얼굴을 마주했건만, 만날 검만 부딪히다 헤어지는 것 같아. 사제 간에 이래도 되는가 싶어 한마디 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네! 에이잉!”

잠시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낸 사부님께서는 곧바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드셨다.

사부님의 분위기가 바뀌는 순간이었는데.

나와 사부님 사이에 놓인 대기가 나를 향해 밀려들며 끝 모를 압박감을 선사하길 잠시.

팟-

사부님의 신형이 흩어지듯 나를 향해 쇄도해왔다.

그런 사부님의 움직임을 안력만으로 오롯이 쫓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하나, 사부님이 내딛는 걸음과 휘둘러내는 검은 나 역시 수천, 수만 번 밟고 휘둘러왔던 파천의 무학이었다.

‘왼쪽!’

덕분에 어렵사리 사부님의 의도를 짐작해낸 나는, 투로에 회한을 끼워 넣을 수 있었다.

카아앙!!!

하나, 사부님의 일격은 막아 냈다고 끝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검을 타 넘어온 중량감이 뼈마디를 저릿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내 디딤발이 살짝 비틀린 순간.

진정한 파천검법의 원류가 가차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압도적인 사부님의 무위에 대처하기 위해, 미친 듯이 회한을 휘저었다.

캉! 캉!!

카앙!! 카아아앙!!!

물론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았기에,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는 나려타곤까지 불사해야 했는데.

‘신승과 무극검.’

그러는 동안 내 머릿속에선 앞서 겪어본 두 절대 고수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공덕대사는 끝을 짐작할 수 없는 거목처럼 느껴졌다.’

명영은 무엇이든 받아낼 수 있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느껴졌다.

‘반면 사부님은 지나간 자리를 모조리 쓸어내 버리는 폭풍과도 같다.’

하나 그 폭풍은 오롯이 사부님의 손에서 통제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는데, 정작 내 몸에 생채기 하나 없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내가 제자가 아니라 적이었다면.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지는 못했겠지.’

가까스로 사부님의 거리에서 벗어난 내가 호흡을 고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때.

사부님께서는 검을 허리춤으로 돌려 넣으시더니.

가까이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이셨다.

“오늘은 이쯤하고. 이야기를 좀 해보자꾸나.”

그 말씀에 따라 곁으로 다가가니.

사부님께선 팔짱을 끼며 작은 한숨을 뱉으셨다.

“여전히 네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를 모르겠느냐?”

“사부님과 쭉 대련을 해오다 보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우선 네 생각을 들어보자꾸나. 이야기해 보아라.”

“사부님께서는 파천신공으로 일으킨 내력을 검초에 실으실 때 가차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저는 힘 조절을 못 할까 봐 무의식적으로 제약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예. 생각해 보니, 혈마가 파천신공의 진면목에 녹아 없어진 이후로 계속 그랬던 것 같습니다.”

“흐음.”

“정현이나 원철 스님과 대련을 할 때도 그렇고. 백광호를 만나러 동정호에 가서도 파천신공을 쓰는 걸 주저했던 것 같네요.”

심검을 마주하며 내딛게 된 한 걸음.

동시에 혈마와 명영에게서 전해 받은 엄청난 공력.

그러한 기연을 얻게 된 것은 복이었으나.

당장 손에 쥔 힘을 오롯이 통제할 수가 없었다.

“통제할 수 없는 힘은 적아를 구분치 않는 살겁만을 낳을 뿐 아니겠습니까?”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휘두른 검이, 언동생들이나 가족 같은 이들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손속을 뻗을 때마다 일말의 주저가 섞인다는 게 내 결론이었는데.

그런 내 말에 사부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여 오셨다.

“그렇지. 파천의 무학은 극성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만물이 벌레가 된다. 나로서는 가벼운 손놀림에도 터져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게지.”

“예. 해서 저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사부님께서는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시는데도 제가 멀쩡하네요? 제자가 어찌하면 사부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이어진 내 물음에 사부님께선 곧바로 입을 여셨는데.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예?”

그렇게 나온 답이 맥이 빠지는 소리인지라, 멍하니 있으니.

사부님께서 재차 입을 여셨다.

“나는 너 같은 고민을 한 적이 없다. 따르는 동생들도 없었고, 지켜야 할 사람들도 없었지. 죽여야 할 놈과 덤벼드는 놈 그리고 도망치는 놈들 뿐이었지.”

“…….”

“천마신교를 차린 련금이 놈 정도가 결이 다르다면 다른 녀석이었긴 한데, 그마저도 깊은 인연은 아니었고. 베고 또 베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터득이 되었다.”

그런 사부님의 말씀에.

나는 짧은 소감을 내놓았다.

“…자랑이십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 내게 꿀밤을 먹여오셨다.

꽁!

“아!”

“아무튼 이 문제는 너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미 네가 휘두르는 파천의 검은 내가 휘두르던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가 되었기도 하거니와, 요리법처럼 정해진 용량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    *    *

사부님과의 시간을 통해 안게 된 숙제를 직시하게 되었으나.

이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하여 나는 원철과 정현이 명상을 하도록 호법을 서준 뒤.

총학생회실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그나저나 집단전이라니. 이렇게 되면 단순히 심신을 닦는 수련만 해선 안 되겠는데?”

“원시천존. 언 소협과 저희 사이의 호흡이야 의심할 필요가 없으나, 천무대회의 방식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할 것 같긴 합니다.”

한편이 허전하다 싶어 둘러보니.

내 걸음을 바로 쫓아온 정현과 달리, 원철이 멀찍이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뭐하십니까?”

그에, 왜 그러고 있는지를 물으니.

원철이 반질거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 천무대회 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가시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요? 식견을 넓혀 보겠다고 교류생으로 와계신 거 아닙니까? 스님도 함께하셔야죠.”

“그렇긴 합니다만. 천무대회가 시작되면 경쟁을 하게 될 텐데. 정무학관의 전략을 제가 들어도 괜찮나 싶어서 말입니다.”

“소림의 대표로 나가시려고요?”

“…예? 그야 소림이 제 사문이니까요?”

“지금은 정무학관의 생도이시기도 하죠. 그런 사고부터 버리십쇼. 지난 학기에 마방연과 연계한 수업 중에 정마대전의 양상에 관한 수업이 있었죠. 합종군이 패퇴할 때 그렇게 사문별로 인원들이 유지가 됐던가요?”

“…아니었다고 배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음을 잊지 마세요.”

“예.”

“뭐, 그렇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고. 소림의 대표로 나가신다고 하더라도 함께하셔도 됩니다. 물론 저는 대회 석권을 노리고 있지만. 당장의 승패가 아니라 백도무림을 지탱하는 문파들을 꿰어내기 위해 천무대회를 추진하는 거니까요.”

“…아미타불. 소승은 어찌 시야가 이리도 편협한지. 괴룡 덕분에 배우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는 그쯤 하시고. 아무튼 갑시다.”

그렇게 총학생회실에 당도하니.

언동생들이 각각 서류뭉치를 쥐고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제갈설지가 들어서는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셨네요. 창량 교수님이 용운 님 어디 계시느냐고 여쭈시길래 수련하시는 곳을 말씀드렸는데. 공문 내려온 거 보셨나요?”

“공문은 봤소. 한데,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요?”

“집단전을 한다잖아요. 그간 교류전에서 치러졌던 조별과제들과 집단전의 유형을 검토하는 중이었어요.”

“흐음. 나쁜 접근은 아닌데….”

“뭔가 더 하실 말씀이 있는 느낌이신데요?”

“근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닫는 중이라서. 일단 다들 서류 내려놓고 현철 족쇄랑 무게추 챙겨서. 연무장으로 나오시오.”

“…예? 현철 족쇄랑 무게추를요? 갑자기 왜?”

그런 내 말에, 제갈설지를 필두로 언동생들은 갑자기 왜 이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내가 짧은 말을 돌려주자.

“집합.”

“지, 집합!”

자기도 모르게 복명복창을 하곤 연무장을 향해 뛰어나갔다.

그런 녀석들을 이끌고 나는 무당산의 산봉우리 중 험하기로 이름난 쌍로봉을 기어올랐다.

“캭! 이놈의 산 타기는 어떻게 매번 힘들어?!”

“그야. 저희의 기량이 늘 때마다 언 형이 가방에 담는 무게추를 늘리고, 족쇄를 두껍게 만드시니까요!”

“당옥기. 우소릉. 입을 나불거릴 여력이 있나 보지? 나보다 늦게 정상에 도착하면 내 가방에서 무게추 하나씩 나눠줄게.”

“캬아아아악!!”

그리고는 북쪽으로 길을 잡고 무당산맥의 자락을 따라 질주를 한 뒤.

단강구의 호숫가에 이르렀을 때.

물속으로 들어가라는 명을 내렸는데.

“저기 보이는 저 섬까지 헤엄쳐서 간다. 단, 두 장 거리를 갈 때마다 잠수해서 호수 바닥을 한번 찍고 올라오는 거야.”

그러자 천장호가 발라당 배를 까고 누우며 한마디를 했고.

“아잇! 현철 족쇄를 차고 헤엄이라뇨?! 누굴 수장시키시려고요!”

“엄살은. 충분히 헤엄칠 수 있어. 여기가 바다나 장강삼협처럼 물살이 격한 곳도 아니고. 그리고 오는 중에 진을 다 빼서 정말로 물에 잠기는 녀석은 내가 구해준다.”

“으아아아! 거지 살려어어!”

이어서 은하연이 입을 열었다.

“뭔가 천무대회랑 관련이 있어서 이러시는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르고 쫓아다니니까 더 힘든 것 같아요. 딱히 비밀이 아니라면 이유라도 알려주세요.”

“천무대회를 개최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뭐요?”

“그야. 미온적이던 방파와 재야 인사들을….”

“궁극적이라고 했소.”

“…천마신교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준비하는 거죠? 해서 방식도 집단전으로 결정된 것이고요.”

“그렇지. 그 천마신교와의 고리를 끊어내려면 결국 십만대산을 쳐야 하는데. 청해성과 대산 일대는 숱한 호수가 있고 산맥이 있소.”

“…호수와 산맥.”

“마침 정무학관의 인근엔 기후는 달라도 지형 자체는 비슷한 곳이 있지. 어떤 과제가 나올지는 몰라도, 어디서 과제를 수행하게 될지는 정해진 것 아니겠소?”

“…….”

“들어가야겠지?”

*    *    *

그렇게 언동생들과 함께 천무대회에 임할 준비를 차근차근해나간 지, 어언 한 달여.

천무대회개최일이 훌쩍 다가옴에 따라 정무학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구경꾼, 잡상인, 참가자 각기 다른 목적으로 단강구를 찾은 사람들로 일대가 붐비기 시작한 때.

“산서금붕이다!”

“찾아든 죽음조차 따귀를 날려 돌려보냈다는 진상(晋商)의 거목!”

“괴룡의 외조부!”

후원인의 자격으로 학관을 찾은 외조부가 윤영 숙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는데.

“산서금붕 어르신을 뵙습니다.”

“이길환이요.”

경혜를 비롯한 교직원들의 인사를 가볍게 받은 외조부는 우리 앞에 다가오셔서는 눈을 흘기셨다.

“용운이 너도 그렇고 용명이 저 녀석도 그렇고. 어찌 한 번을 안 들러? 만날 서신 쪼가리나 보내고. 에잉.”

나는 죄송한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는데.

“진상을 이끄시느라 천하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니 잘 아시겠지만, 좀 바빴습니다. 물론, 바쁘다는 핑계를 조부님께 대는 것 자체가 불효이긴 한데요….”

듣고 계시던 윤영 숙부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나와 용명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마음에 두지 마라. 네 외조부님께서는 요즘 산서금붕이라는 별호보다 괴룡의 외조부라는 말을 기꺼워하신다. 어딜 가든 네 이야기를 꺼내시고.”

숙부의 말에 외조부께서는 헛기침을 하셨는데.

“크흠. 윤영이 너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덕분에 좌중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내리깔리길 잠시.

또 다른 거물들이 당도한 것인지, 구경꾼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싶더니.

“복마선봉?! 곤륜파! 곤륜이다! 곤륜의 도장들이 왔다!”

“어, 저 뒤편에 구름 문양이 새겨진 검수들은 종남파의 유운검수들이 아닌가?!”

“맞네! 맞아! 종남이다! 종남의 유운검수들이 왔다!”

이내 곧 장본인들이 정무학관의 문턱을 넘어섰는데.

곤륜과 종남의 검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내 쪽을 노려보며 투기를 뻗어왔다.

그 눈초리들을 마주하니 스치는 감상에 입을 여니.

“눈빛 좋네.”

은하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어왔다.

“좋다고요? 아주 저희를 갈아 마시겠다는 기세인데요?”

그 말에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래야 밟아주는 맛이 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