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3화. 물결 (7)
괴한이 내 감을 칭찬하는 때.
순식간에 임전 세태를 갖춘 언동생들이 가세해왔는데.
“언 형!”
“언 소협!”
이 순간.
괴한은 회한과 맞대고 있던 자신의 검을 비스듬히 틀었다.
끼긱-
난 그런 괴한의 움직임에서 나를 튕겨내고자 하는 저의를 읽었다.
‘가만히 있다간 나와 언동생들에게 둘러싸이게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군.’
본디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상대의 뜻을 망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법.
“어딜!”
나는 괴한이 뜻한 바를 이루게 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앞으로 디뎌내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괴한의 손에 들린 검과 회한 사이에서 쇠 긁는 소리가 이어지길 잠시.
카가가카강-
괴한의 검에 극양의 기운을 품은 아지랑이가 모여든다 싶더니.
한줄기 염화(炎火)가 피어올랐다.
화륵!
그 염화는 이내 곧 이글거리는 참격으로 화했다.
화르르르륵!!!
이제는 내 쪽에서 괴한과 거리를 벌려야 하는 이유가 생긴 셈이었는데.
내가 황급히 괴한의 검을 떨쳐내는 순간.
제갈설지와 사부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적제신공(赤帝神功)?”
-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검초인데… 남악검파(南岳劍派)였나?
난 두 사람의 말과 괴한의 행색을 토대로 그의 정체를 짐작했다.
‘남악검파. 적제신공. 남루한 행색. 가방에 달그락거리는 건… 풍찬노숙을 밥 먹듯 하는 이가 지니고 다니는 휴대용 냄비인가?’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끄집어져 나왔다.
“혹시 선배님께서는 랑야검 장철한 선배님이 아니십니까?”
우소릉이 눈을 크게 뜨며 질문한 건 이때였는데.
“헉! 랑야검이면 저번에 천하십검중 한 분이라고 꼽으셨던 분 아닌가요?!”
그 물음에, 은하성이 입을 열자.
“맞아. 랑야검 장철한. 천하십검의 말석으로 꼽히는 분이지.”
당옥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은하성을 향해 눈을 흘겼다.
“야! 본인 앞에서 말석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하면 어떻게 해!”
“헙.”
하나, 장본인인 장철한은 그런 것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비소를 흘렸다.
“날 때 받은 이름과 남들이 붙인 이름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은지 오래다. 검수는 오직 벼려온 검으로 자신을 나타낼 따름 아니겠나?”
그리고는 염화가 타오르는 검을 휘둘러 왔는데.
화륵-
화르르르륵-
나는 바쁘게 회한을 휘저어 장철한의 검에서 뻗어 나온 화마를 끊어내며.
언동생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매화검수들이랑은 반대로 가야 할 듯하다. 나랑 정현 그리고 원철을 꼭짓점으로 삼되 공간을 충분히 벌려! 이거 평범한 불이랑은 달라. 잘못해서 몸에 붙으면 쉬이 꺼지지 않을 거다!”
이 순간.
장철한은 처음 봤을 때 했던 말을 또 한 번 반복했다.
“확실히 감이 좋아.”
랑야검 장철한.
휘두르는 검과 분위기로만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해보자면, 그는 한마디로 위험한 사람이었다.
‘우선은 원작에서는 등장한 바 없는 인물이고.’
다음으론 실력이 그랬다.
천하십검의 한 자리는 장철한의 것이라는 세간의 평은 전혀 과장된 게 아니었다.
장철한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신공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고.
그 신공의 힘을 십분 발휘해 낼 수 있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공세를 잡았을 때 휘둘러내는 장철한의 검 자체도 매섭기 그지없었지만.
화르르르르륵-
카아앙!!!
진면목은 그가 수세에 몰렸을 때 여실히 드러났다.
쌔애애애액!
내가 휘두르는 검은 땅을 짚으며 피했고.
그 자리에 쏟아진 정현과 원철의 공격은.
채앵!
각각 부드럽게 흘려내고, 또 강격을 가해 틀어냈다.
카아아앙!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언동생들의 공격은, 살초를 쏟아내 지레 공세를 접게 만들었다.
쌔액! 쌔액! 쌔액!
쌔애애애액!
창량의 검을 보았을 때 느꼈던 수려함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빈틈 역시 없다.’
그건 장철한이 심신을 오롯이 본인의 통제하에 두고 있다는 결론이었다.
‘…최소한 나랑 동등한 수준의 고수다.’
한마디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는데.
그런 상대가 문답무용으로 싸움을 걸어오니 위험하다는 생각이 떠오를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고 있는가?’
이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은하연이 전음을 보내왔다.
[…시험의 일환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학관에서 준비한 시험관(試驗官)이라고? 소저의 눈엔 저자가 그렇게 보이오?]
[타격대의 선배님들도 사전에 고지한 바 없었지만, 나타났잖아요.]
[그야 타격대원들이니까. 참가자들이 모두 아는 인물들이고, 맹주님의 통제를 받는. 장철한의 등장은 절대로 시험 같은 게 아니오. 그럴 수가 없어.]
그런 내 말에, 은하연은 되물음을 던져왔는데.
[그럼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죠? 이번 대회를 치르려고 수위부와 운영위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언 공자가 제일 잘 아시잖아요?]
[그건 지금 고민할 대상이 아니고. 어쨌거나 눈앞에 저자가 있으니….]
은하연이 잠시 잡생각을 하고 있음을 놓치지 않고, 장철한의 검이 쇄도해 들어왔다.
[일단 머리 숙이시오!]
은하연은 아차 하며 머리를 숙였고.
그 자리에서 회한과 장철한의 검이 붙었다 떨어지며 불꽃을 튀겨냈는데.
카아아아앙!
은하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전음을 보내왔다.
[하면. 용운 님이나 다른 고수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호승심이 일어서 오셨을 수도? 천하십검이 바뀌니 어쩌니 그런 소식지를 뿌렸으니까요?]
[방금 삼도천을 건널뻔해 놓고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예해수 선배의 글귀를 통해 광역 도발을 시전했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지.]
[그래요. 아닐 수도 있죠. 해서, 언 공자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은하연의 물음에, 나는 떠올린 다른 가능성을 말했다.
[마인이랑 엮여있을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랑야검이 천하에 이름을 알린 계기는….]
[협행이었지. 하지만 우리가 계획을 짤 때 희망적인 면을 보고 짜왔던가?]
[…계획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두고 짜왔죠.]
[다시 묻겠소. 장철한이 마교와 관련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소?]
오 년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바 없는 재야의 고수가 문답무용으로 덤벼오는 상황인데.
딱 한 마디 뱉은 말은 벼려온 검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는 말뿐.
그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힘의 논리가 중하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어느 면에선 마도와 맥이 통하는 말이었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만인혈을 운반하고 있는 몸이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두들겨보고 조심해야지.]
목함에 든 환단이 진짜 만인혈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아무짝에 쓸모없는 약재뭉치인 것도 아니었다.
이 안에 든 건, 소림이 대회의 상품으로 사용하라고 제공한 대환단 이었다.
‘…원작에선 만박보심단을 바탕으로 천마신교의 마환단이 크게 개선됐지.’
장철한이 마인들과 연이 닿아있을 가능성이 있는 이상.
이제 당면과제는 이 목함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되었다.
캉! 캉!
카아아아앙!
하여, 바쁘게 회한을 휘젓는 와중 그 방도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이때, 천장호가 턱짓으로 곤륜의 제자들이 있던 봉우리를 가리켰다.
“용운 형! 곤륜 쪽도 움직이기 시작했는데요?!”
그런 녀석의 말에, 내 머릿속엔 한 가지 방도가 스쳤고.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곤륜에 목함을 넘긴다.”
그런 내 말에, 언동생들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떠왔고.
“예에에에에?”
그중 천장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격렬하게 반대의사를 전해왔다.
“미치셨습니까? 죽 쒀서 개도 아니고 곤륜을 주자고요?! 제가 알던 용운 형님 맞으세요?”
“마교에게 넘어가는 것보다는 낫잖아.”
“마, 마교. 저 양반 마교에 넘어갔답니까? 이보쇼 선배님 진짭니까?”
그런 천장호의 말에 장철한은 그렇다는 답도 아니라는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뜻 모를 웃음과 함께 염화가 불타는 검을 휘둘러올 뿐이었다.
그에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냐 그 말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 그건 아니죠.”
“우리가 이번 대회를 왜 열었냐? 매화검수들은 왜 우리한테 양보를 했고? 지금은 위급상황이다. 목함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게 맞아. 그게 시험 과제이기도 하고.”
그런 내 말에, 대부분의 언동생들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천장호는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니 그래도. 곤륜파 놈들 하는 행동이 딱 이쪽에 무슨 일이 생기니까 그제야 홀라당 하려고 오는 거 아닙니까! 딱!”
“저들이 대회 내내 탐탁지 않은 모습을 보인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정파로서의 불꽃이 가슴속에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로 썩어빠졌다면. 십만대산의 지척에 있는 곤륜은 진즉에 망했을 거야.”
“하.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곤륜은 아닌 것 같은데요. 차라리 뒤에 올 다른 참가조를 기다리면 어떻습니까?”
“아니. 이렇게 하자. 장호 너랑 소릉이랑 가. 가서 곤륜파의 제자들 만나.”
“만나서요?”
“만나서 첫마디가 이쪽에 생긴 변고를 걱정하는 거면 사정을 설명하고 목함을 맡기고. 만에 하나라도 빼앗으려 들면. 그땐 장호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 * *
언용운에게서 목함을 건네받은 천장호는 우소릉과 함께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릉 동생. 동생 생각은 어때?”
“글쎄요. 심정적으로는 저도 천 형의 말이 끌리긴 하는데, 언 형 말이 맞기는 맞다는 느낌이네요?”
“후. 제발 용운 형의 말이 맞기를. 천하의 말종들로 밝혀지면 진짜 못 참을 거 같아 나.”
“저. 저기 오는데요.”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특유의 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달려온 곤륜의 도사들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중 선두에 선 덕성자는, 두 사람이 빠져나온 곳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저 검사위는 절대로 대회 차원의 대련 같은 게 아니야.”
“…….”
“행색 역시 초청을 받은 이는 아닌 듯한데… 마교의 소행인가?”
그런 덕성자의 말에.
천장호는 언용운의 통찰력에 놀라는 한편.
몸담고 있는 백도무림이 자신의 생각만큼 썩어빠진 곳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는데.
그러고 나니 절로 품 안에서 목함을 꺼내게 되었다.
“확실치는 않은데 마인들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저희가 막아보려 합니다.”
그런 천장호의 태도를 잘못 이해한 덕성자는 호통을 치며 말했다.
“이보시게! 지금 대회의 승패가 중요한 것이 아닐세!”
“그러니까요. 비상상황이니까. 우선 이것부터 옮겨야 합니다. 민간에서 온 관객들도 피신시켜야 하고요.”
“저자는 어쩌고?”
“저 사람은 저희가 어떻게든 막아 보겠습니다. 곤륜이 십만대산의 지척에서 버텨오긴 했지만, 마인들과 싸운 경험은 저희가 더 많습니다.”
“…….”
“저 사람은 저희가 막고 이 목함은 곤륜이 안전하게 옮겨주시는게 맞습니다. 아울러 이곳 상황을 교수님들께 전해주십시오. 곤륜의 신법이라면 빠르게 가능하지 않습니까?”
* * *
한편, 경혜와 제갈척의 명을 받아 장철한의 행적을 쫓아온 언정웅과 무당오협.
이들은 언동생들과 장철한이 맞붙고 있는 곳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망루에서, 일련의 상황들을 막 목도한 참이었는데.
가장 먼저 영일이 입을 열었고.
“괴룡의 무리에서 천장호와 우소릉 두 사람이 곤륜 쪽으로 가더니, 곤륜이 선착장 쪽으로 내달리는군요.”
이어 사람 좋기로 유명한 명한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목함 같은 것을 넘겨주던데, 대환단이 든 목함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큰일이 난 줄 알고 그것부터 옮긴 듯한데.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언정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을 했는데.
“총장님께서 대회를 강행하시겠다 하셨지 않습니까? 하면 일단은 조금 더 두고 보는 게 맞을 듯합니다.”
그 말에, 명한이 답답하다는 듯 재차 말했다.
“본인 자식들 일인데도 어찌 그리 담담하십니까? 물론 대회를 강행한다고 하시긴 했지요. 하지만 그건 랑야검이 민초나 후기지수들에게 함부로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하신 말씀일 겁니다. 한데, 저렇게 싸움을 벌이고 있으면 대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언정웅도 원래의 생각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때 무당오협의 맏이 명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조금 두고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네.”
“예? 대사형. 소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셨습니까?”
“이해했네.”
“한데요?”
“내가 격체전공을 해준 뒤로 괴룡은 수렁에라도 빠진 듯 제자리걸음을 해왔네. 한데, 보아온 바로는 괴룡은 극한의 상황에서 꾀든 진전이든 걸음을 내딛어내는 인종이었어.”
명한의 되물음에 잠시 본인의 사제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명영은, 다시금 언용운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남은 말을 이었다.
“약왕 어르신이 보증한 인물이니. 랑야검은 악인일 리는 없을 것이고. 어쩌면 저 싸움이 그 수렁을 벗어날 계기가 될지도 모르니… 괜히 나서서 산통 깨지 말고, 조금만 더 지켜보면 어떨까 하는데?”